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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야비 님의 서재입니다.

너의 등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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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야비
작품등록일 :
2022.01.27 17:15
최근연재일 :
2023.06.19 04:59
연재수 :
90 회
조회수 :
25,485
추천수 :
34
글자수 :
575,946

작성
22.07.23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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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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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17. 당신이 잠든 사이에(1)

DUMMY

천신력 1674년 10월 27일.



알프가 의식을 잃고 5일 후.



"정말 이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편성대를 따로 꾸려서 저희 수색대를 숨겨주신다니."



천류문의 거주 구역. 밖으로 마루가 활짝 열려있는 이라야의 별채.


드레이프가 한모금 들이킨 찻잔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네.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이라야는 잠시 찾아온 평화와 가을바람을 느끼며 차를 홀짝 들이마셨다. 수련장에서는 공사중인 인부들의 작업 소리가 쉬지않고 들려왔다.



"이제 결사단은 거대한 적이 되었습니다. 숨길 수 없을 바에는 차라리 화려하게 이목을 끄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그래주신다면 너무나도 든든하겠지만, 하나 걸리는 건.."


"알프를 중심으로 연이어 사건이 터지는 것, 인가요?"



드레이프가 입맛을 다시고 말꼬리를 늘렸다.



"... 예. 맞습니다. 지금까지 향한 모든 곳에 결사단이 숨어있었으니까 말입니다."


"음."



다시 찻잔을 홀짝이며, 이라야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다시 복기했다.



"알프와 동행했던 저로서는.. 우연의 일치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결사단 쪽에서도 계획이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지만."


"나인틴이라는 자 때문이군요."



드레이프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자는 지금 어디에?"


"저희 수색대와 함께 있습니다."


"그렇군요.."



결사단의 대략적인 계획들을 알게 된 이상, 나인틴은 이제 단순한 마물이 아니었다. 나인틴은 인류에게도, 결사단에게도 강력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 저는 그 자에게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제 와서 제가 그의 처우를 논하기는 힘들 것 같군요."


"만약 결사단과의 연결고리가 있다면?"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찻잔을 전부 들이킨 드레이프가 짧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하... 제가 마물을 옹호하다니.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원."


"저보다 더욱 오래동안 그 자를 지켜보았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최근 한달 간 너무 많은 일이 있다보니.. 20년은 넘게 믿어왔던 것들이 순식간에 뒤엎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레이프 님."



이라야가 맞닥뜨린 결사단. 그 일원 중에 인류 최고의 수호자라 불리던 사내가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 갈드 님은, 어째서 그런 선택을."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들어서 알고 있던 드레이프는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풀어야 할 문제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선 결사단이 어떻게 '심연의 은둔자'를 알아내고 그와 접촉했는가를 제일 먼저 조사해야 할 듯 싶습니다."



드레이프가 '심연의 은둔자'라는 단어를 말하자 이라야가 눈을 크게 뜨고 드레이프를 쳐다봤다.



"드레이프 님은 그걸 말 할 수 있으신 겁니까?"


"예? 그게 무슨."



이라야는 목을 가다듬고는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갑자기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라야 님! 이건 혹시.."


"...... 아무래도 그 자의 본질과 마주한 사람들만이 저주를 받게 되는 듯 하군요."


"그런 건가..! 저는 나인틴에게 전해 들었을 뿐, 그 자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주를 피해간 모양이군."


"그건 다행입니다. 드레이프 님의 말대로 저희 편성대의 목적은 먼 과거의 잔재들을 조사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이 맞다면 결사단은, 아니, 결사단의 수장은.."



드레이프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을 이어받았다.



"천신력 이전의 과거를 알거나, 과거의 신에 준하는 존재."



이라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 할 일이 많겠군. 저도 이제 일어나봐야겠습니다."



드레이프는 서둘러 외투를 걸치고는 나갈 채비를 했다. 나가기 전에 이라야에게 격식을 차려 인사했다.



"예정대로 출항은 알프가 일어날 예정인 2일 후. 그 때 뵙지요."


"만약 알프가 일어나지 못하면 그때는 어떡할 예정이십니까?"


"알프를 실어야지요."



드레이프가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짐칸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





"감시자 키르."



조금 무뚝뚝하고 차가운 말투의, 하얀 로브를 입은 중년 남성이 키르에게 다가왔다.



"들어가도록."



남자는 키르를 문 앞까지 인도하고는 그대로 멈춰섰다. 키르는 그 남자를 흘긋 쳐다보고는 금색 장식물이 유려하게 치장된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 와도..'



키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건물의 별채로 따로 지어놓은, 푸르른 자연의 산물이 가득하게 뿌리내린 화려한 정원에 키르가 발을 들였다.



'뭔가 속이 거북해져.'



키르는 잘 다듬어진 돌담길을 따라 정원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식물들은 마치 아무렇게나 방치해놓은 듯 자신들의 푸르름을 뽐내며 어지럽게 자라나 있지만, 키르는 잘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단 한 명의 사람만을 위해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었다. 단 한 줄기라도 더 자라거나 길어지면 안 되는, 이 모습 그대로 영원히 굳어버린 식물들이었다.


키르는 이 정원의 모든 게 의미 없이 그저 빛나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게 그대로인 정원을 들어가노라면, 키르는 이유 모를 불쾌함을 느끼고는 했다.


돌담길을 따라 들어간 정원의 중심에는 백색의 울타리가 쳐진 조그마한 쉼터가 있다. 쉼터에는 이미 백발의 남자가 의자에 몸을 맡기고 앉아 있었다.



"왔구나."


"의장님."



인류 연합의 의회의 수장은 의자에 앉아 정원의 향취를 만끽하고 있었다.



"얼굴 보는 게 점점 힘들어지는구나, 키르."


"...임무에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의장은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렇구나."


"..."



의장이 키르에게 맞은 편 의자에 앉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키르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저벅 저벅 옮기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키르는 눈을 흘긋 흘겨 의장의 표정을 살폈다. 얼굴과 손등에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듯 주름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회색으로 빛바랜 눈동자에는 초점이 실리지 않았다.



"이야기를 좀 들어보마."



키르는 대답 대신 의장에게 얼굴을 숙여 보였다, 의장이 키르의 머리를 쓰다듬자, 의장의 손길에서 마법의 술식이 새어나왔다,



"파레의 일을 다시 한 번 들어보도록 하마."



키르는 무감각한 어투로 지금까지의 일들을 상세히 보고했다. 결사단과 미지의 괴물에 대한 이야기들, 결사단에 갈드가 있었다는 것. 과거의 존재인 '심연의 은둔자'에 대한 이야기까지.



"세계는 이제 다시 움직이려 드는구나."



키르의 보고를 가만히 다 들은 의장이 짧은 소감을 내비치며 한숨지었다. 키르는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흔들어보였다.



"키르,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무엇을 말입니까."


"이 세계에 대해서 말이야. 너의 눈으로 본 세계는 어떨지 궁금하구나."


"이 세계는... 신비하고, 때로는 잔혹하고.."



키르는 지금까지 자신이 품었던 의문들을 곱씹었다. 알프를 따라 세상을 돌아다녔지만, 그의 눈에 비친 세계는 아직 의문투성이였다.



"... 비밀이 많습니다."



키르는 마지막 말에 은근히 힘을 주어 말했다.



"그렇구나. 그게 네가 느끼는 세계로군.."



의장은 온화한 표정을 잃지 않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나는 이 세계가 조금은 안정되었으면 해."


"안정..?"


"그래, 안정. 세계는 아까도 말했듯 자꾸만 변화하려고 하거든. 주로 누군가의 강한 의지에 의해서 말이야. 변화는 절대 나쁜 것이 아니지만... 가끔은 그 변화가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조금 가혹한 것일 때가 있지. 마물이 들끓던 그 시절처럼."


"..."


"하지만 이제 변화의 흐름을 돌이킬 수 없는 것 같구나. 다시 안정될 수 있게 우리도 힘 써야 하겠어."


"이미 알프 님을 비롯한 인류의 투사들이 분투하고 있습니다. 금방 해결될 겁니다."



키르는 대화를 급하게 종료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장은 쉼터를 나서려는 키르를 쳐다보지도 않은 체 잠시 내버려 두었다.



"나에게 숨기고 있는 걸, 말해주지는 않으련?"



그 말을 들은 키르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지금까지 들킨 적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눈 먼 노인이니, 간단한 연기로 세뇌가 풀리지 않았다고 속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 알고 있었습니까?"


"내가 모르는 것은 드물단다. 비록 이렇게 눈이 멀어버렸어도 말이야."



키르가 신경질적으로 뒤통수를 마구 긁어댔다.



"정말 즐거우셨겠습니다. 다 알고서 제가 헛짓거리 하는 걸 보고 계셨다니."


"나는 네 눈으로 세상을 탐구하기를 바랬을 뿐이란다. 그 후에 네 입으로 그 결과를 직접 듣고 싶었고."


"허.....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제 단독으로 진행한 일입니다."


"너를 책망하려는 게 아니야. 단지 걱정될 뿐이지."


"무슨 걱정 말입니까."


"내게서 네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 걱정된단다."


".... 그건 제가 '성공작'이기 때문입니까?"



감정이 격해진 키르가 쏘아붙이듯이 내뱉은 말에 가장 먼저 놀란 건 키르 자신이었다. 차마 의장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그냥... 가보겠습니다."


"키르 네가 조사하고 있는 사건, 그 사건은 의회의 짓이 아니야."



정원을 나서려고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키르는 의장에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홱 돌려 의장을 바라봤다. 의장은 담담하게 그저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초점이 실리지 않는 두 눈에는 아까의 온화한 표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뭐라고.."


"이렇게 말해도, 키르 너는 이미 믿지 않는 것 같구나."


".....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럼 난 너를 설득할 방법이 없구나. 너에게 내가 아는 것들을 기꺼이 말해줄 수 있지만.. 의심을 뿌리뽑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직접 알아내는 것이니까."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도록 하려무나. 네가 보고자 하는 진실을.. 꼭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마."



키르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최대한 억누르고 돌담길을 되돌아 걸어갔다. 쉼터는 수풀에 가려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체 제게 뭘 원하십니까."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혼잣말이 키르의 입에서 맴돌다 새어나왔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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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20. 진실과 거짓의 경계(2) 22.10.07 58 0 16쪽
81 20. 진실과 거짓의 경계(1) 22.09.07 66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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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19. 시련의 성녀 아르미아(5) 22.08.25 108 0 13쪽
78 19. 시련의 성녀 아르미아(4) 22.08.16 151 0 15쪽
77 19. 시련의 성녀 아르미아(3) 22.08.11 174 0 14쪽
76 19. 시련의 성녀 아르미아(2) 22.08.10 182 0 14쪽
75 19. 시련의 성녀 아르미아(1) 22.08.08 192 0 13쪽
74 18. 빛과 그늘(3) 22.08.04 206 0 12쪽
73 18. 빛과 그늘(2) 22.08.03 216 0 13쪽
72 Extra 02. 진주는 언제나 검어야 한다 22.08.01 221 0 12쪽
71 18. 빛과 그늘(1) 22.07.28 224 0 14쪽
70 17. 당신이 잠든 사이에(2) 22.07.27 228 0 15쪽
» 17. 당신이 잠든 사이에(1) 22.07.23 240 0 11쪽
68 16. 어둠을 걷어내고(8) 22.07.20 248 1 21쪽
67 16. 어둠을 걷어내고(7) 22.07.15 251 0 14쪽
66 16. 어둠을 걷어내고(6) 22.07.13 277 0 17쪽
65 16. 어둠을 걷어내고(5) 22.07.06 302 0 14쪽
64 16. 어둠을 걷어내고(4) +2 22.07.05 308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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