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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이 나르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무협

왕잼
작품등록일 :
2021.03.28 11:18
최근연재일 :
2021.05.18 18:00
연재수 :
54 회
조회수 :
5,183
추천수 :
140
글자수 :
277,754

작성
21.03.29 18:10
조회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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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글자
11쪽

이인동심(二人同心): 둘이 한 마음이더라 1

DUMMY

박광은 한양에 온 이후 처음으로 기방이란 곳에 와 있었다. 앞에는 한종로가 앉아 있고 기녀 둘이 술시중을 들고 있다. 한종로가 호기롭게 건배를 권한다.


“자자! 여기 있는 이 분이 누군지 아느냐? 궁궐 최고의 무관이시다. 앞으로 운검((雲劍)이 되실 분이라 이거지. 딸꾹! 건배!”


운검은 임금의 최측근 좌우 호위무관이다. 운검이 된다는 건 그야말로 무인으로선 최고의 영예이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 해 후배인 자신을 이렇게 치켜세우는 한종로의 혀는 이미 꼬여 있었다.


한종로의 꾀병으로 엉겁결에 떠밀려 나간 어전시합에서, 박광은 결국 우승까지 해버렸다. 실력은 자신 있었지만, 주목받는 걸 원치 않던 박광에게는 좋지 않은 결과였다.


지겨운 궐 생활, 조금만 더 버티다가 태백산으로 내뺄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오늘 우승으로 덜컥 익위사(翊衛司: 세자를 호위하는 조직)에 발탁돼 버렸다. 세제인 연잉군을 지근에서 호위하게 된 것이다.


오늘 자기 덕에 우승자가 된 거라며 한턱 쏘라 해서 예까지 끌려왔는데 이 양반 상태가 영 아니었다.


“광아! 아니지, 박형!! 이제 출세 길을 올라탔으니, 앞으로 잘 봐주셔잉?”


혀 꼬인 주정을 남발하던 한종로는 급기야 술상에 이마를 처박고 뻗어버렸다. 박광은 술 냄새보다 독한 분 냄새에 더 취할 지경이었다. 옆의 기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진한 향내에 코는 마비되고 머리는 지끈거렸다. 지끈지끈한 머릿속에서 툭 삐져나온 생각.


‘도성의 여인들이 모두 이런 냄새를 뿜고 다닌다면 분명 세상은 마비될 거야.’


갑자기 태백산의 청량한 공기가 그리워졌고, 분내나지 않는 미리내의 뽀얀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독한 분 냄새를 피해 밖으로 나온 그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뒷간으로 향한다. 술기운이나 빼고 정신 좀 차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시원하게 오줌줄기를 쏟아내면서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물이 몸 안에 있을 수 있는 건지, 이러다가 체액이 고갈돼 말라 비틀어 죽는 건 아닌지···, 히죽히죽 웃고 있는데, 갑자기 목 뒤의 솜털이 곤두섰다.


*****


<명류장>에서 뛰쳐나온 이단은, 한양 저자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해 저문 밤의 초입, 그가 접어든 운종가(雲從街:한양의 대표적 상가거리) 시전(市廛)들은 진열된 상품을 거둬들였고, 시전의 주인이거나 종사자로 보이는 양민들은 그날의 수지(受支)를 얘기하거나 다음날 필요한 목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루하루 자신들의 영리를 위해 치열한 노력을 하는 모습이 엿보였는데, 순간 그네들의 사는 모습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저들은···, 오로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살고 있겠지?’


이웃한 가게와 경쟁관계일 터인데 저들끼리 농을 주고받고 히히덕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조정은 병약한 왕을 사이에 두고 노론과 소론의 당쟁과 살육이 극에 달한 상황이지만, 백성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를 의지하며 살고 있었다. 도성에 같이 살고 있으면서도 궐을 경계로 안팎의 생존 모습은 극과 극이었다. 궐을 구분하는 담과 문이 마치 인간계와 이계(異界)를 가르는 차원문처럼 느껴졌다.


‘내가 살기 위해 상대를 잡아먹어야 하는 궐내의 권력투쟁이 이계의 괴물들과 뭐가 다를까?’


운종가를 지나 광통방(종로에서 남대문으로 통하는 큰길가)으로 꺾어지자 발그레한 좌등(坐燈)불빛들이 밤을 밝히고 있었다. 술과 가락과 풍류를 파는 곳이라고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다. 흐트러진 매무새의 사내들이 비틀대며 꼬인 발걸음을 옮기고 있고, 좌등 불빛이 닿지 않는 담 너머에선 가야금 소리와 여인의 웃음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오늘은 정말 취하고 싶구나!’


낭패였다. 어디든 들어가서 흠뻑 취하고 싶었지만, 부친과 다투고 뛰쳐나온 마당이라 전낭이 없었다. 항상 어딜 가나 도방(흑방갓)이 수행하기에 따로 엽전꾸러미를 챙겨 다닐 필요가 없었으니까.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까운 곳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젠···, 한양 도성에도 나타나는가?’


이단은 본능적으로 인근 담을 넘어 지붕으로 올라가, 방금 느낀 탁한 기운을 향해 뛰었다. 춘심관이라는 기방의 지붕에 다다르자 그 기운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아래 어둠 속에 사람만한 검은 물체가 있었고, 그 앞에 비틀거리는 한 취객이 서있었다.


*****


곤두선 솜털이 위험신호를 발했다. 등 뒤에 무언가 있었다. 박광은 허리춤을 만져봤지만, 방에 두고 온 칼이 거기 있을 리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족제비를 닮은 괴물체가 입맛을 다시며 노려보고 있었다. 달빛에 반사된 괴물체의 송곳니가 싸늘하게 번쩍였다.


박광이 몸을 채 돌릴 새도 없이 족제비괴물이 큼지막한 발톱을 세우고 덤벼들었다. 억지로 몸을 틀어 맨손으로 반격하려는데, 댓돌에 발이 걸리며 다리가 풀렸다.


‘젠장, 술 때문에 인생 이렇게 종치는구나.’


박광은 애꿎은 술을 원망하며 균형잡기를 포기하고 아예 바짝 드러누웠다. 족제비 괴물이 보기엔 항거불능 상태로 보였으리라. 방심하고 들어올 때 무릎으로 급소치기를 날릴 요량이었다. 괴물에게도 낭심이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박광의 인생이 종칠 일도, 괴물의 급소가 걷어차일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덤벼들던 놈의 동작이 갑자기 멎는가 싶더니 부르르 떨면서 박광의 배 위로 엎어지는 게 아닌가.


박광은 방금 전, 얕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진땀을 닦으며 괴물체를 젖혀보니 뒤통수에 웬 단검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틀리지 않았구나.”


한 사내가 중얼거리며 지붕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마치 검은 도복을 입은 신선처럼 보였다. 검은 옷에 대비되는 하얀 얼굴이 달빛을 받아 더 파리하게 느껴지는 이단이 찌푸린 표정으로 괴물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단검을 회수해 돌아선다. 쓰러진 취객의 안부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박광은 놀란 표정으로 사내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봤다. 몸 안에서 찌릿한 느낌이 흘러나왔다. 잠재된 기운이 거칠게 반응하고 있었다.


‘어라? 언제였더라···, 이런 느낌이 있었는데?’


과거 언젠가 이런 비슷한 반응을 느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알딸딸한 술기운에 머리가 지끈거렸거니와, 그 멋진 사내가 바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가?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인생 종치는 걸 막아준 은인이기도 했지만, 단검 하나로 평범한 짐승도 아닌 요물을 해치운 실력이 결코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 무공으로 이런 괴물을 제거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사내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박광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실실 웃으며 사내의 발길을 잡았다.


“형씨! 밤은 길고 술은 넘치는데, 한잔 안 하실라우?”

“······?!”


마침 술이 고팠던 이단이 초면의 상대와 대작을 하고 있다. 물론 술만 고팠다면 이런 즉흥적인 합석은 없었을 것이다. 이십여 년 살아오며 제대로 된 친구 하나 둔 적 없었다. 가문도 가업도 극히 비밀스러웠고, 마음을 준 사람들에게 몇 번 배신감을 느끼면서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단지, 이 사내에게서 묘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인데 담백하고 순수한 선기였다. 그러면서 알 수 없는 힘이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자신과는 정반대의 성질이지만 이상하게도 닮은 구석도 있어 보였다.


‘뭘까? 이 사내는?’


방구석에서 한 사내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고, 기녀들은 내보내졌다.


“박광이라 하오.”


다짜고짜 통성명을 시작한 청년은, 격식과는 담을 쌓은 친구 같았다. 초면부터 손을 덥석 잡고 끌지 않나, 이것저것 내키는 대로 떠벌이는 것이 자신과는 판이하게 다른 환경에서 자란 듯 했다.


“아 그래서 제가 빨리 태백산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말이죠. 곧 가야하는데···, 재수 없게 이번에 세제 저하를 모시게 돼서 못 가게 됐다 이 말입니다. 아! 연잉군 저하가 재수 없다는 건 아니고···,.뭐 없으니 하는 말이지만, 궐 사람들 좀 인간적인 맛은 없다 이거죠.”


박광은 검은 도복의 준수한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차가운 표정과 미간에 검은 기운이 서려있는 게 흠이었지만, 요물을 단검 하나로 해치운 실력과 묘한 기운에 반한 것이다. 어디서 수련한 도사 같은데 도무지 입을 열지 않는다. 말수가 적어서 자기 혼자 벽에 대고 얘기하는 느낌이었지만, 어렵사리 이름을 얻어냈다.


앉자마자 자기 이름을 깐 박광에게 끝까지 통성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단은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일어 잠시 머뭇거렸다.


“왕···, 왕단이라고 하오.”


‘고려 왕족 출신인가?’라고 박광은 생각했다. 상대에게서 알 수 없는 기품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왕단? 멋진 이름이군요? 헤헤, 그럼 이제···, 음···, ‘왕도사’라고 부르겠소.”

“편한대로 부르시오.”


자신의 내력을 구구절절 말해주지 않는데, 굳이 캐물어 알 것이 무엇이더냐. 말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그저 들어주기만 하면 되었다. 하염없이 신세타령을 한다.


어린 시절 부모를 괴물에게 잃었다. 무예를 익혀 괴물들을 때려잡으려 했는데 팔자에 없던 우림위 위사가 돼 궁궐이나 지키고 있다.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나랏님과 관료들을 싸잡아 욕한다. 한양 와서 한 번도 꺼내보지 못한 얘기였다.


속이 후련했다. 이렇게 내 마음을 들어줄 벗이 생긴 게 얼마만인가? 얘기할 게 더 많은데 눈꺼풀이 감겨온다. 생각해보니···, 이틀째 잠을 자지 못했다.


한참동안 자기 신세를 얘기하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박광을 보며 이단은 쓴웃음을 지었다. 듣자하니, 궁궐 우림위 무관인데 이번에 익위사로 발령이 났단다. 궐 이야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아픈 기억이 떠올라 술잔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말 많은 사람을 멀리 하는 편이지만, 이 자는 나쁘지 않았다. 왠지···, 몸속에 들어찬 탁한 기운이 잠시 맑아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게다가, 궐인들 흉까지 본다. 임금이건 관리들이건 나라의 주인행세를 하는 자들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듯 보였다.


‘저런 생각으로 어찌 나라의 녹을 받고 있을까?’


기묘하게 여겨졌지만 나름의 사정이 있으리라. 이 자도,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다는 동류감(同類感)이 생겼다.


박광이 다음날 일어나니 해가 중천에 있었다. 한종로는 온데간데없고, 밤새 술잔을 나눴던 왕단이란 도사도 보이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냉수를 찾는데, 술상 위에 쪽지 하나가 놓여 있다.


<이인동심(二人同心:둘이 같은 마음이오)>


그 도사와 대체 무슨 얘길 나눴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픈 머리 쥐어짤 시간도 없었다. 익위사 출근 첫날부터 지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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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일령이체(一靈二體): 하나의 영에 두 몸이라니 21.04.16 135 2 11쪽
21 유유상종(類類相從): 끼리끼리 모이게 될 것이다 21.04.15 86 2 11쪽
20 삼령일체(三靈一體): 세 영이 한 몸에 담기다 21.04.14 176 2 11쪽
19 몽상합령(夢想合靈): 합령의 술을 꿈꾸다 21.04.13 183 2 12쪽
18 혼탈남녀(魂奪男女): 사내와 계집의 혼을 빼놓으니 21.04.12 191 3 11쪽
17 은곡집회(隱谷集會): 은자의 계곡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21.04.11 207 2 11쪽
16 흑망조판(黑蟒組版): 검은 이무기가 판을 짜다 21.04.10 277 2 11쪽
15 갑호발령(甲號發令): 갑호소집령을 발동하였다 21.04.09 85 2 12쪽
14 영육분리(靈肉分離): 영과 육이 떼어지다 21.04.08 123 2 12쪽
13 목령흡생(木靈吸生): 목령이 생기를 빨아 먹다니 21.04.07 100 2 11쪽
12 지입마경(至入魔境): 입마의 지경에 이르다 21.04.06 78 3 11쪽
11 호추삼오(虎追三烏): 범이 세 마리 까마귀를 쫓누나 21.04.05 68 3 11쪽
10 암종탐세(暗宗眈世): 암종이 세상을 노려보다 2 21.04.04 94 3 11쪽
9 암종탐세(暗宗眈世): 암종이 세상을 노려보다 1 21.04.03 9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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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인동심(二人同心): 둘이 한 마음이더라 2 21.03.30 107 3 11쪽
» 이인동심(二人同心): 둘이 한 마음이더라 1 21.03.29 168 7 11쪽
3 사불아심(事不我心): 일이 내 마음 같지 않구나 21.03.29 180 7 12쪽
2 호자하산(虎子下山): 새끼 범이 내려오다 21.03.29 283 7 11쪽
1 서장(序章) 21.03.29 398 9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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