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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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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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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7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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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7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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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210. 미치광이는 그네를 거꾸로 탄다.

DUMMY

*


공작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


흠.


그렇게 거꾸로 매달려서 볼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려고 그러는 건 아니었다.


공작,


프린스, 알사드는 팔짱을 낀 채였다.


“······.”


첫 번째의 침묵은 닫혀 있는 공작의 입술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의 침묵은, 그 근처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는 고용인들의 입을 표현한 것이었고.


늙은 공작이었다. 주름진 얼굴. 나름대로 잘생긴 이목구비이기는 했지만, 세월에는 견디지 못한다. 체구는 그리 작지 않았고.


공작가의 소양대로 배워 온 솜씨들이 있었다. 기력술사라고 할만한 수준은 아니었고, 초상술사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예 아무런 능력이 없다고도 말하기 애매했다. 어쨌거나, 같은 나잇대의 다른 이들에 비한다면 훨씬 더 건강했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도 가능했다.


아티팩트 류 중에는 가끔, 사용자의 능력이 필요한 것들이 있었다. 개중에서 본격적으로 아티피서의 자질을 요구하는 것들도 있지만. 내장되어 있는 에너지로 온전하게 움직이는 종류는 일반인들도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아주 약간의‘ 자질을 요구하는 아티팩트들도 있었고.


그 자체만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MP라고 하더라도. 도구의 스위치를 켜고 끌 수 있을 정도는 될 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프린스 알사드는, 미약하게나마 초상력에 대한 능력이 있었다.


그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수준의 자질이었지만 말이다.


플레이어들은 축복받은 신체와 자질을 갖고 이 세계에서 삶을 시작한다. 그들에게는 ’한계‘가 없다. 본질적으로. 노력 여하에 따라서 모두 스킬들을 얻어낼 수 있었고, 초상술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 콘란드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초상술을 사용할 수는 있으리라. 어설프게 익혔다가, 쓸데없이 스킬 경험치만 잡아 먹는다던가. 별로 쓸만한 수준으로 키워낼 수 없으니 몇 종류 적성에 맞는 것에 시간을 투자할 뿐이지.


한 가지 부류의 속성 스킬을 일깨워내는 건, 언제나 그만한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플레이어들은 어마어마한 재능을 갖고 있는 천재들이었다. 이 게임 속에서의 ’설정‘이 말이다. 비련시 온라인은은 현실의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고. 그들이 몇 년 정도 서비스되는 게임을 즐기라고 만들어둔 것이었으니까.


그 수 년 내에 적어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컨텐츠들을 즐길 수 있을만한 재능을 부여해야 되는 것이다.

물론 개발진 측에서 가능성을 열어두었다고, 난이도가 딱히 내려가는 것은 아니었기에. 플레이어들이 모두 그 재능을 개화시키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어쨌건, 타고날 때부터 많은 부분들이 막혀 있고, 불가능한 일이 많은 NPC들보단 훨씬 좋은 처지임에 틀림 없었다.


프린스 알사드가 이렇게 미쳐버린 이유에는, 어쩌면 그런 이유도 있을 지 모른다. 그 스스로가 세계 제일을 노려볼 수 있는 재능이 있었더라면. 혹, 세르게이 알사드는 쓸데없이 자신의 존재감들 드러내기 위해 요상한 계획 따위를 세우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보다 조금 더, 스스로 기술연마 따위에 파고들면서 제 두 손으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했을 지도.


그러나 세르게이 알사드는 어린 시절부터 많은 교육과 훈련을 받아오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분명하게 알아버렸다. 공작가의 적자嫡子로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위치였으나. 그럼에도 바꿀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게 있었던 것이다.


세르게이 알사드는 기본적으로 머리가 맛이 간 놈이었고. 그런 상황과 맞물려서, 지금의 프린스 알사드라는 인물로까지 크게 된다.

지루하지 않고자 하는, 무언가 큰 일을 벌여보려고 하는. 이 조용한 시대와 세상, 그리고 자신을 숨막히게 하는 사회에 변혁을 주고자 하는 프린스 알사드다. 그는 기력술이나 초상술에 있어서는 범인凡人이었기에, 다른 방면에서 스스로의 능력을 키우고자 한다.


그가 세워온 장대한 계획과 그 단초가 키워낸 ’능력‘이었다.


오랜 세월 공작가의 적자로서 선한 가면을 써왔다. 주변의 이웃들에게 그저 건전하게 웃어주었고. 자신의 위에 있는 왕실에 대해서도 한 번 불평을 하거나, 적의를 드러낸 적이 없다.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는 사이코패스라고 한다면 ‘제약’이란 걸 견디지 못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공작가의 정당한 계승자였으나. 왕실의 휘하에 있다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으니.

재능이 없고, 머리가 돌아버린 공작은 그러나 나름대로 자제심이 있었다. 커오면서 배웠던 많은 상식의 족쇄들이 그를 얽어맸다. 함부로 움직였다간, 아무것도 제 뜻대로 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있었다. 실로 맞는 말이었다.

공작의 지능을 가늠해보면, 상당히, 아니 아주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권위와 권력, 직책 따위를 모두 빼앗아보면 그리 대단할 게 없는 인간이었지만. 자신이 가진 것들을 이용해서 남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일들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차라리 그 개인의 목표 성취를 위해서 노력했다고 한다면. 그저 최고의 무예가가 된다거나, 최고의 초상술사가 된다거나, 하는 쪽으로 매진을 했을 지도 모를 인간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공작은 주변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방향으로 자신의 진로를 틀었고.


지금과 같은 작자가 되었다.


거꾸로 매달린 공작.


그는 정원에 있었다. 넓은 대공 저의 부지에는 그의 허락을 받은 이들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 반듯한 직사각형 형태의 거대한 공간이었고. 그 부지의 외곽선을 따라서 높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없는 곳도 있었으나, 그 곳은 반듯하게 가꾸어진 숲이 있다. 나무 자체가 울타리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으리라.


물리적인 울타리보다도 더 정확하게 대공 저와 아닌 곳의 경계를 나누는 게, ‘초상력’이었다. 초상 스킬. 산슈카가 고국이며, 오래 전의 유물들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처럼. 알사드 공작령에도 그러한 유적들이 남아 있었다.


공작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가지 고귀한 아티팩트들이 있었고. 그것들을 응용해 공작가의 초상술사단이 가문의 방위체계를 완성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초상력은 경계로써 작용하고 있다.


공작가에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외부의 것’이 다가오거나 허락 없이 넘으려고 한다면, 1차적으로 막아서고, 또 곧바로 안쪽의 경비 인력에게 알림을 줄 테였다.


알사드 공작가의 방호 체계는, 상당한 고강도의 전투를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언제나 100%의 출력으로 유지되는 아티팩트들은 아니었지만. 내부에 상주하는 초상술사 전단의 워메이지들이 조작한다면 곧바로 임전 태세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평시에는 그저 ‘경계’ 수준으로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고.


어쨌거나 공작 저의 정원 안에서, 공작이 예기치 못한 습격을 당할 리는 거의 없다.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좋으리라. 일단은.

물리적인 이유로도 그러했고, 공작이 당장 가늠하고 계산하고 있는 이유로도 그러했다. 지금 이 순간 공작에게 원한을 품은 존재나 집단이 여기에 와서 난동을 피울만한 가능성이 극히 적었다.


그런 여러가지 연고로, 공작은 정원의 나무에 그네처럼 줄을 매달고, 그 높은 나무토막에 다리를 걸친 채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기이한 체조라도 하는 것도 같았다. 팔짱을 끼고, 그러고 있다가 중심을 잘못 잡으면 그대로 곤두박질 쳐서, 목이라도 부러질 수 있는 정도의 높이였다.


사람의 키보다는 낮지만. 1.5m 정도는 되는 정도의 허공에 자신의 머리를 두고 있었다. 공작은 운동 겸, 그러고 있는 셈이었다.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무언가 기여하기 위해,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위해 그러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이상한 자세를 하고 있을 뿐이다.


공작의 기행은 대공 저 안에서 아주 유명하다. 세르게이 알사드는, 게으르고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모를 인간이었지만. 저택 내에서는 온갖 이상한 짓거리들을 벌이는 기인이었다. 그가 진행하고 있는 여러 계획들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고용인들도, 적어도 그가 이상한 작자라는 것만은 알았다.


굳이 그런 이야기를 바깥에 퍼뜨리는 인간이 많지는 않았기에. 대개의 평판은 그저 ‘게으른 프린스’라는 정도로만 유지되고 있었지만. 프린스 알사드를 가까이서 본 인간은 그를 ‘이상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가장 잘 알고, 직접적으로 따르는 수족들은 그를 ‘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물론 아닌 수하들도 있기는 하다. 프린스 알사드라고, 늘 미치광이처럼만 구는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사회화 교육 과정을 거친 사이코패스였다. 그 스스로의 열망이 본능을 억누를 수는 없었지만. 과정에 있어서 어느 정도 참을 줄은 아는 작자이다. 섣불리 행동을 하는 게,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해가 되고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검은 늑대단 같은 경우에도 그러하다. 붉은, 푸른, 그리고 검은색의 늑대단이 대공의 휘하에 존재했다. 알사드 대공가家의 기사단이었고, 산슈카에서 굴지의 실력을 자랑하는 존재들이다. 개중에서 검은 늑대단은 존재하는지조차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숨어 있는 집단이었다.

그럼에도 실력은 다른 기사단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고.


검은 늑대단의 인원들은, 모두 사연이 깊은 작자들이었다. 알사드 대공은 그런 그들에게 하나같이 은혜를 베풀었다. 이 나라에서 대공가의 가주이자, 정통파 세력의 수장인 그였으니. 재력이든 권력이든, 소시민을 돕는 일에 아끼지 않는다면 무수히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알사드는 선별적으로 자신의 힘을 아랫사람들에게 베풀었고. 철저하게 이용해먹을만한 가치가 있는 자들을 구슬리기 위해 그렇게 했다.

세상에 재능이나 능력이 있으나 기구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참 많았다. 알사드는 붉은 늑대단, 푸른 늑대단에서 뛰어난 기사들을 차출해 양성관으로 삼았다. 사르삿을 비롯해, 산슈카 각지에 있는 고아들 따위를 조사하기도 했고.


높은 수준의 재능과 적성을 보이는 아이들을 데려와 ‘검은 늑대단’의 훈련생으로 삼았다. 그렇게 어린 아이 시절부터 대공가의 지원을 받아 늑대단으로 길러진 이들이 적어도 절반 이상이었다. 검은 늑대단 중에서는 말이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갈 곳을 잃었던 프리랜서 용병들이나 기사들.

죄를 저지르거나, 혹은 명예를 상실한 자들. 그런 이들을 모아다가 만든 것이었다.


그 출신 자체가 결함이 있는 이들을 일부러 그러모아 만든 기사단이었으니. 그들의 행동 자체가 비밀스러워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검은 늑대단은 있는듯 없는듯. 각지에 파견되어 공작의 의지를 수행했다. 수십 여 명. 운트 작힘 백작의 기사단과 비견되는 정도의 인원이었고, 그레이 하운드 기사단에 비하자면 개개인의 실력은 높은 편이었다.


평균적인 수준이 뛰어나고, 곧 산슈카 최고의 기사단들과 견줄 수 있을법한 곳이다.


공작가의 기사단 셋 중 최고를 뽑으라고 한다면 누구나 망설임없이 붉은 늑대 기사단을 뽑기야 하겠지만. 이름도 없이 가리워져 있는 검은 늑대단 역시, 만만하지는 않다는 말이었다.


공작은 정원에서 그늘에 매달린 채로, 위 아래로 조금씩 흔들렸다. 괴짜같은 예술가라거나, 혹은 과학도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세상을 달리 보아서 무언가 창의적인 생각을 해보려고 하는 듯 보이지만. 공작은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그러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서는, 화가 나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였기에. 그 심정대로 주변에 패악질을 부릴 수는 없지 않은가. 세르게이 알사드 대공은 ‘패악질’을 참는다. 그건 자신이 정말 마지막에 하고 싶은 일이었다. 성이 나는대로 물건들을 때려 부수고, 사람에게 푼다면 자신의 곁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테였다.


몇 사람 정도 없애는 건 세르게이 알사드에게 큰 일은 아니었는데. 두려운 건 ‘소문’이었다. 아예 완벽하게 입막음을 하고 계획을 세워서 먼거리에 있는 작자들을 암살하는 건 알사드 대공의 특기였으나.

자신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을, 비슷한 자신의 수족을 시켜서 죽인다고 해봐야. 대공이 휘하에 있는 모든 인물들을 자신과 같은 사이코패스로 만들어두지 않는 이상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따르기는 할 것이다. 공작은 그럴 의지와 권력, 그리고 여러가지 도구들과 꾀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순순히 따르고, 아무런 소문도 내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결국 말이 바깥으로 새어나가고, 공작이 중요한 순간에 일을 벌이는 걸 방해하게 될 테였다.

이 세계는 신분제 사회로 대부분 이루어져 있기는 했지만. 귀족이 아닌 이들에게도 당연히 인권이라는 게 있었다. 사람이 살아남기 어려운 세계이고, 몬스터들에 대항하는 인류의 수와 병력, 자원 따위가 중요해서 그럴 지도 모른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계속해서 가신들을 죽여 없애고, 고통을 주고. 그 따위 짓을 반복하다 보면, 대공이라고 하더라도 문책을 받게 될 테였다. 그리고 왕실의 견제나 눈총을 받게 될 테였고. 그건 알사드 대공이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왕실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세르게이 알사드는 이 산슈카 국에서 단연, 가장 미친 놈이었고, 뵈는 게 별로 없는 인간이었으니. 다만, 계속해서 거듭 말하듯 그가 바라고 있는 이상적인 계획의 실현이 망쳐지는 게 싫을 뿐이다.


공작은 ‘조용히’, 가만히 있기에 특화된 놈이었다. 그 스스로의 욕망이나 천성에 비교를 한다면 말이다.


끼이이익.


지금도 그러하다.


화창한 낮.


푸르른 하늘 아래.


공작가의 정원은 들푸른 잔디들이 쫙 깔려 있었고. 마차나 사람이 다니는 길이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공작가 내부에서 일을 보고 있는 하급의 고용인들만 수 백 여 명이었다. 대공가의 권위를 일러주는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정통파의 수장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단순히 어느 일개 귀족가가 아니라. 산슈카를 상징하는 사대고가 중, 유일하게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으며 또 권력 역시 잃지 않은 가문이 아닌가. 로멜리아나 그리턴은 산슈카 국의 정치 세력도에서 볼 때 변방으로 이미 밀려난 집단이었다. 그리턴 자작가도 그러하고. 로멜리아 가문의 경우에는, 살아있는 것이 더 용할 지경이다.


로멜리아 가문을 죽이지 못한 것이, 아직도 공작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말이다. 공작에게 감히 생선 요리를 내어오면서, 가시를 제대로 제거하지 않는 간 큰 셰프chef는 없었으므로. 실제로는 잘 경험하기 어려운 기분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비유를 하자면.


공작의 가장 큰 계획의 요지는 결국, 이 산슈카에만 있는 특수한 아티팩트였다. 사대고가의 저력, 필리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고국으로서의 저력이 거기에 있었는데.


사대고가가 아닌 자들은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유명무실한 오래된 가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힘’과 ‘권리’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정말로 이름뿐인 권리였으므로.

로멜리아 가문을 죽이고 그 ‘권리’를 독점하려고 했었다.


계약에 의거해서, 산슈카의 사대고가에게 전해지는 아티팩트 ‘네 가문의 약속’은 정당한 권리자가 없을 때 남은 권리자에게 여분의 권한이 넘어가게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로멜리아 가문과 알사드 가문이 ‘네 가문의 약속’을 함께 발동할 권한을 갖고 있었는데.


로멜리아 가문의 적통이 끊어지고, 그 핏줄이 사라진다면. 아티팩트는 자연스럽게 ‘알사드 가문의’ 혈족만을 주인으로서 받아들이게 되어 있었다. 알사드의 핏줄은 현재 세르게이 알사드 뿐이다.


알사드 가문의 피를 잇기 위해서 양자를 들이기는 했으나. 먼 방계 혈족의 아이였고, ‘아티팩트’를 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 정도로 옅어진 피에도 ‘네 가문의 약속’이 제대로 반응을 할런지는 말이다.


뭐, 어차피 귀중한 아티팩트를 자신의 양아들에게 맡길 생각따윈 세르게이에겐 없다.

양아들을 데리고 있는 건, 전통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전통’이라는 걸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부류의 인간이었고.


그의 아버지가 살아있을 적에는 누구보다도 훌륭하고 신실한, 정통성의 수호자인 척을 했지만. 그에게 있어서 일종의 억제 기구였던 선대, 번 알사드 공작이 죽고 나자 세르게이 알사드는 미친놈처럼 날뛰기 시작한다.


물론 그는 고지능의 사이코패스였으므로, 그가 날뛰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별로 많지 않았다. 여태까지 무수히 많은 이들을 죽여왔고. 그 피를 고스란히 검은 늑대단을 비롯해 공작가의 하수인들을 통해서 내왔다.


세르게이 알사드가 죽인 자들에는 산슈카 국내의 인사들도 있었고, 국외의 인사들도 있다. 인접하고 있는 나라들. 이슈칼, 안단, 벨베르. 보통 화신 사막의 부족들은 야만인들로 규정을 하고, 제대로 외교를 하고 있지는 않았기에.

산슈카 왕실이나 국민들은 그들을 제대로 상대하거나, 염두에 두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세르게이 알사드는 용의주도했고, 말했듯, 아주 머리가 좋은 인간이다.


그는 산슈카 국의 대공령에 앉아서, 이 나라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모두 건드려왔다. ‘건드렸다’라는 건 여러가지 공작工作 활동을 벌여왔다는 말이었다. 그 공작 활동에는 물론 암살 역시 훌륭한 수단으로써 포함된다.


알게 모르게, 주변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쳐온 것이 세르게이 알사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모두 비밀리에 감춰왔다. 곧,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인 것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비춰지기 시작했고.

그의 속내를 잘 모르는 인간들은 모두 세르게이에게 ‘게으른 대공’이라는 이명을 붙여 부르게 된다.


산슈카의 대공, 세르게이 알사드는 게으르지 않다.

성실하다는 게, 꼭 좋은 쪽으로만 발휘되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그 마음에 지독한 암癌을 품고 있는 괴물들은. 자신들의 성실함을 음험한 일을 위해 쓰곤 한다. 세르게이는 한 발 더 나아가서, 아무에게도 자신의 야욕을 보이지 않았고. 그는 위험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정말로 말이다.


그렇기에, 기인이니 게으름뱅이 대공이니 하는 따위의 이명으로 불리면서도 국내의 인사들에게 많은 견제를 받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었고. 양지에서는 어떠한 정치적 행동이나 발언도 삼가고 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대공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대공령에 그저 처박혀서 자신만의 사색 시간을 보내는 늙은이였다.


세상물정을 모른다거나, 혹은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사내라는 평 역시 그에게 늘 붙는 것이기도 하다.


세르게이로서는, 그런 소문이 자신을 두고 돌 때마다 즐거워서 미칠 것 같았다. ‘무능하다’라는 이미지가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지면 새겨질수록. 그를 지켜보는 감시자들이 사라지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는 곧 여태까지 하던대로, 무수하게 많은 암살자들과 공작 요원들을 움직여서 주변국과 국내의 여러 알력 다툼에 끼어들면 되는 것이다.


세 개의 나라, 안단과 이슈칼, 벨베르 공화국뿐만 아니라. 심지어 화신 사막에 있는 부족들의 정치적 다툼 내부에까지 말이다.


화신 사막의 부족들은 쉽게 규합되지 못하고 있었고. 하나의 힘으로 그들의 저력을 모으지 못했으므로, ‘나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대등한 외교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그들이 인접한 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과, 체질적 변화가 필요해보인다.

그러나 그건 정치적인 관점에서의 일이었고.


만일 모종의 이유로, 그들 모두가 하나로 모여서 사막을 횡단한 뒤에 가장 가까운 산슈카 국을 치기로 한다면. 화신 사막의 여러 부족들은 충분한 저력을 갖고 있었다. 적어도 산슈카의 대도시 하나나 둘 정도는 노려볼 수 있음직하다.


세르게이는 ‘힘’에 집중을 한다. 무수하게 쪼개진 부족들이며, 나름대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대부족장들도 왕국의 정규군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르지만. 그들 부족을 하나로 그러모을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주면 충분히 군사로서 써먹을 수 있었다.


세르게이는 대부족장들 중에서 몇 명과 내통하고 있었다. 사막의 부족들은 왕국에 비하자면 미개한 편이었고, 실력 높은 기사들이나 초상술사들도 아주 부족했다. 대공의 저력으로 몇 개 부족을 후원하고 도와준다면, 손쉽게 그 부족들이 전투 전쟁에서 이기게끔 할 수도 있었다.


검은 늑대단의 정예 한 개 소대만 간다고 하더라도, 상당한 전력일 테였다. 소규모 교전에서는. 거기에 워메이지 전단의 선임 초상술사 몇 명을 더 붙인다고 하면 더욱이.

대공이 갖고 있는 건 아주 긴 시간과, 무수한 재화였다. 그는 대공가의 재산을 남겨둘 생각이 별로 없었다. 사실, 양자에게 무언가를 물려 줄 생각조차도 없었고.

vika-strawberrika-RxOUzElpJtc-unsplash.jpg


작가의말

열심히 해야 합니다. 뭐든이요.


아, 물론 나쁜 일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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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211. 한 번 불꽃처럼(악의) 24.03.08 16 1 21쪽
» 210. 미치광이는 그네를 거꾸로 탄다. 24.03.07 18 1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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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205. 거북이 사냥 24.03.03 21 1 36쪽
205 204. 따스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24.03.01 16 1 12쪽
204 203. 화살막이 24.03.01 16 1 19쪽
203 202. 방패, Shield 24.01.07 22 1 14쪽
202 201. 짜증 24.01.07 17 1 24쪽
201 200. 공습 24.01.06 19 1 22쪽
200 199. 필멸창 24.01.06 14 1 20쪽
199 198. 둘러 앉아서 24.01.05 21 1 14쪽
198 197. "…시작인가?" 24.01.05 20 2 23쪽
197 196. 띄어쓰기 24.01.05 17 2 15쪽
196 195. 호아킨은 웃었다. 24.01.05 12 2 11쪽
195 194. 귀퉁이 24.01.03 16 2 12쪽
194 193. 가즈아 24.01.03 19 2 14쪽
193 192. 독주 24.01.02 19 2 17쪽
192 191. 터뜨리다. 23.12.20 22 2 13쪽
191 190. 턱 밑에서 23.12.19 18 2 16쪽
190 189. 검은 선 23.12.19 15 2 17쪽
189 188. 지난한 과정 23.12.19 15 2 16쪽
188 187. 진검기眞劍氣 23.12.18 23 2 26쪽
187 186. 블러디 아이시bloody icy 23.12.13 21 2 21쪽
186 185. 버로우Burrow 23.12.13 17 2 29쪽
185 184. 준비 23.12.12 19 2 29쪽
184 183. 원거리 딜링Dealing 23.12.07 19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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