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그르메의 서재입니다.

흑룡이 나르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무협

왕잼
작품등록일 :
2021.03.28 11:18
최근연재일 :
2021.05.18 18:00
연재수 :
54 회
조회수 :
5,191
추천수 :
140
글자수 :
277,754

작성
21.04.02 18:00
조회
78
추천
3
글자
12쪽

실부지애(失父之哀): 아비를 잃은 슬픔에 빠지다

DUMMY

평안도 덕천 방면에 탁기가 짙어져 결계가 흔들린다는 보고가 들어왔기에 부친이 직접 원행을 꾸렸고, 첫 견습에 나선 이단은 흥분되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부친의 호위였던 마달 아저씨도 동행했으니 모자람없이 든든했다. 지금은 명류장의 총관(總管)이지만 당시엔 도방이었던 마달은 자신이 아는 한 최고의 무인이었으니까.


덕천방면 묘향산 초입으로 접어들 무렵 병장기 소리가 들려왔다. 병장기가 맞부딪치며 내는 소리는 멀리까지 울려퍼진다. 농기구와 달리 제련이 잘된 쇠여서 경쾌한 잔향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단 일행이 달려가 목격한 것은, 관병과 화적떼의 싸움이었다.


백성으로부터 걷어오는 길인지, 도성에 바치러 나아가는 길인지 모를 짐수레에는 포목이며 곡식이 한가득 실려 있었고 그걸 빼가려고 화적들이 습격한 모양이었다.


부친이 나서서 화적을 때려잡아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달 아저씨만 몸이 근질근질한지 허리춤의 박도(朴刀)를 만지작거렸다. 아들의 그런 기대감을 느낀 것인지 부친은 이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단아! 인간세는 임금이 다스리는 것, 우리는 관여하지 않는단다.”

“그렇지만···, 우리도 여기에 살고 있잖아요. 우리는 사람이 아닌가요?”

“허허···, 물론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고 백성이기도 하지. 하지만 우리에게 그어진 경계는 절대 넘어가서도, 그럴 생각을 해서도 안 된다. 유념하거라.”

“······, 네 아버님”


평소 인자하고 부드러운 부친이지만, 그분의 음성이 단호해지면 거역할 수가 없었다. 성질이 불같은 마달도 부친 앞에서만은 고분고분해지지 않는가.


싸움 상황을 보니 관병이 열세였다. 이십여 명의 화적떼가 수적으로도 우세했고 관병가운데 지휘관으로 보이는 무관이 제법 용맹하게 저항했지만, 화적 가운데 돋보이는 인물이 있었다.


이제 약관(弱冠: 이십세)을 갓 벗어나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혼자서 흑마를 타고 있는 걸보니 화적의 수괴(首魁)인 모양이었다. 칼날이 사척(四尺)이 넘어 보이는 긴 환도(環刀)를 휘두르며 싸움터를 누비고 있었는데, 이미 관병 여럿이 그의 칼에 상한 상태였다.


어린 이단은 그 모습에 감탄했다. 마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조자룡의 현신(現身)처럼 보였으니까. 그가 관병 지휘관에게 달려들어 칼을 겨루다 몇 합 지나지 않아 무관의 칼을 날려버린 순간, 이단은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했다.


전의(戰意)를 상실한 몇몇 관병들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지휘관은 무기를 놓치고도 싸울 의사를 거두지 않았지만, 부상당한 수하들과 함께 사로잡히고 말았다.


흑마의 청년이 이끄는 화적떼는 꽤나 능숙해 보였다. 항거 불능한 관병들을 모아 포박하고 짐수레를 수습하며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묘향산의 초목이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그때, 초목의 흔들림이 갑자기 더 거세지면서 화적들의 머리 위로 검은 공간이 열려갔다.


화적들은 아직 눈치를 못 챘지만, 멀리서 지켜보던 이단 일행에게는 또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곧 그 안에서 시커먼 날짐승이 튀어나왔다. 놈은 넓적한 날개를 휘저으며 화적들과 포박된 관병들 주위를 한바퀴 맴돌더니 무서운 속도로 사람들을 덮쳐갔다.


사람보다 큰 박쥐가 존재할까? 분명 박쥐의 형체인데 날개를 펼치니 커다란 짐수레마저 덮을 정도였다. 이계의 마물(魔物)이 분명했고, 이단 일행의 목표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거대박쥐는 승전의 기쁨에 들떠있던 화적 무리를 곧바로 지옥으로 안내했다. 날개에 돋아난 날카로운 발톱과 몸체보다 길게 뻗어 나온 작살 같은 꼬리로 포박돼있던 관병들의 목숨을 앗아가더니, 날카로운 이빨로 지휘관의 목을 끊어버렸다.


끔찍한 살육장면에 놀란 화적 일당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살아있는 관병이 하나도 없었다.


화적의 청년 수괴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듯, 괴수를 향해 말고삐를 돌려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체들을 내동댕이치고 날아오른 박쥐는 말달려오는 청년을 무시하고 우왕좌왕하는 화적 무리를 덮쳐갔다.


마달 아저씨와 부친이 이단과 몸종만을 남겨두고 이계의 목표물을 향해 달려간 것이 아마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현장에 당도하려면 꽤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동안 박쥐는 창칼을 내밀어 저항하는 화적들을 하나둘 살육해나갔다.


화적들의 창칼은 관병을 꿰뚫고 벨 때는 위력적이었지만, 괴물인 박쥐에게는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할 정도로 무력해 보였다.


“야! 이 괴물 놈아!!!”


청년 수괴가 쩌렁쩌렁한 노성(怒聲)을 토하며 말을 몰아가자 박쥐도 이번엔 무시하지 않고 청년을 향해 날아갔다. 아마 그 우렁찬 소리가 거슬린 모양이라고 이단은 생각했다.


이때 이단의 눈에 들어온 장면은 훗날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검은 말을 탄 ‘조자룡’같은 청년과 거대한 박쥐가 상대를 향해 맞달려가고, 다른 쪽에선 부친과 마달 아저씨가 각자의 무기를 빼들고 괴물을 추격하는 장면이었다.


청년이 안장을 박차고 튀어 올라 박쥐의 꼬리를 베어갔다. 꼬리와 칼이 부딪혔음에도 묵직한 충돌음이 들렸다. 청년이 튕겨나가 간신히 착지했다. 그는 칼을 놓치진 않았지만 꽤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떨었다.


박쥐괴물도 이번엔 좀 아팠는지, 괴이한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가 다시 청년을 향해 내리꽂혔다. 이번엔 꼬리대신 날카로운 발톱을 앞세우며 청년을 몰아쳤다.


청년의 환도 쓰는 솜씨가 출중했지만, 상대는 평범한 짐승이 아닌 이계의 마물, 물리적인 힘만으로 해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윽고 청년의 칼이 부러져 날아가고 박쥐의 발톱이 청년의 어깨와 머리통을 움켜잡아갔다. 아슬아슬한 순간, 청년이 몸을 틀며 피해보지만 사정권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는지 얼굴에 할상(割傷)을 입고 나동그라졌다.


청년은 얼굴에 피가 흐르는 것도 개의치 않고 주변에 떨어진 창을 들어 저항하려 했으나 이번엔 박쥐의 꼬리가 창을 튕겨내 버렸다.


멀찍이 지켜보는 어린 이단의 양손에 땀이 배었다. 마치 자신이 저 청년이 된 양, 이를 악물고 시선을 쫓고 있었다. 제발 저 청년이 무사하기를 바랐으나, 박쥐괴물의 흉포한 공격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놀라게 한 죄를 추궁하듯이 청년을 몰아쳤다.


데굴데굴 굴러 피하던 청년이 나무 등걸에 걸려 꼼짝 못하게 되고, 박쥐괴물의 날카로운 꼬리가 그를 찔러가는 순간 청년은 포기한 듯, 어린 이단은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눈을 감아버렸다. 그때···,


“이 육시랄, 후레 괴물 놈아! 꼼짝 말거라.”


쩌렁쩌렁 울리는 걸쭉한 욕설이 청년과 이단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 아울러, 괴물박쥐의 시선도 돌려놓았다.


어느새 싸움터에 도착한 마달이 찰진 욕설과 함께 육덕진 몸으로 박쥐를 들이받고 있었다. 박쥐가 짜증스럽다는 듯, 꼬리의 방향을 틀어 새로운 방해물을 향해 쏘아갔는데 마달은 박도를 휘두르며 여유있게 받아쳐갔다.


마달 아저씨의 박도는 예사 모양과 달랐다. 날의 길이가 두 척(약 60cm)정도로 짧았으며, 도첨(刀尖)도 뾰족함이 없는 네모 각진 형태였다. 대신 두께가 아주 두툼해서 무사의 칼이라기 보단 도부(屠夫: 백정)의 것에 가까웠다. 한번은 아저씨가 칼을 풀어놓은 사이 칼장난을 하려고 들어보다가 무게를 못이겨 발을 찧은 적도 있었다.


그 육중한 박도를 장난감처럼 휘두르는 마달의 용력에 마물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더욱이, 마달의 박도에는 마물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묵기(墨氣)가 잔뜩 주입돼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쥐의 꼬리가 뭉텅 잘려나갔다.


얼굴에 피가 낭자한 화적의 우두머리 청년은 입을 쩌억 벌렸고, 이단은 멀리서 손을 번쩍 들며 환호를 질렀다.


누구보다 놀랐을 거대박쥐가 몸을 돌려 자신이 빠져나온 검은 공간으로 날아가려는 순간,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검은 학 한 마리가 박쥐를 덮쳤다. 부친 이죽(李竹)의 몸에 봉인된 영물(靈物)이었다.


그때 부친의 봉인 영물을 본 것이 이단으로서도 처음이었다. 허공에서 두 마리의 검은 짐승이 한동안 뒤엉키자 주위에 돌개바람이 몰아쳤다.


잠시 후 돌개바람이 멈추고 하늘로부터 거대한 흑학(黑鶴)이 고고한 날갯짓을 하며 내려왔다. 학의 부리에는 박쥐의 머리통이 물려있었고, 곧 머리 잃은 박쥐의 몸뚱이가 추락했다.


이죽이 손짓을 하자 흑학이 검은 기운으로 화(化)하며 이죽의 정수리로 사라졌다.


그리고는 머리가 분리된 박쥐괴수를 향해 손을 뻗었는데 그의 손에는 뭉툭한 검은 물체가 들려있었다. 기를 흡수하는 도구, 흡기척이었다.


괴수의 몸뚱아리가 마치 검은 가루덩어리처럼 분해되더니 기류에 휩쓸리듯, 흡기척을 통해 이죽의 몸 안으로 사라져갔다. 괴수가 뚫고 나왔던 검은 공간 역시 그의 손이 스쳐감에 따라 조금씩 지워져갔다.


그의 일련의 행동은 극히 자연스러워 보였지만, 그의 낯빛은 검붉게 상기돼 있었고 거무스름한 땀방울까지 잔뜩 맺혀있었다. 그동안 마달 아저씨는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고 박도를 움켜쥔 채 부친의 호위를 섰는데, 마치 다가오면 모두 베어버릴 듯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부친이 직접 손을 쓰는 모습을 처음 본 어린 이단은, 큰 감명을 받은 것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놀란 사람은···, 바로 화적의 청년 수괴였다.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한 청년이 이죽 앞에 꿇어앉더니 머리를 숙였다.


“어르신···, 저를 받아주십시오. 힘이 되겠습니다.”


수하의 절반 이상을 잃은 청년은 그날로 가족이 되었고, 도방 마달의 밑으로 배속됐으며, 지금은 마달을 능가하는 실력자가 돼 도방 자리를 물려받았다.


*****


미소를 머금고 과거를 떠올리던 현재의 이단이, 든든한 호위이자 조직의 한 영역을 이끌고 있는 도방을 바라보았다.


저 방갓 속의 얼굴엔 그때 괴물에게 입은 상처의 깊이만큼 도드라진 흉터가 가득할 것이다. 비록 과거 자신을 매료시켰던 늠름한 흑마청년의 패기는 사라졌지만 그보다 강한 경험과 노련함이 장착된 최강 무인의 모습을 보며 이단은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좋은 가족들이 옆에 있지 않은가. 그러다 문득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천두, 늘 고맙네”


갑자기 소주인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잠시 당황했던 도방 방천두가 이단에게 고개를 숙였다.


“소주께서 웃어주시니 더 바랄게 없습니다.”


둘이 마주보며 미소를 주고받았다. 이번엔 도방의 미소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때였다. 멀리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두 사람의 머리 위를 한 바퀴 돌았다.


얼마 후 까마귀가 날아온 쪽에서 검은 옷을 입은 누군가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도방이 이단의 앞을 막아서며 칼에 손을 얹다가, 상대를 알아본 듯 입을 열었다.


“아니,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멀리 점으로 보이다가 순식간에 눈앞에 멈춰선 사내, 오방(烏方)은 까마귀와 교감하는 자였으며 조직 내에서 정탐과 연락을 맡는 자들의 우두머리였다.


두 사람은 심각한 일이생겼음을 예감했다. 이 자는 긴급 상황에나 움직이는 사내이기 때문이다. 오방이 이단 앞에 부복(俯伏)했다.


“소주께 전합니다. 암종(暗宗)께서···, 흑화(黑化)하셨습니다.”


암종은 이단의 부친을 이르며, 흑화는 그들의 은어로 <죽음>을 뜻했다.


이단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흑룡이 나르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6 귀빈환대(貴賓歡待): 귀빈 대접을 받다 21.04.20 111 2 14쪽
25 망포화향(蟒抱花香): 이무기는 꽃향기를 품고 21.04.19 102 2 11쪽
24 호세등등(虎勢騰騰): 범의 기세가 솟구쳐 오르니 21.04.18 73 2 11쪽
23 불가살이(不可殺伊): 죽일 수 없는 짐승이로다 21.04.17 130 2 11쪽
22 일령이체(一靈二體): 하나의 영에 두 몸이라니 21.04.16 135 2 11쪽
21 유유상종(類類相從): 끼리끼리 모이게 될 것이다 21.04.15 86 2 11쪽
20 삼령일체(三靈一體): 세 영이 한 몸에 담기다 21.04.14 176 2 11쪽
19 몽상합령(夢想合靈): 합령의 술을 꿈꾸다 21.04.13 183 2 12쪽
18 혼탈남녀(魂奪男女): 사내와 계집의 혼을 빼놓으니 21.04.12 191 3 11쪽
17 은곡집회(隱谷集會): 은자의 계곡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21.04.11 208 2 11쪽
16 흑망조판(黑蟒組版): 검은 이무기가 판을 짜다 21.04.10 277 2 11쪽
15 갑호발령(甲號發令): 갑호소집령을 발동하였다 21.04.09 85 2 12쪽
14 영육분리(靈肉分離): 영과 육이 떼어지다 21.04.08 123 2 12쪽
13 목령흡생(木靈吸生): 목령이 생기를 빨아 먹다니 21.04.07 100 2 11쪽
12 지입마경(至入魔境): 입마의 지경에 이르다 21.04.06 78 3 11쪽
11 호추삼오(虎追三烏): 범이 세 마리 까마귀를 쫓누나 21.04.05 68 3 11쪽
10 암종탐세(暗宗眈世): 암종이 세상을 노려보다 2 21.04.04 94 3 11쪽
9 암종탐세(暗宗眈世): 암종이 세상을 노려보다 1 21.04.03 93 3 11쪽
» 실부지애(失父之哀): 아비를 잃은 슬픔에 빠지다 21.04.02 79 3 12쪽
7 호견비학(虎見飛鶴): 날아가는 학을 범이 바라보았다 21.04.01 99 3 11쪽
6 교우약조(交友約條): 벗이 되기로 약속하다 21.03.31 122 3 11쪽
5 이인동심(二人同心): 둘이 한 마음이더라 2 21.03.30 107 3 11쪽
4 이인동심(二人同心): 둘이 한 마음이더라 1 21.03.29 168 7 11쪽
3 사불아심(事不我心): 일이 내 마음 같지 않구나 21.03.29 180 7 12쪽
2 호자하산(虎子下山): 새끼 범이 내려오다 21.03.29 283 7 11쪽
1 서장(序章) 21.03.29 399 9 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