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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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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킴
작품등록일 :
2021.05.13 21:41
최근연재일 :
2022.11.17 22:25
연재수 :
98 회
조회수 :
92,377
추천수 :
2,887
글자수 :
580,477

작성
21.06.06 19:51
조회
704
추천
27
글자
8쪽

11. 지나온 곳 가야 할 곳(4)

DUMMY

커다란 태백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싼 평원을 지나와, 드디어 진은 산의 초입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이드를 만났다.


"오셨습니까?"


로이드는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진을 맞이했다. 며칠간의 산행은 숙련된 전사인 로이드에게도 버거웠는지 약간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그래도 자신의 라나트인 진에게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이상한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로이드는 이 부분에 관해서 만큼 전혀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애썼다. 놈들은?"


진은 로이드의 모습이 어떻든 상관없단 투로 간략히 물었다.


"반대쪽 능선 아래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반나절도 안 걸릴 겁니다. 그런데 오면서 놈들의 수가 조금 줄었습니다."


"줄다니?"


로이드의 보고에 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기가 모르는 다른 페이트의 습격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면 혹시 다른 맹수가?


"그게..."


로이드는 자기가 본 것을 가감 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서 있던 페이트들은 두 야힌의 기백에 압도되어 감히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몇몇 페이트가 저려오는 다리를 조금씩 꿈지럭거릴 무렵이 되어서야 로이드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뭐, 연약한 인간 몇이 얼어 죽었다는 얘기군. 상관없잖아? 자네는 다 좋은데 별거 아닌 얘기를 너무 장황하게 끄는 버릇이 있단 말이야. 그건 그렇고 수컷 녀석들은? 혹시 그놈들도 죽었나?"


진이 관심 있는 것은 전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수컷들의 근황이었다.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수컷이 끼어있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건 좀 아쉽군."


아쉽다는 진의 말과는 달리 표정이나 태도에는 전혀 아쉽다는 티가 나지 않았다. 사실 큰 상관은 없을 거였다. 어차피 결과는 같은 것이니까. 로이드는 아직 보고할 것이 남았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모든 인간들의 종적을 살피기는 어려웠습니다. 한데 뭔가 목적이 있는듯했습니다. 무질서하고 부산해 보여도 놈들의 움직임에는 뭐랄까... 체계가 있었습니다. 짐작뿐이지만, 놈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이쪽으로 이동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건 진도 동의하는 의견이었다. 이곳으로 오기까지 다섯 구의 시체를 남겼다는 로이드의 보고에서 그는 좀 더 명확한 확신을 얻었다. 그렇다면 죽은 이들의 희생을 깔고서라도 꼭 이곳으로 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놈들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곳으로 왔는가?`


사실 지금 당장에라도 달려가 놈들의 목을 비틀고 싶었지만 그는 잠시, 아주 잠시만 더 참기로 했다. 어차피 이곳까지 따라온 이상 놈들의 목숨은 자신의 손바닥 안에 들어와 있는 것과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괜히 조급해할 이유가 없다.


대신 평생을 가꾸어온 터전을 버리고, 또 목숨까지 버려가며 이곳으로 도망온 인간들의 목적과 계획이 더욱 큰 관심사로 떠올랐다.


"로이드, 다른 의견은 없나? 자네가 본 것을 바탕으로 말일세. 짐작이라도 괜찮아."


"일단 급하게 이동하는 점을 봐선 추격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뒤따르며 은밀히 살펴보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상태에서도 끈질기게 이동을 계속하더군요."


"잠깐, 그 생각은 미처 못했는데."


진은 속으로 뜨끔한 심정이 되었다. 찬찬히 따지고 보니 그랬다. 자신들이 습격할 것을 어떻게 알고 미리 몸을 피했으며, 이후 추격받는다는 것까지 알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또다시 원점이다.


인간 놈들은 스스로가 사냥감임을 인식하고 특별한 목적 없이 그저 멀리멀리 달아나는 것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진의 반응이 의외였는지 로이드도 잠시 당황했다.


"그렇지만 수컷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낮 시간엔 무얼 하는지 몰라도, 해가 지고서야 무리에 합류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으로 보아 단순히 도망가기에 급급하다는 인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먹이를 찾는다고 하기에도 어색한 점이 있죠."


급히 덧붙인 말이었지만 로이드의 보고는 확실히 논리정연한 것이었다. 얼핏 생각해도 그의 말대로라면, 인간들이 무언가 다른 꿍꿍이를 숨겨놨을 확률이 상당했다. 진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관자놀이를 문질러댔다.


"사실은 말이야, 로이드. 자네라면 짐작했을 수도 있지만 이 자리에서 솔직히 고백하겠네. 난 머리 쓰는 게 싫어."


`사실은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젊은, 아니 어찌 보면 아직은 어린 자신의 라나트를 보며 로이드는 몰래 미소 지었다.


머리 쓰는 걸 싫어한다니, 진작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새삼 이렇게 엉뚱한 고백을 할 줄이야. 그래도 로이드는 그 모습조차 싫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여태 해왔던 대로 하시지요."


"해왔던 대로?"


로이드가 조금 전과는 다른 웃음을 지었다. 송곳니가 입술 밖으로 비어져 나와 그가 말할 때마다 위아래로 살벌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이빨만큼 살벌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쓸어버리는 거지요. 다른 생각할 필요 없이."


확실히 이번 경우는 평소의 진과 달리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로이드가 생각하는 진의 장점 중 하나는 일을 빠르게 전개해 나가는 추진력이었다. 그리고 또 그만큼이나 빠른 결단력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장점들이 한데 모여 어린 나이지만 토페익투족 내에서도 인정받는 제를렉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임무에서는 그 장점들이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진은 무언갈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노련한 로이드는 평소와 미묘하게 다른 진의 태도에서 뭔가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재차 말을 이어갔다.


"그 인간 때문이라면.. 그리 신경 쓸 일이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그랬다. 그동안 진은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던 한 명의 인간 때문에 `늘 해오던 대로의 방식`을 쉽사리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네는 못 속이겠군. 임무도 임무지만, 사실 나는 그놈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 제대로 다시 한판 해야 직성이 풀리겠어."


그때 입었던 다리의 상처보다 컸던 것은 역시나 마음의 상처였을 게다. 로이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라나트, 물론 임무에 실패할 거란 생각은 저도 하지 않습니다만, 최대한 빠르게 돌아가는 것을 추천합니다. 괜한 사심에 일이 늦춰진다면 터스겅으로 돌아가서 로우이터에게 할 말이 궁색해질 겁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금 만류해 봤지만, 진의 표정을 본 후 로이드는 바로 마음을 접어버렸다. 한번 결정한 사항을 번복하는 일이란 여태까지 없었다. 더고르로서 몇 년간 손발을 맞춰온 로이드가 그런 사실을 모를까마는, 직책이 직책인지라 그래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적은 지척으로 가까워졌고, 준비도 충분하다. 이제 진의 뜻에 맞추어 일을 진행시키는 것만 남은 셈이다. 로이드는 어떻게 할지 일의 전개를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뜻하신바,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결행은 언제 하시겠습니까?"


"대단한 계획까지는 필요 없겠지? 오늘은 늦었으니 먼저 저놈들을 추스르고 내일 시작하도록 하자고."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로이드가 일어나려 할 때 진이 갑자기 그를 잡았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혹시 먹을게 남았나? 오는 동안 별로 못먹었더니 조금 출출하군."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로이드가 떨떠름한 얼굴로 숨겨놓은 새끼 고라니 한 마리를 꺼내놓았다. 깊어가는 밤 속에서 둘은 먹이를 나눠 먹으며 각자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내일의 결행, 그 마침표를 말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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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지나온 곳 가야 할 곳(4) +1 21.06.06 705 27 8쪽
39 11. 지나온 곳 가야 할 곳(3) +2 21.06.05 719 27 13쪽
38 11. 지나온 곳 가야 할 곳(2) +1 21.06.04 744 29 12쪽
37 11. 지나온 곳 가야 할 곳(1) +1 21.06.04 761 26 11쪽
36 10. 괴물은 멀리 있지 않다(4) +1 21.06.03 783 27 17쪽
35 10. 괴물은 멀리 있지 않다(3) +3 21.06.02 762 28 14쪽
34 10. 괴물은 멀리 있지 않다(2) +1 21.05.31 768 29 9쪽
33 10. 괴물은 멀리 있지 않다(1) +1 21.05.31 814 31 10쪽
32 9.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인다(3) +1 21.05.30 844 30 12쪽
31 9.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인다(2) +1 21.05.28 881 32 14쪽
30 9.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인다(1) +1 21.05.28 869 29 10쪽
29 8. 살아가도록 하는 것은(3) +2 21.05.27 932 32 13쪽
28 8. 살아가도록 하는 것은(2) +1 21.05.27 924 29 12쪽
27 8. 살아가도록 하는 것은(1) +1 21.05.26 957 31 11쪽
26 7. 사냥의 계절(3) +1 21.05.26 971 31 10쪽
25 7. 사냥의 계절(2) +3 21.05.25 1,034 37 12쪽
24 7. 사냥의 계절(1) +9 21.05.25 1,104 34 12쪽
23 6. 무엇을 희망이라 하는가(2) +1 21.05.24 1,103 38 17쪽
22 6. 무엇을 희망이라 하는가(1) +3 21.05.24 1,141 39 13쪽
21 5. 먹이를 찾아서(5) +2 21.05.23 1,135 42 11쪽
20 5. 먹이를 찾아서(4) +1 21.05.23 1,208 42 14쪽
19 5. 먹이를 찾아서(3) +1 21.05.22 1,248 41 12쪽
18 5. 먹이를 찾아서(2) +3 21.05.22 1,384 43 16쪽
17 5. 먹이를 찾아서(1) +1 21.05.21 1,544 46 13쪽
16 4. 떠나가는 바람(4) +3 21.05.21 1,558 44 12쪽
15 4. 떠나가는 바람(3) +9 21.05.20 1,637 50 17쪽
14 4. 떠나가는 바람(2) +1 21.05.20 1,749 48 15쪽
13 4. 떠나가는 바람(1) +3 21.05.19 1,914 53 15쪽
12 3. 마침내 돌아오다(5) +3 21.05.19 2,104 6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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