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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백현의 서재입니다

8클래스 흑마도사의 귀환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윤백현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4
최근연재일 :
2023.05.24 10:00
연재수 :
17 회
조회수 :
6,144
추천수 :
104
글자수 :
93,280

작성
23.05.1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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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2쪽

제10장

DUMMY

“그럼 이만.”

고개 숙여 막내 공자에게 인사하고 레미가 방을 나왔다.

방을 나온 뒤에도 레미는 닫힌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막내 공자가 말레브를 주먹으로 제압했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 위험한 상황에서.

곤죽이 되었어야 할 사람은 누가 봐도 막내 공자였다.

바위와 달걀이 부딪치면 달걀이 깨지는 게 옳지 않은가.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막내 공자가 말레브를 흠씬 두들겨 팼다.

심지어 어설프게 제압한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권을 쥔 막내 공자였다. 어쩌면 그것은 싸움이 아니라 사냥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었다.

‘앞으로 놀랄 일이 더 남은 걸까?’

레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1층 홀로 내려갔다.

때마침 동료 하인 갈로가 맞은편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레미, 괜찮아?”

레미를 발견한 갈로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걱정하는 말투를 보아하니 그녀의 사정을 누군가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망나니 4공자한테 찍혔다고 하던데. 험한 꼴은 안 당했어?”

“응. 괜찮아.”

“힘들면 힘들다고 이야기해. 괜히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정말 괜찮아서 그래.”

레미의 대답을 갈로는 못 믿는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몇 개월 전, 4공자가 눈독 들인 하인이 돌연 가문을 떠나는 사고가 있었다.

눈치 빠른 하인들이 그 뒷배경을 모를 리 없었다.

다 알면서도 모른 척.

다 보고서도 모른 척.

그것이 약자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막내 공자님이 4공자님을 혼내 줬어’라고 말하려다가 레미는 그만두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말을 해선 안 될 것 같았다.

“막상 만나보니까 내가 4공자 취향이 아니었나 보지.”

“으음.... 그런가?”

“우리 오전 스케줄은 어떻게 돼?”

“내일 사피엔님이 오신대. 본가 청소 일이 갑자기 잡혔어.”

본가라는 단어에 레미가 흠칫 몸을 떨었다.

두려운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집사님께 너 아프다고 빼달라고 할까? 아직 본가로 가기에는 좀 그렇잖아?”

“아냐, 갈게. 죄지은 것도 아닌데.”

레미가 휘휘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청소 업무가 잡혔다고 했기에 레미는 갈로와 함께 별채를 나왔다.

걷던 중 작아지는 별채를 힐끔 돌아보았다.

텅 빈 별채에서 막내 공자는 무얼하며 시간을 보낼까.


***


레미가 떠난 후.

크로닌은 방 안에서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타다닥. 타다닥.

발재간이 경쾌하고 빨랐다.

적당히 굽힌 상체가 상하좌우로 현란하게 움직였다. 이따금 체중이 실린 주먹과 발차기가 허공을 때렸다.

“휴. 아직 멀었네.”

크로닌이 그 자리에서 서서 숨을 골랐다.

방금 펼친 것은 발자크 가문의 호신술이었다.

크로닌이 입센으로 살던 시절 익혔던 것으로 이 호신술을 통해 말레브를 묵사발로 만들어줄 수 있었다.

검술 명가까지는 아니지만.

발자크 가문은 검술과 호신술에 능했다.

운동 연습을 마치고 크로닌은 책상에 앉았다. 깃털 펜에 잉크를 찍고 누런 파피루스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뭐가 마음에 안 들었을까.

다섯 줄 정도를 적고서 크로닌은 종이를 구겨 휴지통에 버렸다.

같은 일이 수차례 반복되었다.

쓰고. 검열하고. 구기고.

쓰고. 검열하고. 구기고.

대문호의 길을 포기하고 복수귀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일까.

문장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문장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너무 노골적이고 뜨거웠다.

흔해 빠진 사랑 묘사로 도배된 통속 소설 같았다.

크로닌은 한숨을 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가만히 천장을 올려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의 인생을 뒤바뀌었던 시발점이 문득 떠올랐다.

시발점.

이보다 더 인생의 진리를 잘 표현하는 단어가 있을까.

무릇 한 인간의 삶이란 ‘시발 소리’가 튀어나오면서부터 바뀌기 시작하는 법이니까.

시발점이 떠올랐으므로.

크로닌은 시발 소리가 나왔던 그때 그 시절로 강제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

12살이 되었던 봄의 일이었다.

하늘이 너무 맑다고.

호수 같다고.

그래서 하늘에 풍덩 뛰어들고 싶다고 생각했던 날이었다.

바로 그날.

귀족계를 평정할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입센은 방에서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좀처럼 글에 집중을 못했다.

바깥이 너무 소란스러웠다.

소음들은 문단에 끼어들었다가, 문장에 끼어들었다가, 급기야 단어 사이에도 끼어들었다.

입센은 미간을 찌푸리며 방을 나왔다.

복도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2층 계단 앞.

어머니와 동생들이 계단 앞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들은 입센이 다가온 지도 몰랐다.

입센은 가족들의 시선을 따라 1층 홀을 내려다보았다. 1층 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왕실 문양이 박힌 갑옷을 입은 기사단과 아버지와 성내 기사들이 평행선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백작. 어서 죄를 고하고 처벌을 달게 받으시오.”

“멀쩡한 사람을 왜 마족과 엮는단 말입니다. 난 아무 죄가 없소. 미트라 앞에 떳떳하다오.”

“그럼 본인이 결백하다는 증거를 대시죠.”

“아니, 무죄를 어떻게 입증한단 말입니까? 내가 죄를 지었다면 당신들이 내 죄를 입증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평소 유순하던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걸 입센은 처음 봤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평화로웠던 일상이 깨지고 있었다.

그리고 깨진 것은 본래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팽팽한 대치 상황이 이어지는데.

한 청년이 기사단 앞으로 나섰다.

왕실의 핏줄을 상징하는 불꽃처럼 붉은 머리의 청년.

건장한 체구에 맑은 눈을 가진 청년.

그때는 몰랐지만 그가 바로 헥스였다.

“이단자는 즉결 심판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헥스가 이단 심문관에게 물었다.

이단 심문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문관이 보기에 저택은 어떻습니까?”

“사악한 기운이 코를 찌릅니다. 이단의 증거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찾을 수 있겠죠.”

“그럼 길게 끌지 맙시다.”

탓!

헥스가 아버지와 기사들을 훌쩍 뛰어넘어 2층 계단 중간에 착지했다.

샤르르릉.

헥스의 오른손에 검이 들렸다.

검이 샹들리에 빛을 반사하면서 눈부신 빛을 토해냈다.

“텔로 경과 기사들은 백작과 가솔들을 처리하세요. 악의 씨앗들은 제가 직접 처단하겠습니다.”

“네! 왕자 전하!”

“정말 이렇게 나오실 겁니까? 왜 제 말은 듣지 않는 겁니까? 설마 원하는 것이 내 목숨이요?”

아버지가 부르짖었지만 소용없었다. 왕실 기사단이 아버지에게 덤벼들었다.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쇳소리가 홀을 뒤덮었다.

아버지는 계속 항변했지만 칼 소리에 다 묻혀 버렸다.

“애들아, 3층으로 올라가렴. 비밀 통로로 빠져나가는 거야. 어서!”

어머니가 입센과 동생들의 등을 떠밀며 재촉했다.

입센은 하는 수 없이 3층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면서 뒤를 슬쩍 돌아보니 헥스가 어머니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부인. 역시 구린 게 있나 봅니다. 자식들을 도망치게 하는 걸 보면.”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어도 내 애들은 손끝 하나 못 댑니다.”

어머니가 양팔을 활짝 펼쳐 계단을 막아섰다.

“눈빛이 독하십니다 그려. 이거 마족과 내통했다는 증거가 차고 넘치는 걸요?”

“악마는 당신들이야.”

“그건 미트라께서 판단한 일이지요.”

푸우우욱!

헥스의 검이 어머니의 복부를 꿰뚫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입센은 너무 놀라 넘어지고 말았다. 계단 모서리에 부딪친 곳조차 아프지 않았다.

어머니는 검에 찔린 와중에도.

오히려 헥스를 향해 전진하더니 헥스를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엄마. 저 나쁜 놈을 왜 안아줘요?’라고 당신의 입센은 생각했다.

그 의미를 깨달은 것은 머리가 한참 자란 뒤였고.

크로닌은 메마른 줄 알았던 눈물샘에서 모처럼 눈물을 쏟아냈다.

“어서 가렴.”

어머니가 고개를 돌리며 힘겹게 말했다.

입센은 고개를 끄덕이고 달렸다.

그것이 가족과 관련된 입센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악몽 그 자체였던 회상을 끝마치고서 크로닌은 자신의 배를 매만졌다.

찔리지도 않은 복부가 욱신거렸다.

억울하게 죽어가던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끝내 혼자 살아남았기에.

역설적으로, 크로닌은 가족의 아픔을 헤아릴 수 없었다.

크로닌은 거친 숨을 고르다가 깃털 펜을 손에 쥐었다.

감정과 생각들이 화산으로 폭발하고 있었다.

슥슥슥슥.

오른손이 종이 위를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문학을 꿈꾸던 소년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저 바뀐 장르에 적응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을 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광기로 써 내려간 편지글이 완성되었다. 크로닌은 탈진한 얼굴로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수취인은 당연히 헥스였다.


***


그날 오후.

크로닌은 1층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직사각형의 테이블은 4인용이었지만 식사를 하는 사람은 크로닌 혼자였다.

애초에 별채는 고급스러운 유배지였다.

“요즘 공자님 식사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은 것 같습니다.”

곁에 서 있던 레미가 한마디 했다.

“무슨 뜻이지?”

“전에는 음식을 드시는 듯 마는 듯 했는데 최근에는 여러 음식을 골고루 잘 드셔서요.”

“살고 싶으면 잘 먹어야지.”

크로닌이 피식 웃었다.

흑마도사들은 대부분 식사 시간이 불규칙했던 것에 반해 크로닌은 예전부터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 오래 살아남고 싶다면 식욕을 잃지 말거라. 식욕이 없는 자는 의욕도 없는 법이니까.


크로닌에게 흑마법을 가르쳐 준 스승의 제1철칙이었다.

그리고 크로닌이 직접 경험한 바 스승의 말은 옳았다.

위대한 사람들은 식욕을 다스릴 뿐이지 식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스승님은 어디 계실까.

여전히 코빙턴 산맥에 머물고 있을까.

아니 살아 있기는 할까.

“음식이 남을 것 같은데 너도 들거라.”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공자님의 음식을....”

“아까부터 목젖이 요동치던데?”

“그게.... 오전에 본가 청소를 해서 그렇습니다.”

레미가 얼굴을 붉히며 핑계를 댔다.

“먹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나를 잘 모시고 싶으면 잘 먹어라.”

크로닌의 눈치를 보던 레미가 결국 크로닌 맞은편에 앉았다.

깨짝깨짝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공자님,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래 보이나?”

“네. 눈 밑에 그늘이 길고 까매지셨어요.”

“관찰력이 좋구나.”

크로닌이 수저를 놓으며 말했다.

티를 안 내려고 노력했지만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자정부터 새벽까지 묘지에서 암흑 마나를 쌓고.

오전과 오후에 각각 2시간씩 달리기와 호신술을 익히고 있었다.

그 나머지 시간은 마나 연공에 힘쓰고 있었다.

마나에 회복 효과가 도움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약골의 몸으로 버티기에는 무리한 스케줄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거늘.

크로닌은 예전의 힘을 되찾는 중인 반면, 헥스와 6영웅은 최전성기를 유지한 채 또 강해지고 있을 것이다.

그랜드 마스터에 가까웠던 헥스는 조만간 그랜드 마스터가 될 테고.

다른 놈들도 차근차근 힘과 세력을 불리고 있을 것이다.

크로닌과 썩을 놈들의 간격은 초원처럼 넓었지만 그렇다고 꼭 못 따라 잡을 것은 아니었다.

일단 몸의 주인이 마법 천재였다.

그리고 썩을 놈들은 크로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크로닌의 정체를 몰랐다.

말하자면 뒤통수 치기 딱 좋았다.

희망은 아직 반짝였다.

식사가 끝난 후 크로닌은 레미와 함께 식당을 나왔다.

“정원으로 가시겠습니까?”

레미가 공손하게 물었다.

크로닌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오늘은 따로 찾을 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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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5장 23.05.12 413 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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