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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이 나르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무협

왕잼
작품등록일 :
2021.03.28 11:18
최근연재일 :
2021.05.18 18:00
연재수 :
54 회
조회수 :
5,184
추천수 :
140
글자수 :
277,754

작성
21.03.3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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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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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교우약조(交友約條): 벗이 되기로 약속하다

DUMMY

박광이 이단의 소매를 끌고 들어간 곳은, 여인네들이 드나드는 방물점 골목이었다.


규방 처녀들이나 마나님들만 왕래하는 골목을 훤칠한 남정네 둘, 아니 셋이 들어서자 여인들이 일제히 길을 틔웠다. 마치 옷깃이라도 닿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인들의 눈은 박광에게 소매를 잡혀 끌려오는 사내, 이단에게 밀착돼 있었다. 잘난 서생들이 많은 한양 도성에서도 그렇게 잘생긴 남자는 드물 것이다.


-아!

-어머!!

-어쩜 저렇게···

-와! 뉘집 도령이실까···

-어머니, 왜 저를 이리 일찍 출가시키셨어요?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는데, 연령이 높아질수록 표현수위가 대담하고 노골적이었다. 여인들의 뜨거운 시선을 느꼈는지 이단은 볼이 발그레해졌고, 박광은 코를 벌름거렸다.


‘아, 이곳의 분 냄새는 춘심관 저리가라구나. 아이쿠 머리야.’


박광은 어제 춘심관에서 취기가 금방 올랐던 것이, 분명 기녀들의 분 냄새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진한 분 냄새에 경계심을 품게 됐는데···, 분 냄새에 약한 그가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미리내에게 가져다 줄 선물 때문이었다.


산에서 내려오기 전, 그녀에게 약속을 했다.


-이렇게 생이별하는 거 이 오라비도 정말 싫은데, 이왕 한양에 가는 거 열심히 돈 모아서 장가밑천도 마련하고 예쁜 가락지도 꼭 사올게.


두둑했던 상금이 동나기 전에 그녀에게 줄 가락지라도 사러 나온 길인데, 도무지 고를 자신이 없어 고민하던 차에 때마침 이단과 조우한 것이다.


‘사람이 기품도 있고 인물도 출중하니, 아녀자들의 취향을 잘 알겠지?’


분명 자신보다는 연애 경험도 많을 것이고 선물 고르는 안목도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방물점 골목을 기웃대다가, 눈에 띄는 상점이 있었다. 상점 편액(扁額)들을 보니 다들 나무판 위에 가게 이름을 대충 적어놓았는데, 유독 나무판에 황금빛 비단을 덧대서 반짝이는 편액이 있었다. <영반월>이라는 붉은 글자가 강렬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상점에 들어서자 주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호들갑을 떨며 맞이했다.


“호호호. 공자님! 도성에서 가장 신상품이 넘치는 저희 영반월(詠半月)에 잘 오시었어와요. 어쩜 이리 귀티가 좔좔 흐르실까나? 마침 어제 막 청나라에서 들어온 황금 장신구들하고, 이건 아무나 안 보여주는 건데엥, 저 멀리 포도아(포르투갈)와 노서아(러시아)에서 가져온 분첩도 보여드릴까? 아휴, 어느 댁 처자인지 복도 많지.”


여주인이 먼저 들어온 박광에겐 잠시 시선을 스치기만 하고는, 뒤에 따라온 이단에게 눈동자를 박은 채 주절거리는데 실로 대단한 호들갑이었다. 나이는 아무리 못 먹어도 마흔은 훌쩍 넘어보였지만 온갖 교태를 혀에 발라놓았나 싶었다.


게다가 손가락마다 번쩍거리는 가락지에다 머리채에는 서너 개의 비녀도 모자라 화려한 떨잠까지 꽂고 있었다. 몸을 살랑살랑 흔들 때마다 금붙이들이 반짝이는 것이, 무슨 이동 진열장 같았는데, 장신구에 문외한인 박광이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화려하고 비싸보였다.


“아···, 음, 내..내가 아니라···, 이 친구가”


주인여자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이단이 말을 더듬거리며 박광을 가리켰다.


“네엥? 아··· 여기 장부님이셨구나앙···. 아주 헌칠하시구나아···. 아···, 뭐가 필요하시죠? 은가락지는 조오기”


못내 아쉬운 듯 말수가 줄어드는 여주인이 박광을 흘깃 쳐다보더니 손가락으로 구석 한 쪽을 가리켰다. 눈은 여전히 이단에게 꽂아둔 채로 말이다.


하긴 이단의 얼굴이야 남자인 박광이 봐도 한눈에 반할 정도였으니, 저 방물점 주인장의 태도는 십분 이해가 됐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은 왕이거늘.


-텅그렁


온 신경이 시각으로 쏠려있던 여주인의 관심이 돌아선 것은, 박광의 허리춤에 있던 돈주머니가 묵중하고 경쾌한 소리를 울리며 탁자 위에 던져지면서였다.


그녀의 신경이 시각에서 후퇴해 청각을 거쳐 후각으로 순간이동했다. 돈 냄새를 맡은 여주인은 아차 싶었는지 잠시 동공이 흔들렸지만, 이내 평정을 찾은 듯 박광을 향해 교태로운 미소를 날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새로운 연기가 시작된 것이다.


“헌헌장부님과 미공자님. 소첩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와요.”


이단과 박광은 순간 어젯밤에 먹은 술이 치밀어 올랐다. 어울리지도 않는 교태로 밑도 끝도 없이 들이대는 여주인의 느끼한 목소리에 속이 울렁거렸기 때문이다.


“저희 가게가 왜 <영반월>인지 아시와요? 소첩이 지금보다 더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 반월이라고 불리었지요. 그래요···, 한때 평양성에서 명월 황진이가 재래(再來)했다고 떠들썩했던 때가 있었더랬지요. 제가 바로 황진이의 후예라고 소문 자자했던 그 반월이랍니다.”


이단과 박광의 눈이 마주쳤다.


‘어서 여기서 빠져 나갑시다’

‘그래야겠죠? 정신이 혼미하네요.’


내공으로 상대의 뇌리에 말을 때려 박는다는 전음술(傳音術)은 전설에나 등장하는 기술이었고, 위기감을 느낀 두 동년배는 충분히 눈빛만으로 대화가 가능했다. 자칭 반월이라고 하는 여주인의 말을 끊고 들어가 고별인사를 하려 하는데, 반월이 갑자기 한시를 읊기 시작했다.


“영반월(詠半月)!! 반달을 노래하오.

수착곤산옥(誰斲崑山玉), 그 누가 곤륜산의 옥을 잘라내

재성직녀소(裁成織女梳), 직녀의 머리빗을 만들었을까?

견우이별후(牽牛離別後), 견우가 떠나간 이후

만척벽공허(謾擲碧空虛), 푸른 하늘 허공에 수심에 겨워 던졌다네.”


황진이의 [영반월]이라는 오언절구 한시였다. 이 시를 익히 알고 있던 이단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설마 했는데, 이 유명한 시를 태연히 읊조리는 반월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였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인거냐···.’


하지만, 한시 공부와 거리가 먼 박광은 뭔가 호기심을 보이는 눈치였다. 그들의 표정을 읽은 반월이 몸을 살짝 움직여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마치 박광과 이단이 눈빛 대화를 나누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차단해버리는 모양새였다.


반월이 박광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리더니 저고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영롱한 빛깔의 옥빗이었다.


“장부님, 견우를 닮은 장부님! 이 빗이 바로 직녀가 푸른 창공에 날렸다는 그 빗이어요. 옥중의 옥, 곤륜산의 옥으로 빚은 빗이지요. 소첩들의 우상인 황진이께서 어렵게 구해 사용하던 것을 소첩 반월이 물려받아 고이 간직하고 있었지요.”


박광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직녀의 빗이라니? 황진이의 빗이라니?’


박광이 반월에게 옥빗을 넘겨받아 귀한 보물을 다루듯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황홀한 표정으로 감상하기 시작했다.


이단 역시 입이 턱 벌어졌다. 저런 뻔뻔한 사기행각을 벌이는 반월도 대단하지만, 정말 곧이곧대로 믿게 된 건지 아예 정신을 놓아버린 박광의 어수룩함에 더 놀란 것이다.


“에헴, 어험!”


이단이 기침을 하며 박광의 나간 정신을 깨워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정말···, 곤륜의 옥이 최고로 쳐주는 옥이지요? 몇 냥입니까?”


얼씨구나, 곧바로 가격흥정에 들어갔다.


“장부님에겐 특별히 스무 냥입니다.”

“열 냥 어떻소?”

“귀한 물건의 가격을 깎으면 가치도 깎이는 법이지요. 하지만 장부님은 이 물건의 임자 같으시니···, 열 닷 냥만 주시지요.”

“그래요? 그럼 그럽시다.”


턱없는 값을 부르는 반월과 턱없이 속아 넘어간 박광의 흥정이 대충 끝나고, 이것저것 반월이 추가로 권하는 것을 보면서 박광의 입은 점점 헤벌쭉 벌어졌다. 미리내가 좋아할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단은 더 이상 뜯어말리기를 포기했다. 박광의 천진난만한 표정을 보면서 행복의 실체를 느낄 수 있었다. 지난밤 저 자가 술에 취해 한 얘기가 떠올랐다.


-왕도사! 저는 미리내가 참, 정말로, 무조건 좋단 말입니다. 딸꾹! 근데 말이죠. 난 여기 있는데, 걔는···, 산속에 갇혀있어요. 꽁꽁 가둬놓고 나한테 안 보내준다 이 말입니다. 이게 말이 되는 겁니꽈? 크헝헝!


산중에 두고 왔다는 그 처자에게 줄 선물일 것이다. 연모하는 사람이 좋아할 일을 준비하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순간이리라. 그 행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사기를 당한들 본인이 행복하고 만족한다면 무엇이 아쉽겠는가?


‘나는 저 친구처럼 행복을 맛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


문득 이단은 자신의 처지를 돌아봤다. 수연과의 지난 시절이 떠오른다. 명류장을 보수하면서 사대문내 저택에 임시로 거처할 때 옆집에 살던 소녀.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을 가장 싫어한다며, 거침없이 수시로 찾아와 공부도 놀이도 같이 하던 그녀는, 지금 조선의 국모(國母)가 되어 있었다.


질끈 입술을 깨물며 박광을 바라본다. 진정 부러웠다.


황진이가 썼다는 옥빗에다가 중국 황후가 썼다는 옥가락지에 몇 점 더 얹어서 바리바리 싸들고 나온 박광은 헤벌쭉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통통했던 돈주머니가 홀쭉해졌지만 마치 횡재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하긴, 반월이라는 늙은 여우가 혼신의 연기로 구워삶는 과정을 지켜본다면 천년고찰의 석불도 전대를 풀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미모는 보잘 것 없었지만, 사람을 홀리는 기술만 놓고 본다면···, 분명 황진이보다 몇 수는 위일 것이라고 이단은 생각했다.


“왕도사 덕분에 싸게 구한 거 같소. 저 여우같은 주인이 자꾸 왕도사를 흘깃거리느라 정신이 팔려 왕창 깎아주지 않았겠소? 헤헤”


박광의 넋빠진 모습을 보면서 이단은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작별을 고하고 돌아서는데, 박광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낭랑하게 소리쳤다.


“어이 도사양반! 담에 우연히 또 만난다면, 징한 인연이니까 그때부턴 서로 벗으로 삼읍시다.”


이단은 가던 발길을 세운다.


‘벗이라···.’


얼마 만에 들어보는 말인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러고 보니 태어나서 제대로 벗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이 넓은 한양 땅에서 연이틀 두 번이나 마주쳤으니 대단한 인연이긴 했다.


자신과 정반대의 성질을 갖고 있지만, 같은 생각과 상황 속에 사는 것 같아 동류감이 느껴지는 사내. 벗 하나 사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이단은 고개를 끄덕여주고 발길을 옮겼다.


이단을 밀착 수행하는 도방은 깜짝 놀랐다. 평소 차갑고 어두운 소주인(小主人)이었다. 수하들과도 불필요한 말을 섞는 법이 없었다. 그런 소주가 언제 저런 무례한 놈을 알게 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소주의 흐뭇해하는 표정을 본 게 얼마만인가. 그가 아는 한, 소주에게 벗이라 불릴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저 알 수 없는 자를 벗으로 삼으려 한다고? 원행을 마치고 복귀하면, 꼭 주군께 보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광은 멀어져가는 두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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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일령이체(一靈二體): 하나의 영에 두 몸이라니 21.04.16 135 2 11쪽
21 유유상종(類類相從): 끼리끼리 모이게 될 것이다 21.04.15 86 2 11쪽
20 삼령일체(三靈一體): 세 영이 한 몸에 담기다 21.04.14 176 2 11쪽
19 몽상합령(夢想合靈): 합령의 술을 꿈꾸다 21.04.13 183 2 12쪽
18 혼탈남녀(魂奪男女): 사내와 계집의 혼을 빼놓으니 21.04.12 191 3 11쪽
17 은곡집회(隱谷集會): 은자의 계곡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21.04.11 207 2 11쪽
16 흑망조판(黑蟒組版): 검은 이무기가 판을 짜다 21.04.10 277 2 11쪽
15 갑호발령(甲號發令): 갑호소집령을 발동하였다 21.04.09 85 2 12쪽
14 영육분리(靈肉分離): 영과 육이 떼어지다 21.04.08 123 2 12쪽
13 목령흡생(木靈吸生): 목령이 생기를 빨아 먹다니 21.04.07 100 2 11쪽
12 지입마경(至入魔境): 입마의 지경에 이르다 21.04.06 78 3 11쪽
11 호추삼오(虎追三烏): 범이 세 마리 까마귀를 쫓누나 21.04.05 68 3 11쪽
10 암종탐세(暗宗眈世): 암종이 세상을 노려보다 2 21.04.04 94 3 11쪽
9 암종탐세(暗宗眈世): 암종이 세상을 노려보다 1 21.04.03 9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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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호견비학(虎見飛鶴): 날아가는 학을 범이 바라보았다 21.04.01 99 3 11쪽
» 교우약조(交友約條): 벗이 되기로 약속하다 21.03.31 122 3 11쪽
5 이인동심(二人同心): 둘이 한 마음이더라 2 21.03.30 107 3 11쪽
4 이인동심(二人同心): 둘이 한 마음이더라 1 21.03.29 168 7 11쪽
3 사불아심(事不我心): 일이 내 마음 같지 않구나 21.03.29 180 7 12쪽
2 호자하산(虎子下山): 새끼 범이 내려오다 21.03.29 283 7 11쪽
1 서장(序章) 21.03.29 398 9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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