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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메의 서재입니다.

흑룡이 나르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무협

왕잼
작품등록일 :
2021.03.28 11:18
최근연재일 :
2021.05.18 18:00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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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9
추천수 :
140
글자수 :
277,754

작성
21.04.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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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은곡집회(隱谷集會): 은자의 계곡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DUMMY

동궁전 성정각.


박광은 대낮부터 술냄새를 풍길까 염려돼, 연잉군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서있었다.


파주 행차 이후 연잉군의 박광에 대한 신뢰는 전폭적이었다. 박광의 사문이 신선술 계통의 문파인 것은 들었지만, 보지 않았으면 믿기 힘든 요물의 등장과 박광의 처리 과정을 보면서 그 위력을 확실히 믿게 된 것이다.


그런 연잉군이, 박광을 앞에 두고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갑자기 휴직을 하겠다고?”


퇴궐도 시키지 않고 항시 곁에 두고 싶은 심정인데, 난데없이 휴직을 하겠다고 찾아온 박광을 다그쳐 물었다.


연잉군은 요즘 좌불안석이었다. 파주 행차 때 마주친 괴한들이 혹시 소론 강경파 측이 보낸 자객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팽배해 있었고 그런 불안감이 잠자리마저 뒤척이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믿을만한 호위를 내보내는 건 말도 안되는 노릇 아닌가.


연잉군의 그런 마음을 헤아렸는지, 박광이 담담하게 의견을 올렸다.


“저하! 소관의 판단으로, 그날의 괴한들은 결코 세제 저하를 노린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우릴 마주치고 적잖이 당황했으니까요. 그리고, 요물의 존재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곳 동궐은 풍수가 견고한 곳이라 요사스런 기운이 침범하지 못한다고 제 스승에게 들었습니다.”


실제로 박광은 지난 일년여 궐내에 있으면서, 그 어떤 삿된 기운도 느껴보지 못했다.


“그리고, 사문에서 갑호령을 발동한 것은, 최근 백년 이래 처음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비정상적인 날씨도 그렇고, 요즘 궐 밖의 민심이 흉흉하다고 들었습니다. 이 사안과 관련해, 저희 사문에서도 움직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게, 나라와 왕실을 안돈케 함이니,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순간 박광은 자신의 언변에 감탄했다. 이렇게 유식한 말이 술술 나올 줄이야···.


‘궐밥 일년 먹었다고 이 정돈데, 몇 년 더 먹으면 시강원 학사도 할 수 있겠구나. 크크크.‘


시강원은 세자를 교육하는 기관, 그야말로 유식한 사람들만 뽑는 곳이었다.


연잉군이 본 박광은 곁에 두려 해도 잡아둘 수 없는 바람처럼 느껴졌다. 억지로 가둘 수 없다면, 자유롭게 떠돌다가 돌아오게 해야 했다.


“우시직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나, 휴직의 청은 허할 수가 없노라. 대신···”

“······?”

“휴가를 주겠다. 달포(한달 남짓)면 되겠는가?”

“······.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나이다. 망극하옵니다. 저하.”


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 일단 벗어나려면 약속은 해야만 했다.


박광의 꿍꿍이 못지않게 연잉군도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휴직과 휴가는 엄연히 다른 것, 휴가를 내줬으니 반드시 복귀해야 탈영죄를 면하게 될 것이다.


박광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지만, 머릿속엔 온통 미리내를 볼 생각뿐이었고, 연잉군의 머릿속엔 일말의 불길함이 차오르고 있었다. 날씨는 미쳐가고, 요물이 설치고 있다. 상서롭지 못한 징조였다.


*****


조선 각지에서 갑호소집령을 받은 환단계 제자들이 생업을 내려놓고 태백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백정 육두는 소를 잡다가 심어를 받았다. 인근 최고의 도축업자인지라 일감이 많았는데, 줄지어 서있는 소들을 내팽개치고, 잘 벼려뒀던 백정칼을 꺼내 차더니 도축장을 나와버렸다. 소 주인들이 원성과 욕설을 퍼부어대자, 그는 이 한마디로 주위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육시럴 잡것들. 소맛 대신 이 칼맛을 봐야겠어? 엉?


한양에서 무속계의 신성(新星)으로 떠오른 여인이 있었다. 신통하다는 소문이 크게 돌고 나서 고관대작 마나님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고 그날도 병조참판댁 마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참판에게 새로 생긴 여자가 있는 것 같다고 하여, 점괘를 봐주는 와중에 심어를 받게 되었다.


무녀 두루는 참판댁 마님에게 대충 부적을 그려줘 보내버리고 장거리 출장 굿판을 핑계로 점집을 닫아버렸다. 그날 점집에 줄지어 서있던 양갓집 부인들은 이 말 한마디로 바로 돌려보냈다.


-무녀가 비운 집에 있으면 신이 들거나 액이 든다고 하지요? 누가 먼저 신들려보시겠어요? 호호호.


활에 살을 매겨 쏘는데 일호흡도 걸리지 않는, 능숙한 사냥꾼 공대는 달포동안 쫓던 백두산 호랑이의 굴을 발견하고 굴 앞에서 매복하고 있었다. 호랑이가 굴에서 기어나오면 바로 큰 돈을 만질 수 있을 거라고 기대에 차있는데, 갑자기 활을 떨구며 심어를 받았다. 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는 조심스레 산을 내려갔다.


단양 살던 조생원은 심어를 받지도 않았는데도 태백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갓과 도포자락은 불에 그슬려, 몰락한 양반의 모습이었지만 얼굴은 참 비분강개해 보였다. 철천지 원수라도 잡으러 가는듯 이를 바락바락 갈면서 힘차게 산을 올랐다.


*****


태백산 이끼부락에 하나 둘 환단계원들이 모여들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계원의 수는 칠십에 달했고, 부락에 거주하는 주민 가운데 수련 제자들까지 합하면 백오십이 넘는 인원이었다.


전국에서 모인 제자들은 낯익은 얼굴을 보면 반갑게 회포를 풀었고, 처음 본 이와도 격의없이 인사를 나눴다. 마을 주민들은 오랜만에 큰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음식 준비하랴 숙소 정리하랴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마루한은 그런 광경을 보며 뿌듯한 감회에 젖었다.


‘수백년이 흘렀어도 우리의 사명은 퇴색함이 없구나.’


입문 시기가 다르고 사는 곳이 다르다보니 서로 처음 보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일인전승(一人傳承)으로 제자를 키워 물려주고 은퇴하는 계율에 따라, 계주 입장에서도 낯선 얼굴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끼부락은 계의 본산(本山)인지라, 모든 제자들은 정식 인정을 받기 위해 입문 후 한번 씩은 방문해야 했다.


미리내는 부락 여인들과 함께 잡일을 돕고 있었다. 음식 재료도 챙기고, 말끔하게 빨래한 이불을 개놓고 이따금 아궁이에 잔솔가지를 챙겨 넣고 다녔는데 마치 앙증맞은 다람쥐가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이따금씩 큰마당에 모인 외지 계원들을 흘끔거렸다.


“아이참···, 오라버니는 왜 안 보이는 거야? 혹시, 혹시···, 못 오는 거 아냐?”


갑호소집령이 발동됐다는 얘기를 듣고 모두가 심각한 얼굴일 때, 혼자 기쁨을 주체 못한 여인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미리내였다. 벌써 1년 넘게 보지 못한 박광 오라비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일년간 성숙하게 변한 자신을 알아볼까? 여전히 날 이뻐해줄까? 보게 되면 가슴이 콩당거려서 어떡하지? 별의별 걱정이 스쳐갔고 어젯밤에 잠을 설쳐 얼굴이 푸석해 보이는 게 신경쓰여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왜 아직 안 보이는 걸까?


‘궐에서 승진까지 하고 높은 분을 모신다더니···, 그럼 정말 못올 수도 있는 거 아냐? 궐 안엔 예쁜 궁녀들이 많다는데···, 설마 나 몰래 정혼을 한 건 아니겠지?’


갑자기 미리내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나쁜 상상을 하자니 끝이 없는 법, 꽃다운 십팔세 처녀의 여린 방심(芳心)은 의심과 분심(分心)으로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박광을 애타게 기다리는 건 미리내만이 아니었다. 계주 마루한도 속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어쭈? 이 자식이 주색에 빠져서 계의 소명도 거부하는구나? 하나 있는 제자놈이 이리 되다니···. 내, 선조들과 계원들을 무슨 낯으로 볼꼬?’


하지만 사람들이 얼추 모였으니 빨리 맡은 바 소임을 다해야했다.


“계원 여러분, 먼길 오시느라 고생들 하셨소. 생업이 중해서, 혹은 현지 상황이 다급해서 합류하지 못한 계원도 계실 것이오. 아시다시피···, 작금의 현상이 유례가 없는 것이라, 백여 년 만에 두 번째 갑호소집령을 발동하게 되었소.”


계의 소집령에는 갑을병 삼단계가 있는데, 갑호는 왜란 때 발동한 이후 두 번째였다. 마물과 관련된 사안은 아니었으나, 국가의 존립이 걸린 외침(外侵)인지라 당시 환단계주가 고심 끝에 내린 것이었다.


당시 계원들은 의병으로 혹은 관병에 편입돼 왜적을 상대하며 큰 공을 세웠지만, 그만큼 큰 희생을 치러야했다. 이후 호란 때는 계를 재정비하느라 은둔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갑호소집령이 발동됐으니, 따로 강조하지 않아도 모두들 사안의 엄중함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마루한이 좌중이 분위기를 살핀 후 말을 이어갔다.


“본인과 삼장로는 이 현상들이 자연적인 게 아니라고 결론 내렸소이다. 아무리 나라의 선기가 약해지고 성상(聖上:임금)의 기운이 쇠했다 해도, 이렇게 전국적으로 결계가 무너지고 마물들이 침범할 수는 없을 것이외다.”


계원 중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인위적인 조작을 했다는 말입니까?”


그 말에 무리가 웅성거렸다. 마루한이 힘을 실어서 답했다.


“충.분.히, 그럴 개연성이 있소이다.”


무리가 순간 조용해졌고,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말을 이어갔다.


“이곳 태백산에서는 평소보다 많은 마물이 발견되었고 모두 처리를 했소만, 각자 계신 곳에서 최근에 목격한 바가 있는지 들어보고 싶소. 내 직접 혼혼령을 통해 전국 상황을 살펴봤소만 마물을 직접 보진 못했소.”


마당에 모인 계원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웅성대기 시작했다. 다들 직접 본적은 없는 눈치였다. 이때였다.


“내가 직접 보았소. 불가사리였소. 그놈이···, 그놈이 내 고향마을을 다 불태워버렸단 말이오.”


분노한 목소리로 외친 사내는, 바로 몰락한 양반 행색의 조생원이었다.


그는 환단계의 직계제자는 아니었지만, 음양오행에 심취해 전국을 유람하다가 태백산에 들러 지금은 이장로가 된 우이에게 큰 가르침을 받고 스스로 외(外)제자가 된 양반이었다.


<불가사리>란 말에 좌중이 더 소란스러워졌다. 고려 말에 출현해 전국의 쇠란 쇠를 다 녹여먹고 민가를 불태웠다는 전설상의 영수 아닌가? 그걸 직접 보았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루한도 내심 놀랐으나, 일단 소란을 진정시켰다.


“단양의 조생원 아니시오? 좀더 자세히 얘기해 주시겠소?”


조생원이 성큼성큼 계주 옆으로 가더니 갑자기 그을린 도포 자락 속에서 왠 쇳덩이를 끄집어 들었다. 누리끼리하고 칙칙한 것이 황동 계열의 쇠뭉치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흡사 동물의 분변 모양이었다.


“이게 그놈의 똥이오. 그놈이 쇠라는 쇠는 다 먹어치우고 다니더니, 이런 똥을 싸대고 다녔단 말이오.”


불에 그을린 도포자락과 난생 처음 보는 똥모양 쇳덩이에 안믿기도 어려운 상황이 됐지만, 직계도 아니고 외제자의 주장이기에 다들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마루한도 참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마을 입구 쪽에서 또랑또랑한 외침이 들려왔다.


“제가 직접 마물을 잡았습니다.”


제일 늦게 이끼부락에 도착한 제자, 박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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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일령이체(一靈二體): 하나의 영에 두 몸이라니 21.04.16 135 2 11쪽
21 유유상종(類類相從): 끼리끼리 모이게 될 것이다 21.04.15 86 2 11쪽
20 삼령일체(三靈一體): 세 영이 한 몸에 담기다 21.04.14 176 2 11쪽
19 몽상합령(夢想合靈): 합령의 술을 꿈꾸다 21.04.13 183 2 12쪽
18 혼탈남녀(魂奪男女): 사내와 계집의 혼을 빼놓으니 21.04.12 191 3 11쪽
» 은곡집회(隱谷集會): 은자의 계곡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21.04.11 208 2 11쪽
16 흑망조판(黑蟒組版): 검은 이무기가 판을 짜다 21.04.10 277 2 11쪽
15 갑호발령(甲號發令): 갑호소집령을 발동하였다 21.04.09 85 2 12쪽
14 영육분리(靈肉分離): 영과 육이 떼어지다 21.04.08 123 2 12쪽
13 목령흡생(木靈吸生): 목령이 생기를 빨아 먹다니 21.04.07 100 2 11쪽
12 지입마경(至入魔境): 입마의 지경에 이르다 21.04.06 78 3 11쪽
11 호추삼오(虎追三烏): 범이 세 마리 까마귀를 쫓누나 21.04.05 68 3 11쪽
10 암종탐세(暗宗眈世): 암종이 세상을 노려보다 2 21.04.04 94 3 11쪽
9 암종탐세(暗宗眈世): 암종이 세상을 노려보다 1 21.04.03 93 3 11쪽
8 실부지애(失父之哀): 아비를 잃은 슬픔에 빠지다 21.04.02 78 3 12쪽
7 호견비학(虎見飛鶴): 날아가는 학을 범이 바라보았다 21.04.01 99 3 11쪽
6 교우약조(交友約條): 벗이 되기로 약속하다 21.03.31 122 3 11쪽
5 이인동심(二人同心): 둘이 한 마음이더라 2 21.03.30 107 3 11쪽
4 이인동심(二人同心): 둘이 한 마음이더라 1 21.03.29 168 7 11쪽
3 사불아심(事不我心): 일이 내 마음 같지 않구나 21.03.29 180 7 12쪽
2 호자하산(虎子下山): 새끼 범이 내려오다 21.03.29 283 7 11쪽
1 서장(序章) 21.03.29 399 9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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