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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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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7.03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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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6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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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


“어이.”


릿샤가 입을 열었다. 제냐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본다. 벌써 몇 달 째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여성이었다. 사귄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었고. 그냥 얘기를 나누는, 인터넷 상의 지인이라는 의미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인터넷 상에서의 만남이지만, 실제 만남과도 거의 같은 질감이었지만 말이다.


“에.”


제냐는 그녀에게 답했다. 제대로된 대답은 아니었다. 입을 열자마자 그냥 바로 나오는 소리를 뱉은 것에 불과했다.


길드 하우스의, 미팅 룸이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장 익숙한 장소. 그리고 날아오는 원거리 창격에 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제냐와 최태현, 라이엔이 이제 막 미팅 룸에 들어오고 있던 차였다.


미팅 룸 내부에는, 릿샤와 호아킨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릿샤는 길드 마스터라도 되는 양, 회의실의 가장 상석이랄 수 있는 집무 데스크 앞의 의자에 앉아 있다.


호아킨은 소파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고. 그는 작은 다과 따위를 어디서 사 왔는지 우물거리고 있었다. 게임 내에서 다양한 식도락을 즐기는 건,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에게 아주 큰 의미였다.

먹어도 먹어도, 완벽한 맛을 느낄 수 있으면서 살은 찌지 않는다니!

그야말로 최고의 컨텐츠가 아닌가.


다만 이곳에도 포만감이라는 건 존재를 하고, 한계 이상으로 먹을 수는 없었으니 엄밀히 말해 ‘무한정 처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긴 하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의 삶보다, 게임 속 캐릭터의 일상은 다이나믹한 경우가 아주 많았으니. 배부르게 먹어도 금방 소화가 된다. 특히 물리적인 전투를 하는 근거리 전투직의 경우에는 의무적으로 섭취해야 하는 칼로리도 있었고.


기왕이면 좋은 맛을 느끼고자 하는 건 플레이어들에게 깨나 진지한 과제였다.

그만큼 현실과 거진 다를 바 없는 게임을 만들어냈다는 의미도 된다.


게임에서 가졌던 ‘신경’ ‘감각’ 따위는 미약하지만 현실에도 영향을 미친다. 애초에 감각 신경계에 접근을 해서 보여주고 있는 가상현실 세상이 아니던가.

깊은 상상을 하고난 뒤에, 그 흔적이 몸에도 남듯이. 생각만 해도 비슷한 동작 부위의 근육에 힘이 들어가고 자극이 되는 경우가 있지 않는가. 몰입도 높은 꿈을 꾸었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고.

그 ‘포만감’은 로그 아웃을 한 현실에도 아주 희미하게는 남아 있어서.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입장의 사람들이나. 혹은 피치 못할 이유로 배를 곪아야 하는 이들이 게임 내에서 대리 만족을 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게임 속 캐릭터가 먹는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감각으로 느끼니. ‘대리’ 만족이라는 표현이 맞을 지는 모르겠으나.


호아킨은 비스킷 류를 좋아한다. 지금도 그걸 우물거리고 있었고. 그는 일행들이 들어왔으나 느긋하게, 아주 늦게 인사를 한다.


“여.”


왔는가. 느긋한 면이 있는 아저씨였다. 제냐는 호아킨을 볼 때마다 느낀다. 안정감이 있다고. 제냐 역시 그런 편인 성격이었다. 호들갑 떨지 않고, 주변의 요란함을 조금 속으로 삭이는 류의.

템포가 잘 맞는다면, 옆에 있기에 좋은 유형의 성격인 건 확실했다. 호아킨은 릿샤와도 잘 맞는 것 같았고. 변신술로 곰의 형상으로 변할 수도 있고. 그런 의미가 아니더라도, 어딘지 곰같은 사내였다. 느긋하게, 다른 이들을 늘 잘 받아주곤 하는.


제냐가 벌컥 문을 열었고, 그 옆에 최태현과 라이엔이 있다. 제냐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와 있었군요.”

“응.”


‘와 있었냐’는 말은 로그인을 했었냐는 말은 아니었다. 로그인을 한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길드원끼리, 아는 유저들끼리는 알 수 있었으니까. 그가 말한 건, 로그인을 해서 게임 내에 들어온 이후에. 대공령으로 떠날 준비를 다 마치고 길드 하우스에 와있는 줄 몰랐었다, 라는 이야기다.


릿샤는 고갤 끄덕거린다.


“어딜 갔다가 오는 거야?”


굳이 텍스트 메세지로 재촉을 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묻는 것이 ‘사냥꾼들’의 스타일이기는 했다. 길드원들끼리, 크게 닦달을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아무리 심각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고작, 게임 속의 일일 뿐이지 않은가.


몰입을 하고 집중을 해야 할 때는 사력을 다하기는 하지만. 결국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유흥으로 삼으려고 들어온 세계였다. 그것을 위해서 사람 간의 관계를 망칠 필요는 전혀 없다. 그 정도 합의나 어른스러움은 있는 양반들이었다. 어찌 보면, 지나치게 느긋하다고도 할 수 있었고.


그건 ‘제냐’에게 꼭 맞는 템포이기도 했다. 김서원의 성격 상, 너무 많이 잔소리를 하고 옆에서 들들 볶는다면, 도리어 튕겨나갈 확률이 높았다. 그런 성격 탓에, 어느 정도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거리감이 있는 건지 모른다.


중앙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는 몇 년간, 제대로 사귄 친구들이 썩 많지 못했다. 부모님과의 사이도,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어딘가 서먹한 구석이 있었고. 자신만의 길을 찾지 못해서, 주변이나 세상에 대해서 투정을 부리고 있다- 라는 귀여운 이야기로 설명할 수도 있을 테였다.


김서원은 누군가한테 한 번도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제 나름대로의 성장통을 겪는 걸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언제나 성장통을 겪는다. 10대 때는 10대 때의, 20대 때는 20대 때의. 큰 변혁을 인생에서 겪는다면, 그 때에 맞는 어려움들이 있는 법이었다. 40대, 50대. 제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이지만. 삶에서 어려움을 겪는 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일일지도 몰랐다.


물론 경험이 쌓이고 성장을 하면서. 이전의 어려움을 다시 겪는 일은 없을 수 있었지만.


아무튼 김서원은 사회를 향해서 나가야 하는 입장이다.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학교를 나왔고, 졸업에도 당장 큰 문제는 없다. 4학년 생활만 잘 마치면 된다. 남은 두 학기.


그리고 가장 어려운 시간이기도 했다. 4학년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라는 건. 학교 생활을 마치는 것보다도, 다시금 자리를 잡을 새 둥지를 찾는 일이다.

갈만한 곳이 있을런가···. 김서원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확실한 열망이 아직 없다는 점이다. 자기가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지. 어디에 가장 미칠 수 있는지. 자신의 열정을 온전히 쏟을만한 구석이 없다는 것.


늘 표정도 없이 돌아다니면서, 사실은 누구보다도 열띤 열의를 쏟아내고 싶은 편인 것이 김서원이었는데. 자신을 온전히 내던지고 쏟아낼만한 분야가 어디 없을까, 하는 게 이 청년의 가장 속 깊은 고민거리다.


그 와중에 비련의 시나리오는 제법 훌륭한, 시간벌이가 되어주었다. 생각보다 집중이 잘 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저, 고작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접속을 했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만듦새가 괜찮은 작품이었다. 현실이라고 문득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게임을 하다가.


게임 시스템도 마음에 드는 점이 많았다. 쉽게 가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다. 뻔한 것도. 이 게임은 뻔하지도 않았고, 쉽지도 않았다. 어려운 길을 갔을 때, 제대로 보상을 해주는 것도 말이다.

김서원은 무언가 성취하는 걸 좋아한다. 그 스스로는 그것에 관심이 없다고 말을 하더라도. 본심이라는 건 숨기기 어려운 법이다.


그리고 ‘성취’라는 걸 위해서, 무엇보다 고생스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고생스런 과정이라는 건 곧 ‘성취’와 직결되는 것이기에. 역설적으로 말해 김서원은 ‘고생스런 과정’을 가장 좋아한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그런 류의 인간에게 가장 잘 맞는 게임이었다.


아무튼 지금 시점에서 중요한 점은,


헌터즈 길드의 길드원들은 모두 하나같이, 마음이 잘 맞고, 김서원의 템포에 잘 따라주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다.


릿샤는 퉁명스럽지만, 그녀의 말이나 행동이 무례함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건 그녀가 그만큼 현명하다는 말도 될 테였다. 머리가 좋다는 게 꼭 현명함으로 이어지진 않으나. 릿샤는 나름대로 그런 편이었다.

여러모로 고생을 하면서,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굴어야 하는가를 배운 편이다.

그녀도 삶에서 참 많은 고난이 있었다. 모나빠진 성격과, 그에 반대되는 아리따운 외모와, 예리하고 냉철하며 특별한 수준의 지적 능력이라는 건. 참 세상 살기가 피곤한 조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이들 중에서 좋은 이들도 있고, 뭐 아닌 이들도 있었겠지만. 릿샤라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기본적으로 툴툴거리며 대하다 보니. 그런 그녀의 행동들은 또 손쉽게 ‘잘난 체’로 여겨져서 조직 사회에서 고립되기가 쉬웠던 탓이다.


학창 시절을 어떻게든 견뎌내고, 그래도 실무진의 한 일원으로 연구소에서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은 좀 덜하지만. 아직도 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 중인 처지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석사 과정에서 냈던 논문이 인정을 받아서, 입지가 있는 편이었다.


기초 물리학은 응용 물리학 계열에 비해서 훨씬 더 방대한 범위를 다룰 테였다. 필연적으로, 방대한 범위에 걸쳐 있는 내용은 ‘원론’이 되어갈 수 밖에 없었고. 역설적으로, 가장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이 작기도 하다.

기초 물리학의 이론에 변화를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파급력이겠으나. 그것이 정말 쉽지 않을만치, 이미 벽돌이 다 차서 올라가버린 벽같은 것이었으니까. 기초 물리학은.


새로운 연구자,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의견과 가설을 찔러넣을 틈이 많은 게, 그 이후에 파생된 여러 응용 학문들일 테였고.

기초적인 학문은 지난 수백 여 년간 위대한 선배들의 이론으로 탄탄하게 짜여 올려진 ‘탑’이나 ‘벽’이었다. 그곳에서 빈틈을 찾아내, 무언가를 한다는 건. 후배로서 아주 어려운 일이었고, 애초에 불리한 게임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말학, 후배에 불과한 릿샤가 그 계열에서 연구를 하고 가설을 자아내면서 대단한 일을 해내는 건 하늘에 별을 따는 일과 마찬가지이리라.

그러나 릿샤의 천재성은 나름대로 유명했고, 그것에서 빛을 본 선배들도 있었다. ‘지성의 빛’. ‘가능성의 빛’ 말이다. 이 어린 후배가, 잘 다듬으면 위대한 선배들의 근처에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의.


그녀는 나이에 비해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연구소에서 직책을 맡아 일을 하고 있었다. 전례가 그리 많지 않은 정도로 빠르게 과정을 패스하고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에 몰두하는 와중에, 학위 하나를 따고 다음 단계를 밟은 것이었으니. ‘학생’으로서의 신분보다 ‘연구자’로서의 신분이 더욱 커졌다.

물리학 연구실에서 그녀가 보는 것들은 일반인에게는 따분하기 그지 없는 수치와 계량표들, 의미를 알기 어려운 여러 원소, 원자들의 변화 과정들이었다. 그러나 그 숫자의 나열과 기하학적인 온갖 이미지들은 늘 릿샤의 삶의 활력이 되어준다.


릿샤 애드윈, 은 스스로 가끔 웃기도 했다.

바르샤 애드윈으로서는 석사 과정에서 박사 과정으로 단계를 밟아 위로 올라섰고.

콘란드 대륙의 릿샤, 로서는 평범한 초상술사에서 마스터 마기아의 단계로 올라섰으니 말이다.


그게 관련이 있는 지는 조금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녀 스스로에게는 재미난 농담처럼 여겨지는 점이었다.


릿샤는 주변의 인정을 나름대로 받고, 연구소에서의 업무 환경도 조금 더 나아지면서. 그녀의 성격이나 태도 또한 약간 유순해진 구석이 있었다. ‘여유로워’졌다, 고 표현하는 게 더 맞는 말이리라.


“아, 그··· 네. 언제 올 지 몰라서. 그냥 퀘스트 하나 하러 갔다가 좀 늦어졌네요.”


제냐가 떠뜸거리며 말을 했다. 똘망똘망한 놈이었는데, 가끔 릿샤가 몰아붙이듯 대하면 저런 꼴이 날 때가 있었다. 릿샤의 말투나 성격이 원래 그런 것이었고. 실제로는 딱히 나무라는 게 아니었음에도. 그리고 최근에는 릿샤의 성질마저도 많이 죽고, 여유로워졌음에도.


릿샤는 제냐를 보며 속으로 웃기는 사내라고 생각을 했다. 한국은 미국에게 있어서는 우방국이다. 자유주의 사상과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나라들의 사상적 싸움으로 세상을 양분하자면. 분명 미국에 많은 도움이 되고,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나라이기에 많이 공을 들여야 하는 동맹국이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일반적인 시민들한테는 그리 큰 생각이 없을 수도 있었으나.

어쨌건, 21세기 중반, 후반에 가까워진 지금 ‘통일된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력과 위상은 이전 시대에 비해 많이 오른 것이 사실이었다. 이전 세기에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붙어 있는 것인 줄도 모르는 청년들이 많았다고도 하는데.


아무튼.

저 먼 바다 너머 땅에 있는, 몇 살 아래의 대학생 사내이다. 경영학도라고는 하는데 배우고 있는 학문에는 영 열정도 없는 것 같았고. 릿샤와는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은 남자다.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으나, 껄끄러운 대상은 아니었다. 릿샤는 나름대로 편하게 굴고 있었고, 제냐는 그런 릿샤의 태도를 받아들이느라 늘 어색하게 군다.

낯을 참 많이 가리는 놈이다, 라고도 릿샤는 생각했다.


“아 그래. 아무튼···. 가자고.”

“네, 네.”


옆에 있던 라이엔이 말을 받았다. 미팅 룸 안에 다섯 명의 인원들이 다 모였다.


고작 다섯, 이기는 하지만 모여 있는 전력은 만만치 않다.


이 게임은 레벨이 올라가고 수준이 높아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분포된 유저 수가 적어진다. 그만큼 고수급으로 올라가는 게, 어렵다는 반증이었다. 혹자는 ‘단순히 시간만으로 되지 않아’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달리 말하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고. 그 시간을 단축해내는 소수의 천재들만이 짧은 기간 내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어떤 행위를 반복하다보면,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자질이나 스타팅 포인트와는 별개로 높은 위치에 오를 수는 있으리라. 지속해서 한 가지 행위를 반복하며, 그 진수를 깨닳을 정도로 게임에 몰입하는 인간들이 적어서. 아예 고수급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뿐이었다. 누구나 고수급이 될 수는 있었다. 게임 내에서 요구하는 행위값들, 경험치만 다 채우면 말이다.

아무도 그걸 쉽게, 선택하고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아서 수가 적을 뿐이다.


하나하나가 마스터 급은 확실히 넘은 실력자들이었다. 가장 내실이 부실하다고 평가할만한 라이엔조차도.

‘수퍼 마스터’ 급이라는, 랭커급들과 비교를 하자면 분명 모자르기는 하지만. 고수급들 중에서도 경쟁력이 있는 건 분명했다. 이만한 고수급 인원들이 모여 있는 길드는 분명 드물다. 아직 대륙을 오시하는 대제국이니, 하는 곳에서 노는 게 아니라.

변방의 어느 왕국에서 놀고 있는 것이기에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되는 전력이기도 했고.


물론 왕국의 최고위자인, 프린스 알사드와 정면 대결을 하기에는 부족하리라.


그러나 측면 대결 쯤은 해볼만한 것 같아서, 이제 출발하려는 참이다.


라이엔이 휘이이, 하고 손을 입가에 가져가 휘파람을 불었다. 아주 깔끔한 휘슬링whistling이었다. 정갈하고 고운, 고음高音이 울며 창문 바깥으로 나간다. 길드 하우스의 마굿간에서 쉬고 있던, 썬더스가 소리를 듣고 홰치며 날아오른다.


놈은 더 이상 ‘새’같지가 않았다. 무슨 특수한 비행 기계처럼 보인다. 한 번 푸드덕, 하더니 크게 힘들이지 않고 허공에 떠올랐고. 위 아래로 요동치는 것도 없이 길드 하우스의 창문 근처에 모습을 나타냈다.


사르삿 거리의 사람들은 그다지 놀라지도 않는다. 아직까지 해가 저물지 않았다. 어둠숲까지 가서, 거대 거북이들을 잡고 여기까지 다시 돌아오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직까지 플레이어들은 조금 더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일단 브라운이랑, 다른 애들을 불러올게요.”

“그래.”


릿샤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보통 라이엔은 썬더스만을 자신이 데리고 다니지만, 썬더스는 ‘갈색 매’ 몬스터 부족의 우두머리였다. 그건 라이엔이 썬더스를 테이밍한 이후로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고, 우두머리로서의 권위 역시 유지되었다.


라이엔은 아주 긴 시간, 갈색 매 부족의 모든 개체들을 자신의 펫으로 만들기 위해서 번갈아가며 테이밍을 시도하고 있었다. 물론 한 번에 그렇게 될 수는 없었고. 그 무리들 전체에 대한 장악력을 서서히 넓혀가고 있는 수순이었다.


라이엔의 그런 시도가 만일 완성된다면, 그 때 라이엔은 자신의 단점을 온전하게 극복한 제대로 된 마스터가 될 수 있으리라. 정반대 계열의 강점을 가지게 될 정도이니. 적어도 수퍼 마스터 급에 견주지 않을까, 막연하게 추측할 수 있었다.


갈색 매 부족에 대한 장악이 아직 끝나지는 않았어도, 몇 마리 정도는 라이엔이 지금도 부릴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썬더스의 지휘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갈색 매 부족 전체를 움직일 수 있었고.


워낙 자주 부려먹었기에. 갈색 매 부족이 살고 있는 아주 먼 협곡과 달리, 근처에 둥지를 틀고 몇 마리를 살게끔 했다. 이처럼 길드원들 모두가 이동을 해야 한다거나, 대대적인 전투를 준비해야 한다거나 할 때마다 불편하니까 말이다.


그건 라이엔이 동시에 정밀 조작이 가능한 펫들의 한계 마리 수와 꼭 같았다. 그 정도의 장악력은 발휘를 해주어야, 무리에서 따로 떨어져서 둥지를 틀고 살게끔 할 수 있는 것이다.


휘이이.


라이엔은 다시금 깔끔한 고음을 냈다. MP로 연동되어 있는 썬더스와 라이엔이었다. 그녀가 정해진 제스쳐를 하면서, 초상술을 발휘했다. 썬더스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알아듣기 어려운 세밀한 사인에 곧바로 움직였다.


썬더스가 창문 앞에서 둥둥, 떠 있다가, 그대로 머리를 돌려 높은 하늘 위로 오른다.


몇 번 더 푸드덕, 거리더니 이미 크기가 작아졌다. 거리 위를 날아가는 괴조였으나, 대도시에는 온갖 초상술사들이 존재하고, 또 오간다. 그다지 큰 일은 아니었다. 왕국의 주요 시설이나 지역 따위에 접근하려고 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거기에 ‘썬더스’는 이미 라이엔의 펫으로서 인가를 받은 녀석이기도 했고. 테이머의 펫들은, 미약한 MP를 이용해서 인가증을 발급받는다. ‘증’이라지만 서류 따위는 아니었고.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마킹을 해두는 것이었다.


마킹이 된 녀석들은, 이 대도시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방위 아티팩트 체계에 걸리지 않는다. 적대적인 행동을 갑자기 보인다거나, 말했듯 중요 시설 근처에서 위협적으로 비행을 하면 공격을 당할 지도 모르겠지만.


라이엔은 그간 많은 ‘갈색 매’들을 도시 내부로 들여왔다. 지금 불러오려는 녀석도 그렇다. 브라운과 프린스, 라는 이름의 매였다. 최근에 가장 자주 부리고 있는 개체였다.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도시 바깥으로 나가, 그리 멀지 않은 산까지. 잠깐 티 타임을 즐길 정도의 시간이리라.


릿샤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면서 말한다.


“···프린스 알사드···. ······. 미친놈이겠지?”


아마 높은 확률로 그럴 것이다.


지난 시간 동안 연줄이 닿는 많은 NPC들과 이야기를 하고, 퀘스트 로그를 분석하며 추론한 결과였다.

‘스토리’라는 건 그 이전 단계에 이미 복선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전 스토리를 진행하면서, 관련 NPC의 입에서 나온 유력한 용의자가 프린스 알사드이니까. 아마 맞으리라. 그리고 이런 시나리오 퀘스트에서 빌런villain 역할을 맡을 정도라고 한다면.


아마 미친 놈 중에서도 보통 미친 놈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그 정도 광기는 있어야, 대륙을 무대로 하는 이 서사시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제냐는 쩝, 소리를 내면서 미팅 룸 한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말이다. 열려 있는, 썬더스가 머물다가 사라진 창문 바깥의 풍경을 괜스레 지켜보았다. 아직도 날이 밝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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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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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208. 지루한 옮김, 라이엔의 상념 24.03.05 22 1 21쪽
208 207. 지루한 옮김 24.03.05 19 1 14쪽
207 206. 퍼레이드parade 24.03.04 18 1 19쪽
206 205. 거북이 사냥 24.03.03 21 1 36쪽
205 204. 따스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24.03.01 16 1 12쪽
204 203. 화살막이 24.03.01 15 1 19쪽
203 202. 방패, Shield 24.01.07 22 1 14쪽
202 201. 짜증 24.01.07 17 1 24쪽
201 200. 공습 24.01.06 19 1 22쪽
200 199. 필멸창 24.01.06 14 1 20쪽
199 198. 둘러 앉아서 24.01.05 21 1 14쪽
198 197. "…시작인가?" 24.01.05 20 2 23쪽
197 196. 띄어쓰기 24.01.05 17 2 15쪽
196 195. 호아킨은 웃었다. 24.01.05 12 2 11쪽
195 194. 귀퉁이 24.01.03 16 2 12쪽
194 193. 가즈아 24.01.03 19 2 14쪽
193 192. 독주 24.01.02 19 2 17쪽
192 191. 터뜨리다. 23.12.20 22 2 13쪽
191 190. 턱 밑에서 23.12.19 18 2 16쪽
190 189. 검은 선 23.12.19 15 2 17쪽
189 188. 지난한 과정 23.12.19 15 2 16쪽
188 187. 진검기眞劍氣 23.12.18 23 2 26쪽
187 186. 블러디 아이시bloody icy 23.12.13 21 2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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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184. 준비 23.12.12 18 2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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