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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연재수 :
1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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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64,671

작성
20.05.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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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Re 08. 죄와 벌 3

DUMMY

싸움이 끝났을 때 이를 기억하는 것은 그때 하늘을 날던 까마귀들이었다. 그때의 까마귀들은 지금도 사막을 배회하며 잊히지 않는 싸움의 결착을 그들만의 언어로 실어 날랐다.



01.

카르고가 사자를 보며 그날의 국경을 떠올렸다. 어떡해서든 살아남는 것만이 전부였던 국경에서의 싸움이 오롯이 기억났다. 사내의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다시 예전의 청년 장교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딱 그만큼의 희열. 팔과 다리가 잘리고도 살려고 꿈틀거리던 어느 병사의 눈동자.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도 기어이 숨통을 끊어놓던 순간. 처음 적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의 전율과 전장에서 기어이 살아돌아갈 때의 충족감.


온전히 돌아온 전투의 감각. 삶에 대한 치열한 집착. 온몸에 기쁨이 흘렀다.


'네놈에게 고마울 지경이로군.'


카르고는 보이지 않는 웃음을 지어 보이고 사자에게 뛰어들었다. 그가 선택한 전술은 찌르기였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상대에게 가장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최후의 일격을 감추기 위해 수많은 기만전술을 폈다. 횡으로 베고 종으로 내리치고 별 의미 없는 공격 속에서 치명타의 기회를 엿보았다.


사자는 막기에 급급해 보였다. 그가 자신의 전술을 눈치챘을까? 그래봤자 별 의미는 없었다. 전성기의 감각이 돌아온 듯한 카르고의 공격은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었다.


그때 사자가 모래로 미끄러운 바닥을 헛디디며 휘청거렸다. 적의 사선을 포착하기에 앞서 몸이 먼저 반응했다.


카르고의 일격. 그것은 응축된 힘을 한 점으로 발산하는 찌르기였다. 카르고는 크게 발을 내디디며 당겼던 검을 뻗었다. 목표는 목이었다. 창백한 칼끝이 섬뜩한 빛을 뿌리며 사자에게 날아들었다. 날이 닿기 전 카르고는 승리를 예감했다.


그러나 한 가지 잘못 생각한 것이 있었다.


카르고가 국경에서 만났던 그 어떠한 자도 지금 눈앞의 상대에게 비할 수는 없다는 것을. 카르고가 헤치고 넘어온 어떤 사선보다 훨씬 깊고 어두운 곳에 사자의 삶이 있었음을. 사자는 날아드는 칼끝을 보며 소름 끼칠 정도로 침착하게 대응했다. 미끄러진 발을 오히려 축으로 삼아 검과 아주 약간의 간격만으로 피했다. 그와 동시에 성큼 카르고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카르고는 아무런 방심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사자의 움직임이 워낙에 빨랐고 대범했다. 사자가 품 안에 들어왔을 때 카르고는 삶을 한 번 더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팔 하나를 주어야 할까? 아니면 여기서 검을 버리고 물러나야 하나?


찰나의 순간 그는 팔을 버리기로 한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자의 도끼를 향해 직접 팔 하나를 내어주며 반격을 준비했다.


사자의 도끼가 날아들었다. 도끼는 크게 반원을 그리며 카르고를 베었다. 사자의 도끼는 카르고의 팔을 단숨에 몸으로부터 떼어냈다. 그리고 그의 몸도 단숨에 베어버렸다.


카르고는 반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온몸의 힘이 풀린 채 땅으로 무너지는 일이었다.



02.

검은 판초 우의를 두른 카르고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자의 일격에 이미 그는 죽음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제 곧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일방향 편도 여행을 떠나는 이들에게 베푸는 사신의 자비일까? 왼팔이 날아갔고 도끼날이 폐까지 들어왔다 나갔지만 딱히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잠시 동안 온몸을 가득 채웠던 전성기의 감각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절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냥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


맥빠진 한숨을 내쉬며 카르고가 생각했다.


사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한 쪽 다리를 살짝 절었다. 카르고에게 베였던 허벅지에서 비로소 통증이 올라오는 중이었다. 마지막 일격을 가한 도끼는 이미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뒤였다.


사자 역시 피곤했다. 긴 하루의 끝이 다가올수록 몸은 그저 쉬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하...... 결국 이렇게 되는군. 이제 만족하나?" 다가온 사자를 보며 카르고가 물었다.


"아침만 해도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뭐, 딱히 미안하단 생각은 안 드는군."


"크하하...... 그도 그렇지. 동정받을 생각 따윈 없다."


"대체 왜 그랬나? 당신은 군인이 아닌가?" 사자가 물었다.


"왜라니...... 마을 주민들 말인가? 하하...... 이제 와서 무슨 변명을 듣길 원하나. 그냥 일이 그렇게 됐을 뿐이라면 믿겠나?"


"그 처참한 살육이 말인가? 아무 이유도 없이 벌린 일이었다고?"


"그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지금 사막에는 그런 일이 일상이 되었다. 네놈도 어느 정도는 알고 온 것일 텐데."


"......"


"허억...... 가기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카르고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대체 넌 뭐냐? 어디서 온 거냐?"


카르고의 질문에 사자는 잠시 고민했다. 이내 무릎을 살짝 굽히고 카르고의 눈을 마주했다. 그의 눈은 반쯤 감긴 채 다가오는 죽음을 겨우겨우 밀어내고 있었다. 사자가 나직이 말했다.


"나는 사막의 황제를 만나러 왔다."



03.

사자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해는 이미 서쪽의 모래 언덕 언저리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겨우 날이 저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긴 하루였다. 소악마상을 지나 마을 안으로 발을 내딛던 것이 오랜 옛날처럼 느껴졌다.


사자는 회관 뜰에 쓰러진 사내들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저무는 해의 붉은 노을이 사내들의 시체 위에서 일렁였다. 그들의 모습은 어딘가 처연해 보였다. 마지막 숨을 내쉬고 삶을 내려놓은 카르고 역시 그들 사이에 자리했다. 회관 지붕 위에 앉아있던 까마귀들이 싸움이 끝났다는 것을 눈치챈 듯 하나 둘 뜰 위로 내려왔다.


사자가 바닥에 떨어진 카르고의 검을 집어 들었다. 까만색의 뱀 문양이 인상적이었다. 사자는 검을 사내들이 드러누운 뜰의 한 가운데에 꽂아놓고 걸음을 돌렸다. 처절하게 붙들었던 삶에서 멀어진 그들은 이제 그들이 죽인 자들과 함께 이 마을에서 영원한 잠에 들 것이다.


사자는 삶이 끝난 뒤의 일을 알 수 없으므로 굳이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사자는 해가 채 떠오르기도 전에 마을을 떠났다. 이빨이 뭉특한 소악마 상이 사자의 뒤를 배웅했다. 마을에 잠든 수십 구의 시체도 그를 배웅했다.


사자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04.

사자가 만일 일찍 떠나지 않았더라면, 피곤에 전 몸을 위해 좀 더 쉬어가려고 마음먹었더라면, 그들을 만나게 됐으리라.


사자가 마을을 떠나고 3~4시간이 지난 뒤, 한 무리의 사내들이 마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해는 이미 하늘 가운데에 떠올라 그들의 그림자를 진하게 드리웠다. 스무 명이 넘는 무리가 말을 타고 움직였다. 선두에서 말을 탄 남자를 따라 대오를 정확히 갖춘 채 였다.


그들은 먼젓번의 사내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비록 얼굴은 무표정하고 사막의 먼지와 건조한 바람에 꺼슬했으나 생기가 가득했다. 특별한 자격을 가진 이들 특유의 기운이었다. 자신감과 일종의 결연함이 얼굴마다 묻어났다.


사막의 태양을 막는 망토 밑으로 황금색 갑옷이 번쩍였다. 날개 달린 뱀의 문양이 갑옷 위에 새겨져 있었다. 뱀은 세 갈래로 갈라진 혀를 탐욕스럽게 날름거렸다. 이는 사막 제국의 휘장. 그들은 기사단이었다.


터번 대신 투구를 쓴 선두의 남자가 마을 입구에서 말을 세웠다. 그가 손을 들자 바로 뒤의 사내가 재빠르게 말을 몰아 옆으로 다가왔다.


"카르고의 연락이 끊긴 곳이 이곳이냐?"


"네 그렇습니다, 단장님. 그가 연락을 취하기로 한 지 꼭 하루가 넘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연락을 취한 후 동선을 생각해보면 이 마을일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단장으로 불린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랜 세월 쌓은 관록이 눈가와 이마에 자욱이 새겨진 얼굴이었다. 고집스럽고 두꺼운 콧대에 이어진 코가 씰룩였다.


"흉흉하다. 이상한 냄새도 코를 찌르는군...... 이에르고."


"네, 단장님." 옆에 선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젊은 기사였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부대원들 사이에서 홀로 초록의 갑옷이었다. 어깨 갑주에는 날개 달린 뱀의 문양이 까맣게 새겨졌다.


"자네는 기사 넷을 데리고 마을 안을 수색하게. 인기척이 하나도 없는 것이 몹시 수상하군. 주민들이 어딨는지 찾아보고 카르고와 그 부대원들도 알아오게. 나는......"


이가 뭉특한 소악마상을 바라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여기서 기다리지."


"알겠습니다. 단장님."


명을 받은 이에르고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봐, 유르케. 셋을 골라 따라와라."


"알겠습니다!"


유르케로 불린 사내가 기사 셋을 차출하여 이에르고를 따랐다. 그들이 마을 안으로 진입했다. 신중하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말을 몰아 마을 깊숙이 들어갔던 그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30여 분이 지났을 때였다. 이에르고의 표정이 몹시 좋지 않았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게냐, 카르고......"


단장은 기사단을 이끌고 마을로 들어갔다.



05.

마을을 떠난 지 나흘이 지났을까. 사자는 아직 사막에 있었다.


사자는 북극의 성과 그 옆의 처녀성을 길잡이로 하여 부지런히 사막을 건넜다. 사막의 모래 언덕은 모두가 똑같아 보였고 앞으로의 길은 지나온 길과 매한가지였지만 사자는 자신이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았다.


사자는 감각이 매우 예민한 자였고 탁월한 길잡이였다. 사자가 나고 자란 곳, 검사로서 길러진 곳에서 배운 대로 별을 따라 나아갔다. 그는 딱히 훌륭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꼭 필요하다고 여긴 것은 확실히 익혀놓는 사내였다. 매일 밤 별이 예상한 위치로 정확히 떠오르는 것을 보며 사자는 안심했다. 길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어느새 마을에서 보충한 물은 반도 남지 않았고 유일한 식량인 육포도 마찬가지였지만 괜찮았다.


'길에서 벗어나지만 않았다면 괜찮다.' 사자가 생각했다.


닷새가 되던 날 밤. 이 날은 평소처럼 모래 언덕에 기대어 머물지 않고 계속 걸었다. 사막의 밤이었고 침식이 우려스러웠지만 사자의 예리한 눈이 무언가를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집이었다. 사막 한가운데 집이라니, 수상하기 짝이 없었지만 확인해 볼 가치는 있었다. 집이 있다는 것은 가까이에 오아시스가 있다는 이야기다. 사막의 오아시스마다 사람이 거주하는 것은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전쟁으로 많은 오아시스들이 황폐해졌지만, (전쟁은 참 많은 것을 앗아갔다) 사막에는 여전히 발견되지 않은 많은 오아시스들이 있을 것이다.


사자는 모래 언덕에 살며시 감추어졌다가 드러나는 집을 때때로 확인하며 계속 걸었다. 1시간쯤 걷자 드디어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대했던 것만큼 큰 규모의 오아시스는 아니었으나 마르지 않은 샘도 있었다.


집은 샘의 가까이에 붙어서 지어진 목조 집이었다. 사람의 손길을 받지 않은 듯했다. 집의 골조는 비틀려 사막의 바람이 불 때마다 비명을 질렀고 외벽은 많은 부분이 허물어져 흉한 속내를 훤하게 드러냈다. 사막의 달빛이 집 안을 비추었지만 밖에서 내부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외부인에게 보이지 않기로 작정한 비밀처럼 군데군데 까맣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사자는 집으로 진입하는 대신 샘물을 확인했다. 물이 맑고 (놀라운 일이었다!) 차가웠다. 손을 모아 물을 떠서 마셨다. 시원하고 맛이 좋았다. 마른 목이 흠뻑 젖을 정도로 양껏 마셨다. 갑작스러운 찬물에 놀란 속이 기분 좋게 꾸르륵거렸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여전히 비밀로 남아있었지만 사자는 그중에서도 사막의 오아시스가 가장 큰 놀라움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광활한 모래땅 깊숙한 곳에 넓게 퍼진 수원이 있다니. 정말 모를 일이었다.


사자는 흐뭇한 마음으로 물주머니에 샘물을 가득 담았다. 이상한 기척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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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Re 21. 괴수 토벌 3 +4 20.06.03 2,192 75 12쪽
20 Re 20. 괴수 토벌 2 +2 20.06.02 2,175 76 12쪽
19 Re 19. 괴수 토벌 1 +4 20.06.01 2,275 74 12쪽
18 Re 18. 마크를 찾아서 3 +2 20.05.30 2,214 83 12쪽
17 Re 17. 마크를 찾아서 2 +8 20.05.29 2,242 72 12쪽
16 Re 16. 마크를 찾아서 1 +6 20.05.28 2,425 79 13쪽
15 Re 15. 고기가 된 검사 3 +7 20.05.27 2,544 86 12쪽
14 Re 14. 고기가 된 검사 2 +8 20.05.26 2,636 83 12쪽
13 Re 13. 고기가 된 검사 1 +2 20.05.25 3,251 88 13쪽
12 Re 12. 세 가지 질문 2 +25 20.05.22 3,474 119 13쪽
11 Re 11. 세 가지 질문 1 +2 20.05.21 3,646 95 12쪽
10 Re 10. 달빛을 먹고 사는 자 2 +4 20.05.20 4,081 110 12쪽
9 Re 09. 달빛을 먹고 사는 자 1 +6 20.05.19 4,346 119 14쪽
» Re 08. 죄와 벌 3 +2 20.05.18 4,694 120 13쪽
7 Re 07. 죄와 벌 2 +10 20.05.15 4,869 130 13쪽
6 Re 06. 죄와 벌 1 +10 20.05.14 5,107 138 13쪽
5 Re 05. 참극 2 +9 20.05.13 5,380 145 13쪽
4 Re 04. 참극 1 +17 20.05.12 6,129 137 13쪽
3 Re 03. 사막을 건너는 검사 3 +12 20.05.11 6,826 163 12쪽
2 Re 02. 사막을 건너는 검사 2 +20 20.05.11 7,733 196 12쪽
1 Re 01. 사막을 건너는 검사 1 +24 20.05.11 14,642 18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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