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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명청간 중원 권력 교체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전쟁·밀리터리

가재모
작품등록일 :
2022.08.10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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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5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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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0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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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 후금 건국, 명과 후금간의 사르후 전투

DUMMY

명말, 만력제 삼대정과 명-청 중원의 권력 교체(2회차)

가재모

4) 만력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선의 재조지은

세 차례의 전쟁 가운데서도 임진왜란으로 인한 부담이 가장 컸다.

경략 송응창이 출관해 쓴 향은(餉銀 )은 200만 냥이라고 했고 형개(邢玠)가 출관하여 1600년 귀국하기까지 사용한 향은은 무려 800여만 냥에 달한다고 하였다. 만력제 신종은 3대정 가운데 보바이의 난과 양응룡의 난에는 자신의 내탕금을 일 냥도 지출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1) 조선 선조의 명군 조선 파병요청을 접수한 후 병부상서 석성과 가유약 등 찬성파의 의견을 선뜻 받아드려서 조선출병을 지체없이 윤허했다. 2) 정유재란 시에도 조선 선조의 명군 파병 요청에 신속하게 재파병을 윤허해 양란에 명군 총 20만명의 조선파병이 이뤄졌다. 3) 신종은 전란으로 기아선 상에서 허덕이는 조선 백성의 구휼을 위해 산동미 100만석(9만톤)을 흔쾌하게 지원했다. 4) 임진왜란 당시 내탕금 200만냥을 하사했다. 5) 정유재란에도 내탕금 500만 냥을 아낌없이 하사했다. 6) 조선의 전후 복구와 왜의 재침방어를 위한 전비 200만 냥을 쾌척했다. 이는 하늘이 만력제로 하여금 조선을 돕도록 역사한 기적같은 일이다. 임진•정유년 두 차례의 전비는 통산해 1천만 량 이상으로 추산한다.


당시 비슷한 시기에 명이 보바이의 난 진압에 180여만 냥, 양응룡의 난 진압에 200만 냥이 소용되었음에 비하면 엄청난 거액이다.

대외전쟁에 소요되는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명 조정은 강남(江南) 등지에 증세(增稅) 조치와 징집, 징발이 이어지면서 백성의 불만이 높아졌고,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1580년대 장거정(張居正)이 주도한 토지조사사업 등으로 일시적이나마 충실해졌던 재정이 적자로 반전되었다. 이에 더해 만력제(萬曆帝)의 실정과 당쟁의 심화, 요동에서 누르하치의 위협 증대 등으로 명은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4. 후금의 국조, 청 태조 누르하치의 건국


누르하지는 후금의 국조이자 청나라의 초대 황제다. 만주족인 그는 랴오닝성 출신으로 오도리 만호부(斡朶里 萬戶府)의 만호였던 먼터무(孟特穆)의 6대손이다. 아버지 탁시와 할아버지 기오창가는 여진족이었지만 이성량이 이끄는 명군을 도왔다. 그러나 1583년 명군과 연합해 타 부족 마을을 치는 과정에서 명군에게 둘다 오인 사살되었다.


24세의 젊은 나이로 추장(수러 바일러)에 오른 그는 푸순 동쪽 지방으로 부족을 옮겨 다스린다. 이즈음에 명의 이성량은 그의 부친과 조부를 죽인 것에 대해 사과하는 의미로 말과 토지를 하사했지만, 누르하치는 명나라에게 속으로 원한을 품고 있었다. 당시 명나라의 이성량은 당대에 뛰어난 명장이었다. 실제 여진족들은 이성량을 두려워했고 누르하치조차 이성량이 좌천되기 전까지는 아무리 세력을 키웠어도 눈밖에 나지 않게 뇌물을 보냈다. 그러나 이성량은 군비를 마음대로 쓰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등으로 타락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명조정에서는 이성량을 좌천시키고 새로운 관리를 요동으로 보냈다.


이성량이 다소간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누르하치와 그 세력을 제압하고 섬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성량을 좌천시키고 후임자는 예상외로 강한 누르하치의 세력에 놀랐고 함부로 제압하기가 힘들었다.

여기서 누르하치의 선택은 대적도 아닌 뇌물 공세를 펼쳤다.

그리하여 후인자는 이성량처럼 누르하치의 여진 통합 과정을 눈감아 주었던 것이다.


이때 명나라가 만력 3대정에 휘말렸다.

이러한 만력 3대정은 누르하치에게 있어서는 천재일우로 이후 명의 시선은 전부 이 3대정에 집중되어 누르하치를 견제할 여력이 없었다.

누르하치는 이후 명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전력으로 여진족들을 통합하기 시작했다. 결국 야인여진을 제외한 모든 여진족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5.명나라 청나라간 전쟁

1588년 여진족 지도자 누르하치가 건주 여진을 통일하고 명나라는 1590년 여진족을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뒤이어 3차에 걸쳐 22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무리하게 파병하는 바람에 국고가 바닥났다.

누르하치는 1616년 드디어 여진족을 완전히 통일하고 금나라를 잇는다는 뜻에서 국호를 후금이라 정했으며, 팔기군을 편성, 문자와 글도 독자적으로 완성했다.


1618년 4월 1만 명의 후금군이 명나라 푸순성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후금군은 푸순성 전투에서 성주 이영방의 항복을 받아내며, 쉽게 성을 함락시켰으며, 뒤이어 장승음이 이끄는 1만 명의 명나라 구원병까지 무찔렀다. 1618년 5월에는 무안과 백가충 등 명나라 11개 성을 함락시키고 7월에는 청하성 전투에서 8000명의 명나라군을 무찔렀다.


(1) 명나라의 누르하치 토벌 작전


일명, 사르후 전투(Sarhū, 薩爾滸之戰)는 1619년 명나라에 쳐들어온 후금에 대항하기 위해 명나라, 조선, 여진족까지 참전한 전투다. 이 전투에서 명나라는 후금에게 패하여 쇠퇴하게 되었고, 후금은 만주 지역을 완전히 차지하였다. 한편 군대를 파병한 강홍립의 조선군 부대는 명군의 패배소식을 듣고 급히 진을 쳐서 청군을 막고자 했지만 평지에서 조총수가 병력의 반이상이였던 조선군은 후금의 기병대에게 크게 패하고, 후금군에게 2일동안 포위되어 결국 항복하게 된다.

건주 여진을 통일하고 1616년에 한으로 즉위하여 후금을 일으킨 누르하치는 1618년 명나라에 대해 "일곱 큰 원한"을 내걸고 선전 포고를 하고 요동의 명 거점인 무순을 공격했다. 명나라는 이에 대해 양호를 요동 경략으로 임명하고 여진을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명군은 예산 부족으로 군사의 결집에 시간이 걸렸으므로, 양호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후금에 북쪽에 접해 있는 예허와 남쪽에 있는 조선에도 원병을 요청했다. 예허는 여진을 통일하기 위해 누르하치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에 응했다. 한편 조선의 국왕 광해군은 출병을 꺼렸지만, 임진왜란 때 명에 도움을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조선은 도원수 강홍립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압록강을 넘게 했다.

1619년 10만 명군은 전군을 4개 군단으로 편성했고 최종 집결지를 누르하지의본거지인 허투알라(Hetuala)로 했다. 그리하여 1) 북로군 개원 총병관 마림이 예허의 원군과 함께 개원을 출발했고 2) 서로군은 산해관 총병관 두송이 심양에서 출발해서 북로군과 서로군은 무순과 허투알라의 중간 지점인 사르후에서 합류하여 허투알라로 진격하기로 했던 것이다. 3) 동로군은 동남로에서 요양 총병관 유정이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 군대와 함께 단동 부근에서 북상하여 각각 서남과 동남에서 직접 허투알라로 진격했다. 4) 남로군은 요동 총병관의 이여백이 요양에서 청하를 넘어 진격했다

총사령관 양호는 예비 병력과 함께 후방인 심양에서 대기하면서 전군을 총지휘 하였고, 10만의 명군은 전군을 4개의 군단으로 나누어 네 곳으로 누르하치의 본거지 허투알라를 포위하기 위해 진격을 하게 했다.


1) 사르후 전투

명군의 진군은 추운 겨울 날씨와 쌓인 눈 때문에 예정과는 상당히 지연되었다., 특히 그런 연유로 마림이 이끄는 북로군이 중간에서 지체했고 두송의 서로군만 사르후 근처에 도착했다. 성질이 급하고 공명심이 많은 두송은 적정을 살피니 사르후산에서 후금군이 성을 쌓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두송은 마림군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1619년 3월1일 사르후 산에 공격을 개시했다. 병력이 더 많았던 두송군은 사르후 산을 즉시 점령했다. 2만 5000의 병력 중 1만명을 수비를 위해 남겨두고, 나머지 주력 1만 5000명을 자이퍈 산 공격에 투입했다.

한편, 누르가치는 허투알라에서 명군의 도착 소식을 듣고, 바로 사르후를 향해 출발하여 저녁에 사르후의 남쪽 변방에 도착했다. 누르하치는 8기 군단으로 구성된 후금군 주력 중 2기를 자이퍈의 적 주력에 대한 견제를 위해 파견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 직접 6기의 군단을 이끌고 어스름한 땅거미를 타고 사르후 중심으로 육박했다.

사르후를 지키는 명군은 적군의 동선을 오판을 했기 때문에 완전히 기습을 받은 형국이었다. 더구나 지형적 혼란과 어둠으로 인해 화력을 거의 살리지 못한 채 백병전에서 괴멸을 당하고 말았다. 후방 부대의 괴멸로 자이퍈에 있는 명군 주력은 크게 동요했다. 견제를 위해 파견된 누르하지의 2기인 기린과 하다 수비대와 사르후에서 전진한 후금군 주력 6기의 군사에 의해 세 방향에서 동시다발로 공격을 받았다. 결국 속수무책으로 괴멸당했고 두송과 휘하의 주요 장령들은 전사를 했다.


2) 상간하다 전투

한편, 두송 서로군과 합류하기 위해 눈 덥인 북쪽에서 사르후로 향하고 있던 북로군 마림군은 두송이 전사했을 때는 사르후 북방에 있는 상간하다(尚間崖)라는 지점에 당도했다. 1619년 3월 2일, 두송군의 괴멸 소식을 듣고 마림군은 더 이상의 전진을 멈추고 상간하다에서 참호를 파고, 대포를 거취시켜 후금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후금군은 명군의 화기에 대한 대책으로 상간하다에 도착한 누르하치 후금군은 본대가 고지를 선제적으로 점령하고 명군의 참호를 산위에서 공격하였다. 명군은 이를 방어를 하면서 후금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후금군이 기마대로 공격을 감행하여 난전을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마림과 불화를 겪던 반종안을 사령관으로 하는 명군의 후방 부대는 마림의 본대에 구원부대를 보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마림은 패주했다.

이어 반종안의 진을 공격한 후금군은 말을 타지 않은 병사들이 적의 화기를 일단 제거한 후에 기병을 돌격시켜서 반종안도 패주를 시켰다. 마림과 반종안의 패전 소식을 들은 예허 원군은 후금군과 전투를 포기하고 자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던 것이다.

3) 아부달리 전투

북서로군의 패전 소식을 접한 양호는 살아남은 이여백과 유정, 양군에게 진격 중지를 알렸다. 이여백군은 원래 천천히 진격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퇴각했지만, 유정군은 이미 적지 깊숙이 진격하여 중단 명령을 받지 못하였다.

유정군은 상간하다 전투가 있었던1619년 3월 2일 허투알라의 남쪽을 방어하는 후금의 수비대를 격파하고 순조롭게 북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누르하치는 사르후 변방에서 북로 군과 싸우고 있던 후금군을 재집결하여 허투알라(赫圖阿拉)로 진입하는 유정군과 맞서기 위해 차남 다이샨(代善)이 이끄는 주력을 파견했다. 3월 4일, 유정군은 허투알라의 남쪽, ‘아부달리’(阿布達裡)라는 지점에서 다이샨 군과 조우하자 즉시 진을 고착시켰다. 이에 다이샨은 자신의 주력부대와 동생 홍타이지(8남)가 이끄는 부대와 합세한 별동대를 이끌고 유정군 진지를 향해 진군했다. 또한 유정의 후방에 있던 누르하치의 부장 다르한 희야도 합세해 세 방향에서 유정의 진지를 포위, 공격했다. 하여 명군을 괴멸시켰고, 유정과 명나라 장수들은 화약더미에 불을 붙여 자폭했다.

4) 부차 전투

아부달리 전투가 있었을 때, 조선군과 명나라 유정군 후방 부대는 자금 부족으로 유정의 주력보다 늦게 출발했다. 그리하여 아부달리 남쪽 ‘부차’(富察)라는 지점에 머물고 있었다. 누르하지의 아들 다이샨은 즉시 진격을 시작하였고 홍타이지를 선봉으로 하는 후금군이 부차로 육박해 들어갔다. 조선군의 강홍립은 조총과 장창으로 전면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이를 맞아 싸웠으나, 강한 모랫바람 역풍으로 인해, 조명 불이 꺼지고, 화기의 연기에 시야를 빼앗겼다. 그 틈을 이용해 후금군 기병이 돌격하여 선봉부대를 돌파하였다. 이때 좌영을 방어하던 조선군 장수 김응하가 전사를 하였다. 명군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밤이 되자 조선군 중영 본영은 5000명만이 고립되어 포위되고 말았다. 후금은 조선군에 항복을 권했고, 결국 이틀을 굶은 강홍립과 조선군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누르하치에게 투항했다. 조선군의 투항 사실을 알게 된 명군의 장교는 자살하고 동남로군은 괴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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