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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명청간 중원 권력 교체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전쟁·밀리터리

가재모
작품등록일 :
2022.08.10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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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5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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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0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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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만력제의 태정과 삼대정

DUMMY

명말, 만력제의 태정과 삼대정


가재모


[어름깨기]

사보타주(Sabotage)는 사전적으로 맡은 일을 게을리하는 태업을 말한다. 일반적으로는 오늘날 노동조합의 통제하에 일을 하면서도 집단으로 노동 능률을 떨어뜨려 사용자에게 손해를 주는 행위를 지칭한다. 그런데 blice.co.kr에 중장편 소설을 연재하고 있는 나는 수은주가 최고로 37도를 넘긴 후덕 지근한 여름 날에 명나라 황제 중에서 재위 기간이 무려 48년(1573년-1620년)이나 되는 신종 황제, 만력제가 황정을 게을리했다는 태정(怠政)을 읽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만력제는 중국에서의 별칭이 '조선 황제', "고려 천자"로 불려지고 있다.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도망했던 선조 임금보다도 더 조선을 사랑함으로써 자기 나라를 망친 황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1. 만력제의 황제 등극


만력제는 10살 어린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즉위했다. 어려서 부터 총명했고 9살 때부터 장거정의 지도 아래 황궁에서 성리학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서예 등 자질을 갖췄기에 후일 성군이 될 것으로 정평이 났다. 만력제가 즉위 초 10여 년간 자성황태후 이씨의 후원을 받은 대학사 장거정과 환관 풍보(馮保)의 도움을 받아 통치술을 익혔다. 장거정은 황태자 태부시절부터 교과서를 별도로 만들어서 일를 달달 외우록 하는 등 한눈을 팔지 못하도록 엄격한 훈육 로드맵으로 통제를 했다. 장거정은 황태자 교육을 통하여 청렴결백해야 하고 인재를 널리 등용시켜야 하며 우국충정과 애민 정신을 강조했던 것이다.




명나라 왕조의 통치 체계는 관료조직과 환관 조직의 갈등구조였지만 장거정과 풍보는 연립 내각을 구현해 국정을 장악하고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장거정은 황하하류의 치수사업, 일조편법으로 토지세제를 개혁했다. 척계광을 요동에 이성량을 몽골에 파견하여 북로를 막았고 절강, 관동 등 해안경비를 강화해 왜의 침입 봉쇄 등 국방을 견고히 했다. 풍보 또한 환관 조직을 통제하여 조정을 장악하고 장거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런데 1582년에 장거정이 사후 2년에 만력제는 돌변, 심경변화와 안면을 몰수하여 "장거정이 언관을 억제하고 황제의 총명을 막았으며, 국정을 농단하고, 황상의 은혜를 저버렸으며, 불충을 도모했다."라는 조칙을 내려 장거정을 부관참시하고 작위를 박탈했고 장남을 고문해 자살하게 했다. 또한 가산까지 몰수해 유족들이 굶어 죽었다. 풍보도 조정에서 쫓겨났다.


장거정의 사후에 황실에 서거정과 풍보의 비리, 축재와 편파적인 인사 전횡을 비난하는 상소가 봇물을 이뤘다. 서거정과 풍보는 사적으론 상당히 부패하여 사리사욕으로 많은 이익을 많이 챙겼고, 반대파를 숙청하는 등 전횡을 일삼아 정적이 많았기 때문에 사후에 응징을 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여하튼 이 사건은 만력제 개인의 통치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신하들의 능력과 도덕성을 불신하고 정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에 이후로 황제는 업무에서 손을 놓아버렸다는 해석이다.


한편, 만력제는 누군가에게 부축을 받아야만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 고도 비만과 척추에 다소간의 문제가 있어서 움직이기를 싫어했다고 전한다.

장거정이 죽은 뒤에 급격히 정무를 게을리한 사실을 두고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인물을 잃음으로써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2. 만력제의 태정(怠政)과 쟁국본(爭國본)


만력제는 이후 치병을 이유로 30여 년간 사실상 직무 수행을 태만히 했다. 거대한 명나라 국토 전역에서 매일 수천 건씩 쏟아져 올라오는 상소를 방치하고 그 위에 엎어져 잤다고 한다. 만력제와 관료들의 충돌은 특히 후계 문제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는 후궁 정 귀비를 총애했기 때문에 정 귀비 소생인 셋째 주상순(朱常洵)을 태자로 책봉하려고 했지만 신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 맏아들인 주상락의 황태자 책봉을 무려 19년이나 지진부진 미루다가 1601년 주상락이 성인이 되자 겨우 태자에 책봉했다. 이 사건을 국본의 쟁, 쟁국본(爭國本)이라고 한다. 만력제는 나라에 사르후 전투같이 아무리 위급한 일이 생겨도 은전 한 냥조차 내놓지 않는 지독한 세기의 구두쇠였다고 한다.


반면에 이재에는 귀재라서 이런 저런 이권에 개입하므로써 황제의 재산은 날이 갈수록 부유해졌고 국고는 점자 바닥이 드러났다. 황제가 재물에 혈안이 되고 부패하니 고관 대작과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정치에 관심이 없는 만력제는 아부하는 자에게 재상에 앉혀 놓고 오로지 자기 취미와 재산 증식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이때 만력제는 정사를 돌보지 않는 대신 수백만 냥을 허비하며 자신의 무덤 공사 하는 것과 보물을 감상하기를 즐겼고,낮에는 호수에 배 띄워 미색의 궁녀와 주연과 가무를 즐겼다. 뱃노리의 하이라이트는 궁녀들에게 부채를 나눠주고 황제가 잡아온 나비 한마리를 날려보내서 그 나비가 이리저리 날다가 애간장을 태우는 궁녀의 부채에 앉으면 그날 밤 황은을 입게 된다. 밤에는 영일이 없이 주연과 꽃노리패에 혈안이 되었다. 그리하여 정력보강을 위해 정력에 좋다는 최고의 약제와 희귀한 음식을 탐했다. 몸에 좋다며 산딸기와 복분자를 밤마다 거의 매일 한 움큼씩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만력제는 궁녀들과 내시들이 자기 의중에 반하면 몽둥이나 가죽 채찍으로 때려 죽이는 엽기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3.명나라 멸망의 적신호


만력제가 30년간이나 파업을 한 후유증은 심각했다. 그러한 연유로 많은 관리들, 심지어 재상도 황제의 용안을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고위 및 중급 이하의 관리 중 황제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조정 관리가 아주 희귀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만력 34년(1607)에 임용된 재상 이정기(李廷機)는 울화통이 터져서 재상직을 자진사퇴했다.

그 당시에 명나라 중앙 부처 9부의 관직 31개 가운데 24자리가 비었고, 호부와 통정사를 제외하고는 책임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이정기는 더이상 재상직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진 사퇴했던 것이다.


명나라는 만력 연간에 일어난 3개의 전쟁, 소위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으로 말마암아 국가 재정이 크게 악화했다. 또한 신종(萬曆帝)의 태정(怠政), 국정 태만으로 인하여 국가의 황정 시스템이 붕괴된 상태였다.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중국 명(明)나라는 극심한 은(銀) 부족에 시달렸다. 명조는 기민들을 구제해야 할 때에 오히려 가혹하게 착취해서 극심한 민심이반을 초래했던 것이다 명나라에선 은이 통화였기 때문에 통화공급 부족인하여 재정이 악화되었다. 국내 경기도 극도로 침체했다. 경제 위기에 빠진 명나라는 농민 반란과 변방 소수민족의 봉기를 진압할 군사비 확충에 실패하고, 종국에는 만주족인 청(淸)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1) 명의 만력 삼대정으로 인한 국가재정 파탄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은 명나라 만력 연간에 일어난 3개의 전쟁을 가리킨다. 3개의 전쟁은 1) 명 신종 만력 20년부터 28년 사이(서기 1592년-1600년)에 서북, 동북, 서남 변경지역에서 발생한, 몽골족 보바이의 반란, 2)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하였던 임진왜란, 3) 묘족 토사 양응룡의 반란을 말한다. 명나라는 비록 3개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극심한 국력을 소모하였다.

1) 보바이 난

서북지역, 오르도스의 보바이의 난은 1592년(만력 20년) 2월 18일부터 9월 18일까지 이어졌다. 보바이(哱拜)는 원래 몽골족 사람으로 가정 연간(1522-1566)에 명나라에 항복하였으며, 이후에 공을 쌓아 도지휘(都指揮)에 올랐다. 만력 연간에는 유격장군(遊擊將軍)에 올랐고 영하 지역을 관장하였다. 만력 19년 몽골족이 침입하자 보바이는 스스로 3천명을 이끌고 구원을 하겠다고 청하였다. 금성(金城)에 도착하여 몽골족의 침입을 수습하고 병력을 흡수하여 세력이 강성해지자 독립할 욕심을 품게 되었다. 순무 당형(黨馨)이 이를 알고 제지하였지만 만력 20년 2월 18일 반란을 일으켰다. 보바이는 당형 등을 죽이고 총병관 장유충(張惟忠)을 협박하여 당형이 “식량을 착복하여 난을 일으켰다”고 상주하게 한 다음 장유충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또한 군대를 보내 중위(中衛), 광무(廣武), 옥천영(玉泉營), 영주(靈州) 등을 점령하였다. 몽골족의 족장들을 회유하여 협력을 받아내려고 하였다. 3월 4일, 부총병 이후(李昫)가 반란을 진압하려고 하였으나 보바이는 몽골족의 지원을 믿고 저항을 계속하였다. 드디어 명나라 조정에서 마귀(麻貴)를 보내 몽골족을 공격하고 지원을 차단하였다. 4월 다시 이여송(李如松)을 영하총병(寧夏總兵)으로 삼고 진압작전을 총괄하게 하였다. 7월, 마귀 등이 몽골족의 근거지를 불태웠으며 섭몽웅(葉夢熊)의 통솔 아래에 영하성을 포위한 다음 수로를 터뜨려 성을 물에 잠기게 했다. 보바이 등은 외부로부터의 지원이 끊기고 성안이 잠기고 식량이 끊기자 서로 죽이고 배신하여 투항하려 하였다. 이여송이 성문을 돌파하고 보바이의 저택을 포위하자 보바이는 자살하고 그의 아들 등은 포로로 잡혔다. 이로써 보바이의 난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중국에서는 '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 또는 '항왜원조전쟁이라고 부른다. 임진왜란은 1592년(만력 20년)에 발생한 임진왜란과 1597년(만력 25년)에 재발하여 1598년(만력 26년)까지 이어진 정유재란이다. 임진왜란의 시작은 전국시대를 거치며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1592년(만력20),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에게 명령하여 조선을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부산(釜山)을 침공한 뒤 파죽지세로 북진해 한양(漢陽)을 점령하고 평양(平壤)까지 차지하였다. 조선의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義州)로 피난하였으며, 명나라에게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한국역사서에서 자세한 내용이 많기 때문에 생략하고 만력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선의 재조지은 '조선의 재조지은' 편에서 추가 설명을 한다.


3) 양응룡의 난

양응룡의 가문은 당나라 이후 대대로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아 파주를 다스렸는데, 파주는 사천, 귀주, 호북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지형이 험준한 산악지역이었다. 만력 초기에 양응룡은 파주선위사사에 오른 후 사실상의 독립세력을 형성했으며, 마침내 만력 25년(1597년) 반란을 일으켰다. 명 조정에서는 양응룡의 반란 초기에 방침을 분명히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다. 양응룡은 명나라에 뇌물을 바쳐 자신의 죄를 사면해줄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다른 묘족을 회유하여 사천, 귀주, 호광 등의 요새 수십 곳을 공격하게 하였다. 만력 26년 사천순무 담희사가 양응룡의 공격을 한차례 방어하였고, 만력 27년 귀주순무 강동지가 반란을 진압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명 조정은 강동지를 파면하고 이화룡을 병부시랑에 임명하여 반란의 진압을 총괄하게 하였다. 만력 28년(1600년) 2월, 총독 이화룡의 지휘 아래 명나라의 대군이 진격을 시작하였다. 4월, 유정이 이끄는 군대가 양응룡의 부대를 격파하고 양응룡의 본거지를 포위하였다. 6월, 성이 함락되자 양응룡은 대세가 이미 기운 것을 알고 자살하였으며 그의 아들은 포로로 잡혔다. 이후 명은 파주를 준의와 평월로 나누고 각각 사천과 귀주에 귀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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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말, 만력제의 태정과 삼대정 22.08.10 148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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