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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류 님의 서재입니다.

용사. 때려치겠습니다.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레트류
작품등록일 :
2024.04.24 00:31
최근연재일 :
2024.04.27 00:00
연재수 :
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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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7,229

작성
24.04.24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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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용사로서의 마지막.

DUMMY

붉은 태양이, 푸르른 산등을 넘어 그 고개를 내민다. 세계에 드리웠던 어둠이 걷히고, 황금빛 밀밭이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기지개를 켜 고개를 든다.


풍경에 들어낸 머그잔에 찰랑거리는 커피의 물결이. 마치 썩어버린 핏물 같아서. 한모금만을 마시고, 바닥에 부어버린다.


애써 만든 카펫이, 갈색으로 물든다. 마법으로 열심히 바른 튤립 내음이 커피 향에 섞여 형언할 수 없는 것으로 변해간다.


그러나 상관없다.


어차피 다음 세계에선 처음부터 만들어야 할 테니.


그래도. 순간의 유흥으로는 적절했다. 이번 세계에서 가장 애정을 쏟을 수 있었으니.


"읏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용사의 보검을 들었다. 용사의 갑주를 둘렀다.





세계의 톱니바퀴는 얼마나 돌아갔을까.


수 번? 수십 번? 수백 번?


좋은 점이 있기야 했다. 세계가 끝날 때 쯤이면 남아나지 않았던 숲의 사냥감들이, 세계가. 다시금 본래의 빛을 되찾고, 아침을 맞는다. 마치 지금처럼.


하루 정도는 새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하루 정도는 아무에게도 평화를 방해받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그 뒤는 동일하다.


실패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고. 어떠한 행동을 해도 세계를 되돌리는 것을 막지 못한다.


세상은 내가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을 용납치 않았고.


또한 내가 행복한 결말을 맞게끔 하는 것을 용납치 않았다.


나는 괴로웠다. 나의 무력함에 쓰러져가는 사람이. 내게 그러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살아남았음에도 본인만이 살아남았다고 괴로워하며 나를 원망하던 사람이.


그 모든 사람이. 나 때문에 망가졌다는 사실에. 버틸 수가 없었기에.


그래서 나는 죽음을 넘었다.


나는 죄책이라는 개념을 넘기로 했다.


죽음을 넘는 것은 처음이 힘들 뿐, 그 이후로는 너무나도 쉬워서. 웃음이 나는 것이었다.


그냥. 눈을 돌리면 될 뿐이었으니까. 나로 돌렸던 마음의 짐을, 떠넘기면 될 뿐이었으니까.


모든 것이 그랬다. 불타는 마을, 고통으로 물든 비명을 무시하는 것. 내가 구하지 못한 사람들을 즈려밟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다음에 보자고."


나는 다 죽어가는 마을 사람 하나의 목을 베곤.


불타 사라지는 마을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마왕이 점령한 황궁으로 향했다.





용사를 보조하는 다섯 영웅이 있다.


불세출의 검성. 시대의 성녀. 달이 깃든 마법사. 태양이 깃든 황녀. 암약의 암살자.


이들은 공통적으로 시대를 뛰어넘은 재능이 존재하지만.


예언서에 따르면. 나라는 '용사'가 존재하지 않으면, 마왕을 저지한다는 본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스러져갈 존재.


단순히 안위인지. 아니면 사명인지는 이제 와서 상관 없었지만. 그들은 나를 전폭적으로 보좌했었다. 나는 그들의 보좌에, 언제나 감사해했었다.


때로는. 한 번의 실패를 더 쌓았음에도 불과하고 일방적인 연정을 품기도 했었고.


때로는. 한 번의 실패를 더 쌓았음에도 불과하고 더 나은 미래를 보자며 함께 울기도 했었고.


때로는. 한 번의 실패를 더 쌓았음에도 어떻게든 아침을 오게 할 거라며. 약속을 한 적도 있었다.


부질없었다.


가식이었는지, 진심이었는지는 모르고. 앞으로 알아갈 생각도 없지만.


애초에 내 무능이. 그 수백번의 루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완벽히 구해내는 데에 성공하지 못한 내 무능이 탓이었기에.


그들을 원망하는 것을 정당화하진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들의 그 말 한 마디가.


"아무도 구하지 못하는 네놈의 검 따위가. 진정 용사의 검인가? 너 따위가 용사라니."


580번째 세계에서.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지키지 못한 내 목을 베고. 내 머리를 밟아 터트리며 질책하는 검성의 말이.


"당신에게는 헬리오스 님의 가호가 없는 모양이네요. 악행엔 약도 없다는 건가···"


612번째 세계에서. 타인을 자의로 희생시켰음에도 마왕과의 일전에서 진 뒤 죽어가는 내 몸에서. 미약하게 남은 신성력을 짜내 비트는 성녀의 말이.


"실로 허망하구나. 네놈만 용사가 아니었어도. 나는. 이 세상은 더 행복했을 터인데···"


670번째 세계에서. 최후의 부활 의식에 실패해, 모두가 정화의 불길에 불타 죽어가는 세계에서. 허망하게 읊조리며 불길 속으로 뛰어든 마법사의 말이.


"이 제국은. 이 황궁은, 이 세상은. 네놈 때문에 파멸했습니다. 이건 전부··· 네놈 때문이야. 네놈 때문이라고!!!"


728번째 세계에서. 결국 단 둘만이 살아남아버린 세계에서. 그렇게 울부짖으며 자결해버리는 황녀의 말이.


"그만한 세계를 돌아놓고, 하는 짓은 고작 타인 등 뒤에 숨는 것 뿐이라니. 마왕보다 사람을 더 죽인 악당은, 당신이 아닐까."


836번째 세계에서. 마왕을 처치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내 목에 독침을 꽂아넣은 뒤 조소하는 암살자의 말이.


뼈에. 사무친다는 말은. 부정할 수 없었기에.


"그래. 너희 말이 다 맞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무능하고 사악하다는 그들의 이미지를 바꿀 생각을 버렸다.





암약의 암살자는, 마왕을 직접 암살하려다가. 침입 단계부터 발각되어, 모든 정보를 뽑힌 뒤 사지가 잘려 묶이곤.


세상에서 가장 환히 타오르는 모닥불의 한가운데에서. 불타 죽어가고 있었다.


"흐아아아아아악!! 뜨거워, 뜨거워!!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나는 그녀를 구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력하게 묶인 채, 불에 타 새까만 잿더미가 되게 방치했다.





태양이 깃든 황녀는, 황궁의 한가운데에서 백성과 귀족을 모두 격려하며 농성에 들어갔으나. 결국 본보기가 되어, 양 눈이 뽑힌 채.


그러나 살아남은 모든 이들의 희생으로 어찌 생명은 연명하여.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어둠을 맞으며, 피를 흘린 채 벽에 기대어 있었다.


"부디. 부디··· 다음 세계에서는. 우리를, 구해주십시오··· 리오바스 님··· 듣고, 계십니까···?"


나는 그녀를 구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나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다.





달이 깃든 마법사는, 마탑의 꼭대기에서 달빛의 마나를 모두 소진시켜. 생과 사를 뒤집는 '반전 마법'의 술식을 그려내기 일보 직전이었다.


온몸이 땀범벅이 된 채로. 자신의 생명을 태워. 완전히 녹초가 되어, 기진맥진해 마법진 위에 쓰러져 있었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정녕 실마리를 찾을 수 있어. 리오, 부탁이란다. 5분만. 딱 5분만 저들을 막아주렴."


나는 그녀를 구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서 살짝 떨어져, 성난 마왕군이 문을 부수고 침입해 그녀를 갈가리 찢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대의 성녀는, 산채로 마왕군에게 사로잡혀. 모든 신성력을 뽑히고, 마나를 추출당한 채. 그것도 모자라 십자가에 매달려, 고기방패가 된 채로.


마왕군이 자신의 신성력으로, 무고한 인물을 태워죽이는 모습을. 강제로 눈이 뜨인 채 목격하며. 피눈물을 흘리며, 억지로 살아있었다.


"주어우에오··· 주어우에오..."


나는 그녀를 구하지 않았다.


결국 마왕이 모두를 죽이고,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그녀가 발광사하는 모습을 지나쳤다.





불세출의 검성은, 황궁에서 떨어진. 전투와는 거리가 떨어진 무력한 이들을 구하기 위해 멀찍이 떨어진 마을 속에서 홀로 마왕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곳에 전투의 의지가 있는 것은 그녀 외엔 없었고.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왼팔이 잘려나갔어도 지혈할 새도 없이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리오바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그런 그녀는. 내 모습을 보고 전의를 잃은 채. 당혹감을 내비치며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건. 마왕이 직접 나선 황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결국 인류 최후의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뜻이기에.


그러나 패배한 내가 살아서 이곳에 왔다는 것은. 내가 마왕과 싸워 이기거나, 져서 죽는다는. 두 가지 사명 모두를 저버렸다는 뜻이었기에.


"큭. 네놈은. 네놈은 또 겁쟁이처럼 도망쳐 나왔나. 그런 거냐!!"


한 팔밖에 남지 않은. 그나마도 칼을 들고 있던 그 손으로 거칠게 내 멱살을 잡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거두지 않은 칼날이 내 얼굴을 베고 지나가 피를 배어나오게 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언제까지 사람들의 죽음을 보아야 만족할 거냐!! 얼마나 수많은 생명을 태워야 만족할 거냐!!"


그러한 원망 섞인 말은. 수많은 세계에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내게 쏟아내던 감정은 정당한 것이었다.


"너로 인하여 수백번의 세계가 윤회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져가는 세계 속에서 부질없이 눈을 감았다."


분노를 차마 이겨내지 못하고, 분함에.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원망에.


"네놈이 정말 용사라면. 리오바스. 네놈이 정말 용사라면."


나는 그 모든 말에 동의했다. 힘없이 칼을 떨구고, 무릎을 꿇으며. 나를 올려다보며, 울음지으며 건네는 말을 모두 이해했다.


"··· 부탁이다. 제발. 다음엔··· 우리를 구해다오···"


그러나. 나는.


그 말 한 마디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야.


"'성공한 세계'라 네겐 기억이 없겠지만, 아르윈."





나는 이미 세계를 구했으니까.


아무도 죽지 않는 세계에서. 나 혼자만의 힘으로. 마왕과 마왕군 전원의 목을 따는 데에 성공했으니까.


여전히 나에게 원망을 쏟아내는 영웅들의 눈이.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로 물드는 모습을 봤으니까.


나도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사명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자리에 펑펑 주저앉아 울었으니까.


그럼에도. 용사의 사명은 끝나지 않고.


다시. 이 저주받을 세계로 넘어오고야 말았으니까.





나는, 용사의 팔찌를 건드린다. 내게 용사의 힘을 불어넣은, 신과 직접적으로 통신할 수 있는 그 팔찌를 건드리자.


'시스템'이라고 칭해진. 반투명한 유리창이 떠오르고.


나는.


이 수백번의 루프간 생각으로만 남겨두었던 것을. 그제야.


행동으로 옮긴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을. 내가 처음 찬란한 빛을 손에 쥐고, 용사라는 자격을 얻었을 때엔 건드릴 생각조차 없었던.


'포기한다'라고 적힌 버튼을.


누른다.


"정말 용사의 권한을 포기하실 겁니까?"

"뭐?"


무미건조한 시스템의 목소리가. 나와, 아르윈과 나의 귀를 때린다.


아르윈은. '설마' 하는 마음에. 내게 되묻지만.


나는 이미 생각을 굳혔기에. 그 되물음에 난 굳이 답하지 않았다.


"거의, 거의 다 왔잖나. 리오바스!! 여기서, 여기서 정말 포기할 셈인가!?"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나는 답하지 않았다.


"너는. 그래, 너는!! 용사잖나!!"


그야.


이젠.


아닐 터이니까.





부질없이도.


내 몸을 태워가며. 원망을 참아가며, 마음의 마모를 견뎌가며.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세계에서, 안식을 취하리라 생각했음에도.


그저 거부할 수 없는 억겁의 수레바퀴에 빠졌을 뿐이라면.


남는 것은 후회와 회한, 돌아오는 것이 멸시와 분노 뿐이라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용사. 때려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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