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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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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7.03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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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41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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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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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329. 계획, 본격적(2)

DUMMY

어쨌거나 왕국의 주요한 시선을 알사드령 근처에 묶어둘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한 일이었다. 세르게이는 그의 영지 안, 안전한 곳에 있었고. 그런 그를 죽이기 위해 대장군 요드먼이 친히 무거운 걸음을 하셨다.


온 것은 요드먼이었지만 결국 그를 다루는 건 벨케임 7세였다. 왕실과는 연을 끊고 멋대로 대군이 움직이고 있는 것마냥 했지만. 세르게이 알사드의 눈으로 봤을 때 그럴 수는 없었다. 칼드릭 요드먼은 왕실을 거스를 의지가 없는 인물이었다.


갑작스럽게 쿠데타를 일으킬 동기는 조금도 없었고. 도리어 위기의 순간에 벨케임의 특명을 받아 거짓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게 더 설득력이 높은 이야기였다.


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세르게이 알사드가 허술한 인간은 아니었다. 대장군이 실로 마음을 독하게 먹으면, 물론 저만한 군을 일으킬 수는 있을 테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반드시 무력적인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대장군은 산슈카의 군부를 틀어쥐고 있는 인물이었지만. 왕가를 따르는 정예병들의 존재 역시 무시할 수 없었으니. 왕궁에 머무르는 왕립 기사단이나 궁정술사단의 존재는 위협적이었다. 대공가의 늑대단이나 전술사단이 넘지 못하는 유일한 초인병 집단이 그들이다.


왕실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었고. 왕가 역시 대공가 못지 않은 역사와 저력의 축적이 있었던 곳이다. 아니, 대공가보다 나으면 나았지 모자라지는 않으리라.


산슈카에서 왕실에 대한 충성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고. 대장군이 함부로 움직일 리도 없거니와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해서 반발을 할 이들이 아주 많았다. 쉽사리 반란을 일으킬 수는 없다는 구조였다.


산슈카가 정말 허울만 좋고 실속이 없는 집단이요 나라였다면. 애초에 대공의 대계 역시 이처럼 멀리 돌아오지 않아도 되었으리라.


왕가 직속의 특무대, 라고 할 수 있는 로얄 가드만 움직여도 사르삿에 있는 군간부들의 명줄을 대부분 끊을 수 있을텐데.


현실적으로 그만한 리스크를 감당하고, 또 이겨내고서 요드먼 백작이 독단적으로 움직였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결국 대공가가 의심을 많이도 쌓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대공가.


저택.


이전에 반파되었으나, 빠르게 복구를 한 본택 내부에 머무르는 대공은 그리 여겼다.


아예 거처를 옮기는 것이 더 나을 지도 모르겠지만. 어설프게라도 수리를 마치고 원래 머무르던 저택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외장재, 저택의 벽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저택을 지을 때 투입한 각종 아티팩트들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었으니.


한 번 보호막이 깨졌다고, 저택을 보호하는 스킬들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었다. 대공가에는 뛰어난 초상술사들이 즐비했고. 그들은 순식간에 방어 스킬들을 복구해냈다. 그 이후에 물리적으로 저택을 보수했고, 완벽한 꼴은 아니었으나 대공은 그런 건물 내에 머무르기로 결정을 했다.


대공가의 충실한 종들이 쌓아올린 쉴드Shield 스킬이야말로 그의 안전을 보장한다. 이전 사건 때도 그러지 않았는가. 대공의 예상을 비집고 갑자기 쳐들어 온 괴한들. 그가 거하는 저택 본채에 그토록 강력한 보호 스킬이 걸려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 날 목숨을 잃었을 테였다.


또한. 전쟁 중의 지휘관은 허름한 막사에서라도 지내야 하는 법이기도 했다.


대공은 이미 전쟁을 시작했다. 개전 자체는 요드먼 백작, 왕실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형국이었지만. 그보다 더 오래 전에, 현재 상황을 예상하고 준비하던 대공이다.


우우우우웅.


그는 식당에 있었다. 원래 거하던 집무실은 릿샤 애드윈의 스킬로 인해 날아간 쪽이었으므로.


멋들어지게 꾸며놓은 식당은 그같은 귀족이 거하기에 그리 어색하지도 않았다.


길다란 직사각형 식탁 위에 올려둔, 아티팩트 하나가 울었다. 통신기의 역할을 하는 놈이었다. 그리고 그건, 왕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 때만 울도록 설정을 한 물건이었다.


잘못해서 다른 때에 울리게 했다간, 이것을 다루는 종자의 목숨을 거둘 정도로 엄히 명령을 해 둔 상황이었고.


곧 시계 정도의 크기를 가진 아티팩트의 울음과 빛은, 왕성에서의 작전이 성공했음을 의미했다.


“하.”


대공은 드디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태까지 왕가의 눈치를 보며 사느라 많은 고생을 했다. 산슈카. 지겨운 이름. 산슈카. 증오스러운 이름.


사실 산슈카 왕국이 세르게이 알사드에게 어떤 불이익과 고통을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순히 세르게이의 성격, 개성 때문이었다. 그가 그토록 나라를 증오하는 이유는.


그는 산슈카를 싫어한다기보다, 일반적인 법적 규제를 모두 싫어했다.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데 어째서 가로막는 게 있다는 말인가.


그에게 있어 세상은 싫증스러운 것이었다.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지독한 권태감, 따분함만이 그의 뇌리를 메운다.

한 순간의 쾌락을 위해서 그는 폭발을 일으키고자 한다.


다른 이의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들 때 그는, 강렬한 생의 불꽃을 본다.


대공은 사이코패스였고.

여태까지 자신의 본성을 사회적으로 잘 감추고 살던 작자였다.


산슈카라는 이름. 사대고가, 명문가의 후계자와 가주라는 이름은 그가 자유롭게 행동하는데 제약을 줄 뿐이었고.


그의 욕구에 계속해서 대치되는 그러한 요소들은 곧 강렬한 증오심의 대상이 되어만갔다.


대공은 자유를 갈망한다.

그러나 그건, 엄밀嚴密히 말하면 자유는 아니었다.

타인의 자유를 무자비하게 짓밟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대공은 괴로움과 슬픔. 낙망. 고통. 비통. 비정. 그런 것들이 세계를 가득 메꾸길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는 표정을 잘 드러내는 적이 없으나. 지금만큼은 좀 웃어둬야겠다고,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끼릭.


아주 고풍스러운 목재 양각이 테두리를 장식하는 의자가 밀렸다.


바깥으로 통하는 긴 창문에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밤중이다. 새벽. 사람들이 모두 지쳐 나가 떨어질만치, 괴로운 시간이었다.


산슈카 성의 보호막은 떨어졌다. 그 위로 그가 쏘아낼 대포는 이미 준비가 된 상황이었고.


대공은 실내를 밝게 비추는 기계식 등으로 환한 식당에서, 홀로 일어나 입매를 비틀었다.


추악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 스스로는 참으로 즐거워보인다.


식당 문은 열려 있었다. 저택 여기저기가 성한 곳이 없었으므로. 전체적으로 받았던 충격에 내부 인테리어도 많은 곳이 박살났다.


열려 있는 식당 문 어귀에서 대공가의 행정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빼꼼, 얼굴을 내민채 대공의 심기를 살피는 그는 홀로 일어나 창가를 바라보는 장년인의 모습을 본다.


그는 답지 않게, 아주 간만에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하하!”


그의 감정에 대해서는, 기승전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주변인이 없었으므로. 광인의 웃음이라고 할만했다.


대공의 감정이 잦아들 때까지. 보고를 위해 온 행정관은 한참이나 기다려야 했다.


*


“이게 맞나.”


이게 맞나, 라고 말을 하는 자는 대공가 초상술 연구소의 소장이었다. 여러가지 직책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어쨌든 전술사단, 과 대치되는 성격의 초상술사 집단이 있었고. 전술사단장에 비견되는 위치의 인물이었다.


플레이어 레벨을 기준으로 놓고 보자면, 숫자로만 셈했을 때 300정도는 될 테였다.


슈페리얼 마스터.


일반적인 마스터들 위에 있는 존재였고. 사실상 대륙 최강이라고 여겨지는 그랜드 마스터들을 제외한다면. 어디에서도 굴할 일이 없는 강력한 이들이었다.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그 정도 레벨에 달한 이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레벨 300이상은 분명 랭커에 준하거나, 혹은 순위권에 드는 이들이었다.


현재 플레이어들이 그래도 경쟁할 수 있는 마지막 수준이라고 보는 게 맞으리라. 그 이상의 NPC, 몬스터들에 대해서 유저들은 아직 대항할 길을 찾지 못했다.


세계에 대항을 할 것인가, 혹은 편승을 하거나 연합을 할 것인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그에 따른 플레이 스타일의 갈래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무력을 갖추어야 대화 역시 편리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지베르트 마샬. 소장의 이름이었다. 그의 근처에는 연구소에 소속된 여러 명의 초상술사들이 있었고. 하나같이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공가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무수하게 많은 아티팩트들을 다루고, 또 만들어온 게 그들이었다.


여태까지 참으로 괴랄한 물건들을 많이 부수고 재조립 해왔지만. 지금의 물건은 아무래도 격이 다른 것이다보니. 전문가들이라 할 수 있는 그들조차 눈빛에 떨림이 생길 수밖에 없으리라.


“연락 왔습니다.”


대공가 저택 내에서, 중요한 위치들 사이에는 모두 통신 기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본가, 라고 할 수 있는 대공이 머무르는 저택 쪽에서 연락이 온 모양이다.


올만한 연락은 한 가지밖에 없었고. 그건 장치의 작동을 의미했다.


대공은 미치광이였다.


그것을 도와 여기까지 온 지베르트라는 사내 역시 미치광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단순히 전투력만을 따지고 본다면, 지베르트는 전술사단의 단장에 비해서 한참 부족하리라. 플레이어의 ‘전투력’ 기준이 아니라. 그가 다루는 온갖 스킬과 그 경지에 비추어 봤을 때 ‘레벨 300’이라는 말이었다.


전투 클래스의 유저가 아니더라도 비련의 시나리오는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컨텐츠가 많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사람들을 규합하는 정치계나, 경제를 다루는 상인계. 그리고 연구를 하거나 물건을 만들어내는 장공인 계열이 있었는데.


지베르트는 장공인 계열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가 하는 일은 ‘아티팩트 메이커’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쪽이었으니까.


물론 단순히 만드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고 또 다루는 인물이기는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초고대의 흔적인 제국기의 아티팩트들을 이처럼 완벽하게 분해하고 조립하진 못했으리라.


순수하게, 과학자로서, 장인匠人으로서의 호기심이나 열망이 있기는 했다. 어디에서도 다루기 쉽지 않은 고대의 아티팩트들을 마음껏 보고 손에 쥘 수 있는 곳이 여기였으니까.

그리고 왕실 연구회에 소속이 되더라도. 대공가만큼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여러 연구를 할 수는 없었으리라.


물론 대공가의 수장, 세르게이 알사드는 상당히 미친 인간이었고. 때로는 들어주기 어려운 정도의 괴랄한 요구들을 해대는 작자였지만.

지베르트는 나름대로 실력이 있었고. 그런 요구들을 충족시킬만한 인물이었기에 큰 문제도 아니었다.


세르게이 알사드가 선인善人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그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진즉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의 손으로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비극에 빠졌다는 것 역시.


지베르트 마샬 역시 선인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최후에 남아 있는 상식이나 이성의 끈이, 조금 망설이게 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야말로 미친 짓거리였다.


이 물건을 쓴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파헤치고 연구하고. 복구를 할 때는 즐거움뿐인 과정이었는데.


정말로 사용한다고 생각을 하니 몸이 조금 굳는다.


그가 만들어냈다-기 보다 복구를 시킨 물건은, ‘네 가문의 약속’이라는 이름의 아티팩트였다.


물건의 이름치고는 다소 사변적이고 복잡한 낱말의 구성이다.


그러나 그만큼, 다른 물건과 비교를 거부하는 개성을 가진 녀석이기도 했다.


제국기 특급으로 분류되어야 할 물건이었고. 현대의 초상공학적 기준에서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신비를 가졌다는 말도 된다.


지베르트는 최고의 연구자였고. 산슈카에서 제일가는 실력의 초상술사 중 한 명이었다. 그와 비견될만한 자들은, 같은 대공가 전술사단의 단장이나. 아니면 왕실 소속의 최고위 술사들밖에 없으리라.


거기에 그는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고대의 아티팩트 연구에 바친 인물이었으므로. 그만이 할 수 있는 특출난 영역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렇기에 이 정도라도 아티팩트에 대해서 용법을 알아내고 컨트롤할 수 있게 된 것일테다.


“후후후······.”


조금 어이가 없어서, 차라리 웃음이 나왔다.


지베르트는 연두색이 조금 섞여 있는 금발이었다. 푸석한 머리칼이었고. 뒤로 길게 늘어뜨렸다. 얼굴은 주름진 모습이었고. 검은 눈동자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 공허하다.


대공가 연구소 소속 술사들이 으레 입는 검은 로브를 치렁하게 걸치고 있었고.


그들은 연구소 내부에 있었다.


연구소는 반지하에 주요한 물건들이 있었으나. 지상이 바로 보이는 창문이 크게 있었다. 구덩이를 파고. 시설물을 따로 만들어서 확보를 한 시야각이었는데.


그것이 출구가 된다.


창문 바로 아래, 바닥에는 거대한 형상의 아티팩트가 있었다.


이만한 크기의 아티팩트를 보는 일은 자주 없어서, 관련한 전문가가 아니라면 쉽게 떠올리기 어렵겠지만. 분명 정교하게 작동하고 있는 초상학적 기계였다.


정사각형 형태의 물건이었고, 제법 키가 큰 지베르트의 목덜미까지 오는 크기를 갖고 있었다. 정육면체라는 말이 조금 더 정확하리라.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물건의 육면에는 복잡한 고대어가 쓰여져 있었다. 검은 색의 음각된 글귀들이었고. 지금은 그 글귀들의 내용을 대강 다 파악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그저 글귀가 쓰인 비석, 비문에 불과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기계 장치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 내부의 오묘한 원리를 전부 알아내는 건.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했다. 이대로 초상공학의 발전이 몇 세대 정도 거듭된다면 혹시 모를까. 지베르트 생전에 이 기술력을 완벽하게 넘어서는 건, 조금 어려워 보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더라도 물건을 사용할 수는 있었다. 대공이 요구한 바도 딱 그것에 그쳤고.


바깥은 별과 달빛이 이지러지는 밤이었다.


이런 날. 대포를 쏘아야 하는 포수의 입장은 썩 즐겁지만은 않았다.


나름대로 넓은 연구소 건물이었고. 그 지하실이었다. 세 계단 쯤 되는 단상의 위에 ‘네 가문의 약속’이 얹어져 있었고.


모든 락Lock은 풀려 있었다. 이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알사드 가문의 적통일 필요가 있었으나. 그것 역시 세르게이 알사드의 의지와, 피 조금을 이용해서 해제시켜둔 상황이었고.

또한 산슈카의 사대가문 중, 알사드와 로멜리아 가문의 의지가 필요했으나. 기계의 내부를 파헤치고 시스템을 해킹하듯 조작해서 일부 기능만을 해금시켜둔 상황이었다.


본래의 용도와는 많이 벗어났고, 위력에도 미치지 못할 테지만. 그저 무절제한 에너지의 집속, 방출 정도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본질적으로 이건 중계기였다. 이토록 거대한 물건이지만, 컨트롤러일 뿐이다.

아티팩트의 진짜 힘을 담고 있는 것은, 산슈카 전역에 흩어져 있는 거대한 유적지들이다.


이 물건이 무서운 이유는, 그 거대한 건축물들에 담긴 거력巨力을 마음대로 뽑아 유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물건이었지만. 지금은 지나치게 긴 시간이 지나 전승으로도 다 구전되지 않는 부분이었고. 실제로 사용한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웠겠지만.


결국 대공가의 초상술사들은 성공했고.


이제는 알사드 대공의 명에 의해 사용하려 한다.


“······하겠네.”


지베르트 마샬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주변에 있는 다른 초상술사들도 긴장된 낯빛을 숨기지 않은 채. 그들보다 조금 높은 단 위에 올라선 지베르트의 뒷모습을 살펴보았다.


지베르트는 바로 앞에 있는, 위쪽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받고 있었다.


“케 케르 마시트.”


별 의미 없는 단어를 그가 중얼거렸다. 시동어라는 건 그런 법이었다. 각 초상술사들이 이미지를 수월하게 떠올리기 위해서 정하는 법이었고. 아티팩트를 분석하고 새로 개조하는 동안에 임의의 시동어를 설정해 두었다.


세르게이 알사드라면, 이런 시동어를 읊는 과정을 빼고 곧바로 아티팩트를 다룰 수도 있었다.


아티팩트를 다루는 데는 필연적으로 초상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MP에 숙달되어 있을 필요도 있었고. 그런 면에서 최고의 연구자이자 술사인 지베르트가 직접 발동을 시키는게 가장 확실한 일이었다.


대공이 제시한 비전.


그것 때문에 지베르트 마샬은 지금, 정육면체의 거대한 블럭에 손을 얹고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세르게이 알사드는 집요하고 독살스러운 인물이었고. 광기에 가까운 의지와 집착을 가진 작자였다.

그는 기필코, 세상을 무너뜨리겠노라 말하고 있었고. 지베르트 마샬이 그의 계획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다른 초상술사를 데려와 일을 벌이면 그만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직접적으로 지베르트를 그렇게 설득한 건 아니었지만. 간접적으로, 언제나 이야기하는 바였다. 그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결국 그토록 강렬한 의지와 행동력을 갖고 있는 괴물 근처에는. 다른 악인들이 모여들게 마련이었다.


산슈카는 좋은 나라였지만. 선인들만 사는 건 아니었다. 어느 인간사의 집단에 가보더라도 똑같을 테였다.

세르게이는 명확한, 확고한 청사진을 그들에게 제시했고.

불바다가 된 세계에서 다시금 질서를 세워, 자신을 따른 이들에게 막대한 부와 명예, 권세를 주기로 약속을 했다.


그런 부나 명예가 솔직히 지베르트에게 간절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연구를 하고 싶었고. 이곳, 산슈카는 그가 고대의 물건들을 알아보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대륙 제일의 고국古國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이 나라였으니까.


이곳에서 아티팩트 연구를 평생, 하기 위해서는 결국 세르게이의 말을 들어야만 한다. 지베르트가 어느 한적한 동네에 처박혀서 자신의 일만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 나라를 통째로 뒤집어 엎을 셈이었으니까. 그리고 나아가서, 필리아 대륙 전역을 말이다.


그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 말한 바는 없었지만. 만일 그가 필리아 대륙 전역에 영향력을 떨치는 호걸이 되기만 하더라도.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을 정도의 위업이기는 했다.


지금의 아릿시안 제국이 있고. 또 과거에 산슈카 제국이 그러했듯. 필리아 대륙 전역을 다스리는 맹자라는 건 결코 쉬운 자리나 위업이 아니기에 말이다.

세르게이 알사드 개인의 선악과는 상관 없이. 그 정도의 일을 벌인다면 그는 필리아 대륙의 역사서에 기술되어 아마 수천 여 년간 회자될 터였다.


그런 역사적 족적의 한 켠에 이름이 새겨지는 것 역시, 연구자로서 어느 정도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지베르트는 자신의 보신과 욕망을 생각했고. 곧 이길 것 같은 편에 붙었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보기에 산슈카를 다스리고 있는 벨케임 국왕은 많이 허술한 자였고. 또 평화에 젖은 자였으니 말이다.


뒤에서 계속해서 칼을 갈고 있는 세르게이 알사드를 당해낼 것 같지가, 않았다. 솔직하게.


그래서 지베르트는 자신 스스로가 세르게이의 칼이 되어서.


움직인다.


그가 시동어를 읊자 거대한 블럭 전체가 발광하기 시작했다.


약간은 어두운 지하 연구소의 조명이었는데. 그 빛을 상회하는 광량이 실내를 가득 메운다.


금빛 블럭은 자신의 색깔과 같은 광채를 내비쳤고.


곧 떨어 울기 시작했다.


그만한 크기의 금속 블럭이다보니 질량이 상당하다. 거대한 아티팩트의 진동은 지하 시설 전체를 울리게 만들었다.


지나친 진동은 시설물 전체의 내구도를 떨어뜨릴 수도 있었지만. 이곳은 대공가의 방위를 책임지는 초상술사들이 있는 곳이다. 대공이 머무르는 본택에 못지 않은 방비들이 철저하게 걸려 있는 건물이었다.


어지간한 물리적, 초상력적 충격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중계기의 진동이 건물을 부수기 위해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중계기, 그러니까 ‘네 가문의 약속’이라고 불리는 아티팩트 자체에 담겨져 있는 MP 역시 어마어마한 양이기는 했다. 내부에 집속되어 있는 MP들만 파괴적으로 운용한다고 하더라도. 일대를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대폭발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네 가문의 약속에 포함되어 있는 MP들은 특수한 방식으로 제련된 힘이었고. 오롯이, 산슈카 각지에 있는 거대한 유적지로부터 힘을 뽑아내고, 컨트롤하는 일에만 쓰인다.


빛과 떨림은 아주 사소한 작동 시 증거에 불과했다.


“수 천 년간 이어져 온 고대의 약속. 알사드의 적자, 세르게이 알사드의 의지로 명하니 산슈카의 불길을 피워 올려라.”


지베르트는 굵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긴 말의 영창을 숨죽이며 듣고 있는 휘하의 초상술사들이 있었고 말이다.


그네들도 어차피 아티팩트를 같이 연구해 온 이들이었다.


어차피 이 행위가 어떤 결과를 불러 일으킬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숨죽일 수 밖에 없다.


“문과 성벽, 첨탑과 성채는 네 가문의 약속에 따라 반응하라. 산슈카, 사르삿의 적을 향해 힘을 발하라. 소리를 내라. 떨어 울려라.

대륙의 오롯한 왕, 맹주는 사르삿의 왕자에 앉은 이이니.

협곡과 강을 넘어 움직이라.”


그 뒤로도 지베르트는 한참이나 긴, 옛 싯구를 읊어야만 했다.


마치 노래처럼도 들리는 긴 시였고. 그것 하나하나가 아티팩트를 다루는 시동어의 집합체였다.


단순하게 말을 하는 건 아니었고. 각 시어에 맞는 심상, 이미지들을 정확하게 떠올리면서. 실제로 MP들을 정해진 배열에 맞춰 조작을 해야만 했다.


가지고 있는 MP가 많을수록, 숙달된 술사일수록 쉬운 일이었다. 아티팩트 내부에 있는 기계 장치들이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지베르트에게 느껴졌다.


어마어마한 거력을 움직이는 것치고는 간단한 작업이었지만. 그건 이 중계기, 컨트롤러 자체가 제국기 특급에 속하는 물건이기에 가능한 일일 뿐이었지. 결코 호락호락한 작업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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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320. 전쟁(5) 24.05.19 9 1 18쪽
320 319. 전쟁(4) 24.05.18 6 1 18쪽
319 318. 전쟁(3) 24.05.18 9 1 16쪽
318 317. 전쟁(2) 24.05.15 9 1 14쪽
317 316. 전쟁 24.05.15 10 1 16쪽
316 315. 호출 24.05.14 7 1 14쪽
315 314. 건너가는 24.05.14 12 1 11쪽
314 313. 로그, 아웃. 24.05.13 11 1 11쪽
313 312. 요식업자 24.05.13 10 1 17쪽
312 311. 영감 24.05.12 13 1 16쪽
311 310. 아이템들Items 24.05.11 10 1 18쪽
310 309. 가쁜 숨을 편히 내쉬며 24.05.11 7 1 20쪽
309 308. 박제가 될 뻔한 천재를 아시오 24.05.11 11 1 23쪽
308 307. 파고 들기 24.05.10 9 1 21쪽
307 306. 제 몸 살라먹기 24.05.10 7 1 12쪽
306 305. 늑대의 뱃속에서 24.05.10 7 1 13쪽
305 304. 뇌검雷劍 24.05.09 8 1 24쪽
304 303. 검은색. 금청색. 24.05.08 10 1 23쪽
303 302. 앞니와 검날 24.05.05 16 1 20쪽
302 301. 눈알 24.05.05 11 1 15쪽
301 300. 나무 위의 사색 24.05.04 13 1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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