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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명청간 중원 권력 교체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전쟁·밀리터리

가재모
작품등록일 :
2022.08.10 17:13
최근연재일 :
2022.09.05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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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5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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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의 난과 명나라의 멸망(5)

DUMMY

명말, 만력제 삼대정과 명-청 중원의 권력 교체(5회)


가재모




(3) 누르하치의 한인 출신의 범문정 중용



범문정의 집안은 원래 강서(江西) 낙평(樂平)에 거주하였다. 그러다가 명나라 초에 선조가 강서에서 심양 무순(撫順)으로 유배를 당해서 심양에 거주하게 되었다. 범문정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경서를 두루 읽어 높은 학문과 병법에도 달통한 걸출한 귀재였다. 명나라, 무순성(撫順城)의 수장인 부친, 범남(范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터로 나아가 누루하치를 만나게 되었다. 누루하치가 1618년 4월 무순성을 함락시킬 때 당시 21세였던 범문정은 포승으로 결박되어 누루하치 앞에 서게 되었다. 준수한 용모에 지략이 뛰어나고 달변가인 범문정은 대담하게 후군군이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현장을 비판했다 누르하치는 처음엔 노했지만 범문정의 담력과 식견, 호기를 인정하여 그에게 자기의 오른쪽, 왼쪽의 팔이 되어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범문정은 1619년 양호가 지휘하는 명의 대군이 네 갈래로 진군해 후금을 공격할 때 명에 밀파했던 밀정보다도 더 정확하게 적의 병력수, 전략전술 및 이동로까지 예측하여 누르하치에게 제시했다. 이미 범문정을 완전히 신뢰한 누르하치는 범문정의 계책대로 주력군 전부를 명나라 장수 두종(杜宗)이 지키는 길로 향하게 했다. 그 결과 후금은 건국이래 최대의 사르후(薩爾滸) 대첩을 거뒀던 것이다. 누르하치는 "범문정 선생이야말로 주나라 문왕의 책사 강자아, 한나라 유방의 장량, 명 주원장의 유백과 대등한 지략가다."라며 칭송했다

(4) 홍타이지의 최고의 책사 범문정에 대한 총애

누르하치의 사후에 등극한 홍타이지에게 범문정은 영원성을 견고하게 지키고 있던 명나라 장수 원숭환을 제거할 기상천외의 책략을 건의한다 청옹성같은 영원성을 우회해서 북경을 공략해 원숭환을 북경으로 유인한다는 전략이었다. 이어서 원숭환이 음흉하게 홍타이지와 결탁하여 반역을 저질렀다는 거짓정보를 성내에 유포시켜 원숭환이 숭정제에게 잡혀 처형당하게 만든다는 반간계였다 그러데 이러한 홍타이지의 반간계를 숭정제가 덮썩 물어서 원숭환을 능지처참했던 것이다. 홍타이지 즉위 초에 범문정은 1) 서쪽으로는 영원의 백성들에게 진실되게 대하고, 2) 동쪽으로는 조선을 보호하고, 3) 북으로는 몽골을 정벌하고 4) 남으로는 명나라 장수들을 끌어 들이도록 대외 책략을 건의했다. 1635년, 홍타이지는 몽골을 정벌하여 대원의 옥쇄를 얻었다. 이어서 범문정은 1) 명나라를 집요하게 '침범'해서 명을 소진시켜 승리를 도모하고, 2) 명나라의 농민 봉기를 기다리고, 3) 홍타이가 황제로 등극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며, 4) 역대의 정치 체제와 제도로 혁신해야 한다는 책략을 건의했다. 황타이지는 이러한 그의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제왕이 되어 대청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1633년에 명나라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이 군사 1만 4000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후금군에 투항하였다. 1636년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나라로 바꾸고 12만 8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조선을 공격했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이 전쟁에서 홍타이지는 조선왕 인조의 항복을 받아냈다. 홍타이지는 만주족과 한족과의 융합 정책을 도모하면서 범문정을 지극히 총애했다. 홍타이지는 한족문화를 존중했고, 범문정은 이런 배경 속에서 홍타이지의 전폭적인 신임하에 최고의 심복 책사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는 명나라를 정벌하는 책략을 정비하고 한족 관리의 귀순을 얻기 위해 애썼다. 또한 몽골을 포섭하였고 1636년 내비서원(內秘書院) 대학사(大學士)에 임명되어 국가의 제도를 정비하는 등 핵심 국사 문제에 모두 참여했던 것이다



(5) 홍타이지의 동생 도르곤, 범문정의 계책을 수용해 북경 입성

홍타이지의 동생 도르곤은 밀운성을 돌파하고 계속 남하하여 50성을 공략하고 8성을 항복시켰으며 46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북경의 관문인 산해관이 난공불락 요새라 더 이상은 남하하지 못하고 대신 1640년 금주성을 포위했다. 이에 명의 군대가 금주성을 구하려 홍승주와 오삼계 등이 송산성에 집결했으나 청군의 대공격으로 크게 패해 명군 5만 4000명이 섬멸당하고 송산성과 금주성은 물론 산해관 외성도 함락당했다.

중년의 홍타이지가 전국을 통일하기도 전, 1643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황위 쟁탈전이 벌어졌을 때 장비(莊妃)는 범문정의 책략을 구했고 그의 책략에 따라서 자신의 여섯 살짜리 어린 후린(福臨))을 황위에 올렸다. 그가 바로 순치황제이다. 범문정의 책략의 골자는 황제든 범부의 남편을 잃은 미망인은 끈이 떨어지 모자같은 신세가 되니 6세인 후린을 황제에 올리고 그 섭정권을 모후가 갖지말고 야심많은 도르곤에게 주라는 기발한 책략이었다. 장비가 상복을 벗고 곱게 분단장을 하고 눈부신 황후복으로 갈아입고 시동생인 도르곤을 독대해서 범문정의 책략대로 제안을 했다. 평소 자기 형수가 총명할 뿐만 아니라 절세의 미인이었기 때문에 부러워 했었는데 이날 갑자기 장비가 천사처럼 꽃단장을 하고 자신과 독대하게 된 도르곤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도르곤은 순간적으로 그러한 묘수의 책략이 자기가 추방시킨 범문정으로 나왔을 것이라는 추론을 했다. 그러나 그 묘수가 자기 한테는 하나도 밑질 것이 없겠다고 판단한 도르곤은 무릅을 쳤다. 그리고 일언지하에 장비의 제안을 수락했다. 범문정은 황제의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섭정왕 도르곤이 자기를 추방했으나 효장 황후의 도움으로 다시 신임을 얻었고 최측근에서 보좌하게 되었다. 범문정은 이어서 도르곤에게 다시 절묘한 책략을 올렸다. 그러한 책략의 골자는 1) 이자성을 적으로 삼으라는 명정(明敵) 2) 북경으로 들어가 이자성과 천하를 겨누라는 급진(急進), 3) 명나라 신하와 백성의 원한을 갚아 민심을 얻으라는 조민(弔民), 4) 이자성을 배제하고 명나라의 계승자로 자처하라는 도명(悼明)계책이었다. 도르곤이 그의 계책을 인정하여 북경으로 진군해서 이자성과 결전을 벌렸던 것이다. 특히 범문정은 1644년 도르곤의 산해관 공격을 전후하여 살육과 약탈을 엄금하고 군대의 기율을 분명하게 세워 인심을 얻을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명나라 숭정제(崇禎帝)의 발상(發喪)을 허락하도록 주청하여 명나라 종실(宗室)과 구신(舊臣)들의 동요를 막았다. 아울러 조세의 감면을 건의하고 과거 시험을 거행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한족 지식인들을 포섭하면서 둔전을 개간하는 일을 실행하여 농업 생산을 회복할 것을 건의하였다. 범문정은 청나라 초기 4명의 황제를 모시면서 청나라의 정치적 상황이 안정되는 데 크게 기여한 명신이었다.

8. 이자성의 난과 명나라의 멸망

점차 국력이 약해지던 명나라는 1644년 청나라의 공격이 아닌 이자성의 난 등 내부 반란으로 인해 급속도로 쇠락했다. 숭정제는 중세(重稅)를 견디지 못해 봉기한 이자성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차례로 토벌군을 보냈다. 그 이자성의난을 평정하기 위한 토벌군을 조직을 위해서는 다시 증세(增稅)를 거둬드리자 궁핍한 백성들이 반란군에 가담해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이자성은 시안, 개봉, 낙양을 점령하고 1644년, 북경을 포위하여, 4월 24일에 총공격을 감행했다. 뒤이어 북경에 입성해서 스스로 칭제했다. 숭정제는 위급을 알리는 종을 울렸지만, 신하들이 모두 도망가서, 환관 왕승은(王承恩) 혼자서 외롭게 지키는 고립무원의 처참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1644년 4월 25일 새벽, 사방이 불타는 와중에 숭정제는 아들들을 자금성으로 부터 탈출시켰다. 그리고 처첩과 딸들을 살해하고, 자금성의 북쪽에 있는 경산(景山)으로 가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였다 그때 청나라는 산해관에서 오삼계의 50만 명나라군 때문에 진격을 주저하고 있었는데 이자성의 난을 들은 오삼계가 청나라에 투항했던 것이다.그리하여 청군은 오삼계의 정병 4만 명을 포함한 18만 명의 도르곤 군대가 이자성을 격파하고 도르곤은 윈난성 왕이 된다. 중국 북부 후베이성으로 도망갔던 이자성은 1645년 그곳 주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대부분 장악했다. 결국 청나라가 입관에 성공했다. 청태종의 9번째 아들 순치제가 6세의 나이에 명나라가 황궁으로 사용하던 자금성에서 천자에 등극하면서 순치제 옆에 있던 대원전국(大元傳國) 옥새는 명의 멸망과 청의 지배라는‘천명(天命)’을 다시금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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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자성의 난과 명나라의 멸망(5) 22.09.05 26 1 9쪽
4 명, 숭정제의 폭정과 누르하치 부자의 한인 책사 범문정의 총애 22.08.14 25 0 8쪽
3 홍타이지, 영원성 우회 경로로 북경 기습과 약탈 22.08.10 29 0 12쪽
2 누르하치 후금 건국, 명과 후금간의 사르후 전투 22.08.10 32 0 13쪽
1 명말, 만력제의 태정과 삼대정 22.08.10 147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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