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이라고 불렸던 것#13
자살하려던 남자. 그는 새로운 길을 걷게된다.
어느 순간 비 소리가 나지 않는다.
방금까지 미친 듯이 내리던 비가 오지 않는다.
그리고 배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내 감각을 배에 온전히 쏟은 적이 없었다.
이 배는 지금 어딘가에 멈춰져 있다.
움직이고 싶다. 일어서서 그 녀를 잡고 물어보고 싶다.
"당신이 이 모든 것을 계획 한 것이었어?"
라고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지랄 맞게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제길.
하필 이런 순간 큰 손님의 링크가 깨어지다니...
아니 큰 손님이 원하는 건 지금의 계획이었던건가?
설마......이 모든 것은 큰 손님이 그린 큰 그림이라고?
난 엎드려서 그 녀가 돌아서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
사친위를 구해준 것도 아니다.
그 녀에게 정신이 나가서 멍하니 서 있는 부하들을 둘러본다.
"이거 받아요."
그 녀는 열쇠 몇 개가 있는 꾸러미를 툭하고 던져 준다.
"사친위와 김길환이 이 배에 숨겨둔 돈과 보물들이 있는 방 열쇠입니다."
웅성 웅성.
김길환의 부하들이 또 웅성거린다.
인간의 악점을 철저히 이용하는 저 여자.
어쩌면 저 여자야말로 이 모든 것의 중심이었구나.
"알아서들 찾아가세요. 전 여기서 내릴게요. 그리고 새로운 여러분의 리더를 만주로 보낼테니 돈과 보석을 나눠서 만주로 가십시요.
그리고 조선의 독립과 중국의 독립을 위해 싸워주세요."
그 녀는 문을 닫고 나갔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 열쇠 꾸러미를 모두가 바라본다.
아무도 줍지 못 하고 보고만 있다.
"흐흐흐. 샤오 티엔. 정말 샤오 티엔답군. 행복하게 사시오. 샤오 티엔..."
철컹거리며 약간 움직이던 사친위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는 그 상황에서 김길환을 쳐다보고 있었다.
허무한 웃음을 띄운 채.
"하아. 이게 뭐야."
알고 싶지 않은 비밀을 바라 보는 느낌.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쓴 웃음이 지어진다.
"그래. 그렇게 된거구나. 내가 세운 가설 같은 건 병신 같은 생각이었네."
세상이 휘몰아침이 느껴진다.
내 눈 앞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시간과 공간의 터널을 지나 난 현실로 돌아간다.
무엇이 현실인지, 어디가 꿈 속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내가 돌아가는 곳이 현실이겠지?
진진이 있는 병실로 돌아간다.
돌아가면 살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알지 못 하는 이야기의 퍼즐들을 말해줄 수 있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이야기.
세상은 역시 멀리서 보는 게 더 잘 보일지도 모르겠다.
응?
진진이 있는 병실로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각났다.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게 맞겠다.
어디 있나!
사친위!
***
삐이..삐이..
"바이탈 싸인 정상입니다!"
진진의 옆에서 의사들이 갑자기 정상 신호가 들어오는 기계음에 기쁨의 소리 질렀다.
후우.
후우.
산소 호흡기를 달고 죽어가던 진진의 상태가 호전되고 있음은 그 녀의 얼굴 색으로 알 수 있었다.
검게 변해 가며 죽음의 색이 되어가던 얼굴 빛에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급격하게 여기 저기 경고의 신호를 울려 대던 기계들은 정상 신호로 바뀌었다.
"뭐야. 이 아저씨 진짜 뭔가 해낸건가?"
다니엘은 유리 벽에 바짝 붙어 진진을 바라보며 경이로운 표정을 지었다.
"진짜. 대단한 아저씨야. "
연희는 옆에 같이 서 있는 심우와 이야기했다.
"그러게요. 근데 왜 아저씨는 안 돌아오시죠?"
심우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연희에게 물었다.
"응? 그러게. 왜 안 돌아오지?"
연희가 주변을 살펴 보았다.
주변의 상황은 변한 것이 없다.
변한 것은 단지 죽어가던 진진의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
"일단 폐렴이 나았는지 엑스레이 사진실로 옯기겠습니다."
의사들을 진진의 호흡기를 떼었다.
이제 충분히 호흡까지 가능한 상황으로 급변했다.
"이건 뭐야. 기적이야?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잖아."
모여 있는 의사들이 웅성거리며 그 녀를 아래 층에 있는 검사실로 데리고 갔다.
"연희씨. 고도리 선생은 어디 간거죠? 혹시 과거에서 돌아오지 못한 건 아닌가요?"
"글쎄요. 이런 적은 처음이네요. 지금까지는 사라진 곳으로 돌아왔는데..."
연희의 걱정스런 표정의 대답에 심우가 의아해하며 물어본다.
"근데 고도리 선생이 느끼는 건 연희씨도 느끼잖아요?"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울수록 강하게 느끼고, 시공간이 멀어질수록 거의 못 느껴요.
아마도 그와 제가 뇌파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거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몇 배수의 차이가 나게 되요.
무조건 가깝게 있어야 서로의 정보가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
연희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 했다.
"고도리 선생이 설마 죽..죽은 걸까요?"
심우가 걱정스레 연희에게 물었다.
연희는 손사래 치며, 그 녀에게 이야기했다.
"아이. 설마요. 그 정도 상황이면 제가 모르겠어요? 지금 그는 돌아와 있어요. 이 상해에 있는 게 아니라서 그렇지. 분명 우리의 시공간 안에 들어와 있는 건 확실해요."
"우리 옥상 가서 담배나 한 대 필래요?"
가장 긴장을 유지했던 다니엘이 긴장이 풀렸는지 니코틴이 땡기는 모양이다.
"좋죠. 이렇게 일 하나 제대로 하고 나면, 담배 한 대 피우는 거죠."
"전 어차피 담배 안 피우니, 여기 있을게요. 진진 씨를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심우는 의자에 걸터 앉으며 진진이 있던 병실 쪽을 바라 보았다.
****
항저우의 서호.
서호 중에서도 가장 안 쪽의 작은 다리가 있다.
눈이 오는 날 이 다리를 좋아하는 이성과 함께 건너면, 애인이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는 다리.
그 다리의 왼쪽 끝 작은 벤치에 고도리 선생은 앉아 있었다.
하얀 연기가 길게 뿜어진다.
그 연기를 바람을 타고 서호의 넓은 호수 쪽으로 날아가 사라진다.
"김길환이었군요. 당신을 죽인 자이자, 이 역병의 주인공은."
나는 아무도 없는 벤치에서 혼잣말처럼 이야기했다.
"내 기억이 바뀌었는 데, 첫 기억은 김길환은 자기들 부하들로 부터 죽임을 당했어. 몰려든 부하들에게 칼로 찔리고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맞았지.
두 번째 기억에는 총을 맞아서 죽는 기억으로 바뀌었어. 마지막 내가 본 그의 표정은 역병을 만들 정도의 표정은 아니더라,"
당연히 내 옆에는 사친위 씨가 앉아 있었다.
내가 현재의 시간으로 돌아올 때 원했던 것은 우리 팀이 아니었다.
난 항저우의 서호로 시공간이 옮겨졌다.
그리고 이 벤치를 찾았을 때 그가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진진 씨는 살았을 것이다.
김길환의 죽음은 가장 사랑하던 여자로부터의 죽음.
분명 그가 역병의 악귀가 될 리가 없다.
난 그의 표정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의 부하들이 그를 믿어주는 순간 그는 웃었으니까.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런 남자가 악귀가 될리가 없다.
"샤오 티엔. 그 여자에게 죽게 되는 게 당신의 두 번째 기억. 즉, 지금에서는 그것이 진실인 상황이군요."
나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가고, 두번째 기억이 또력해져가는군."
"미안해요. 지난 번 사친위 씨를 협박한 것은..."
"충분히 그 때는 그럴 이유가 있었겠지. 자네라면 괜찮아."
난 사과했고, 그는 받아 들였다.
후우.
하얀 담배 연기가 이번엔 산 쪽으로 날아갔다.
"고맙군. 그 때 날 구해주고, 모두를 괜찮은 상황으로 만들어줘서.분명 그 황당한 등장을 했던 남자가 당신이었을거니까."
"죽을 사람은 죽는 것은 변하지 않더라구요. 그건 제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닌가봐요."
난 쓴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정확히 가야할 곳을 향해 가는거야."
사친위씨는 내가 마지막에 보았던 그 쓴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호수로부터 바람이 불어온다.
후룩.
난 아까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 ( 중국 커피는 진짜 달달이 )를 마셨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험한 세상에서."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지만, 난 그를 쳐다보진 않았다.
내 마음 속 작은 곳에서는 약간의 경멸도 있다.
어찌되었건 이 사람은 마약을 판매하기도 했다.
적어도 사람들을 도운 만큼은 자신의 이익을 챙긴 장사꾼이다.
그래도 그것과 별개로 그는 적어도 악인은 아니었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그 시대에서는 훌륭한 사람의 부류에 속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는 결코 좋은 사람은 아니다.
"내가 벌어둔 돈들은 정말 한푼도 남기지 않았어. 내 아들이 마약쟁이가 된 것도 다 내 탓이지. 여기저기 바삐 다니느라 그 아들 놈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 했으니."
사친위의 말이 이상하게 듣기 싫었다.
"그만해요. 이런 말 듣다보면, 나 당신은 완전히 용서해버리게 되니까. 적어도 뒷 돈도 챙겨먹고, 마약도 했던 것은 사실이잖아요. 그건 나쁜 짓이니까."
사친위는 하늘을 바라 보았다.
"뭐 자네 말이 맞네. 그 대신 아직까지 이렇게 천벌을 받고 있지 않은가. 좋아하는 친구에게 죽었고, 사랑했던 여자에게는 배신당했네.
심지어 내 하나뿐인 아들은 마약 중독자로 살다가 잡혀서 죽었지."
후우.
담배는 이럴 때 피우면 어찌나 눈을 찌르는 지 눈에서 눈물이 고였다.
"아씨. 담배 연기 왜 이리 눈을 찌르지?"
난 휴대폰을 들고 카카오톡을 열었다.
[ 어기 항저우 서호입니다. ]
연희에게 톡을 보내고, 다시 폰을 껐다.
"사친위 씨. 정원으로 돌아가세요. 이제 당신의 아들이 당신을 기다릴지도 몰라요."
"고맙네. 자네 덕분에 적어도 김길환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의 총에 죽었으니."
돈과 관련된 오해 속에서 자기들의 부하에게 맞아죽은 김길환보다는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의 손에 죽은 김길환이 좀 더 멋지긴 하다.
내가 데리고 있던 직원들에게 배신당한 일에 치를 떨었던 적도 있다.
급여를 주지 못 했다고 (그나마도 죽을 힘을 다해서 내 개인 빚을 내며 줬지만) 노동부에 고소한 직원들도 있다.
그럼에도.
나와 함께 끝까지 남아준 직원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힘든 과정 중에서도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며, 같이 개발한 직원도 있었다.
고마운 사람은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미웠던 사람은 지독하게 가슴에 새겨진다.
샤오 티엔이 던진 원래 부하들의 급여 명세서(라고 하는게 이해가 쉽다.).
그게 진짜 였을 지 가짜 였을 지 난 아직도 모르겠다.
그 정도의 일에 자신의 보스를 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는 일을 생각하니 정말 화가 났다.
어차피 사친위 씨를 정원으로 보낼려면, 아마도 심우가 필요하다.
이 아저씨는 심우를 보고 나서야 마음 놓고 정원으로 떠날 것 같았다.
"진실을 모두 아는 건 좋은 일이 아닌게지. 그냥 보기 좋은 것만 보고 살 수 있는 시대에서 살아가고 싶다네."
사친위는 하늘을 보면서 나에게 푸념한다.
그러게요.
당신이 겪은 그 시대에서는 그게 맞겠네요.
지금까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그 꽉 막힌 이야기들이 싫었는데, 그들의 삶도 존중받아야 하는 거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서호의 하늘.
서호의 호수.
이제 곧 떠날 날이 오겠네....
지금은 그냥 그 아름다운 풍경이나 내 눈에 저장하자고 생각했다.
항저우 서호에 있는 연인의 다리.
댓글과 추천을 환영합니다. 여러분의 추천이 많아야 글이 잘 써져요..
- 작가의말
으아 좀 지치네요.
여러분들이 갑자기 많이 오는 바람에
좀 더 재밌게 만들어보려고 노력하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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