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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류 님의 서재입니다.

용사. 때려치겠습니다.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레트류
작품등록일 :
2024.04.24 00:31
최근연재일 :
2024.04.27 00:00
연재수 :
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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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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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4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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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990 - 에리스 선라이즈 울셰인

DUMMY

그 말이 기폭제가 되어. 여전히 무릎을 꿇은 나에게. 완벽한 표적이 된 나에게, 감정의 비난과, 물리적 비난이 날아든다.


돌, 말, 쓰레기, 말, 말, 말. 막을 생각도 없고 막을 수도 없이 날아드는 악의. 일상, 고통. 떽떽거리는 소리, 역겹게 쥐어짜는 소리···


"그래! 네놈은 살인자에 불과하다!"

"네놈은 용사가 아니다! 가짜 용사다!!"

"그딴 변명 할 바에야 자결해라!!"

"아르윈 님과 카르네 님을 돌려줘!!"


아.


아프다.


이 고통도. 이 먹먹함도.


진짜 지긋지긋하다.


이 꺅꺅거리는 비명소리도, 대놓고 흉보는 말소리도, 죽으라고 떠미는 저주소리도.


전부. 전부. 전부. 전부.


내가 왜 참아야만 하지?


어차피 윤회할 세계라면.


어차피 돌아갈 세계라면.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또한, 세계가 윤회하는 것이 예정조화라면.


내가.


도대체 왜 참아야만 하지?





왼쪽 이마에서부터 흐르는 피인지 착각인지 모를 찐득한 액체에 손을 올리고 있으려니, 대뜸. 이제 넘어가기 시작한 태양을 가린 그림자 하나가 드리운다.


그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허나 이제 가져다 버린 기대에 눈조차 돌리지 않고 고개를 드니. 거기엔, 기억처럼.


양 팔을 벌려, 내게로 날아드는 돌과 잡동사니를 막아주는. 나와 마찬가지로 돌에 상처를 입고, 막아낸 쓰레기가 흘러내리는 모습에.


그러나 본심을 알아버린 지금, 저 태양을 등진 모습에 나를 위하리란 감정은 단 하나도 묻어나오지 않는 이기적인 행동에.


나는 이 성스러운 거짓에 속아 이제껏 달려왔구나, 싶어. 형용할 수 없는 금색의 아이러니가 느껴져. 그저 헛웃음을 흘렸다.


"다들! 다들 멈춰요."


그렇게 선언하는 그녀의 몸은, 마치 성인군자처럼 끼어들며 외치는 그녀의 시선은. 군중을 향해 있지 않았다. 오로지 나를 향해 있었다.


여전히 무릎꿇은 채 있는 나를, 높은 이가 낮은 이에게 베풀듯. 역광 비쳐 확인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저 나를 내려다볼 뿐이다.


타인에게 쏟아지는 악의를 정면으로 받아줄 용기는 없으면서. 그러면서 뭐라도 된 양, 내게 관용을 내밀듯 설교하는 그 모습이.


신의 부름을 받은 나는 구원을 받을 선인과 악인을 판단할 수 있다는, 또한 교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도덕성 우월감을 뻗대는 모습이 너무나 우스워서.


"폭력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막상 폭력 외의 해결책을 제시하라고 해도, '당신 따위에게 알려줄 해답은 없다', 라거나. '헬리오스 님에게 빌어봐라, 답은 없겠지만', 라거나.


결국 명확한 대책 없이 그저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며 지껄일 것이 뻔함에도,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저 '악한'을 조금이라도 정화할 수 있다며 구는 꼴이 한심해서.


"그러니 리오바스 씨. 제발 멈춰주세요. 무용한 폭력일 뿐이잖아요."


결국 그녀는 내가 여기서 돌덩이에 맞아 죽던, 저 쓰레기 더미에 깔려 죽던. 수많은 발길질에 밟혀 죽던, 아무런 관심이 없다.


저 호소는 내게 하는 호소가 아니다. 헬리오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군중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아양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런 당신이라도. 헬리오스 님은 분명히 당신의 죄를 사하여 줄 겁니다. 그러니까."


악한에겐 약도 없다고 한 게 누구였더라?


그래서.


나는 일어났다. 꿇었던 무릎을 펴 일어났다. 그리곤 여전히, 군중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은. 나만 바뀌면 모든 것이 끝나리라 믿는 이 성녀의 눈을 바라본다.


내가 바뀌었다고 믿는 건지. 그래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오늘 나와 만난 이래,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띄며. 가식적인 미소를 띄며. 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를. 군중을 바라보는 내 눈빛에 담긴 감정이 변화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마음가짐을 바꿨으니까. 살짝 떠올랐던 감정을 한껏 드러내었다가 죽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 상황이.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간다고 찰떡같이 믿고 있을 리셰가 앞으로 지을 표정이. 퍽 기대되었다.


내가 이전까지 말에 담았던 감정은 기대고.


지금부터 말에 담을 감정은 체념과, 분노니까.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요. 그렇죠, 리오바스 님-"

"거짓말."


날 안심시키려는 듯 웃으며 멋대로 지껄이는 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내뱉는다. 나는 더이상 너의 그 기만에 놀아나지 않을 거라고.


어수룩하게 당하지만은 않을 거라고. 더이상 헤헤 웃고 내 탓으로 돌리는 삶은 지쳐버렸다고.


"니가 방금 헬리오스의 가호같은 건 없다며."

"··· 리오바스 님. 그건···"


그녀의 모순을 지적하자. 자신이 당할 리가 없다는 듯. 혹은 그저 상정 외의 사태라 말문이 막힌 듯. 숨을 들이마시곤, 말을 고르듯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는 리셰.


그러나 변명할 틈은 주지 않는다. 반응을 즐기며 저열한 자존심을 채울 생각도 없다. 점차 격앙되어가는 목소리의 톤을 낮출 생각은 하지 않는다.


"너 자신은 바라지도 않는 구원을 신한테 떠넘겨?"

"리오바스 씨. 부디 멈춰주세요. 이성적으로-"

"넌 성녀가 아니야. 그럴듯한 말로 나를 속여먹는, 단순히 사기꾼일 뿐이지."


나에게 멈춤의 미덕을 강요할 거라면 너희들이 먼저 행하였어야지. 나라는 인간에게 모든 미덕을 강요하는 그 모습. 완전히 질려버렸다.


상황이 잘못 돌아가는 것을 눈치챘는지, 더이상 자신의 입에 발린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리셰는 다급함을 얼굴에 띄우며, 나를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굴지만.


알잖아.


그 설득이 통할 상태였으면 내가 아르윈이나 카르네를 죽였겠어?


"내가 도대체 어디까지 이성적이어야 하지? 너는 지금 보인 내 모든 행동이 감정에 매몰되어 뱉어낸 헛소리라고 취급했다는 거지?"

"저,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

"거짓말이야!!"


감정의 고양은 충분하다. 이제 할 일은 단 하나.


사기꾼 새끼에게 심판을. 놀아난 군중에게 계몽을.


"큭! 다들 물러나세요! 위험합-"

"그걸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응. 내 탓이네."


여전히 아르윈의 피가 찐득히 묻어 굳은. 본래의 새하얀 검신은 간데없이, 더럽게 물들어버린 칼날을 검집에서 거칠게 꺼내어 세상에 보인다. 손잡이를 강하게 쥐어, 날을 향한다.


경악으로 물드는 그녀의 표정은 장관이었으나, 난 이제 저 상판을 보는 것도 질려버렸기에. 그대로, 리셰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이 씨발 새끼야."


리셰는 다급하게 유사시 나를 제압하고 죽여버리려 몸에 미리 둘렀던 신성력을 끌어모아, 방어막을 전개하지만.


고작 그딴 신성력으로. 헬리오스의 가르침을 무시한 네가, 마왕의 공격조차 막지 못한 방어막으로 내 검격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기에.


유리창 깨지는, 경쾌하고 청아한 소리와 함께. 방어막은 새하얀 파편이 되어 부질없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이제 나와 그녀 사이에 감정적 거리에도, 물리적 거리에도 가로막는 것 따위 없어졌기에. 그대로. 검을 잡지 않은 손을 들어 그녀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리셰의 안면을 강타해, 그대로 쓰러트린 뒤. 추하게도 성대하게 넘어진 그녀의 긴 금색 머리칼을 잡아채어, 억지로 일으킨 후.


고작 조금 더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코피 흘러내리는 추한 몰골을 하면서도 발버둥치는 그녀의 얼굴을.


"이, 이거 놓으세요···! 놔 줘···!"

"똑똑히 봐둬, 리셰."

"아··· 아, 그만. 리오바스 님, 제발 그만···"

"이제. 너도 나와 같은 배를 탄 거다?"


이제 곧 내가 전부 죽여버릴. 군중들을 향해 억지로 돌린다. 지금껏 등을 돌린 채 도덕적 우월감을 내세운 그녀를, 타인의 비난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보지 못하지만. 군중에게 자신의 추한 몰골을 내보인 그녀의 감정을 읽어내지는 못하겠지만.


다만 그러한 내 행동은 다시금 기폭제가 되어, 너 나 할 것 없이 위대하신 성녀님을 구하기 위해. 하나같이 살의를 품은 채, 나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기 시작했고.


"큭, 성녀님을 구해라!!"

"거짓된 용사님을 처단하라!!"

"죽여!! 죽여버려!!"

"다들, 다들 멈춰주세요! 다들-"


그녀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조차. 위선을 유지하려 외치는 최후의 발악조차.


그러한 성난 군중의 웅성거림에, 방어막의 파편처럼 산산히 묻혀 사라질 뿐이다.


그래.


"있잖아, 리셰."


역시 나는 틀리지 않았어.


그렇지?


"이제 너도 나처럼. '아무도' 구하지 못한 '악인'인 거다?"


얻고 싶지 않았던 확신을 가슴에 새기며.


나는, 검을 고쳐쥐었다.













"으흠~"


격한 운동을 하고 나면, 몸이 뻐근하다. 목을 좌우로 비틀어 풀어주고, 뭉친 어깨 근육을 오른손으로 꾹꾹 눌러준다.


칼을 열심히 휘두르느라 고생한 오른 팔목도 잘 돌려주고, 그 격한 저항에도 모두를 죽일 때까지 무사히 사람 하나를 옮겨가야만 했던 왼 팔목도 잘 돌려주고.


끝에 가서 나온 도망치는 사람을 쫓아 죽이기 위해 열심히 일해준 무릎도 꾹꾹 눌러주고.


통나무집 지은지 얼마나 됐다고 이래저리 뛰어다녀 충분히 놀랐을 허벅지랑 종아리도 눌러주고.


온 몸의 근육과 뼈에서 뚜둑 소리가 두어번 나고 나니, 좀 시원하구만. 이제 좀 살 것 같은 기분이다.


아니. '좀' 살 것 같은 기분이 아니다. 난 지금, '상당히' 상쾌하다.


수백년간 응어리진 감정을, 옳지 못한 방법이라도. 어떻게든 풀어버린 것 같아, 폐로 들어오는 모든 공기마저 시원할 지경이다.


그래. 카펫 정도야 다음 세계에서 만들어도 되는 것 아닌가. 꿀빵이라는 목적 하나 정도는 달성했으니, 더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그 가게 주인도 죽었을 테고.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가장 마지막에 복부에 칼을 찔러넣은 리셰의 시체를 짓밟고 넘어가. 그 뒤로도 쭉 이어진 놈들의 시체를 짓밟고 넘어가.


이 탐욕스러운 파리떼 꼬여 살아있을 때만큼이나 꼴불견이 될 시체의 길을 벗어나, 나는 황궁과 통나무집으로 갈리는 갈림길 앞에 섰다.


그러면 이제 어디로 가나. 다시 그 통나무 집으로 돌아가, 소소한 생을 즐길까? 낚시를 하고, 수확을 하고, 요리를 하며. 사람을 마주하지 않는 삶을 즐겨볼까?


어차피 세계가 윤회하려면 짧게는 1달, 많게는 3달이란 시간을 기다려야 하니까. 물론 마왕을 잡으면 저절로 윤회하는 것을 알아내긴 했다지만.


지금의 나는 자의로 마왕을 잡아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거슬리는 것들을 전부 죽인 뒤의 짧은 평화와 행복을 만끽하고 싶었기에.


어떻게든, 한달이라도. 사람 사이에서 부대낄 일 없는 평화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었기에. 그러한 삶을 살아본 것은, 내가 '용사' 자격을 얻기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에.


그러나 평화나 행복은 내가 원하다고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어떻게든 손을 쓰고 수를 써, 쟁취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아르윈도 그렇고. 결국 날 어떻게든 귀찮게 하려는 놈들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차피 몰려와서 나를 비난하고 조롱할 것이었기에.


그래.


쇠뿔도 단김에 빼버려야지.


나는 왼쪽으로 걸음을 돌려, 황궁으로 향했다.


내 거취를 알고 귀찮게 굴 놈들이 몰려있는, 놈들을 처리하고 찰나의 평화와 행복을 만끽하기 위해. 황궁으로 향했다.








나는 처음 저 거대한 황궁에 발을 들일 때를 기억한다. 우뚝 솟은 첨탑의 자태에 기가 눌려, 거대한 문이 열리는 소리에 움츠러들어.


어서 들어오라는 듯 활짝 열려 보이는 황궁의 안뜰이 날 잡아먹으려는 용의 입처럼 보였기에. 슬쩍 뒤돌아, 빼려고 하던 내 어깨에 손을 살짝 올리고.


내가 그녀를 돌아보자, 내게 다정히 눈을 맞추곤. 내게 믿음직스러운 뒷모습을 보이며, 황실의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당신은 제 동료입니다. 겁먹을 필요 없으니, 걱정 마시고 따라오시길."


앞장서 걸어가는 그 모습 하나가. 그 말 한 마디가. 얼마나 든든했는지 넌 모르겠지.


내가 살던 시골을 벗어나, 거기서 접한 모든 것이 새로워 연신 감탄하며. 그러나 그렇기에 우물쭈물하고 있던 내게 눈웃음을 징어보이며.


"우와··· 정말 멋져요!"

"앞으로 자주 보시게 될 겁니다. 그게 꽤 마음에 들어보이시는데. 뭐하다면 드립니까?"

"으아아니요···"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그 실없는 농담 한마디가. 얼마나 든든했는지 넌 모르겠지.


내 용사 즉위식이 아무런 호응조차 얻지 못하고. 특권을 빼앗기고 영역을 침범당한 귀족들의 험담과 비난 속, 침묵으로 마무리되었을 때.


"역시. 저 따위가 여기서 들어와선 안됐나봐요. 용사라고는 하지만, 전 고작 평민이고···"

"평민이기 이전에 용사이고, 용사이기 이전에 동료입니다. 저들의 시선 따윈 신경쓰지 마시길."


자책하는 내 손을 잡아끌며, 내게로 쏟아지는 악의가 가소롭다는 듯. 나 대신 시선 하나로 그들 모두를 압도해, 침묵시켜버리곤.


그 딱딱해보이는 말투에 숨어있는 따듯함을 알았기에. 구석진 복도로 나온 뒤, 황녀인 그녀가 내게 무릎까지 꿇곤 사과했을 때.


"모든 일이 끝나면, 용사의 신분이 아닌. 세계를 구한 '동료'이자 '친우'의 신분으로 초대할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시길."


내게 손을 내밀고. 내가 그 손을 잡자, 숨은 따듯함을 완전한 미소로 내보이며.


"그때가 되면. 모두가 당신을 칭송할 터이니. 아니, 그렇게 만들 터이니. 용사님."


그 보라색 눈동자를 희망으로 빛내며. 미래를 향한 태양빛으로 빛내며. 어리숙하고 미숙했던 내 모습을, 한없이. 담으며. 말했을 때.


"그러니. 함께 나아가주시겠습니까."


얼마나 든든했는지 넌 모르겠지.


너는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맨 처음의 세계에서 들었던 그 모든 말들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넌 모르겠지.









인간은 기억의 동물이라고 했다. 비록 방금 전에 마을의 모두를 몰살시키고 올라왔음에도, 이젠 돌이킬 수 없는 행위를 저질렀음에도.


'첫날의 황궁'을 보고 부질없는 추억에 잠긴 내 꼴은 우습기 그지없었다. 나는 지금 꽤 꼴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겠지.


그때도 아마, 이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리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에리스가. 그때처럼 나를 위로해주지 않을까. 앞장서 걸어가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감히 여기에. 어느 안전이라고."


그럴 리가 없지, 당연하게도.


에듯 서늘한 목소리로, 왕궁의 문을 열고. 안뜰을 지나쳐, 본궁으로 들어간 내게 엄숙하게. 그러나 확실히 악의를 던지는 에리스의 목소리에.


내 잘못을 통감하며. 얼굴을 쓸어내리며, 표정을 지운다. 기대, 안 한다고 했잖아. 기대를 해선 어쩌자는 건데.


지금 내 앞에 있는 것들은 더이상 내 동료 따위가 아니란 걸 나도 알잖아. 저들은 '용사'의 동료지. '리오바스 벨라이즈'의 동료가 아니라는 걸 알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여긴 당신 따위가 디딜 공간 따위 없습니다."

"언제는 동료이자 친우의 신분으로 초대하겠다더니."


팔짱을 끼고, 그녀가 날 위해 무엇을 준비했나 싶어. 가만히 에리스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이 넓디넓은 본궁 내부에, 홀로 남아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황제가 병상에 누워 주인없는 황좌의 앞으로 걸어가. 황제의 적자만이 쓸 수 있는 '선라이즈의 대검'의 칼날을 땅에 내려찍었고.


그 소리를 필두로, 비어있던 본궁의 공간 하나하나에. 새하얀 빛줄기가 내리쬐기 시작하고. 눈이 부셔 살짝 눈을 감았다 뜨니.


빛줄기가 내리쬔 자리에. 은빛 갑주를 온몸에 두른. 방패와 새하얀 장검 든 '황실 기사단' 수십. 아니, 수백이 소환되어.


에리스를 보호하듯 둘러싸며, 반대로 나를 적대하듯 포위하며.


이 본궁의 내부를, 가득 채운다.


"그건 그 세계의 저이지. 이 세계의 제가 아닙니다."

"아르윈과 똑같은 말을 하네."


역시 황궁에 온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가만히 있었으면 저 소환식을 내 통나무집 앞에서 시전했을 것이 아닌가?


밀밭 감자밭 숲 강 다 작살나는 꼬라지 생각하니. 그나마 다행이군.


"귀족이고 왕족이고 좆같은 건 똑같구만."


올라오는 길에 묻은 핏자국을 털어내어, 다시금 새하얀 빛을 내는 용사의 검을 검집에서 뽑아들곤. 그들에게. 정확히는, 에리스를 향해 겨눈다.


그리고 그에. 에리스는 마찬가지로 노을빛 신성력을 몸에 둘러가며. '황녀'의 위엄을 담아, 내게로 외친다.


"그래서, 거짓된 용사. 리오바스 벨라이즈. 굳이 신성한 황궁에 발을 들인 이유는."

"네 말대로, 익숙한 장소라서. 마음의 안식을 얻으려고 온 건데, 문제라도?"


그러나 당연하게도. 마왕군에도 주눅들지 않았던 내가 이에 주눅들겠는가? 에리스는 내게 무슨 반응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검을 거두고. 저 멀리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그녀의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잔뜩 대비를 시켜놓은 걸 보니까. 알고 있는 모양인데. 괜히 왜 묻는 거야?"


무엇보다. 황궁에 들인 이유라니. 네놈들 전원의 살해 말고는 뭐가 있겠는가? 너희도 알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 잘못된 질문인데 제대로 된 답을 해줄 수가 있겠는가?


"날 막아도 세계는 윤회를 멈추지 않아. 그건 알지?"

"그렇다한들, 무고한 이들을 더 죽게 놔둘 순 없습니다."


어디까지 알고 있나 살짝 그녀를 떠보았고. 그녀는 대부분의 정보를 파악한 모양이었기에. 서로 나누는 대화는 명분을 얻기 위한 감정싸움에 불과한 것을 깨달았기에.


"당신과 같은 행보를 밟진 않겠습니다. 그것이 선라이즈의 사명-"

"아. 그래. 그래보시던가."


더이상의 말다툼은 무익하였고. 평행선을 달리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은 하루 빨리 평화로운 삶을 보내고 싶은 나에겐 내키는 상황은 아니었다.


때문에 나는 손을 휘적여 에리스의 말을 끊곤. 자세를 정돈한 뒤. 천번에 가까운 루프동안 갈고닦은, '응축된 마나'를 검에 담았고.


"안되겠지만."


대화의 종언을 고한 나의 그 도발을 필두로. 에리스 역시 다시금 대검을 땅바닥에 내려찍고는, 기사단을 고취시키려는 듯 본궁 내부가 떠나가라 선언하며.


"나, 에리스 '선라이즈' 울셰인의 이름으로 선언하노니! 선라이즈의 칼날은! 절대 꺾이지 않으리라!!"


그녀를 둘러싼 기사단을 헤치고 나와, 최전열에 선다. 그리곤, 나의 도발에 맞받아치듯. 다시금 외쳤고.


"전군! 전투 준비!"


그를 신호로 철컥거리는, 금속의 마찰음을 내며 일사불란하게 방패를 내밀고, 검날을 내게로 향해 올리는 전원의 기사단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그러한 장관을 가관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하는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는 것보단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었기에.


그대로 마나 담긴 검을 휘두르며, 저 사이로 내 몸을 쏘아내어 파고들려 했으나.


쾅, 하는 문 부수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 위로 기습적으로 드리우는 그림자에, 몸을 다급히 뒤로 날려 회피하곤, 그림자가 착지한 부분을 눈에 담는다.


거기에 내리꽂힌 것은, 마법으로 강화된 주먹. 정확히는, '달의 마나'가 깃든 주먹. 마법으로 보호되던 황궁 내부의 바닥을 깔끔하게 뚫어버린 주먹의 주인을 난 당연히 알고 있었기에.


"달의 마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만 쓴다니, 뭐니 지껄여놓고."

"이 행위도 사람을 구하는 것이지 않겠니."


숙였던 자세를 펴고 일어나, 주먹에 묻은 돌조각을 털어내는 달의 마법사. 이 자리에 없을 리가 없는 마지막 영웅 루네라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래서 수많은 세계에서 날 죽였냐?"

"악마에게 더 할 말 따윈 없단다."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을 인지하고. 단순한 도발만을 남긴 이후에 다시금 전투 자세를 취했고.


루네라 역시 내겐 시선 하나 보내지 않으며, 에리스와 간단한 눈빛 교환만을 한 후 다시금 주먹에 달빛 마나를 두른다.


"에리스. 준비는 끝났단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필두로. 푸르고 새하얀 달의 마나와, 새빨간 주홍빛 태양의 선언이 본궁 내부를 휘감으며.


그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하늘이, 달과 태양의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들이 만든 조화가.


기사단 전원을 감싸고. 에리스와 루네라를 감싸고, 그들의 의지를 감싼 뒤. 그 감싼 것은, 최종적으로 내게로 돌격하는 형태를 취하곤.


최후의, 최후엔.


나를 집어삼키기 위하여. 정면으로 덮쳐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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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91 - 아르윈 로드스터 24.04.25 5 0 18쪽
7 990 - 세계의 윤회. 24.04.24 11 0 15쪽
6 990 - 루네라 모노리스 24.04.24 9 0 15쪽
» 990 - 에리스 선라이즈 울셰인 24.04.24 9 0 21쪽
4 990 - 리셰 일라이오스 24.04.24 8 0 16쪽
3 990 - 카르네 에스트라 24.04.24 7 0 20쪽
2 990 - 아르윈 로드스터 24.04.24 10 0 15쪽
1 용사로서의 마지막. 24.04.24 16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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