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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백현의 서재입니다

8클래스 흑마도사의 귀환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윤백현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4
최근연재일 :
2023.05.24 10:00
연재수 :
17 회
조회수 :
6,154
추천수 :
104
글자수 :
93,280

작성
23.05.16 10:00
조회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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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2쪽

제9장

DUMMY

“크으으으.”

말레브는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낮부터 하인과 재미를 보려던 찰나, 무언가가 그의 몸을 거세게 들이받았다.

그 충격으로 몇 미터를 날아가 자빠지고 말았다.

허리부터 바닥에 떨어진 탓에 허리가 찌르르 울려왔다.

통증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차리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

말레브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다가 두 눈을 번쩍 떴다.

땀에 젖은 크로닌이 레미 옆에 서 있었다. 그러니까 저 잡놈이 고의로 자신에게 몸통 박치기를 했다는 뜻 아닌가.

‘이 새끼 눈깔 보소?’

말레브는 크로닌의 눈빛을 마주하고 한 번 더 놀랐다.

크로닌의 눈빛이 겨울바람처럼 차가웠다.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체온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형님. 대체 무슨 짓을 하고 계셨습니까?”

말투는 정중했지만 명백한 추궁이었다.

“아니, 뭐. 네 하인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말레브는 자신도 모르게 변명하듯 말했다. 크로닌의 기백이 예사롭지 않았다.

“으쓱한 정원에서 굳이 손까지 잡아가며 해야 할 만큼 진지한 이야기가 뭡니까?”

“요새 가끔 마주치는데 저 하인이 힘들어 보이길래 개인적으로 위로를 해주고 있었지.”

“제 눈이 잠시 삐었던 모양입니다. 제 눈에는 형님이 꼭 레미를 추행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당치도 않은 소리.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나는 가문의 4남 말레브 글로리다.”

말레브가 세게 나가자 크로닌이 입을 꼭 다물었다.

침묵 속에서 녀석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난 네가 하는 말 따위 믿지 않아.

확실히 말에서 떨어진 후 크로닌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말레브가 아는 크로닌은 겁쟁이고 허약했고 눈치도 더럽게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앞에 있는 크로닌은 어쩐지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것 같았다.

“레미. 네가 오해를 좀 풀어줬으면 좋겠는데?”

말레브가 레미를 쳐다보며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레미가 크로닌과 말레브의 눈치를 한 번씩 보더니 어쩔 줄 몰라 했다.

뭐,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을 택하게 되겠지만.

“형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인가?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네. 공자님.”

레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역시 예상대로!

성격이 제법 어른스러워졌다지만 그렇다고 레미가 크로닌에게 줄을 댈 수는 없었으리라.

비루한 첩의 핏줄이고.

마법 명가에서 1클래스도 달성하지 못한 병신이었으니까.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괜히 사람을 오해하고 말이야. 이 모욕은 잊지....”

말레브는 말을 잇지 못했다.

크로닌이 말레브의 말을 중간에 잘라 먹었던 것이다.

“고개 들고 내 눈을 쳐다보면서 말해라. 정말 아무 일도 없었나?”

“....”

“네가 도와달라고 한다면 돕겠다. 다만 다시 한 번 아무 일도 없었다고 대답한다면....”

“....”

“네가 험한 꼴을 당하든, 죽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 자, 마지막으로 묻는다.”

“....”

“정말 아무 일도 없었나?”

크로닌의 압박에 레미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레미에게서 시작된 침묵이 정원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짧지만 긴 순간이었고.

정원의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기묘한 순간이었다.

별 웃기는 놈을 다 봤네.

추파를 던진 건 나인데 레미를 꾸짖고 있네?

크로닌이 헛발질을 한다고 고소해하면서도 말레브는 레미의 결정에 귀를 기울였다.

“공자님. 도와주세요. 말레브 공자님이 저를 만지고....”

레미가 흐느껴 울며 말했다.

레미의 어리석은 결정에 말레브가 미간을 찌푸렸다.

“긴 말은 필요 없겠죠? 제 하인한테 집적거리지 말고 당장 꺼져주시죠.”

“뭐라고? 꺼져 달라고? 그게 형님한테 할 소리냐?”

“동생 하인을 건드리는 건 형님이 할 짓입니까?”

크로닌이 빈정거렸다.

“아랫도리 관리 잘하시죠. 그거 함부로 놀렸다가 엿 된 인간, 한 둘이 아닙니다.”

“이 씹새끼가? 말에서 떨어지면서 주둥이도 다쳤냐?”

말레브의 눈동자에 쌍심지가 켜졌다. 더 이상의 모욕은 참아줄 수 없었다.

제 몸도 간수 못하는 머저리가 어디서 훈계질은 훈계질인가.

파바바밧!

말레브가 크로닌을 향해 달려 나갔다.

마법이면 간단하게 제압하겠지만.

마법을 쓰면 크로닌이 크게 다치면서 일이 커질 위험이 있었다.

“떨어져 있어라.”

크로닌이 레미를 멀리 밀쳐낸 뒤 말레브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겁을 상실한 눈동자였다.

“우리 아우, 처맞은지 하도 오래 돼서 감이 떨어졌지?”

부우우웅.

이죽거리며 뻗은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말레브의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갔다.

피했다고?

10분 이상 걷는 것도 피곤해하는 저 약골이?

아냐. 운이 좋았던 걸 거야.

말레브는 주먹으로 크로닌의 턱을 올려 치기도 하고, 관자놀이를 후려치기도 하고, 코를 주저앉힐 생각으로 안면에 주먹을 뻗기도 했다.

하지만 크로닌은 그때마다 쥐새끼처럼 자리를 피했다.

우연이란 결코 계속되지 않는 법.

그때부터 말레브는 흐름이 이상해졌다는 것을 감지했다.

크로닌이 자신의 공격을 보고 피한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순간 뒷목이 서늘해졌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주먹도 무거워졌다.

“형님. 4번입니다.”

“무슨 뜻인데?”

“절 때리려고 했던 게 4번이라고요. 피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4대를 맞았겠죠.”

“병신. 그걸 세고 있었냐?”

“계산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시는 군요. 복수란 건 말입니다. 그간 받은 것에 적당한 이자를 쳐서 되돌려주는 일입니다.”

크로닌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시발, 꼭 네가 날 이길 것처럼 말한다?”

“지는 싸움은 딱 한 번 밖에 안 해봤거든요.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을 테고.”

“개새끼 넌 오늘, 비 오는 날 먼지나게 쳐맞을 줄 알아.”

숨을 고른 말레브가 다시 한번 크로닌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먼저 신음을 터뜨린 건 말레브였다.

“크으으윽.”

크로닌의 주먹이 말레브의 왼쪽 옆구리를 강타했다. 말레브가 한 손으로 옆구리를 움켜쥐며 얼굴을 구겼다.

솔직히 그렇게 아프진 않았다.

크로닌 따위에게 얻어맞았다는 사실에 충격이 컸을 뿐.

“커헉!”

또 다시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말레브.

복부와 옆구리를 몇 번 더 얻어맞자 눈앞에 별이 빙글빙글 돌았다.

솜 주먹도 연달아 맞으니 고통스러웠다.

퍼어어억!

주먹이 명치에 꽂히는 순간.

말레브는 단발마조차 뱉어낼 수 없었다. 뱀 한 마리가 가슴을 콱 조여 오는 느낌이었다.

털썩!

말레브는 힘없이 무릎을 꿇은 뒤 가슴에 손을 얹었다.

뒤늦게 구역질이 밀려왔다.

오는 길에 먹은 간식들이 걸죽한 황갈색 액체로 쏟아져 내렸다.

머리는 하얗게 비고.

눈물이 핑 돌아서.

말레브는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꺽꺽거리는 그의 눈은 그저 레미를 데리고 사라지는 크로닌의 뒤꽁무니를 쫓을 따름이었다.

시발, 이게 뭐냐고!


***


별채 2층 복도 끝 방.

크로닌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다리를 꼬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레미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감사합니다.”

레미가 연신 허리를 숙여가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크로닌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레미는 끔찍한 꼴을 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감사는 나 말고 너 자신한테 해.”

“제자신이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레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미를 구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크로닌이 아닌가. 그런데 왜 자신에게 감사하라는 걸까.

“네가 너를 도왔기 때문에 내가 너를 도울 수 있었다. 네가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으면 나도 나서지 않았어.”

크로닌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용케 나를 선택했군. 형님이 아니라. 이유가 있나?”

“공자님께서 이번 일에 끼어드셨다는 건 이 일을 해결할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

“그래서 공자님을 선택했습니다.”

“사실 내가 착각한 거라면? 바보처럼 일을 크게 만든 거라면?”

“아니요. 저는 공자님을 믿습니다.”

레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크로닌은 배짱이 없지, 능력이 없는 게 아니었다.

요즘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 계속되고 육체 훈련도 열심히 한다면 말레브를 능히 뛰어넘을 수 있다고 레미는 믿었다.

레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크로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좋을 대로.”

“공자님은 제가 스스로 도왔다고 하셨지만 저는 공자님이 저를 도와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째서 저를 도와주셨습니까?”

레미는 아직 의문이었다.

크로닌이 한낱 하인인 자신을 감싸기 위해 말레브와 주먹다툼을 벌였다는 사실이.

“그게 그렇게 궁금했나?”

“네. 공자님.”

“듣고 나면 실망할 텐데?”

“그래도 좋습니다.”

“사실 너를 도와줬다기보다는 형님을 혼내줬다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 그동안 진 빚이 있어서. 무슨 뜻인지 알겠나?”

“아. 네.”

레미가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거봐. 실망할 거라고 했잖아.”

크로닌이 한 손으로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크로닌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크로닌이 싸우는 이유는 그저 자신을 지키거나 또는 자신에게 거슬리는 적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지켰어야 할 사람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소중한 사람들을 만들 수는 있었다.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등을 내맡길 수 있는 동료 등등.

하지만 크로닌은 인간다운 삶을 전부 포기했다.

복수귀의 삶을 선택했다.

복수귀에게 인연은 필요 없었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이 적에게 인질로 잡혔을 때 곤란하게 될 테니까.

잃을 것 없는 놈이 가장 무서운 놈이니까.

크로닌은 일부러 그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뜨겁게 타오르는 복수의 불길뿐이었다.

그리고 그 불길은 헥스와 6영웅을 잿가루로 만들 때까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제게 있었던 일을 짧게 말씀드릴까요?”

“아니. 필요 없다.”

크로닌이 손을 저어가며 만류했다.

“그래도 알아두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건 네 생각이다.”

굳이 설명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귀족의 자제가 하인에게 주접을 떠는 건 어딜 가나 있는 이야기였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크로닌이 레미의 사연을 들음으로써 레미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크로닌은 복수 말고 다른 감정에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크로닌은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손목이 욱씬거렸다.

때린 사람도 아파야 한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이 몸은 대체 얼마나 약골인가.

“혹시 어디 다치셨나요?”

“다쳤다기보다는 오랜만에 몸을 격하게 움직였더니 피곤하군.”

크로닌이 한 손으로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공자님. 낙마하신 이후로 특이한 버릇이 생기신 것 같습니다.”

“무슨 버릇?”

“손으로 자꾸 목을 쓰다듬으시더라고요.”

“그랬던가?”

크로닌이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방금 전에도 그러셨는걸요? 혹시 목이 불편하신가요?”

“아니 불편한 건 없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군.”

크로닌이 미간을 찌푸렸다.

레미의 말을 의식하고 보니 과연 한 손으로 목을 쓸어내리는 묘한 버릇이 생긴 듯 했다.

방금 전에도 그랬다.

왜 이런 버릇이 생겼을까.

몸의 원래 주인도 이런 버릇이 없었을 테고, 흑마도사로 살았던 때도 이런 버릇은 없었는데 말이다.

무언가가 떠오를 듯 말 듯 크로닌을 애태웠다.

“그건 그렇고 공자님. 앞으로 어떻게 하죠?”

“뭐가?”

“말레브 공자님이요. 아까 전 일로 잔뜩 독을 품으셨을 텐데 보복하려고 들지 않을까요?”

레미는 아직 불안을 다 떨치지 못한 기색이었다.

크로닌은 피식 웃고 말았다.

“세상 쓸데없는 걱정이군. 대륙에서 가장 독한 사람이 누구인 줄 아나?”

“아니요. 잘 모르겠습니다.”

“바로 나다.”

크로닌이 엄지로 본인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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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7장 +1 23.05.14 354 6 12쪽
6 제6장 23.05.13 380 7 12쪽
5 제5장 23.05.12 414 7 11쪽
4 제4장 23.05.11 484 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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