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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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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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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05.2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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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글자
13쪽

Re 13. 고기가 된 검사 1

DUMMY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친구와 한 약속, 왕 앞에서 맺은 신의이거나 신에게 드린 맹세일 수도 있었다. 무엇이 되었건 그들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도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01.

왜 이렇게 된 걸까? 사슬에 묶인 채 사자가 생각했다. 곤란한 질문이었다.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지금 양 팔과 가슴을 단단하게 묶고 있는 것은 직경이 최소 4센티는 되는 쇠사슬이었다. 검이 있었다면 끊을 수도 있었지만 묶여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뒤로 묶인 손목 쪽은 조금 헐겁게도 느껴졌지만 이 역시 혼자의 힘만으로는 무리였다. 몸을 살짝만 움직여도 사슬이 더욱 단단하게 몸을 옥죄여 왔다. 게다가,


'사람을 무슨 도축한 고기 마냥 걸어놓다니. 인정사정없는 놈들이군.'


사자는 사슬에 묶인 채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뒤통수가 몹시 얼얼했고 채 마르지 않은 뜨끈한 것이 목 뒤로 흘렀다. 그와 함께 걸려 있던 것은 주로 깨끗하게 뼈를 바른 도축한 소와 돼지, 양의 고기들이었다. 고기로는 잘 소비되지 않는 낙타와 극히 희귀한 염소도 있었다.


그리고 두 개의 팔과 두 개의 다리를 가진 시체들이 있었다. 수줍음이 많은 소녀처럼 머리를 축 늘어트린 시체 한 구는 여전히 목에서 핏방울을 똑똑 떨어트렸다.


다리 밑에 고인 피 웅덩이를 보니 아무래도 이곳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되는 친구인 모양이다. 물론 시기로 보자면 사자가 가장 새롭게 합류한 신참내기이니 그들은 모두 사자에게 선배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그들의 뒤를 따라 사자도 독자적으로 피 웅덩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괜히 힘을 빼지 않기로 했다. 몸을 늘어트린 상태에서 고개만 살짝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콧속으로 찌르고 들어왔던 피비린내는 이제 많이 적응이 되었다. 하지만 고기의 썩는 냄새는 여전히 진동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동지들이 이미 썩기 시작했고 종류도 제각각이라 더욱 지독했다.


벽 위에 난 작은 창문으로 얕은 빛이 새어 들어왔다. 환기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는지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매달린 고기들과 시체들에 햇빛이 닿은 부분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장소와 상황만 달랐다면 봄이 왔음에 감동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자에게 감상에 젖을 여유는 없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필사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이대로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02.

도축장 경매에 나가는 소고기와 같이 매달리는 처지가 되기 딱 하루 전, 사자가 도시에 도착했다.


주식이 달빛인지 농담인지 모를 남자의 집을 떠나고 나흘을 꼬박 걸었다. 산처럼 거대한 모래 언덕을 두 개쯤 지났다. 그 사이 한 개의 오아시스를 만났는데 이번엔 다 허물어져가는 폐가도 흉흉하게 미소 짓는 이방인도 만날 수 없었다. 사자는 그저 마른 목을 적시고 물병에 물을 담고는 그곳을 떠났다.


이번에는 철저하게 사막의 밤을 피해 가며 걸었다.


밤이 오면 모래 언덕 밑에 구덩이를 파고 잠을 청했다. 사막의 밤에 침식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하지만 그리 좋지 않은 방법이었는데 사자의 몸은 그 정도의 휴식으로도 충분히 회복되었다. 남자가 약속했던 죽음과 같은 잠에서 일어난 뒤로 사자는 거의 제 컨디션을 되찾고 있었다. 향초는 집중을 흩트리는 효과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꽤 도움이 된 모양이다.


세 번째로 만난 모래 언덕을 넘었을 때 사자는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도시를 발견했다. 태양의 뜨거운 열이 대지를 데우고 겸사겸사 사자의 머리도 계란 반숙처럼 익히고 있을 때라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좀 더 모양이 뚜렷해질 때까지 사자는 계속 걸었다. 앞에 보이는 도시가 철 지난 농담처럼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사자는 결국 도시에 닿았다. 이음새가 헐거운 모래 벽돌이 완고한 표정으로 장벽을 이루었다. 장벽의 출입문은 삐쩍 마른 나무를 겹겹이 붙여서 만든 것이었고 도시 속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문을 지키는 경비병이 대수롭지 않은 눈빛으로 사자를 흘깃 쳐다보더니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출입문을 지나며 사자는 도시의 이름을 확인했다.


'아우바'. 남자가 말한 '잃어버린 약속의 도시'였다.



03.

도시에 발을 들이면서 사자는 왠지 익숙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란 기시감이 들었다. 인기척 없는 도로, 사람의 흔적이 사라진 건물과 주인에게 버려진 채 외로이 떠도는 개들.


그렇게 인기척이 사라진 길을 따라 걷다가 땅 위에 재현된 지옥을 발견하겠지.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우바는 번화한 도시였다. 드나드는 외지인이 평소에도 많은지 주민들은 사자의 모습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들 제 갈 길이 바쁜지 앞만 보고 걸었다.


까맣고 두꺼운 천으로 겉감을 댄 드레스를 입은 여자 둘이 똑같은 표정을 하고 지나갔다. 표정만? 얼굴도 똑 닮은 여자들이었다. 쌍둥이들은 둘 중 누구도 사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중앙 도로는 알레르기아의 도로보다 잘 관리된 것은 아니었으나 규모는 훨씬 컸다. 대략 짐작해봐도 세 배는 되어 보였다. 넓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집과 상점이 점점이 놓였다. 사자는 도로를 따라 도시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식료품점의 계단 앞에는 초로의 노인 둘이 같은 방향을 보며 무료하게 담배를 피웠다.


왼편에 앉아있던 노인이 고개를 돌려 사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관심도 없는 눈. 그가 고개를 돌리고 이번엔 오른 편의 노인이 사자를 바라보았다. 첫 번째 노인의 얼굴과 똑같았다. 그 역시 아무 감정도 비치지 않는 눈으로 사자의 행색을 잠시 훑어보다 고개를 돌렸다.


'쌍둥이가 둘이나? 오늘 운세에 대해 괘라도 맞춰봐야 하나......'


이쯤 되고 보니 기묘한 인위성이 사자의 심기를 건드렸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 있는 사자를 애써 무시하는 듯이 보였다. 길을 따라 난 집들은 대부분 이층으로 된 집이었다. 집 안에 든 사람들이 사자의 모습을 관찰하는 낌새가 느껴졌다. 사자가 무심한 듯 위를 올려다보면,


왜 아니겠어? 똑같은 얼굴들이 사자를 내려다보았다.


'몹시 이상하다. 누군가 손을 쓴 것인가? 대체 누가?'


사자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을 때 그의 앞에 거대한 주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게의 이름은 '마나'. 언젠가 들어본 이름이었지만 언뜻 생각나지 않았다.


고동색의 나무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때만 해도 소와 돼지, 그리고 참으로 과묵한 여행객의 시체와 나란히 걸리게 될 것임을 사자는 까맣게 몰랐다.



04.

그리고 지금 사자는 지독하게 과묵한 친구들과 함께 고기처럼 매달린 신세였다. 창문 밖으로 돌이 튀고 땅이 진동했다. 수레가 지나간 모양이다. 정신이 들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전경 말고 밖에서 새어들어오는 소리에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하게 들려왔다. 사람 여럿이 서로에게 고함을 쳤다. 지나가는 이를 붙들어 세우며 호객하는 소리도 들렸다.


'시장이구나. 여긴 도시의 시장 밑이다.'


시장 밑의 창고. 어쩌면 이 위에 있는 것은 도축장의 경매 장터일지도 몰랐다. 사자도 여기의 도축된 고기들과 함께 매달려 상인들 앞에 나서게 될까?


"자, 이번엔 갓 잡힌 싱싱한 검사입니다! 검으로 살아왔다는 놈이 넙죽넙죽 잠에 취해 쓰러지더니, 이번엔 이렇게 고기로 매달렸군요! 자, 여러분 이 경솔하고 빈틈투성이인 검사를 단돈......"


조롱을 당해도 쌌다. 요크가 봤다면 분명 신나게 비난했을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 이 애송이 놈아.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어설픈 놈 같으니."


잘게 깨어진 기억이 숙취처럼 고통스럽게 올라왔다. 아우바의 주점으로 발을 디디는 사자 자신의 모습이 기억났다. 마치 하늘에서 지켜보듯 어리석은 자신의 모습이 내려다보였다.


주점에 들어갔고 눈 밑에 요염하게 점이 있는 여점원에게 맥주를 주문했다. 맥주를 시키면서 사자는,


'또 한바탕 난리가 나는 건 아닌가 걱정했지. 다행히 난리는 나지 않았어. 그럴 리가 있나, 꼼짝없이 당했으니.'


다행히 그녀는 속옷 대신 갑옷을 껴입고 있지도 않았고 맥주를 따르지 못해 쩔쩔매지도 않았다. 붉은 머릿결이 인상적인 그녀에게 사자는 성도의 금화를 주며 정보를 구하려 했고, 그리고......


쓴웃음이 났다. 명치를 파고드는 사슬 때문에 웃음을 터트릴 수는 없었으나 사자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몹시 비웃고 싶었다. 사막의 남자, 달빛을 먹는지 과자나 처먹는지 모를 그 빌어먹을 사내를 만난 뒤 사자는 감각이 확실히 무뎌진 모양이었다. 체력과 컨디션이 돌아온 것에 혹해 이토록 무방비하게 방심하다니.


사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때 문밖으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둘..... 아니, 셋. 바닥을 울리는 둔중한 발걸음 소리로 보아 덩치가 상당한 것 같았다. 이제 사자의 차례가 온 모양이다. 그가 물끄러미 친구들 발밑에 고인 피웅덩이를 바라보았다. 내 피는 어떤 색깔일까?


사자는 문득 궁금해졌다.



05.

문이 열렸다. 예상대로 세 명이 들어왔다. 매달린 고기와 시체가 분동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소가 흔들리고 양이 흔들리고 두개골이 쪼개진 남자와 목이 흔적도 없이 날아간 여자가 차례로 흔들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등장을 예고라도 하듯이 참 부지런히 흔들며 다가왔다. 저들이 어떤 이들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체를 만지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는 모양이다. 어쩌면 이곳에 매달린 친구들이 모두 그들의 작품일 수도 있었다. 하나하나 뼈를 바르고 목을 자르고 피를 뽑아내는 것까지 부지런하게 그리고 소중히 행한 이들인 것이다.


작품을 만드는 데 쓴 도구를 지금도 들고 있다면 사자도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사자, 사막을 건너려다 처음 와 보는 도시에서 목이 따여 죽다'.


제법 괜찮은 작품명이다. 사자가 생각했다. 동시에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직감이었지만 강렬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도시에 발을 디디면서 느꼈던 수많은 눈빛들, 길 위를 채우고 있는 쌍둥이들, 눈 밑에 점이 있는 점원, 무심한 표정으로 사자를 들여보내주던 경비병까지. 모두가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었다. 징그러울 정도로 작위적인 인형극. 지금 들어오는 저들도 무대에 서는 주요 인물일 것이다.


'차라리 잘 됐다. 누군가 내가 찾아오는 것을 알았고 이렇게 무대까지 마련했다면 그 선에 빨리 닿는 것이 나을 테니.' 사자가 생각했다.


그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사자는 고개를 높이 들어야 그들의 얼굴이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 명의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의 손에는 피 찌꺼기가 잔뜩 묻은 도살용 칼이 장난감처럼 들려 있었다.


그들은 사자를 찾는 것 같았다.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빛만으로 친구들을 구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도축된 고기와 살해된 시체를 하나하나 돌려가며 얼굴을 확인했다.


"형, 나 빨리 나가고 싶은데. 오늘 시장에 유랑단이 온다고 했거든, 어?"


맨 뒤에 선 아이가 볼멘소리를 했다.


"그럼 닥치고 좀 빨리 찾아봐. 나도 나가고 싶긴 마찬가지니까."


가운데 낀 아이가 핀잔을 주었다.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앞장선 아이는 아무 말 없이 괴로운 웃음을 지었다. 누런 이 사이로 금이빨이 번쩍였다.


그들이 사자에게로 근접했다. 인사라도 건네야 할 것 같았다.


"이봐." 사자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세 명의 아이가 동시에 사자를 바라보았다.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맨 뒤에 선 아이는 이미 도망갈 채비를 하고 뒤돌아선 채였다.


"깨...... 깨어 있었어?" 셋 중의 하나가 말했다. 어쩌면 동시였을지도 몰랐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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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Re 21. 괴수 토벌 3 +4 20.06.03 2,192 75 12쪽
20 Re 20. 괴수 토벌 2 +2 20.06.02 2,175 76 12쪽
19 Re 19. 괴수 토벌 1 +4 20.06.01 2,275 74 12쪽
18 Re 18. 마크를 찾아서 3 +2 20.05.30 2,214 83 12쪽
17 Re 17. 마크를 찾아서 2 +8 20.05.29 2,243 72 12쪽
16 Re 16. 마크를 찾아서 1 +6 20.05.28 2,426 79 13쪽
15 Re 15. 고기가 된 검사 3 +7 20.05.27 2,544 86 12쪽
14 Re 14. 고기가 된 검사 2 +8 20.05.26 2,636 83 12쪽
» Re 13. 고기가 된 검사 1 +2 20.05.25 3,252 88 13쪽
12 Re 12. 세 가지 질문 2 +25 20.05.22 3,474 119 13쪽
11 Re 11. 세 가지 질문 1 +2 20.05.21 3,647 95 12쪽
10 Re 10. 달빛을 먹고 사는 자 2 +4 20.05.20 4,081 110 12쪽
9 Re 09. 달빛을 먹고 사는 자 1 +6 20.05.19 4,346 119 14쪽
8 Re 08. 죄와 벌 3 +2 20.05.18 4,694 120 13쪽
7 Re 07. 죄와 벌 2 +10 20.05.15 4,870 130 13쪽
6 Re 06. 죄와 벌 1 +10 20.05.14 5,107 138 13쪽
5 Re 05. 참극 2 +9 20.05.13 5,380 145 13쪽
4 Re 04. 참극 1 +17 20.05.12 6,129 137 13쪽
3 Re 03. 사막을 건너는 검사 3 +12 20.05.11 6,827 163 12쪽
2 Re 02. 사막을 건너는 검사 2 +20 20.05.11 7,733 196 12쪽
1 Re 01. 사막을 건너는 검사 1 +24 20.05.11 14,643 18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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