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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류 님의 서재입니다.

용사. 때려치겠습니다.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레트류
작품등록일 :
2024.04.24 00:31
최근연재일 :
2024.04.27 00:00
연재수 :
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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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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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1 - 대책 회의

DUMMY

"늦었군요."

"기다렸단다."

"시작하겠습니다, 어서 자리에 앉으시길."

"로드스터 후작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무용한 격식은 됐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기도를 올리던 리셰를 제외한 전원이, 가장 늦게 문을 열고 들어온 아르윈에게 각자의 인사말을 건네었다.


아르윈은 그 인사 중 에리스의 인사에만 답하여 가슴께에 한 손을 얹으며 허리를 숙이는. 격식을 담아 인사하였지만. 에리스는 그 행위가 퍽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미간을 살짝 좁힌다.


그러나 단지 그 뿐이라. 아무리 다혈질인 아르윈이라도 표정 하나에 분개할 정도로 사리분별을 못하진 않았고. 더이상 대화를 잇는 대신, 유일하게 빈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그래서, 카르네. 오늘은 뭐에 대한 회의지?"

"전반적으로, 전부에 대한 것."


자리에 앉자마자 팔짱을 끼며 거만하게 고개를 든 아르윈은 카르네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그에 대답하기 직전 시선을 끌어모으기 위해 다섯 명 전원이 둘러앉은 테이블을 약하게 내려친다.


그때까지도 기도를 올리던 리셰가 천천히 눈을 뜨며 고개를 드는 것을 마지막으로, 모두의 이목이 카르네에게로 집중되었고.


카르네는 앉은 둥근 테이블 중 자신을 기준으로 가장 왼편에 있는 아르윈부터, 가장 오른편에 있는 에리스까지. 차례로 그들 전원과 눈을 맞추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번 세계는, 저번 세계들과 상당히 이질적인 흐름을 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대었던 테이블에서 뗀 손을 들어, 주먹을 쥐어보인 카르네는, 우선. 검지를 펴곤 아까와 같이 모두와 한 번씩 눈을 마주친다.


"첫 번째. '용사의 권한 포기'입니다. 물론, 그 전부터도 사명과 업무를 포기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사견은 삼가도록."

"··· 그러죠."


그런 카르네의 말이, 금일 회의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끊긴다. 아르윈이 심기가 불편한 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내리깐 목소리로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의견의 충돌과, 회의의 파토를 의미하진 않았다. 팔짱 낀 아르윈의 오른속 검지가, 거슬린다는 듯 톡톡 제 팔을 건드리고 있던 것을 본 카르네가 빠르게 태도를 바꾸었기에.


짧은 침묵으로 수긍하자, 아르윈은 표정과 손짓으로 불쾌함을 표하는 것을 멈추었고. 그러한 상황의 종료를 확인한 카르네는, 두번째론 중지를 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두 번째. '기억의 유지'입니다."


사실, 카르네에게는 이 두번째 주제가 핵심이었다. 그녀는 주제보다 사견에 집중해 말했던 아까완 달리, 지금은 처음부터 목에 힘을 주어 강조했고.


미적지근했던 첫 주제와는 다르게, 이번 주제엔 확실히 동의하는 듯. 강도만 다를 뿐, 4명 전원의 눈빛이 이채를 띠며 빛난다.


단, 개중 아르윈의 눈동자만 조금 더 빛났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본인을 포함해, 아무도 없었으리라.


"직전 세계 이외의 세계는 '정보'로써만 머리에 남아있어야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공식이었죠. 하지만."

"확실히··· 듣고 나니,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엔 그 공식이 살짝 뒤틀렸다는 것을."

"맞아요. 지금이 991번째의 세계이니. '직전 세계'인 990번째의 기억만이 남아있어야 하죠."


이변의 증명을 위해 손동작까지 섞어가며 이어지는 카르네의 설명에, 리셰와 에리스가 한 마디씩을 거든다.


그때까지 세계를 관통하며 이어지는 '공식'이 있었고, 그녀들 전원이 그 공식에 대해 완벽히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공식이란 다음과 같았다. 용사를 제외한 모든 인원은, 즉 윤회를 인지하며 또한 대상이 되는 인원들은 이전 세계의 기억을 갖고 윤회하는 대신, '모든 세계'를 기억할 수 없다.


그들은 오로지 '직전 세계'의 기억만을 갖고 다음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 이전의 세계는 어렴풋한 '정보'로만 남게 된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고 마법으로 간섭해도, 절대로 떠올릴 수 없고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저는 989번째 세계에서. ··· 제 사지가 잘린 채 불타 죽어가는 그 감각을, 생생히 기억해요. 풍경을, 생생히 기억해요."


하지만 지금의 세계는 달랐다. '직전 세계' 외의 기억이 남았다. 어떠한 수단을 써도 떠올릴 수 없는 기억이 어떠한 수단을 쓰지 않았음에도 떠오르는 상황이었다.


앞선 공식이, 이곳에 있는 영웅 5명이 카르네의 말에 동의하는 이유였고. 뒤따르는 상황이, 대책 회의의 주요 안건으로 삼을 '이변'이라는 데에 수긍하는 이유였다.


잠시 뜸을 들일 뿐, 표정에 단 하나의 변화도 없이 담담히 자신의 죽음을 읊어내려가는 카르네는 자신의 이야기를 마친 뒤 우선 루네라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그렇나요?"

"··· 읍, 우윽."


그러나 루네라는 대답 대신 연신 헛구역질만을 했고. 영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피나 시체를 끔찍이도 두려워하는 습성을 알고 있는 카르네는 짧은 한숨을 내쉴 뿐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러는 대신, 대답을 촉구하여 그 왼편의 리셰와 눈빛을 나눌 뿐이었다.


새하얀 눈동자를 마주한 리셰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다. 신관모를 고쳐쓰곤, 성호를 한 번 그은 뒤.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곤, 천천히 입을 연다.


"네. 기억해요. 마왕군에게, 패배해서··· 지키는 데 사용해야 할 신성력으로. 무고한 분들을···"


그러나 호기롭게 시작된 말은 고작 두번째 문장에서 멈춰진다. 리셰는 꼿꼿히 들었던 고개를 떨군다. 이어나가야 할 말을 전부 마치지 못하고, 말끝을 흐린다.


그러나 루네라와는 다르게 그렇다, 아니다의 맺음 정도는 하였기에 카르네는 한숨을 내쉬는 대신 고개를 마주 끄덕여주었다. 그녀의 고통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저는 끝에 가선 무엇도 보고 듣지 못하였기에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음으로 카르네의 시선을 받은 에리스는 대답을 유보하였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의 기억이 불확실한 것이 이유였다.


평이하였던 2달 하고도 3주의 기억보다는, 마왕이 급습하던 마지막 1주의 기억이 중요하였고. 그 1주 중에서도 최후의 기억이 중요했지만. 에리스는 눈이 뽑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인간은 착각의 동물이라고도 하였고, 본능에 따라 불확실의 염상을 착각으로써 채워 확실로 만들어봤자 그것은 또다른 착각의 늪에 빠질 뿐이었다. '옳은' 대답을 만들 수 없다.


99%의 확신이라도 1%의 의문이 들면 확신하지 않는다. '옳지 않음'을 자초하지 않는다. 그것이 에리스가 말하는 방식이었다.


모든 상황에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필요하였던 카르네와도 일부 정돈 일맥상통한 사유였기에, 왜 말을 못하냐며 따지지 않은 그녀는 마지막으로 남은 아르윈과 눈을 맞춘다.


아르윈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약간의 침묵을 즐겼다. 남은 4인의 시선이 정적을 버티지 못하고 아르윈 자신에게로 향할 때까지 고수하였다. 혹여나 누군가 다른 정보를 꺼낼까, 기다렸다.


그러나 전원은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다. 989번째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영웅인 아르윈의 입에서 나올 정보보다 '중요한' 정보를 지니지 않았다는 반증이었다.


그녀와 같은 이변을 겪었다면 이 단계에서 '그리고보니' 등의 서두를 띄워야만 했지만, 서두는 커녕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만을 토해낼 뿐.


이야기를 하면서 그나마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금 고개를 듦에, 아르윈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곤 깊은 한숨을 쉬며 짧게 답한다.


"··· 전부 기억하고 있다."


조금 더, 라는 말을 덧붙일까 잠시 고민한 아르윈이었지만, 이미 저들 중 그 누구도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는 것은 증명되었다. 희박한 희망을 드러내어봤자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그러한 착잡함의 표는 루네라나 리셰처럼의 단순한 개인 감상의 산물이라 여겨졌고. 거기에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으며 유야무야 이야기는 넘어간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정리하였던 카르네에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의 의미를 표하곤, 이번엔 에리스가 일어선다. 의자가 뒤로 끌리는 소리에 3명은 시선을 향하고, 카르네는 자리에 앉는다.


"최소 다섯 중 셋에게 일어난 현상. 이 현상에 대해, 짐작가는 바가 있으신 분. 있으십니까."


에리스의 힘있는 목소리는 카르네와는 다른 위엄이 있었다. 카르네의 힘 실은 목소리가 단순한 강조라면, 에리스의 힘 실은 목소리는 사람을 끌어모으고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유일한 적자인 에리스가 여성의 몸임에도 전권을 물려받을 수 있던 이유는, 목소리에서부터 지도자의 자질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지금까진 기억을 떠올리기 급급했던 이들은 잠시 생각에 잠기듯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감았고, 그 침묵은 수 분을 이어졌다. 또한 에리스는 섣불리 답을 촉구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린다.


"아마 그건, 후우··· 리오가, 용사 권한을 포기했기 때문이겠지."


그 기다림을 끊은 것은, 겨우 구역질을 멈춘 루네라였다. 챙이 넓은 남색 모자를 눌러쓴 루네라는, 입가를 손으로 닦고 손을 든 뒤 입을 열었다.


"아직도 애칭을 붙일 마음이 드십니까, 루네라 씨?"

"어떻게 부를지는 내 마음이란다. 호칭에 토를 달려고 회의를 하는 건 아니잖니?"

"하··· 그래요. 멋대로 하십시오."


잠시, 아까 이어졌던 자신의 말엔 대답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가장 먼저 손을 들었음에 불만이 있는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카르네의 가시 돋힌 조롱이 있었으나.


루네라는 얼버무리는 대신 트집에 정론으로 맞부딪혔고. 당연하게도 정론이 어느 쪽인지는 명백하였기에, 카르네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작은 소동이 진정되자 에리스가 루네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뜻을 전달한 루네라는 천천히. 나긋한 목소리로 톤을 잇는다.


"에리스. 적어도 기억하지 못하던 시절의 우리가 남긴 기록에선 이러한 현상이 한 번도 없었지. 그렇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수준 내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점'을 찾아야만 해. 그리고 나는 적어도."


기억할 순 없지만, 기억의 기록은 필요하였기에. 비단 루네라나 에리스만이 아닌 5인 전원은 직전의 세계마다 '기록'을 남겼다.


물론 기억이란 절대적 기준으로 남는 것이 아닌 마음에 떠오른 염상에 불과했다. 개인의 사견, 누가 좋다. 누가 싫다 따위를 적기엔 여백과 시간, 인간의 지능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중요한 사건'만을 적었다. 579번째 세계에서 리오바스가 마을을 불태움. 984번째 세계에서 루네라가 동대륙에서 금술을 찾음. 같은, 알아둬야만 하는 굵직한 사건만을.


루네라와 에리스가 나누는 대화는 그 연장선이었다. 몇번째 세계에서 추가로 기억을 얻음, 같은 서술이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확인에 틀림이 없냐는 질문에 돌아오는 것은 확신에 가까운 에리스의 긍정. 그에 힘입어 루네라는 모자의 끝을 만지작거리며, 의견의 종언을 고한다.


"리오의 용사 포기, 말고는 찾지 못했단다."


리오, 라는 이름이 거론되자. 그때까지 눈을 감고 있던 아르윈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린다. 대놓고 드러낸 것이 아르윈일 뿐. 리셰나 카르네도 침음을 흘리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등으로 동의를 표했다.


실제로 '서술되지 않았던' 정보가 있었으면 모를까. 그러한 것이 있다한들 어차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었기에. '찾았다'고 나서는 인원은 아무도 없는 것이 당연했다.


현재의 시점에선, 그 의견이 정론이었다. 리오바스가 용사의 권한을 포기해 일어난 이변이라는 것이 정론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그러나 속시원히 나온 결론은 없었다. 규명된 것인 원인 뿐. 이 현상이 앞으로 어떤 일을 일으키고, 해결할 방법은 무엇인지. 결과와 관련된 그 어떠한 내용도 밝혀지지 않았다.


아르윈이 따져묻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르윈이 아니었으면, 루네라를 고까워하는 카르네가 나섰을 정도로 대답엔 알맹이가 없었으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다음 세계의 표본이 필요합니다. 이어지는 현상인지, 단발성 현상인지조차 지금으로썬 알 수 없습니다."

"그렇네요. 한 번의 세계로 답을 찾아낼 수 있는 사태였다면 우리가 여기에 모일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에게 다음 세계라는 건···"


그 불만은 에리스는 정론으로 잠재운다. 현 상황에서 결론을 알아낼 능력이 없음을 자백하고 차선책을 내밀고, 이제껏 침묵을 고수했던 리셰가 조심히 뒷받침하는 것으로 진정된다.


그러나 진정은 개선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카르네가 표정을 찡그리며 중얼거리는 혼잣말은, 좁고 조용한 회의실 내에선 더이상 혼잣말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랬다.


다음 세계라는 것은, 윤회함을 의미했고. 윤회라는 것은, 곧 실패를 의미했다. 어떠한 경유로든 마왕에게 살해당하거나, 용사가 죽거나.


성공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 실패로써 답을 찾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고. 차선책 없는 무능의 자백과 동일하였다.


"젠장."


아르윈이 나지막하게 내뱉은 욕설을 기점으로, 처음부터 넓지도 않았던 공간에 또다시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거대하게 가라앉는다. 누구도 섣불리 말을 내놓지 않는다.


초반의 몇 번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991번째의 세계. 윤회가 지속되리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고, 용사의 힘마저 잃었다. 한 번 일어난 이변이 두번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도 없었다.


슬슬, 무력함을 통감할 때도 되었다. 그랬기에 아무도 섣불리 의견을 내놓지 않는 것이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카르네였다. 카르네는 이를 뿌득 갈곤, 의자가 뒤로 넘어질 정도로 거칠게 일어난 뒤. 양 손으로 테이블을 강하게 내려친다.


쾅, 하고 회의실을 울리는 굉음에 세명은 고개를 들고. 루네라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떤다.


"아, 빌어먹을. 왜 그렇게 다들 쫄아있어요? 우리는 영웅들이에요. 영웅들! 예언서에 적힌 불세출의 영웅 다섯 명!!"


그러나 그 반응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곤, 카르네는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열변을 토한다.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내려치며, 해결을 호소한다.


"왜 우리로는 이루지 못한다고 생각하세요!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대표로 나설 듯한 루네라가 고개를 젓곤, 의자를 뒤로 살짝 밀어넣고 일어나. 격정적인 카르네와는 상반되는 차분한 목소리로 반박한다.


"'해보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 아니란다. '했기에' 모르는 것이지."

"그건 무슨 뜻이죠?"


루네라는 긴 숨을 들이마시곤, 제 차갑게 가라앉은 보라색 눈동자를 카르네의 날카로운 새하얀 눈동자와 맞부딪히며 입을 연다.


"그렇게 우리끼리 해낼 수 있었으면. 우리가 991번의 루프를 할 필요가 있었겠니?"

"그건 리오바스, 그 자식이 우리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생각하렴. 그렇다고 한들 네가 말한 가능성은 989번째에 끝나지 않았니."

"그, 그건···!"


실제로 약 980번째 세계부터 용사는 거의 대부분을 방관했다고 기술되었으며, 용사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전원은 '예언서에 나온 영웅'인 자신들이라면 충분히 용사 없이도 마왕을 무찌를 수 있을 거라며.


989번째 세계에서 완전한 끝을 내자고 합의하곤 각 세계를 거치며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모아나가기 시작했다.


아르윈은 로드스터의 검술서를, 카르네는 마왕성의 직접 침투를, 리셰는 신성력의 극대화를, 에리스는 기사단의 집결과 전력 강화를, 루네라는 동대륙에서 금서를.


모든 일은 순조로이 진행되었고, 목표했던 989번째 세계에선 '용사'만이 없을 뿐. 모두가 목표를 이룬 채로 마왕군과 맞부딪힐 수 있었다. 최선의 수를 썼다.


그러나 결과는 알다시피, 처참한 패배였다.


황궁은 불탔으며, 살아남은 이 없었다.


차라리 기억이라도 남아있지 않으면 모를까, 이변으로 인해 그 저항의 결과는 '생생하게도' 모두의 머릿속에 남은 상태였기 때문에.


카르네는 눈 앞에 당도한 '합리'를 인정하지 못하고, 궤변만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어쩌면 리오바스의 존재 그 자체가 억제제일 수도 있지 않나요? 지금이라면 뭔가 될 겁니다! 그리고, 그리고 또···!"


전략가라는 이명이 무색하게도 자신감은 간데없이. 시선은 갈 곳 없이. 말에는 두서 없이 횡설수설하는. 보기에도 딱한, '암약의 암살자' 카르네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


용사를 증오하고, 상황을 타개하고 싶은 이 곳의 전원마저 동조하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눈을 감거나, 고개를 젓는 등의 표현으로 딱함이나 비동의를 표했고.


"입 다물어라, 카르네."


그 소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아르윈이었다. 앉은 채 주먹으로 테이블을 강타하고. 카르네가 내려친 것보다 더 강한 파열음이 모두의 고막을 때리고 지나간다.


"아까부터 전혀 합리적이지 않군."


상황의 뒤로 찾아온 순간의 침묵에 만족하지 않은 아르윈은,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카르네에게 응수하여. 마찬가지로 의자에서 일어나, 시선을 마주한다.


"뭐라고요? 하! 전 아까부터 계속 합리에 의거해서 떠들고 있는데요? 오히려 겁쟁이처럼 겁을 집어먹은 당신들과는 다르게···"

"두루뭉술하게 '어떻게든 된다' '어떻게든 해보자'가 합리인가? 그건 네가 생각하기에 '타당한 이유'인가?"

"그야 그건···! 그건···"


찢어죽일 정도로 맹렬하게 몰아치는 시선과 비웃음까지 흘리는 단어의 나열. 감정에 고조되어 적대적으로 튀어나가는 카르네의 말.


그리고 그 카르네의 폭풍같은 적의를, 마주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답하는 아르윈.


아르윈의 말에 반박하려다가, 문득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한다는 것을 깨닫는. 아르윈의 말에 틀린 점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곤 입을 잠시나마 다무는 카르네였지만.


"그래요. 좋습니다. 그러면 어디, 아르윈 '후작'님께서 직접 말씀해보시죠? 그 잘난 합리에 의거한 더 좋은 대답이 있기라도 한 겁니까?"


그러나 카르네는 여기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상대가 고까운 그저 아르윈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비논리적인 말을 쏟아냈다는 자괴감에서 눈을 돌리기 위함인지. 아니면 단순한 화풀이인지.


고개를 삐딱하게 치켜들곤, 비열한 웃음을 한없이 지어보이며. 대화의 논점을 흐린다. 자신의 무고를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공격한다.


실제로 그 공격은 성공할 예정이었다. 아르윈은 대부분의 회의에서 불만만을 제기할 뿐,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았고.


'그러면 넌 뭘 아느냐' 식의 질문을 역으로 내밀면, 카르네가 방근 항였던 '그건'같은 말로 얼버무리며 침묵하는 역할. 분위기에 제동을 걸어줌으로써 필요는 하나, 막상 쓸모는 없는 역할.


그러나 지금의 아르윈에겐 당혹스러움보단. 의문이 앞선다. 대답하지 못하는 상황에 짜증을 내지 않는다. 그저, 고요해진다.





"'성공한 세계'라 네겐 기억이 없겠지만, 아르윈."


리오바스의 그 말이, 쭉 마음에 걸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점'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부터. 어쩌면 989번째 세계의 기억이 아르윈 자신에게 남아있을 때부터.


그들 사이에서 성공의 정의는 단순히 마왕과 마왕군을 모두 물리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초 조건'에 불과했다. 그 조건에, '아무도 죽지 않는다'까지 포함되는 것이 정의였다.


'성공한 세계'. 용사와 영웅 5명. 아니, 윤회의 대상이 된 모두가 갈망하는 유일한 세계. 간절하게 바라는, 단 하나의 세계.


'아무도 죽지 않고' 마왕과 마왕군을 물리치는 세계. 그러나, 그만큼 어려워. 단 한 번도 이뤄내지 못했던 세계. 실마리를 잡는 것조차 어려웠던 세계.


그러나 리오바스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했었다. 확신했고, 단언했다. 그 단언의 끝에선, '나는 이미 너희 모두를 구했다'는 실망감을 내비쳤다.


아르윈 자신조차, 지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홀린 듯, 감정에 몸을 맡기고. 떠들 뿐이다.


"있다."

"뭐라고요?"


물론, 없을지도 모른다. 좋은 대답 같은 건 지금의 자신으로썬, 모두로썬 도출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만약, 그 열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들을 등진. 자신들이 등진. 그러나 아르윈 자신의 마음만큼에는 겉잡을 수조차 없는 파도를 일으키는.


"그리고 그 답은 내가 아닌. 리오바스가 알고 있겠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갑자기 리오바스 님이 왜···"


리오바스에게 있을 것이 자명했다.


그랬기에. 아르윈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카르네를 바라본다. 자신밖에 알지 못하는 리오바스의 모습을, 떠올린다. 모두가 어떻게 반응할지 앎에도. 입을 연다.


결심을 굳힌다.


"내가 리오바스를 설득하고 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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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991 - 방문 24.04.27 2 0 17쪽
» 991 - 대책 회의 24.04.26 4 0 21쪽
8 991 - 아르윈 로드스터 24.04.25 6 0 18쪽
7 990 - 세계의 윤회. 24.04.24 12 0 15쪽
6 990 - 루네라 모노리스 24.04.24 9 0 15쪽
5 990 - 에리스 선라이즈 울셰인 24.04.24 9 0 21쪽
4 990 - 리셰 일라이오스 24.04.24 8 0 16쪽
3 990 - 카르네 에스트라 24.04.24 8 0 20쪽
2 990 - 아르윈 로드스터 24.04.24 11 0 15쪽
1 용사로서의 마지막. 24.04.24 18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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