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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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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킴
작품등록일 :
2021.05.13 21:41
최근연재일 :
2022.11.17 22:25
연재수 :
9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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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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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477

작성
21.05.21 15:42
조회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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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글자
12쪽

4. 떠나가는 바람(4)

DUMMY

"네 말이 맞았군. 괴물은 없었어."


창현의 말대로 굴속에 남아있는 페이트는 없었다. 그가 이곳에서 마주쳤던 괴물마저도 사라지고 굴은 그저 참담한 흔적만을 남긴 채 텅 비어 있었다.


"그 괴물.. 제가 본 그 덩치 큰놈도 그새 달아난 모양이군요."


"제기랄. 더 빨리 나왔어야 했어. 어쩌면 몇 명은 더 살 수 있었을지도 몰랐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괴물이 없다는 사실에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미어지는 마음을 금하지 못했다. 준우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건 핑계일 뿐이야.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고 결행할 여지는 충분히 있었어. 그놈의 괴물 때문에.. 아니 이것도 핑계군. 결국 우린 괴물이 아니라 그날의 기억과 공포에 갇혀 스스로 죽어갔던 거야. 그 결정은 내가 내린 거지."


입구가 지척에 다다라 있었다. 멀리서부터 밝아오는 환한 빛이 점점 커져갔다.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는 기분이었다.


어둠에 싸인 긴 통로를 빠져나오며 준우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책하고 원망했다. 그날 이후, 삼 층 지하에서 모든 사람이 절망으로 시들어 갈 때 그도 예외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지 못했고, 더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다는 죄책감에 짓눌려 뭇 사람들보다 배는 괴로워했다는 것이 정확한 말일 터였다.


"하지만 모두의 목숨이 달렸던 일 아닙니까. 잘못하면 전부 죽을 수도 있었는데 함부로 결단할 수 없었다는 걸 압니다. 왜 자꾸 자기 탓으로 돌리려 합니까? 오히려 이만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형님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창현이 화를 내듯 말했다. 그는 준우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볼뿐더러, 보기가 싫었다. 그때 옆에서 말없이 걷던 이박헌이 불쑥 끼어들었다.


"창현의 말이 옳다. 자네는 충분히 잘해주었어. 누군들 자네보다 더 잘해낼 수 있었겠는가? 어쩌면 우린 이미 죽어야 했던 운명이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린 살아남았고,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네. 자네에게도 말이야."


준우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몇몇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적의를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어떻게 그 말을 올곧이 수긍할 수 있을까마는, 그렇다고 대놓고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이상은 어리광이요 투정일 뿐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었다.


"아니, 아닙니다. 못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못난 모습을 보였군요."


마침내 바깥이었다. 얼마 전 비가 왔던 모양인지 하늘과 땅 모두 축축이 젖은 빛깔이었다. 통로를 나오기 전 보았던 환한 빛과는 다르게 사방은 잿빛으로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많은 사람이 우두커니 선 채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너무도 생경한 광경이기도 했다.


나올 때부터 그랬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어디선가 황폐한 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발밑을 스쳐 지나갔다. 공방도, 우물도 모두 부서져 있었다.


조각조각 바스러진 그들의 터전이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때마침 준우의 눈에 갈색으로 마른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휘날려가는 모습이 크게 확대되어 왔다.


우리의 모습이 저 날려가는 나뭇잎의 신세와 같지 않을까? 준우는 생각했다. 그러고는 또다시 처량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줄곧 입에 달고 살던 농담이나 우스갯소리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대체로 그와 비슷했다. 그들이 알던 고향, 안식처가 이제 더는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빠드득!


옆에서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리자 이를 앙다문 명모의 얼굴이 보였다. 팔을 잃은 그 날, 그리고 하나뿐인 혈육인 명진을 동시에 잃은 그 날 이후로 명모는 확실히 변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긴 하였으나 준우의 눈까지 속이긴 어려웠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날 이전의 능글맞고 쾌활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려 무진 노력했었다. 그러나 수척해진 얼굴로 가끔 사나운 기운을 내쏘는 그 눈빛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강렬히 타오르는 적의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준우는 잘 알고 있었다.


괴물들!


바로 그것이다. 젊은 몇몇의 표정은 명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옆에 서 있는 창현의 얼굴도 준우의 눈에 들어왔다. 명모처럼 적개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들바람에 익어 거뭇거뭇한 안색,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거친 머리카락, 굽은 매부리코 위로 날카롭게 찢어진 눈꼬리. 그리고 피를 흘려 넣은 듯 선열한 빛으로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


"넌 그런데. 뭐냐, 그 눈은?"


준우의 물음에 창현은 떨떠름히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사실 창현 그 자신조차도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당장 대답할 말이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출행 도중 열매 하나를 잘못 먹은 탓인지 어느 순간부터 이렇더군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뭐 딱히 이상이 있는 게 아니니 신경 안쓸려구요."


"저런.. 어쩌다 그랬나? 여태 잘 지내온 걸 보면 심각한 건 아닌 모양이다만 그래도 조심해야지. 너답지 않게 실수를 했군. 독이 심했으면 어쩔 뻔했냐."


딱히 자세한 대답을 한 건 아닌데도 준우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긍해 버렸다.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던 창현은 그 모습에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적이 보기 흉한 꼴이 되었는데 네놈도 참 신경이 무딘 건지 둔한 건지 모르겠군. 아직 네 나이 때에는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쓸 텐데 말이야."


"몸에 문제만 없으면 아무래도 상관없죠."


준우의 걱정은 빈말이 아니었다. 애시당초 해사한 얼굴도 아닌바, 더욱이 찢어진 눈초리에 날카로운 인상이 붉은 눈동자로 인해 더욱 강조되고 사납게 보였던 것이다.


"그래. 몸 성히 건사해서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몇 마디 잡담이 이어지자 준우의 얼굴에서 어두운 기색이 조금은 옅어지는 것 같았다. 창현은 뭐라고 조금 더 준우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태생부터 말재간이 없던 터라 그냥 아무 말 않았다. 그동안 폐허로 변한 마을 중앙 공터로 사람들이 모여 둘러섰다.


"일단은..."


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도 괴롭고 힘들었지만 억지로나마 힘을 내었다. 좌중을 지배하는 이 무력함을 먼저 걷어내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때문에 어떤 말이든 해야 했다. 어떤 행동이라도 시작해야 했다.


"사람을 나눠 쉴 곳을 먼저 정리해야겠습니다. 나머지는 먹을 것을 구하러 가겠습니다."


허리가 구부정해 거의 코가 땅에 닿을 듯한 노인에게 준우가 말했다. 옆에서 이박헌에게 부축을 받으며 서 있는 게 고작인 노인이었지만 그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노인은 바로 이가촌의 촌장님이었다. 준우의 말은 촌장에게 향한 것이었지만 실상 주변 모두에게 하는 말과 다름없었다.


"쿨럭. 쿨럭."


촌장이 마른기침을 토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바깥의 찬바람을 쐰 탓인지 기침은 매우 고통스럽고 길게 이어졌다. 실제로 창현이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병이 도져 계속 고생했던 촌장이었다.


더구나 마을에 일이 터지고 지하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 그것은 급격히 악화되어 지금에 이르러선 속된 말로 오늘내일하게 된 것이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회복될 기미도 없이 빠르게 죽음으로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촌장이 준우를 바라보았다. 짓무른 눈을 겨우 뜨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폼이 영락없는 산송장이다. 말을 하는 것도 힘든지 가느다란 목만 겨우 움직이는 거였다.


걱정스럽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우가 촌장의 고갯짓에 예를 표했다. 촌장의 기침 소리를 듣고 옆에 있던 창현은 불현듯 얼마 전 통로에서 들었던 그 희미한 소리가 연상되었다.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들었는지는 몰랐다.


`혹시?`


괴물에게 두 번째 암습을 받기 바로 직전 들었던, 벽 너머에서 울리는 듯한 그 소리. 지금 생각해보니 괴물의 숨소리가 아니라 촌장님의 기침 소리였던 것 같았다.


덕분에 괴물의 공격을 쉽게 알아채었으니, 그때의 기침 소리는 확실히 창현에게 있어서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때마침 준우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던 청년들을 따로 모으기 시작했다.


"서둘러 움직이자."


사실 밖으로 나왔을 경우를 가정해 세워둔 몇 가지 계획이 있었다. 어제 공개회의에서 마을 사람들과 논의한 계획이었다.


계획이라 봐야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밖으로 나갔을 때 어떻게 배를 채울 것인가, 어디에서 휴식을 취할 것인가 등의 극히 기본적이고 단순한 내용들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꼽으라면 바로 그것이었다. 생존과 직결되는 사항이기 때문에 절대 소홀할 수 없었다.


준우의 말이 떨어지자 청년들이 각자 무기를 꼬나 들고 떠나기 시작했다. 사냥을 업으로 삼던 창현과 그의 친구들이었다. 떠나가는 그들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미처 삼 층으로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역시나 방안에서 참극을 당한 듯했다. 괴물이 먹었는지 시체는 없었지만 거멓게 말라붙은 피와 썩은 살점의 흔적들은 아직도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굳은 얼굴로 그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질러진 집기도 치우고 덜렁거리던 문은 차라리 활짝 뜯어버려 환기도 했다.


대충 청소가 끝나자 촌장을 위시한 병약자들부터 들어가 쉬게 했다. 입구 쪽 몇 개의 방만 대강 치운 것이지만 급한 대로 몸을 뉘일 만 했다. 극도로 체력이 떨어지고 영양이 부족한 상태를 오래 겪었기에 휴식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남은 이들은 모두 너무 나이가 많거나 혹은 적거나, 병들거나 다친 이들이 대부분 이었다. 그리고 거의가 여자였다. 힘을 쓸 줄 아는 남자들은 모두 페이트와의 싸움에 동원되어 죽어갔던 것이다.


준우는 아직 움직일 만한 사람을 몇 명 뽑았다. 산에 가서 풀뿌리라도 뽑아올 요량이었다. 먹거리를 위해 청년들이 떠났지만 당장 먹을 것조차 없는 게 지금의 실정이었다. 언제 그들이 돌아올지, 내일 올지 글피에 올지 몰랐다. 아니 그 이상이 걸릴 거라는 게 준우의 생각이었고, 아마 그 생각은 맞을 거였다.


그전까지는 어떻게든 그들 스스로 버텨야 했다. 그나마 건강상태가 양호한 십여 명의 여성들이 앞으로 나섰다. 하나같이 지치지 않은 이가 없었지만 누구도 불평의 빛을 띠지 않았다.


구름 한편이 비켜나며 실낱같은 햇살이 들이쳤다. 아직 밤이 오려면 멀었는지 사위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바람은 더욱 차갑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혼자 그 바람을 느끼며 준우는 상념에 젖어들었다. 모든 것을 영에서 시작해야 하는 막막함이 가장 문제였다.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살기가 죽기보다 힘들다는 것을 뼛골이 시릴 정도로 절감하고 있었다. 또 한 번 으슬으슬한 바람이 어깨를 치고 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보다 차가운 기운이 이마를 덮쳤다. 눈이 오고 있었다. 창공을 가득 메우며 천천히, 그러나 폐허를 뒤덮을 정도로는 충분하게 떨어져 내리는 눈.


서기 2675년 겨울 초입, 한반도 땅의 첫눈이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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