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황해도 개풍군 토성면에서 해방 둥이로 태어나 자랐다. 1950년 6월25일 새벽 38선과 북에서 인민군이 쏘아대는 포탄 소리에 새벽장이 깨었다. 동족상잔의 정쟁이 발발한 것이다. 동네 어름들이 가까운 개성에 나가보니 경찰서가 불타버렸고 관공서 건물에 포탄이 떨어져 아수라장이 되었다며 방공호를 파고 대피하거나 피난을 가야 한다고 했다. 점심때에 도로 양측으로 인민군이 완전 군장으로 남쪽으로 행군을 하고 있었다. 토성면 최고의 부농인 외할아버지의 바깥 채가 인민군 수중으로 들어갔고 창고에 저장된 수백 석의 쌀이 강탈해 갔고 많은 농지 문서도 몰수를당했다.공산당 앞잡이들이 완장을 차고 부자와 경찰 등 공무원들을 색출해 죄도 새도 모르게 숙청했다.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서울 수복과 함께 압록강까지 북진했다. 그러나 갑자기 중공군의 참전으로 처참한 1.4 후퇴를 맞게 되었다. 아버지는 철도 역무원으로 계셨기 때문에 숙정이 무서워 집으로 오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숙식을 하고 계셨고 외할버지는 공산당에 두번 당할 수 없다고 식구 모두가 전쟁의 피해가 적은 경북 청도로 피난을 가자고 하셨다. 그리하여 외할아버지댁이 먼저 피난했고 이어서 아버지는 1.4후퇴 막지막 열차로 남하했고 우리 3형제는 뒤따라 배를 타고 다시 군산에서 기차로 청도로 가서 피난 생활하게되었다. 청도에서 국민학교에 입학했고 아버지가 춘천역으로 발령 받았다는 연락읋 받고 춘천으로 이사해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는 남자 반장이 한없이 고마웠다. 어느날 학교에 우리 집까지 먼거리를 매일같이 데려다 주는 반장과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