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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연재수 :
1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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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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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05.11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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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Re 03. 사막을 건너는 검사 3

DUMMY




01.

난장판이 되어버린 주점의 한복판에서 사자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들이쉬는 숨을 타고 피로가 딸려 들어왔다.


"그냥 목이 좀 말랐다니까......"


사자가 투덜거렸다. 사막을 건너면서 이런 일이 언제든 터질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렇게 피를 많이 보게 될 줄은 사자로서도 의외였다. 그것도 처음 만나는 마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예 몰랐다.


숨이 멎은 사내들은 고요와 평온 사이에서 삼도천을 건넜다. 사람들의 몸에 배었던 피비린내는 이제 그들의 피로 새롭게 덮어 씌었다. 손목에 까마귀 문신을 한 여인은 최후의 숨을 바람 빠진 소리로 길게 내쉰 후로 더 이상 미동이 없었다.


유일하게 한 사람, 사자를 보며 끝도 없이 해죽대던 늙수그레한 사내만이 주점 바닥에 엎어져 추운 듯 떨었다. 토라진 듯 엎어진 사내의 얼굴 주변으로 피웅덩이가 번졌다. 사자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주점을 나왔다. 땀도 거의 흘리지 않은 그의 얼굴 위로 사막의 햇볕이 쏟아졌다.


"그나저나......"


목마름 만큼이나 강렬한 의문이 움텄다. 이 안에서 사자에게 당한 이들은 모두 살인자들이었다. 흉흉하게 날이 선 날붙이를 주저 없이 내지르는 모습이나 눈에 서린 살기가 모두 그 사실을 입증했다. 이들이 마을에 붙박고 있었다면 분명 희생자들이 나왔을 것이다. 마을에 인기척이 전혀 없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엄청난 비극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놈들이 저질렀을지 모를 일을 확인하려면 어디로 가야 할꼬."


사자는 잠시 생각했고 이내 답을 내렸다. 이제 완전히 깨어난 감각에 기대자. 사자가 바람이 부는 방향에 서서 코를 벌름거렸다. 바람이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었다. 피비린내가 마을 도처에 가득했다. 그는 냄새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로 했다.


"하긴 감각이고 뭐고 이렇게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몰랐던 게 이상하지."


사자가 다시 마을 중앙의 보도로 돌아갔다. 다시 봐도 마을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잘 만든 길이었다. 사람이 이용했다기보단 소나 말이 오갔을 것이다. 수레나 마차 말이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실크로드.


"전쟁 중에 실크로드는 완전히 지워졌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때의 흔적인 건가?"


사자는 혼자 중얼거리며 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한 무리의 사내들이 마을로 들어섰다.



02.

입을 쩍 벌린 소악마상 앞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난 이들은 한눈에 봐도 법과 무관한 삶을 살 것 같은 이들이었다. 넝마와 같은 옷을 아무렇게나 걸쳤고 허리춤에는 제각기 다른 날붙이들이 흉측한 모습으로 주렁주렁 매달렸다. 햇빛에 까맣게 그을린 그들의 살갗은 거칠었고 여러 해에 걸쳐 새겨진 상흔들이 가득했다. 그들의 입 주변은 음탕한 욕설로 지저분했고 장난기 어린 눈매는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섬뜩한 살기가 흘러넘쳤다.


무리의 가장 앞에 선 사내는 까만색 판초 우의를 덮어쓴 남자였다. 비를 좀처럼 만날 리 없는 사막에서 무슨 생각인지 모를 복장이었다. 판초는 기름을 먹인 듯 반들거렸다. 분명히 의미가 있는 복장이리라. 예를 들어 기름을 먹이면 피가 묻었을 때 닦아내기 쉬워진다든지 하는.


"잠깐, 멈춰라."


까만 판초 우의를 덮어쓴 남자가 마을에 들어가기 전 손을 들어 사내들을 멈추게 했다. 까만 판초가 손을 들자 왁자지껄 대며 낄낄대던 사내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앞에 선 대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감히 입을 뗄 수가 없는지 누구도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저 얌전한 양처럼 옹기종기 모여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뭔가 좀 이상한데."


판초가 깊이 팬 눈으로 마을 안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인기척 없는 마을은 어젯밤 이곳을 떠날 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판초의 머릿속에선 '직감'이라는 이름의 경보가 미세하게 사이렌을 울리기 시작했다. 입을 쩍 벌린 소악마상은 뭔가 할 얘기가 있지만 감히 말할 수 없다는 듯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판초가 미간을 찌푸렸다.


"야, 아무나 와 봐라."


판초가 부하들을 향해 지시했다. 누구에게랄 것 없는 지시였다. 그의 눈은 계속 마을을 향하고 있었다. 부하들 중 앞에 서 있던 사내들이 잠시 (아주 잠시) 서로 눈치를 보다가 볼에 문신을 새긴 사내가 째까닥 튀어나왔다.


"넵."


"너, 지금 마을 안으로 들어가서 스티아로랑 바르간이 어딨는지 찾아와라. 남은 녀석들도 모조리 불러들여라."


"네, 알겠습니다."


사내가 넙죽 고개를 숙이고는 마을 안으로 부리나케 뛰어 들어갔다. 판초가 다시 손을 들었다.


"잠시 대기. 우리는 저 둔한 놈이 제대로 된 대답을 들고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린다."


판초는 입맛이 썼다. 꺼림직한 기분이 들었다. 사막이 변하고 나서 그런 기분이 들지 않은 적이 있었겠느냐마는 이번엔 느낌이 아주 달랐다. 말하자면,


시궁창에 발을 들이게 될 것 같은 느낌. 그것도 잘못 발을 들였다가는 한없이 빨려 들어가 버릴지 모를 구멍이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느낌. 보통 이런 시궁창은 피웅덩이를 동반하기 마련인데.


지시를 받고 뛰어갔던 사내가 죽은 어미를 본 고양이처럼 눈이 커다래져 달려온 것은 그로부터 10분이 지났을 때였다.


"쓰읍."


판초는 입을 다셨다. 아주 지랄 같은 맛이 났다.



03.

부하들이 나뒹굴고 있는 주점에 들어서면서 판초는 침묵했다.


판초의 뒤를 따라 들어선 부하들은 그게 아주 불안했다. 대장이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심지어 활짝 미소를 지을 때에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가장 무서울 때는 그가 잠자코 입을 다물 때였다. 판도의 침묵은 으레 누군가의 영원한 침묵과 안식을 동반하곤 했다. 그리고 사내들이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열심히 생각했을 때 이번이 가장 상황이 심각했다.


스티아로가 바 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판초 일당의 홍일점. 유일한 여자이자 최고로 악랄한 년. 평소 같으면 남자들보다 훨씬 저질스러운 욕설을 내뱉으며 동료들을 맞았을 그녀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스티아로의 풀어헤친 셔츠 앞섶은 온통 피로 가득했다. 판초가 가만히 앉은 채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편안히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가 부름에 대답하는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다.


바르간은 그녀 옆에 엎어진 채로 숨이 끊어져 있었다. 사내 중 하나가 엎드린 그를 바로 뉘었는데 얼굴이 엉망이었다. 보통은 얼굴에서 가장 높게 솟아있을 코가 가장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판초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았다. 으깨어진 것은 코뿐이 아니었다. 두개골도 부서졌을 것이다. 그리고 사인은......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사였다.


"하, 이거 봐라......" 판초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판도의 부하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곳곳에 그들의 형제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정수리에서 피가 다 빠져나갔는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진 대머리 아만의 머리가 그의 몸과 멀찍이 떨어져 굴러다녔다. 아만의 반들반들한 머리를 놀리는 것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과였던 피에르는 목에 커다랗게 구멍이 났다.


목에 섬뜩한 공백이 생기는 동안 그는 알아차렸을까?분명 통증을 느끼기도 전에 즉사했을 것이다.


'이건 여럿에게 당한 것이 아니야. 한 놈이다.'


숨쉬기에서 해방된 부하들을 살펴보고 판초가 간단히 결론 내렸다. 한결같은 깊이로 베인 자상. 대부분의 상흔은 치명상이었고 단 일격에 숨을 끊었다. 감탄할 만큼 깔끔한 솜씨였다.


'솜씨가 대단한 놈이다. 군인? 기사? 모르긴 몰라도 괴물 같은 놈이 마을에 들어왔어. 그리고 아마......'


"아직 마을에 있겠지."


판초가 입을 열었다. 눈앞에 펼쳐진 살육의 현장에 할 말을 잃어버렸던 사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판초가 스티아로에게 시선을 맞춘 채로 말을 이었다.


"지금 마을에 알 수 없는 녀석이 들어온 모양이다. 그런데 심상치 않아. 둔한 네놈들이 봐도 알 거다. 실력이 엄청난 놈이다."


판초가 고개를 돌려 부하들을 바라봤다. 사내들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어 안달이 난 표정이었다. 터질 듯 끓어올랐다. 판초는 그들의 조바심이 일을 그르칠까 걱정됐다. 하지만 그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도 지금 열이 뻗쳐서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셋씩 모여 놈을 찾아라. 분명 아직 마을 안에 있다. 샅샅이 뒤져라. 네놈들도 눈이 있으니 알 테지만 아주 위험한 놈이다. 찾더라도 섣불리 덤벼들지 말고 신호를 보내라. 몰아서 한꺼번에 쳐야 한다."


판초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뭘 멀뚱히 보고 섰나. 가라, 이 멍청이들아!"


사내들이 일제히 주점 밖으로 뛰쳐나갔다.



04.

판도의 부하들이 고삐 풀린 투우 소처럼 주점 밖으로 우르르 뛰쳐나왔을 때 사자는 중앙 보도가 교차하는 마을 중앙에 있었다. 사자는 굳이 하늘에서 보지 않아도 알겠다고 생각했다. 여기가 마을의 중심이었다. 이름을 여전히 알 길이 없는 마을의 중앙에는 우물이 있었다. 오, 마침내.


그러나 비로소 발견한 우물을 보고도 사자는 선뜻 다가가지 않았다. 지독하게 새빨간 경보가 그의 머릿속을 미친 듯이 울려댔다. 우물이 뿜어내는 냄새 때문이었다.


보통 마을과 도시의 중앙에는 중심지를 알리는 표시가 있기 마련이다. 사자가 떠나온 곳에는 거대한 분수가 있었다. 천사와 악마가 분수를 두고 싸우려는 듯 양쪽에 조각된 가운데 검사의 조각상이 고고하게 우뚝 선 분수였다. 그곳을 찾는 외지인이라면 누구나 그 모습에 홀려 한참을 구경하고도 쉽게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그러나 이곳에는 우물 하나가 전부였다. 거대한 소금나무가 이파리를 늘어트린 가운데 정물화처럼 우물 하나가 우두커니 놓여 있었다. 나무의 그림자가 우물 위에 드리워졌다. 이곳에 있었던 암울한 비극을 형상화하듯이. 우물은 세상의 모든 고독과 불길한 예감과 잔인한 운명을 한꺼번에 뿜어냈다. 그 안에 든 것이 아직 뭔지는 몰라도.


"지독한 냄새다. 마치 '섬멸전'이라도 벌인 듯한 전장의 냄새야."


사자가 코를 킁킁거렸다. 그리고 맡기 싫은 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바로 여기가 마을의 비극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낼 수 있을 터. 하지만......"


사자는 주저했다. 그가 저세상으로 한꺼번에 보내버렸던 살인자들. 그들의 몸에는 최근에 씐 듯한 피 냄새가 가득했다. 그들 눈에 서려 있던 독기 어린 살기도 아주 최근에 피를 보았다는 증거였다. 그것도 아주 많은 양의 피를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마을 안 어디에도 시체는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뻔하지 않은가.


"결정을 해야겠지. 이 예기치 못한 만남을 이대로 끝낼지, 끝까지 마무리 지을지 말이야."


사자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우물로 다가갔다.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우물은 강렬한 메시지를 이방인에게 던졌다. 무엇을 예상하듯 그 이상을 보여주리라. 어떤 끔찍한 경험을 했더라도 아직 최악은 남아있나니.


사자가 우물 속을 내려다보았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악취가 마치 얼굴을 때리듯 우물 안에 가득 고여 있었다. 피와 살갗이 썩는 냄새였고 숨과 삶이 한꺼번에 잘려나간 냄새였다.


사자는 자신이 보게 될 광경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입에서 새어 나오는 탄식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 시발."


그 안에 지옥이 꿈틀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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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Re 21. 괴수 토벌 3 +4 20.06.03 2,192 75 12쪽
20 Re 20. 괴수 토벌 2 +2 20.06.02 2,175 76 12쪽
19 Re 19. 괴수 토벌 1 +4 20.06.01 2,275 74 12쪽
18 Re 18. 마크를 찾아서 3 +2 20.05.30 2,214 83 12쪽
17 Re 17. 마크를 찾아서 2 +8 20.05.29 2,242 72 12쪽
16 Re 16. 마크를 찾아서 1 +6 20.05.28 2,425 79 13쪽
15 Re 15. 고기가 된 검사 3 +7 20.05.27 2,544 86 12쪽
14 Re 14. 고기가 된 검사 2 +8 20.05.26 2,636 83 12쪽
13 Re 13. 고기가 된 검사 1 +2 20.05.25 3,251 88 13쪽
12 Re 12. 세 가지 질문 2 +25 20.05.22 3,474 119 13쪽
11 Re 11. 세 가지 질문 1 +2 20.05.21 3,646 95 12쪽
10 Re 10. 달빛을 먹고 사는 자 2 +4 20.05.20 4,081 110 12쪽
9 Re 09. 달빛을 먹고 사는 자 1 +6 20.05.19 4,346 119 14쪽
8 Re 08. 죄와 벌 3 +2 20.05.18 4,693 120 13쪽
7 Re 07. 죄와 벌 2 +10 20.05.15 4,869 130 13쪽
6 Re 06. 죄와 벌 1 +10 20.05.14 5,107 138 13쪽
5 Re 05. 참극 2 +9 20.05.13 5,380 145 13쪽
4 Re 04. 참극 1 +17 20.05.12 6,129 137 13쪽
» Re 03. 사막을 건너는 검사 3 +12 20.05.11 6,826 163 12쪽
2 Re 02. 사막을 건너는 검사 2 +20 20.05.11 7,733 196 12쪽
1 Re 01. 사막을 건너는 검사 1 +24 20.05.11 14,642 18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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