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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류 님의 서재입니다.

용사. 때려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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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류
작품등록일 :
2024.04.24 00:31
최근연재일 :
2024.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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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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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1 - 아르윈 로드스터

DUMMY

거친 숨을 몰아내쉬며, 눈을 떴다. 용사의 권한을 처음 받아들였던. 어느날 나타난 용사의 팔찌를 호기심에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던 밭에서 일어났다.


모든 루프의 시작 장소인, 이 밭에서 눈을 뜬 것을 보아. 계절이 돌아온 것을 보아 '윤회'한 것을 유추할 수 있었으나.


혹시나 싶어.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현장이 환상인가를 확신할 수 없었기에. 오른팔을 들어, 팔목을 확인한다. 내가 용사임을 드러내던 팔찌를 찾는다.


새하얀 금속으로 만들어진, 내가 바라보는 손등 부분엔 팔목의 절반을 가리는 크기의 주홍석 보석이 달린. 보석을 누르면, 그 자태가 빛나며. 반투명한 창인 '시스템'을 띄우던.


단순히 내 강함의 척도를 숫자로 알려주거나, 내 조력자인 '영웅' 5명의 위치를 알려주거나. 이번 세계가 몇번째인지 알려줄 뿐인. 그런 소박하지만 확실히 내게 도움을 주던 마법을 띄우던.


그러나 문득 든 갑갑함에 벗어보려 해도. 심지어 전투 도중 팔목이 잘려나가도, 아무것도 없는 부위에 환상으로까지 남아 나를 속박해 떨쳐낼 수도 없었던. 그 저주받을 팔찌가 없다. 확실히, 없다.


그제야 안도감이 들어 다시금, 이 드넓은 감자밭에. 내가 용사가 아닌 '농민' 리오바스 벨라이즈로 지내던 시절. 먼저 떠난 부모님과 함께, 그러나 그 이후엔 홀로 땀을 흘렸던 부드러운 흙 위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라 함은 마음가짐과 복장 뿐. 후줄근한 농부복 대신, 지금 두르고 있는 것은 용사의 새하얀 갑주라는 것 뿐. 물론 흙이 푹신한 덕에 불편함은 없었다.


익숙한 흙내음이 느껴짐에. 다시금 잠자리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초가을의 풍경을 마주함에. 마왕을 죽이고 윤회를 두 눈으로 확인하기 직전까지 심란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고.


천천히 떠오르는 태양에게서 눈을 감고, 내가 저번 세계에서 보아왔던 풍경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


쾌감이었는지 모르겠다. 혹은 죄책감이었는지, 착잡함이었는지, 후련함이었는지. 나를 저주하고 내가 저주하던 이들을 내 손으로 죽여가던 그 광경을 만들어내며 느낀 감정이.


모든 것은 두루뭉실한 추측일 뿐. 이젠 그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없었기에. 항상 내가 윤회하면 돌아가는 날짜를 기점으로 '3달째'에 나타나던 마왕이 5달이 되는 시점까지 나타나지 않았기에. 이변을 겪었기에.


내가 나로써 있다고 확신하게끔 하는 것은 기억 뿐이고, 정보 뿐이다. 하지만 그 기억과 정보를 확신할 수 없다면 확신은 필요를 잃어버리고 만다.


이번은 이번 세계는 정말 991번째의 세계가 맞는가. 마왕과 마왕군을 피해 없이 물리친 세계는 카운트하지 않은 채 넘어온, 991번째의 세계가 맞는가.


내가 거쳐온 모든 것이 환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사실 첫번째 마왕 퇴치에서 죽었고. 정신만이 남아, 세계를 수없이 루프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에잇."


물론. 말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그녀들에게. 사람들에게 받았던 매도와 혐오가 사실은 피해망상에 찌든 내 착각이었다는 편리한 상황 따위 오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내가 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래주지 않으리란 것을 아니까. 세상이란 것은 절대 대신 그러한 것을 인정해주지 않으리란 것을 아니까.


그래서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곤. 몸 곳곳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낸 뒤. 다시금. 내가 봐두었던 그 장소에 통나무집을 세우기 위해. 푸르른 하늘 아래를 걷기 시작했다.


구름이 두둥실 흘러가고, 새들이 근심 없이 날아가는 것을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보다보니. 아까 불확실하던 감정 중 '후련함' 정도는 확신해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는 삶에 지쳐서, 저런 걸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덜 사람을 마주치고 덜 욕을 먹을지 고민했으니까.





나는 거기에, 내가 구상한 통나무집을 다시 지었다. 이번엔 조금 넓게 지었다. 의자 두 개와 부엌, 테이블과 옷장이 들어가도 내 몸 뉘일 공간 하나까진 나오게끔.


그리곤 나무를 깎고, 적당한 마법으로 실을 만들고. 도르래를 단 뒤 만든 낚시대를 들고. 양철 양동이에 미끼를 담아, 저번 세계에서 낚시를 즐겼던 강가로 향했다.


이번 세계에서는, 진득하게 낚시를 즐겨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많이, 즐기기로 했기 때문이다.


원래도 낚시는 조금 할 줄 아는 편이었다. 부모님과 살았던 터 주변에 꽤 넓은 호수가 있었기 때문에. 심심할 때면 부모님의 등 뒤를 따라가, 어수룩하게 물고기를 낚아올리는 모습을 관찰하였기에.


덕분에 본래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3달동안 간간히 낚시를 했더니, 과거와는 다르게 꽤 늘긴 늘었기에. 더이상 가르쳐주지 않아도 홀로 낚시찌를 드리우고 능숙하게 대를 당길 수 있었기에.


물론 산책을 빼놓을 생각은 없었지만, 나는 아직 낙엽 여물지 않은 언덕을 걷고 싶지는 않았다. 싫다기보다는, 낙엽 밟는 사박사박 소리 나지 않는 걸음은 어딘가 허전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강가로 향하던 도중 문득 떠오른 발상으론. 낚시로 세계를 구하거나, 농사로 세계를 구할 수 있었다면 나도 꽤 용사로써 내세울 점은 있었을 텐데.


그러면 나는 밀과 감자를 먹이며 싸우나? 물고기들과 함께 싸우나? 그런 재미있는 상상을 하며 도착한 뒤. 그대로 미끼를 걸고, 낚시찌를 강에 퐁당, 드리운다.





내가 그러한 일을 벌여도, 세계는 윤회한다. 용사의 권한은 넘어갔어도, 세상은 흘러가고.


그리고 거기서 한발짝 떨어진 채 즐기는 생은. 정말로, 평화롭다고. 생각했다.


평화의 맛이 이렇게 달았는가. 생각했다.













아르윈 로드스터가 예언서에 적힌 검성이라는 것이 드러나자. 현재 사안이 급하여 즉위식만 하지 않았을 뿐 전권을 가지고 있는 황녀에게 '수호자'라는 궁정 직책을 제안받았고.


'로드스터의 후계자'라고 불리던 그녀는. '검성'이라는 별칭에 전혀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기에. 예언을 사명으로 여기는, 정의롭고 올곧은 인물이었기에.


후작저의 모든 인물들에게 축복을 받으며. 박수갈채와 격려를 받으며. 그녀는 로드스터의 후작저를 벗어나, 궁정으로 향했다.


그것이 세계가 용사를 명하여 윤회의 품 속에 들어가기 전. '아르윈 로드스터'가 용사를 찾아가기 전. 고작 일주일 전의 이야기였다.


그런 그녀는. 지금 991번째의 세계에 진입하여. 목이 잘리는 죽음의 편린에서 겨우 깨어나. 황궁 내부에 마련된 숙소의 침대에 앉은 채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지금 그녀 자신의 머리를 덮친 두통도, 혹시나 그녀 자신이 죽었어도, 세계의 윤회가 끝나지 않을까 생각한 예측이 빗나갔음도 이래저래 신경쓰이는 아르윈이었지만.


그보다 신경쓰이는 건. 죽기 전, 그녀 자신의 목을 아무런 망설임없이 베기까지의 과정에서. 용사의 본분을 포기한 '가짜 용사' 리오바스가 한 말이었다.


"거짓말이잖아. 그 맹약."


분명 리오바스는 그렇게 말했다. 마왕과 싸우는 일에 흥미를 전혀 느끼지 않던, 뭐가 그렇게 허무한지 두 세계 내내 죽어버린 표정만을 짓고 있던 그가.


아무런 감정 담지 않았던 눈에, 맹렬한 눈빛을 담고. 생기가 없음에도 무척이나 맑아, 부정적인 감정이 담기리라 쉽사리 예측할 수 없는 사파이어와 같이, 새파란 눈에.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 지금의 자신은 물론 '지나온 세계 속 아르윈'도 마주하지 않았을 '살의'를 가득 담고.


"전부 알고 있어. 또 또 또 거짓말로 나를 부려먹고 버릴 생각이지."


그녀 자신의 진실된 호소를 변명 따위로 취급하듯, 살기어린 미소를 보이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마왕을 물리쳐야 하는 데에 써야 할 '용사의 검'을 아르윈에게 드러내보이며.


"아핫, 거짓말."


상쾌함마저 담긴 말로 그녀의 모든 말을 일축해버리곤. 단 한 칼에. 사선으로 검날을 그어, 목을 잘라버린. 어쩌면 오지 않을지 몰랐던 다음 세계로 의식을 넘겨버린다.


그런 '가짜 용사'에게. 가증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야만 했다. 지금껏 용사의 모든 책무는 포기해버린 뒤, 모두가 죽는 모습을 뒤에서 관망만 하는 모습에.


과거에 저지른 '무능'으로 잘 포장된 악행만을 저지르는 그의 모습에. 환멸과 혐오를 느껴야만 했고.


다시 기회를 얻은 이번 세계에서는, 어수룩한 변명 대신. 사태에 일침을 가하며, 진정 '로드스터의 홍염검'을 뽑아. 그의 악한 의지를 꺾건, 그녀 자신이 영예로운 죽음을 맞건.


둘 중 하나의 결과를 마주하기 위해. 그것이 '검성'이자 '로드스터의 후계자'된 자로써의 사명이었고. 그렇기에 그녀는, 그를 만나러 가야만 했다.





그런데.


그러한 증오는. 그 감정은.


법칙에 따른다면 절대로 '존재할 리 없는 기억'에, 덧씌워진다.





"아, 아르윈 님! 가, 같이 갔으면 좋겠- 으앗! 으으으···"


언제, 어디서 봤는지 모르는. 몸과 차림새는 똑같으나, 지금과는 분위기가 다른.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라 착각할 정도로 모든 것이 다른.


어둡게 가라앉은,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듯한 칙칙한 분위기가 아닌. 회색조로만 느껴지는 앞머리 사이로 스쳐가는 눈동자 사이에 아무런 빛조차 존재하지 않는 모습이 아닌.


밝게 빛나는, 찬란한 풋풋함을 한없이 드러내보인 채. 그 보석같은 눈에 별과 같은 빛을 띄운 채, 아이같은 천진함을 띄며. 새하얀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어리숙하게 그녀에게로 달려오다, 성대하게 넘어져.


부딪힌 부위를 문지르며, 아픈 듯 울먹이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는. '악한' 모습이 아닌, '약한' 모습에.


"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대련을 하던 도중, 완벽히 패배하여. 놓친 목검을 저 멀리로 날려버리고, 그녀에게 맞은 부위를 문지르는. 꽤 아팠는지, 눈가엔 눈물까지 맺힌.


그러나 그 나약한 모습도 잠시. 팔로 슥슥 눈가를 닦아내곤, 제 양 뺨을 챡챡 친 뒤. 저 멀리 날아간 목검 쪽으로 달려가, 양 손으로 손잡이를 다시 꽉 잡으며.


봐주지 말라는 듯, 더 강해지고 싶다는 듯. 씩 웃는 그 얼굴에 한없이 굳은 의지를 피워올리는. '무능한' 모습이 아닌, '노력하는' 모습에.


"후작님. 미안해요, 나약해서 죄송해요··· 다음. 다음 세계에선, 꼭. 당신을. 아니, 모두를···"


마왕군과 마왕의 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모두가 같이. 용사도 영웅도 가리지 않고, 비와 눈 섞여 내리는 초겨울의 밤하늘 아래에 죽어갈 때에.


울먹이며, 그러나 결코 울음을 터트리진 않으며. 빗물에 씻겨내려가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바닥에 누워 죽어가는 아르윈에게, 눈과 비로 적셔진 진창을 뚫고, 처절히 기어와.


식어가는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그 역시 자신과 같이 패배해 죽어가는 처지였음에도. '방관하는' 모습이 아닌 떠나가는 따스함을 어떻게든 나누려는 '가슴아픈' 모습에.


그렇게. 그렇게, 덧씌워진다. 덧씌워진 기억은, 감정에. 의문을 남긴다.





'맹약'엔 거짓이 없었어야 했다. 아르윈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예외를 두지 않았다. 섣불리 맹약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것은 '로드스터'의 명예이기도 하였고, '아르윈' 자신의 명예이기도 하였다. 그것이 그녀가 섣불리 황녀의 앞에서도, 그 어떤 동료의 앞에서도 맹약을 입에 담지 않는 이유였다.


하물며 그것이 저리 '떨어진' 용사라면. 새하얀 갑주와 검, 용사 자신의 색과는 다르게. 그저 새까매진 기억만이 남아버린.


무고한 이들을 성공이라는 명분으로 희생시키고, 그 희생을 무능이라는 핑계 뒤에 숨기고. 끝에 가서는 아예 사명을 포기해버린 용사의 앞에서 거론하리라 전혀 생각치도 않았지만.


"영원토록 타오르는 로드스터의 불꽃에 맹세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리오바스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억 속에서 꺼내는 듯한 그 말을. '로드스터의 맹약'을 중얼거린다.


리오바스의 입에서 나오던. 맹약에 담아야 할 존경 따위의 감정이 아닌, 원망과 증오를 씹어 뱉듯 쏟아내던. 그 맹약의 문장을 중얼거린다.


"나, 검성. 아르윈 로드스터는. 심장을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의 곁에 있겠노라···"


그 눈은 거짓을 고하는 눈은 아니었다. 아르윈은 '검성'이 되기 이전부터, 정략 등의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하였었고.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입에 발린 단어를 튀기는 침과 함께 추악하게 뱉어대는 사람 역시 숱하게 마주하였었다. 때문에, 그녀는 거짓과 진실을 어느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고 자부하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는, 리오바스가 자신과 나눈 대화에서 뱉어낸 단어는. '거짓'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진실'에서 우러나왔다고 판단하였다.


그 눈은. 그들과 같이, 이득을 위해 거짓을 고하는 눈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척이나 진실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 진실이었다. 격한 감정을 털어낼 수밖에 없는, 폭력적인 진심이었다.


거기서 마주한 모든 것이. 이유였다.


"거짓말···이라고."


아르윈은 나즈막히 중얼거리며, 마른 세수를 한다. 얼굴을 양 손으로 문지른다.


그 대화에서 누구 하나는 거짓을 고하고 있었으리라. 둘 모두가 진실일 수는 없었으니까. 그것은 모순이었고, 용사도 그녀 자신도 그런 흐리멍텅한 결과가 아닐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그야 당연히, 용사가. 리오바스가. 거슬리는 아르윈을 죽여버릴 명분을 얻기 위해 고했다고 취급하면 될 일이었다.


거짓과 진실을 '어느 정도만' 구분할 줄 아는 아르윈의 안목이 틀렸다고. 이를 바탕삼아, 다시금 구분하는 경험을 쌓으면 된다고. 그렇게 결론지으면 될 일이었지만.


하지만.


해맑게 웃으며, 슬피 울며, 자신에게 다가오던 용사. 아니, '리오바스 벨라이즈'의 모습을. '어느 세계'의 기억인지도 모를 것을 지워낼 수 없던 아르윈은.


"··· 젠장."


나지막히 욕설을 내뱉은 뒤. 손을 내리곤 일어나. 있어야 할 곳에서의 안정을 얻으려는 듯. 홍염검의 손잡이를 한참을 만지작거리다.


"역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봐야겠군."


무언가의 각오를 마치곤. 눈빛을 바꾼 뒤. 간단히 몸단장을 하곤, 로드스터의 홍염검을 찬 뒤. 방의 문을 열었다.





"혼자 또 어딜 가려는 겁니까."


카르네가. 검만을 챙기고 숙소에서 나가는 아르윈의 뒷편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로. 위협하듯 목소리를 낮게 깔아 묻었고.


예측하지 못하여, 우뚝 멈춰섰지만. 미지에 대한 공포나 놀람 등. 감정은 전혀 드러내지 않으며. 아르윈은 뒤돌아보지 않고 담담히 답한다.


"이야기다."

"이야기가 가능한 상태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녀의 짧은 말엔 이야기의 주체가 누군지 담겨있지 않았지만, 카르네는 그것을 이미 리오바스로 단정지은 상태였고.


그 단정은 틀림이 없었다. 또한, 아르윈은 문을 닫은 뒤. 뒤돌아보아, 문 뒤에 숨었던 카르네의 새하얀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할 뿐. 부정하지 않았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

"당신만 모르는 겁니다, 아르윈 씨. 똑같이 목이 잘려 죽을 걸 왜 모릅니까?"


아르윈은 짧게 일축하며 카르네의 성가신 방해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한심하다는 듯 한숨까지 섞어가며, 카르네가 고하는 '사실'에. 아르윈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뭐라?"

"대책 회의입니다. 조금 진정하시고 참석하시길."


그러나 카르네는 본론은 다 말했다는 듯 아르윈의 되물음엔 대답하지 않고. 복도의 난간을 뛰어내려 그대로 숙소의 바깥으로 향한다.


그러한 그녀의 뒷모습을 쫓아 무례를 추궁할까도 생각한 아르윈이었지만. 어깨에 손을 얹고, 카르네의 행보에 대해서도 꼬치꼬치 캐물을까 생각한 아르윈이었지만.


복도에 잠시 홀로 남아 생각을 정리하다보면 카르네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금새 알아챌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고.


시간을 약으로써, 그저 팔짱을 끼곤 복도 벽에 기댈 뿐이었다. 두통을 가라앉히기 위한 찰나의 침묵을 느낄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아르윈은 지금,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만한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맹약과 자신의 죽음, 존재할 리 없는 기억과 감정의 소용돌이에 완전히 매몰되어 어떤 말을 할지 정리조차 못한 그녀가 지금 상태로 찾아간다 한들, 똑같이 자극하고 말 것이었고.


검을 맞대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똑같이 목이 잘리는 결말을 맞이해버릴 수도 있었고. 한 세계의 기억을 허무하게 날려버릴 수도 있었기에.


아르윈은 잠시 감정과 계획을 억누르기로 했다. 다섯 영웅만이 모이는, 매 세계의 윤회 직후 열리는 '대책 회의'에서. 알지 못하는 기억이 새어들어온 현상에 대해 공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하면 그 중 누군가는 이 현상에 대해 명쾌히 답해주어, 아르윈의 머릿속에 잔뜩 낀 잡념의 안개를 걷어낼 수도 있었기에.


거기까지 미친 생각에, 아르윈 더 시간을 끄는 대신 그러한 희박한 희망을 바라며 벽에서 등을 떼곤, 천천히 숙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젠장."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박한' 희망에 불과하다.


걸을 때마다. 자신의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해맑게 웃거나 슬피 우는 리오바스의 모습이. 존재할 리 없는 모습이 자꾸 스쳐갈 뿐이었고.


아르윈은 아직 멎지 않은 두통을 진정시키려는 듯. 혹은 있을 리 없었던 광경을 지워내려는 듯.


연신, 홍염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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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991 - 방문 24.04.27 2 0 17쪽
9 991 - 대책 회의 24.04.26 3 0 21쪽
» 991 - 아르윈 로드스터 24.04.25 6 0 18쪽
7 990 - 세계의 윤회. 24.04.24 12 0 15쪽
6 990 - 루네라 모노리스 24.04.24 9 0 15쪽
5 990 - 에리스 선라이즈 울셰인 24.04.24 9 0 21쪽
4 990 - 리셰 일라이오스 24.04.24 8 0 16쪽
3 990 - 카르네 에스트라 24.04.24 8 0 20쪽
2 990 - 아르윈 로드스터 24.04.24 11 0 15쪽
1 용사로서의 마지막. 24.04.24 18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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