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게임

새글

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6.23 00:06
연재수 :
353 회
조회수 :
8,528
추천수 :
765
글자수 :
3,360,040

작성
23.08.05 03:08
조회
26
추천
4
글자
34쪽

53. Could you join us?

DUMMY

*


흩어지는 불티 속에서 안드레의 눈이 까뒤집혔다.


기력이 쇠했고, 이제 간신히 돌아오려는 순간에 맞은 초상 스킬이었다.


그는 모르나, 아주 약간의 배려가 있었기에 그나마 덜했을 것이다.


릿샤도 사이코패스 살인마는 아니었고,


이곳이 게임 속 세상이며 NPC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이유 없이 살인 행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쉽게 인류 NPC를 죽이다 보면 그 행위에 제한이 많이 사라지게 되고, 악업 수치가 쌓이는 일도 쉬워진다.

그런 것만이 아니래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사람처럼 따라 흉내 내며 행동하는 초고기능 AI들을 마구잡이로 대하는 일은 본인의 정서에도 좋지 않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때 전쟁을 함에 있어 주저하지도 말아야겠지만. 현실이 그렇듯.


아무튼 안드레는 확실하게 항복했다.


그는 오늘 여러 번 여기저기 처맞아서 튕겨댄다. 마치 공과 비슷한 꼴이어다. 그가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안드레 챈을 ‘구기’로 정한 스포츠 게임이 오늘 새로 만들어져서 시행되었나 보다.

그래, 거의 그런 꼴이었다.


자신은 분명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정밀하게 행동 요령과 세부를 짜고, 정확한 타이밍에 움직여서 운트 작힘의 명령을 실행했는데.


로멜리아 가의 잔당들을 없애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그레이 하운드 기사단의 십인장으로 책임을 다해 제일 앞서서 검격을 베었다.


그러나 그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아주 많았다.


때로 그런 상황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자체가 그르지 않나 한 번 쯤 생각해볼만한 경우였다.


물론 어떤 때 도리어 선하고 올바른 일, 정의를 위한 행위가 더욱 많은 저항에 부딪힐 수도 있었다. 그럴 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내야 한다는 게 ‘정의’라는 가치를 당신이 제대로 인식하고 배워 안다면 해야 하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누군가의 야욕이나 이득을 위해 도리나 도덕, 천륜을 저버리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중이라면-


때로 그건 잘 될 수도 있지만 수많은 저항에 부딪힐 수도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어떤 사상과 종교를 가졌을 지 모르지만, 그렇게 당신이 악행을 저지르지 않도록 수많은 방해가 닥쳐올 때 당신은 어떤 존재의 사랑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글자로 줄여 말하자면, ‘신’같은 존재 말이다. 조물주.


어찌 되었든,


안드레는 단순한 NPC에 불과했다. 그에게는 노모를 거두어들이고 자신의 여생을 훌륭하게 끝내기 위한 소망이 있었고 안온한 삶을 향한 계획이 있었지만, 그에게 신의 손길이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떤 플레이어들의 손길이나, 그 유저들을 이 퀘스트 내부로 끌어들인 시스템 AI나 개발자의 손길 정도는 닿을 지도 모른다.


한낱 인형극이며, 데이터로 이루어진 가상의 시나리오 시뮬레이션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보기 좋은 쪽으로 만들어지고 결말이 나는 게 좋은 일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사람이 보고, 배우는 탓에.


안드레는 축구나 테니스, 뭐 그런 경기의 공들의 시점을 잘 알 수 있었다. 오늘로부터 말이다.


찰나의 순간 불티와 같이 사라지려던 안드레의 정신이 간신히 그 끈을 잡고 돌아왔다. 정신줄 말이다. 그는 그것을 놓지 않았고, 위로 돌아가 백안이 되려던 눈깔이 간신히 초점을 잡았다.

그럼에도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물리적으로 그는 강한 관성 속에 있었고, 여태까지보다 가장 강하게 튕겨져 잘 깔린 로키 산의 가도를 굴러대다가, 어느 수풀 더미에 머리를 처박고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


마지막 순간에 의식을 잡았지만 꼴이 처참했다. 안드레는 정신이 다시금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호아킨은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 릿샤는 볼을 긁적거렸다.


“데헷, 너무 심했나.”


릿샤 애드윈이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말이었다. 현실에서 그런 소리를 한다면 주변의 지인이나 친구, 가족들이 미친 사람을 처다보듯 바라보겠지. 그러나 게임 내에서라면 그럴 수 있었다. 이렇게 파이어 볼을 신명나게 한 번 날려볼 수도 있었고.


그 말소리가 호아킨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사자의 모습을 한 그가 고개를 돌려 뒤편에 있던 릿샤를 보았다. 멈춰선 채로 귀여운 제스쳐를 취한 아가씨를 보았다. 그는 사자의 얼굴이었으나, 왜인지 눈빛이 느껴지는 듯한 꼴로 릿샤를 마주했다.


릿샤는 절묘한 헛소리를 하다가, 미국인, 자신과 오래도록 같이 게임을 즐기고 대화를 나누었으며 속내를 얼마간 아는 한 사내의 표정에 장난을 그만두었다.

지인과 친구 즈음 되는 사내가 미친년을 바라보듯 보고 있었기에.


“으흠.”


둘은 잠시 어색하게 침묵했다.


운트 작힘의 기사가 저토록 화끈하게 충절을 꺾어버릴 줄은 몰랐던 탓이다.


생각보다, 운트 작힘은 쌓인 원망이 많은 사내일지도 몰랐다.


비련의 시나리오의 퀘스트를 깨나가면서 평범한 예상으로 다음 퀘스트 상황을 읽는 건 금물인 일이긴 했다. 나름대로 시나리오 온라인을 오래 플레이했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팁으로 전하곤 하는 이야기였다.


아주 양식적이고 클리셰에 가까운 이야기 형식이 나올 수도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무한에 한없이 가까운 난수로 세팅되고 행동하는 수 억, 그 이상의 NPC들과 플레이어들, 다양한 오브젝트의 상호 작용은 허무한 끝을 만들기도 하고 평범하게 예상되는 상황의 정 반대 결과를 자아내기도 한다.


실제 사람이라고 대강 생각하고, 시뮬레이션 게임의 연기에 몰입하는 것이 가장 편리한 플레이 방법이기도 했다. 실제 사람의 생각들을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다 읽을 수는 없듯이 말이다.


세세하고 켜켜이 쌓인 NPC들의 설정이나 추억을 플레이어들이 모조리 다 파악을 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두 사람, 릿샤와 호아킨은 일단은 전투 태세를 느슨하게 했다. 수장이 장렬하게 항복을 했으니, 그 부하들을 설득할 계제이리라.


수풀 더미에 널브러진 안드레, 기사의 축 늘어진 기절체를 가지고 전장으로 돌아가야겠다. 호아킨이 아가리를 벌렸고, 덜그럭 거리며 이빨 사이에 물려 있던 거대한 배틀 엑스가 떨어졌다. 그 둔중한 쇠 부분과 칼날이 몸을 상하게끔 하지 않고, 아주 안전하게 떨어지는 능숙한 동작이다. 쿵, 하고 배틀 엑스의 머리 부분이 먼저 땅에 닿은 뒤 자루가 호아킨의 앞 발 조금 앞쪽에 떨어졌다.


호아킨은 “······.”하고 잘 들리지도 않는 중얼거림을 조금 하더니 변신술을 일단 해제했다. 스킬의 해제와 함께 MP의 유동이 그의 신체 주변으로 회오리쳤고, 반투명한 그 흐름 속에서 한 마리의 거대한 사자는 다시금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변신술은 외형 전체에 관여하기에, 따로 장비의 변형이나 손실도 없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나 소지품들 따위가 함께 변신하게 된다. 그 말은 곧,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의 효과로 보정을 받는 게 있다면 어떤 형태로 변신을 해도 여전하게 적용 받는다는 뜻이다.


다시 건장한 구릿빛 피부의 민머리 사내, 상체 여기저기에는 깊은 흉터가 있는 터프한 작자가 일어섰다. 그가 안드레를 줍기 위해 걸어갔다.


*


“키야아아아악!”


고블린의 성대는 날카롭다. 실제 성대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수술이라도 하려 해도 빛의 입자로만 보일 것이다. 플레이어의 시각에는. 투시 스킬 따위가 있다면 모를까), 적어도 내는 소리를 빗대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찢어지며 둔중하게 멈추지 않고 잘 갈려서 토해지는 하이 톤의 비명이요 괴성이었고, 밤 중의 오지에서 고블린 사냥을 하다가 여러 마리에게 둘러싸인 뒤 그런 소리들을 들으면 제법 스릴이 넘친다. 넘침이 과해서 어지간한 호러 영화의 무서움에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비유하자면, 날선 쇠를 거칠게 마찰시키는 듯한 음성이다. 호전적으로 전투를 위해 소리치는 고블린들이 여러마리가 되면 귀가 따갑기도 하다. 신경이 지나친 자극을 받아서 ‘고통’ 수준이 되면 어느 정도 시스템에 의해서 반감되기는 한다.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따위로 조금 대체되는 것이다.


그들이 있는 자리, 일명 로키 산의 산책로라 불리는 가도에는 무수한 수의 고블린 무리가 있었다. 얼핏 세어도 수 백 마리. 이미 충분한 수를 빛의 입자로 되돌리고 죽여 넘어뜨린 듯 했는데도, 여전히 많다.


“코아와아와아!”


거기다가 굵은 멧돼지같은 소리를 내면서 달려드는 오크들도 숫자가 상당했다. 천 여 마리까지는 안되어도 자신이 선 자리에서 좁은 시야로 보면 그리 다르지도 않았다. 괴물들이 내는 괴성들이 사람들의 귀를 먹먹하게 했다.


그러나 일부 다행인 점은, 몬스터들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괴물들은 흉폭함을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드러냈다. 각기 로브로 자신의 행색, 얼굴을 감추고 수상쩍기 그지없는 여러 명의 검사들을 향한 악의였다.

그들은 분명하게 로멜리아 가 일행들, 그리턴 가의 병사들과 대척점에 선 자들이었다.


최초에 여섯이었으나 하나는 이리저리 치이더니 도망가서 저 바깥에서 쓰러진 모양이다.


다섯 명만이 남아서 방진을 펼치고, 분투를 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열 개의 손으로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이 바로 앞에서 아가리를 벌리는 것과, 멀리서 스킬과 궁술 사격으로 견제하는 것까지를 다 막을 수가 없었다. 수백 마리의 대군에 둘러싸여도 바로 앞에 있는 놈들만 책임지고 계속 처리를 한다면, 계속해서 작은 전투를 연전 연승한다면 살아남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에 비해 그다지 실력이 떨어지지 않는 견제자들이 완벽한 프리 롤 상태에서 원거리 공격을 난사하니 버텨낼 재간이 없다.


다섯 명의 호기로운 기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방진이 무너졌다.


몬스터들이 그들을 삼켜버릴 정도가 될 즈음에, 너덜너덜해진 로브의 기사들을 위해 제냐가 화살을 날렸다.


파악! 하고 둔탁하게 때리는 듯한 소리가 나며 오크의 목덜미를 철시 하나가 깊이 꿰었다. 그 부근에 있는 중요한 뼈나 살, 장기들이 망가지면서 단번에 치명상을 입었고 아래로 쓰러졌다.


제냐의 행동에 최태현 역시 공감을 했다. 위에서 어차피 상황을 여유롭게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편한 사냥이나 공격도 달리 없었다. 방진을 펼쳤던 그리턴 가의 열 명의 기사들도 큰 부상이 없었다. 최초에 소극적으로 공격을 하고 몸으로 조금 밀고 들어오던 놈들에 채여서 타박상 정도나 조금 입은 것 뿐이다.

그들이 찬 방어구들 또한 그리 상하지 않았다.


마차를 뒤덮고 있는 푸른 보호막은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대면 웅웅거리면서, 여전하게 마차를 보호하고 있다. 그 마부석에 몸을 대고 있는 질리언과 페이브, 객실 안에 탄 두 명의 아가씨와 한 명의 노인, 그리고 제냐까지도 말이다. 사실 마차의 지붕처럼 차체 외곽에서 가장 먼 곳에 서 있다면 그 보호막의 효과가 조금 약해지기는 한다. 마부석처럼 그 차체나 연결된 마구 등 사이에 끼어서 있는 것도 아니고.


MP는 콘란드 대륙에 있는 실제적인 에너지였고, 발생지로부터 먼 곳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또 그만한 전달력이 필요하며 멀리 떨어질수록 손실 또한 일어난다. 마차를 보호하고 있는 에너지는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움직이고 저장된 배터리를 사용해 충격 상쇄의 효과를 거듭 발생시키고 있었으므로, 아무래도 범위가 조금 한정되게 된다.


단발적인 효과였다면 조금 더 많은 범위를 아티팩트 효과 범위로 가둘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퉁, 퉁 하고 현악기를 다루듯이 제냐가 활 시위를 놓쳤고, 그 박자 하나마다 묵직한 철시의 공격이 날아가 몬스터들의 급소를 꿰뚫었다.

실로 구슬 꿰기라도 하듯이, 그 정도의 노련함으로 근거리에 있는 몹들에게 연속적으로 치명타를 입힌다.


제냐와 최태현 두 사람이 몇 개 들이의 화살통을 다 써내자 몬스터들이 조금 소강 상태에 이르는 것도 같았다. 몇 사람의 적만이 그 맹수들의 목적이었는데, 그 주변이 시신으로 둘러쌓여 잘 보이지도 냄새가 나지도 않기 시작한 탓이었다.


두 사람이 하는 양을 다른 이들이 지켜보다가, 각기 자신의 앞에 있는 몹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쨌건 기사들은 확연하게 마차를 노린 암살자들이었다. 몬스터들은 당장은 공격적으로 굴지 않으나 유구한 역사가 증명하는 인류의 적이었고 말이다. 지금은 현혹술에라도 걸린 것인지 순하게 행동했지만 언제 돌변해서 태도를 바꿀 지 몰랐다.


적들의 위험이 사라졌다면 천천히 청소를 해두는 게 깔끔할지 몰랐다.


검고 두꺼운 로브를 둘러쓴 이들은 전부 사내들이었고, 사지 중 어딘가가 부러지거나 피를 흘리면서 바닥에 누워 있었다. 죽은 이들은 없었다. 제냐가 정확하게 세고 있었다. 목숨이 달아날 정도의 치명상은 없었고, 단지 기사도 버티지 못할만큼 스테미나의 소모가 일어나고 자잘한 부상이 누적되어 드러누운 것 뿐이다.


이미 전투력은 거의 상실했다고 볼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죽을 정도의 부상들이었지만, 기사들이니 조치 없이 조금 내버려둔다고 죽는 정도는 아닐 것이다. HP의 증가는 치명상을 중상으로, 중상을 경상으로 바꾼다.

결국 HP의 소모와 데미지 누적은 계속해서 일어나므로 적절한 조치가 없다면 마지막에 ‘죽음’이라는 결말에 다다르게 되기는 한다.


공들여 치료해 줄 생각이 달갑게 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눈 앞에서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이미 무력화된 상대들이기도 했고, 그들이 지나치게 유리한 판국이기도 했으며, 거기다 확연하게 실력자로 보이는 초인들이었기에 여태까지와 달리 운트 작힘의 계략을 밝혀 줄 좋은 고발자들로 제냐의 눈에 바꿔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턴 가의 기사들, 방진을 짜고 굳건한 기세로 물러서지 않았던 결심의 열 명은 앞다투어 몬스터들을 정리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질리언, 페이브, 그리고 줄리앙까지도 나서서 하나 둘씩 청소를 시작한다.


제냐와 최태현의 손이 가장 빨랐다. 그들은 지겹도록 사냥해왔던 몬스터 종류이기도 하고, 급소를 잘 알고 있기도 했다.

달려들고 공격해오며 그들을 지치게 만들던 몬스터 무리도 어렵잖게 청소를 해 온 콤비였으니, 그저 멀뚱히 서서 죽음을 기다리는 몬스터들의 숨통을 끝내주는 일은 아주 쉬웠다.


그런 이들의 마무리 속에, 호아킨과 릿샤가 안드레를 들고 다가왔다.


“······.”


두 명의 용병, 플레이어들은 눈 앞에 벌어지는 소탕에 어떻게 할까, 고민을 했다. 섣불리 초상 스킬을 발휘하거나 하면 저들의 경계를 좀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릿샤와 호아킨이 아닌 다른 용병들은 일찌감치 몬스터들에 섞여 바닥에 드러누웠다.


로웰 드버의 공이 컸다. 그들이 죽지 않고 단지 부상을 입고 기절하는데 그칠 수 있었던 건 말이다.


로웰은 조금 거리를 띄워서, 천천히 다가오다가 산책로 근처 수풀에 몸을 가린 채 천천히 테이밍 스킬을 조작했다. 안정감을 얻고 온전히 스킬 사용에 집중하자 일류 마물술사로서의 진가가 드러났다. 몬스터들은 적절한 수위를 유지하며 공격성을 드러내었고, 누구 하나 과도하게 물어 뜯는 일 없이 체력을 소모시키는 데 쓰였다.


거대한 무리는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가만히 기다렸다.


인류의 도시를 공격하며 틈이 보이면 잡아 죽이기 위해 달려들던 흉포한 괴수들이었지만, 마치 순한 양처럼 멍청하게 자신들의 마지막을 받아들였다.


*


제법, 긴 시간이었다.


본래의 계획이라면 몬스터가 파도처럼 움직여서 들이닥치고, 상대가 마차를 이용하고 방진을 짜며 지키려던 어떤 계획이던 간에 그대로 밀고 들어가 반대편 수풀을 넘어 야지에 처박을 생각이었다.


그리턴 가의 감시 체제나, 그 도움의 손길이 제대로 찾을 수 없는 곳까지 파도로 휩쓸어 이끈 다음에 기사와 용병들이 한 번에 공격을 해서 암살을 하려던 것이었는데.


어디부터 어긋난지도 잘 찾을 수 없을만큼 계획은 깔끔히 박살났다.


제법, 긴 시간만에 그런 일을 위해서 모아들였던 로키 산의 몬스터들이 모두 정리되었다.


하나같이 숨통이 끊어졌고, 게임 오버, 게임 내 생물로서 죽음을 맞이해 빛이 되어 사라졌다.


제냐와 최태현이 죽인 만큼은 아이템 박스를 확률에 따라 내놓기도 했다. 퀘스트 씬(Scene)에서 플레이어가 전투를 벌이며 사냥한 몬스터들은 게임성의 룰에 따라 다루어진다. 그리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게임 내에서 소멸하고, 전리품을 내놓거나 말거나 하는 것이다.


온전히 NPC들만의 전투로 죽은 몬스터나 짐승들은 사라지지 않고, 평범한 사체로 남아 콘란드 대륙 주민들의 자산이 된다. 그 가죽을 벗겨서 가공을 한다거나, 신체 각 부를 또 다양하게 제조업 소재로 쓰는 것이다.


콘란드 대륙은 완벽하게 설정되고 시뮬레이트 된 세상이지만 그 주체는 플레이어들이었다. 플레이어들이 온전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고, 시스템과 게임성, 인터페이스들은 유저들을 위하여 기능한다.


플레이어가 그 상황 내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그곳은 유저에게 적용되는 룰을 따르는 것이다.

여러 명의 NPC들 가운데 단 한명의 유저라도 포함되어 있다면 말이다.


그런 연유로, 죽어서 길바닥에 드러누운 짐승들, 괴물들의 사체는 시간이 걸려 깔끔하게 사라졌다.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편리한 뒤처리였다. 간편한 게임성을 위한 편의다.

개중에서 플레이어의 손을 거친 것, 제냐나 최태현, 그리고 릿샤나 호아킨에게 죽은 몹들은 아이템 박스를 남겼다.

NPC들이 처리한 만큼은 사라졌으나, 전리품을 남기지는 않았다.


NPC들 중에서 소재 채취와 관련된 스킬과 의지를 가진 자들에 의해서는 사라져가는 사체에서 무언가 얻을 수 있었다. 플레이어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러나 지치고 고단한, 정신 없는 이들은 전리품을 얻기 위해 애쓸 생각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잠시간의 소강 상태가 있었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이들은 그것만으로 만족하며 가쁜 숨을 천천히 몰아쉰다. 고조되었던 정신과 들뜬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도 애썼다.


아드리안과 헤슈나는 전장의 모습을 제대로 지켜보지도 못했지만, 어쨌건 마차 내부에서 천재지변이라도 당한 것 같은 꼴이었다. 바깥에서 벌어지는 소란, 소음, 흔들림 따위는 고스란히 느껴졌다.

근거리에서 터진 스킬들에 대해 폭압 정도는 마차 내부로도 전달된다. 지나치게 가까워서 ‘충격’으로 인식되는 수준은 마차의 보호막에 가려졌지만.


전장 속에서 이불에 둘러쌓여, 침대에 파묻혀 한 겹 멀리서 들려오는 포탄 소리를 들으며 쉬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말도 되지 않았지만, 여러가지 요소가 그녀들에게 운좋게 작용했기에 그럴 수 있었다.


사람들이 시신이 사라진 산책로에 모여들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멀쩡히 길을 가다가 몬스터들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거기다가 그것들이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어서 기이한 행동을 하던 것 말이다.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었지만, 너무 정신이 없었다.


공허할 정도로 텅 비어버린 가도 위에 마차 하나, 십 수 명의 사람들, 다시 몇 명의 상처 입은 포로들. 그리고 어색하게 새로 만난 이들이 있었다.

도망가지도 패닉에 빠지지도 않고 몬스터들 앞에서 맞섰던 용감한 말들도 있기는 하다.


몹들을 거의 다 처리했을 때, 산책로를 시각적으로 지켜보던 로키 캐슬에서 지원군을 보내왔다. 그들로서도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고, 채비를 마치고 상당한 숫자의 군대가 가도를 따라 내려왔다.

그들이 내려와서 본 건 몬스터 떼나 습격의 흔적이 아니라, 이미 다 끝난 뒤의 소강 상태다.


이젠 사정을 좀 들어봐야 할 차례였다.


최태현은, 로멜리아 가 일행 중에서 가장 게임 외적으로 게임 내 지식이 풍부한 인간이었으므로, 대강 사태를 인식했다.


게임 내에 있는 이들에게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이 필요했다.

제냐는, 그러려니 했다.


여섯 명의 기사들이 포로로 잡혔다. 그들은 일단 치료를 받았고, 뒤늦게 온 군대가 그들을 잘 묶어서 지키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입은 하나면 족하다. 마침 그 대상으로 안드레가 당첨되었다. 오늘 하루 가장 많은 수난을 겪었다고 해도 좋을 인간은, 뒤늦게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치료약을 뒤집어쓰며 정상 상태로 돌아왔다.


포로의 이야기를 통해 듣기 앞서, 그 포로를 인도해 온 자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좌중은 길가에 서서 어디서 소문을 듣고 구경 나온 인간들처럼 굴었다. 갈색 사슴 기사단의 기사단장까지 뒤늦게 단원들을 이끌고 나와서, 옆에 서 있었다.


그 상황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인간은 정해져 있었고, 갑작스러운 급전개와 변화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건, 릿샤 애드윈이었다.


몬스터들이 거의 다 얌전하게 죽고 사라졌을 때 즈음, 그러니까 그리턴 가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조금 전에 로웰 드버도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 릿샤와 호아킨 근처에 서 있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고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되어도 적어도 일행의 얼굴은 알아본다. 낯선 얼굴 세 명. 릿샤, 호아킨, 로웰. 그들과 로멜리아 가 일행이 마주 섰고 그 주변을 그리턴 가의 인원들이 빙 둘러쌌다.

같이 왔던 암살조의 용병들은 작힘 가의 기사들과 같이 기절해서 곱게 묶여 있었다.


“그러니까.”


애드윈이 붉은 입술을 열었다.


제냐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딘지 낯이 익었다. 그 옆에 멀뚱히 서 있는 거한을 처다보았다. 조금 더 낯이 익었다.

‘저들을 어디서 봤더라······.’


한참을 고민하던 제냐에게 불현듯 기억이 지나갔다.


세슈칸.


메리골드 여관.


지나가던 무수한 사람들 중에서 유달리 눈에 띌 정도로 특이했던 커플Couple.


이성적인 연인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별에 별 외형이 다 공존하는 세슈칸에서도 제냐의 기억에 남았던 남녀다.


특히 호아킨의 상체에 나 있는 깊은 흉터들이 그의 거친 플레이 스타일을 짐작케 해서 눈길이 갔었다. 그는 투박하게 경갑옷을 위에 대충 걸쳐 입었고, 맨 살이 그대로 드러난다. 구릿빛에 단순히 근육질이라는 말로도 조금 부족한 완벽히 조형된 체격이었다.


가슴팍을 크게 가로지르는 찢어진 듯한 참상이 흉터로 남아 있고, 팔뚝이나 팔목까지도 상흔이 있었다.

어지간한 상처로는 저런 꼴이 되지 못하리라. 만일 현실에서 저런 모습이었다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을 것이다.

대동맥도 지난 게 아닌가 싶은 뱀처럼 팔을 타고 오르는 상흔은 누가 보더라도 순간은 눈길이 멈출 수 밖에 없다.


캐릭터는 사람을 말한다.

그것이 고작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예전 가상현실 게임이나, 현실적인 정보의 등록 제한이 없을 때는 자유롭게 성별도 바꾸고 외관도 바꾸고, 여러 캐릭터를 꾸미며 인터넷 세상에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비련의 시나리오 외에 다른 시뮬레이션 게임에선 여전히 완벽히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것이 많았지만, 적어도 실제 성별이나 접속하는 대륙 정도는 공개 정보로 늘 노출되어 있다.


어쨌든 많은 것들이 가상으로 꾸며져 있었고, 변형되며 일그러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속 캐릭터는 실제 플레이어를 말하는 무언가나 다름 없다.


자신이 매일 느끼고 바라보고 살아가는 캐릭터의 신체를 저 꼴로 디자인한다는 건, 섬칫할 정도의 느낌마저 드는 외향을 플레이 비쥬얼로 선택했다는 건 현실에서도 저런 일에 무감하거나 익숙한 인간일 가능성이 있었다.


아마 자신이 그런 현장을 직접 선택해서 바라볼 수 있는 직군들, 의사나 검시관 따위는 아닐 테다. 자신의 선택과 의사에 상관 없이 갑작스럽게 상흔과 마주치는 직군, 재난 상황의 구조 대원이나 직업 군인 따위가 아닐까, 하고 제냐는 생각했다.

때로 어떤 인간은 상처를 바라보면서 상처를 치유하기 원한다.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서, 그 상황을 이겨내고자 더욱 몰입할 때가 있었다.


호아킨의 신체는 제냐에게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하나 더 특이했던.


릿샤 애드윈이 입을 열 때 제냐가 그녀를 보았다. 붉은 단발머리. 붉은 입술. 붉은 눈동자. 총명하게 빛나는 둥그런 눈이 오밀조밀하게 들어 찬 곱상한 이목구비의 하나를 차지한다.

체구가 작은 여성이었고, 농담을 더한다면 ‘어린애’라고 불러도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으리라. 그런 애매한 경계의 외형이기에, 그런 식으로 말했을 때 화를 낼 가능성이 다분히 높았다.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신체적 특징은 유년기부터 시작해서 늘 낯선 이들의 대화 주제나 놀림거리가 되었을 확률이 높으니까.


예전에 메리골드에서 그들을 보았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리 오래 되지도 않은 일이었다. 시간적으로 말하자면 고작 몇 주 정도. 게임 속에서 급전개되는 상황은 마치 그것이 아주 오래 전의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예전의 제냐와 지금의 제냐는 전혀 다른 전투력을 갖고 있었고,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 본디 콘란드 대륙의 주민들이라면 몇 년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도 모자를 지 모른다. 평균적인 재능을 갖고, 전투 클래스를 연마하는 이들의 평균값을 내자면 말이다.


어쨌든 당시, 그 날 낮에 여관 로비에서 보았던 그녀의 특이점은 ‘동물 귀’였다. 흔히 일본 애니메이션 류에서 많이 생산되고는 하는 이미지였는데, 이따금씩 서구나 유럽의 인물들도 전혀 관련 없을 듯이 굴다가 그런 이미지를 좋아할 때가 있었다.

어쨌거나 사람의 감각이라는 게 다 비슷하고 보편적인 점이 있는 모양이다. 어색하고 이질적이지만, 잘만 어울리게 코스튬을 디자인하면 귀여움이 더해지기도 한다.


특별한 무대나 의도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그런 꼴을 한다면 정신적인 불안정을 조금 의심해봐야 겠지만.

애초에 이곳은 콘란드 대륙이었으니.

조금 기분이 들떠서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다닌다고 해도 어느 정도 용인되는 부분이다.


“우리는 세슈칸의 대영주, 운트 작힘 백작의 의뢰를 받고 이곳에 왔습니다.

아마··· 예. 당신들을 기습적으로 덮친 뒤 죽여 없애라는 내용이죠. 정확한 사연을 우리가 다 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귀족가 간의 알력 다툼이라고 이해했고요.


······.”


릿샤는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숨을 고르고 설명을 이었다. 자극적인 단어를 써서 이들의 적대감을 불러 일으킬 필요는 없다. 그런 강한 표현 뒤에는 적절한 설명이 따라 붙어야 하리라.

어쨌거나 이들은 길을 가다가 금세 습격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놀란 피해자들이다. 릿샤와 호아킨은 그런 이들을 덮친 가해자와 한 무리일 가능성이 있었고.


“다들 표정을 보아하니, 운트 작힘이라는 이름이 익숙한가 보군요. 뭐 저희는 산슈카 귀족 가문들의 알력 다툼, 정치적 입장이나 싸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떠돌이 용병에 불과합니다.

최근 세슈칸에 머물면서 금패를 받고 여러 의뢰를 수행하긴 했지만요.

이 친구와 저는 같은 일행이고, 여기 있는 로웰 드버 씨는 이번 의뢰를 통해 만났지요.


······예, 궁금하시겠지만 아무튼 운트 작힘은 강압적인 사내이며, 시내에서는 나름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요.

설령 그것이 대놓고 나타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떠돌이로서 살아가는 이들은 대영주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는 팁을 서로에게 전하곤 합니다.

언제 어떻게, 이런 식으로 암살 기습이라도 당할 지 모르니까요. 산슈카의 국법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운트 작힘은 적당한 기회만 있다면 누구라도 해할 수 있을 의지와 능력을 가졌나 봅니다.


······우리 역시, 스스로의 보호를 위해서 일단 용병 신분을 갖고 의뢰에 참여했습니다. 용병 길드 마스터의 간곡한 부탁과 협박에 의해서 이곳까지 왔죠.

또한 자세한 상황을 모른다는 게 이유이기도 했고···.”


릿샤는 달변이었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른 이들은 입을 다물고 별 말이 없다. 한낮의 거리. 일장연설이 시작되고 있었다.

궁금증을 풀어줄 만한 제대로 된 입이 그녀 뿐이었기에, 아, 물론 호아킨도 있었지만 그녀가 대변하고 있기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뭐, 혹시나 당신들이 정말 운트 작힘의 원한을 살만큼 나쁜 짓을 저질렀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우리는 말했듯 귀족가와는 관련이 없는 떠돌이고, 악인의 적이 꼭 선인이리란 법도 없는 게 세상의 이치라는 것만은 아는 사람들이라.”


그 즈음 말했을 때 갈색 사슴 기사단의 단장, ‘알렉세이 루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부단장인 옌 마퉁처럼 체격이 장대하고 호방하게 생긴 사내였다. 금실같은 곱슬 머리를 하고 있고, 눈썹은 옅은 갈색이다. 검은 눈동자가 둥그러니 크며 표정이 잘 드러난다. 기사단의 단원들은 그대로 심기가 드러나는 얼굴 표정을 살피며 그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늘 애써야 할 듯 하다.


“그런데 뭐······. 암살을 위해서 상당히 오랜 시간 이 로키 산에 진을 치고 기다렸습니다만, 갈수록 저희의 생각에는 별로 자신이 없어지더군요.

운트 작힘 백작이 보낸 기사들이 함께했기에, 우리가 정면에서 그들을 모두 잡을 수 없어서 협력하는 쪽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만···.

그 때 여기 로웰 드버, 세슈칸의 천재 몬스터 테이머가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채게 되었죠.

이 사람은 몇 없는 대도시 세슈칸의 금강Diamond급 용병입니다. 거대한 마물 부대를 순식간에 장악해서 군대와 비견할 만한 힘을 내는 대단한 술사죠.


어쨌든··· 이 사람이 근원적인 의문을 가졌습니다. 이 의뢰를 하는 게 맞는 것인가, 하고요.

우리는 그 고민에 동참했고, 동의했습니다.


운트 작힘과 그의 의뢰 대상이 되는 당신들···. 두 패의 귀족가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옳고, 또 안전한지 말입니다.


당신들에 대해서는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나누어본 적도 없고 모르지만··· 운트 작힘 백작에 대해서는 잘 알죠. 그는 의뢰를 성공시킨대도 그리 안전을 보장할만치 신뢰감 있는 의뢰주가 아닙니다.

운트 작힘이 싸이코라는 건 이미 알고 있고··· 우리는 당신들이 그런 쪽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면서, 작힘 가의 기사단을 뒤에서 치고 당신들을 살렸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아니더라도 당신들이 살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몇은 심하게 다치고, 또 죽었겠죠.

그들에 대한 목숨의 보답이나 값이라고 생각해서라도··· 우리의 결정과 선택을 호의로 받아주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이 알력 다툼에서 작힘 백작을 배신했습니다. 세슈칸으로 돌아갈 지, 말 지 결정을 해야 하지만··· 당신들의 뜻이나 계획을 조금 듣고 동참하거나 하고 싶군요.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긴 말이었다. 한 번에 해내지도 않았다. 릿샤의 스토리를 들은 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해는 되었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운트 작힘은 사이코였고, 미친 작자였다.

세슈칸의 대영주이며,

자유 도시 세슈칸의 지배자로서 중앙 정부의 눈치를 일부 보기는 하지만 뒷거리나 음습한 곳에서는 자신의 야욕을 드러내기 서슴치 않는다. 그건 짧은 시간이지만 그의 대적자가 되었던 로멜리아 가의 일행들이 아주 잘 아는 것들이었다.


제냐는 그래서 생각했다.


‘이 사람들, 유저인가?’


최태현에 비해서는 한참이나 늦은 인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비련의 시나리오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게 이 게임을 제대로 즐기는 묘미인 것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마주치는 플레이어들. 퀘스트는 고정적이지 않고 수많은 요소의 이합집산으로 계속해서 변화되며,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적극적으로 궤도가 바뀐다.


그렇잖아도 복잡한 변수가 있는 초고도 AI와의 시뮬레이션 게임인데, 실제 사람이 개입하면서 더욱 많은 분기점이 생기는 것이다.

그럭저럭 재미있거나, 시원찮은 전개일 때도 있겠지만, 아주 가끔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다이나믹한 씬의 연결이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

약간의 우연과, 사람의 개성과, 게임 내의 미리 깔린 요소들이 기적적인 하모니를 만들어내야 하는 일이리라.


제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퀘스트의 양면이 있었고, 적군이라 할만한 운트 작힘 쪽의 퀘스트 플레이어가 변절을 했다. 그들로서는 아주 달가운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쓸만한 아군까지 얻을 법하다.


제냐는 생각했다. 이 얘기를 어떻게 풀어서, 저들과 파티를 맺고 이대로 세슈칸까지 진격할까. 제냐나 최태현은 유저에 대해서 알았기에 그들의 심리와 동기를 쉽게 이해했지만, 다른 NPC들은 쉬이 믿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게임 내부의 세계는 곧 현실이었기에. 누군가를 믿기 위해서는 조금 더 상세하고 깊은 수준의 정보와 그들의 동기에 대한 서사가 필요하리라.


호아킨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뒤가 없는 놈들이고······ 아니 년과 놈들이고··· 운트 작힘은 언제 뒤통수 칠 지 모르는 사이코 새끼지. 그리고··· 우리 둘은 더럽게 잘 싸우고, 한 명은 보기 드문 천재 테이머요. 함께하겠소?”


거칠고, 호쾌한 언변이었다. ‘푸핫.’ 제냐는 헛웃음을 작게 터뜨렸다.


갈색 사슴 기사단원들의 표정이 더없이 일그러졌다. 그 찡그림이 곧 적대감이나, 불길한 미래를 예견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

j-k-2j8X-RpB1sM-unsplash.jpg


작가의말

빠밤.

사나이의 변명은 길지 않지!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4 83. 별 것 아닌 아이템들 23.09.21 25 3 19쪽
83 82. 흑사의 죽음 23.09.20 24 3 21쪽
82 81. 뱀(3) 23.09.20 22 3 20쪽
81 80. 뱀(2) 23.09.19 25 3 27쪽
80 79. 뱀 23.09.18 23 3 26쪽
79 78. 달칵 23.09.07 28 2 35쪽
78 77. 뒤꽁무니 23.09.05 30 3 31쪽
77 76. 암살자 23.09.02 35 3 42쪽
76 75. 어둠숲 23.09.02 29 3 31쪽
75 74. 헤어짐 23.09.01 29 3 32쪽
74 73. 프린스 알사드Prince Alsard. +1 23.08.31 35 4 55쪽
73 72. 퀘스트의 끝, 즈음 23.08.29 29 3 36쪽
72 71. 술래잡기의 끝 +1 23.08.27 27 2 41쪽
71 70. 술래잡기 23.08.25 25 2 23쪽
70 69. "…단장!" 23.08.25 23 2 21쪽
69 68. "작작해야지 새끼야…." 23.08.25 21 2 17쪽
68 67. 합류 23.08.25 22 2 18쪽
67 66. 황무지의 동굴 23.08.25 20 2 21쪽
66 65. U씨의 경우 23.08.21 24 2 20쪽
65 64. 생각보다 23.08.21 22 2 27쪽
64 63. 두 발째 23.08.18 23 2 36쪽
63 62. 전투, 전쟁 23.08.18 23 2 19쪽
62 61. 일점돌격 23.08.17 24 2 29쪽
61 60. 돌입 23.08.16 23 2 16쪽
60 59. 태양의 숨결, 폭풍의 한 자락 23.08.16 52 2 24쪽
59 58. 릿샤Rissha의 방 23.08.16 20 3 17쪽
58 57. 사연 23.08.13 29 3 24쪽
57 56. 누군가의 죽음 23.08.13 24 3 13쪽
56 55. 어느 법관의 정의正義 23.08.13 23 3 27쪽
55 54. 돌아가는 길 23.08.13 22 3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