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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모 님의 서재입니다.

명말, 명청간 중원 권력 교체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전쟁·밀리터리

가재모
작품등록일 :
2022.08.10 17:13
최근연재일 :
2022.09.05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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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2.08.14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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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숭정제의 폭정과 누르하치 부자의 한인 책사 범문정의 총애

DUMMY

명말, 만력제 삼대정과 명-청 중원의 권력 교체(4회)


가재모


(4) 숭정제,홍타이지의 반간계와 엄당의 모함에 원숭환 책형으로 처형.


여하튼 원숭환은 11월17일 9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경 광거문에 도착했다. 원숭환은 부총병 주문욱이 일단 북경성안으로 들어가 병사들을 휴식시킬 것을 건의했으나 원숭환은 그의 제안을 물리치고 전군 야영을 결단한다. 그리하여 다음날 부터 광거문 밖에서 원숭환 9000명의 군사와 후금 군간에 10차례 이상 야전에서 악전고투 끝에 결국 후금군을 격퇴했다. 그리하여 원숭환은 11월23일 장병들은 오랜 행군과 장기간의 노숙으로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에 성안으로 들어가 휴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원하지만 숭정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북경의 겨울 날씨에서 성밖에서 노숙을 계속하던 원숭환의 9000여 군사는 11월27일 사력을 다해 북경 좌안문 부근에서 후금군을 격퇴했다. 홍타이지는 원숭환의 끈질긴 반격의 영향도 있었지만 당초에 목표로 했던 엄청난 물자 노획에 성공했고 수만 명의 포로 확보에 만족하고 북경에서 철군을 단행했다. 숭정제는 황성이 전화의 위기를 맞았기 때문에 원숭환에 대하여 격노했고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환관 엄당의 잔당이며 모문룡의 고향 친구로 원숭환으로 부터 많은 재물을 받아 재미를 봤던 환관 온체인(溫體仁)이 모문룡을 죽인 원숭환에게 반감을 갖고 황제에게 원숭환을 모함을 했다. 그는 숭정제에게 "원숭환이 홍타이지와 내통하여 후금군을 북경에 끌어들여 반역을 했다면서 목을 쳐야한다."고 무고를 했던 것이다. 나아가 홍타이지는 북경 침공 당시 사로잡은 2명의 환관에게 "원숭환이 북경을 탈취하기로 후금과 밀약을 했다"고 거짓 정보를 흘러서 북경으로 돌려 보냈다. 풀려난 두 환관은 지체없이 숭정제를 알현하고 그 사실을 직고했다.



의구심이 많고 대국적인 안목이 부족한 숭정제는 결국 홍타이지의 반간계에 농락당하고 만다. 그리하여 숭정제는 1629년 12월1일, 후금이 북경성 남쪽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원숭환을 군량에 관해 의논할 것이 있다며 황궁으로 소환했다. 원숭환은 별다른 의심없이 휘하 총병인 만계(滿桂)와 부장 흑운룡(黑雲龍) 두 사람만을 대동하고 황성으로 입궁했다.


그런데 숭정제는 난데없이 원숭환에게 모반죄를 물어 현장에서 구금 조치했다. 원숭환 휘하 총병 만계와 만계의 부장 흑운룡에게는 반대로 특진과 상훈을 내렸다. 원숭환의 구금에 후금군이 북경성을 포위하자 숭정제는 만계에게 나가 싸울 것을 명령했다. 만계는 북경성 영정문밖에서 12월16일 결전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여하튼 원숭환을 살리려는 동림당과 죽이려는 엄당의 격렬한 갈등 속에 숭정제는 황제를 속인 죄와 모반의 죄를 물어 1630년 8월16일 북경 저자 거리에서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원숭환은 기둥에 묶인 채 살점을 발기발기 발라내는 처참한 책형(磔刑)을 당했다. 이어서 원숭환의 형제와 처자는 멀리 변방 땅으로 추방됐다. 반면에 홍타이지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적국의 최고 명장을 손 쉽게 제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원숭환이 지키던 산해관에서 후금을 막던 병사들은 명을 이반했다. 영원성이 함락된 것이다. 이것이 명이 패망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6. 홍이포를 확보로 날개를 단 홍타이지

정묘호란에서 조선을 누른 홍타이지는 이제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명나라는 홍이포(紅夷砲)를 확보하고 있었고, 홍이포의 파편에 아버지 누루하치가 숨졌다는 것을 간파한 홍타이지는 홍이포 탈취에 골몰한다. 홍이포의 유효 사정거리는 2.8km 이내였지만 홍이포는 당시 파괴력이 우수했고,적의 사기를 꺾는 데도 아주 위력적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한 명나라 군대의 대포는 홍이포 보다는 한단계 아래인 불랑기포(佛朗機炮)였다.


명 말기에 북경에 체류하던 독일 신부 아담 샬(Adam Shal)이 명의 예부상서 서광계(徐光啓)에게 제작기법을 전해줬고, 명 조정이 홍이포를 수입해 자체 제작이 가능하도록 기술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홍타이지는 명나라만이 보유하고 있는 홍이포 확보에 전력 투구했다. 1629년 10월 후금은 명의 영토인 하북성 영평(永平)을 공격할 때 홍이포를 만드는 장인들을 찾아내 포로로 압송한 것이다. 후금은 서둘러 홍이포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포로로 잡아온 한족 장인을 노예에서 해방시켜주고,무기기술자들을 적극 우대하고 후하게 포상했다.




그 결과 만주에서 홍이포를 주조하게 된 것은 1631년 6월이었다. 홍타이지는 홍이포의 이름도 홍의포(紅衣砲)로 바꿔서 대량제작에 나섰다. 후금군은 1631년 8월, 대릉하(大凌河) 공격시 명군의 홍이포를 수적으로 압도해 대릉하는 홍의포의 덕분에 일거에 함락되었다. 당시 명나라 황제 숭정제는 폭력적인 황제로 신하들을 맘대로 죽였다. 후금은 청나라로 날로 강성해졌고 명은 전비 각출로 민심이반과 민란이 속출했다.


7. 숭정제의 폭정과 누르하치 부자의 한인 책사 범문정의 총애


(1) 숭정제의 폭정


당시 명나라 황제 숭정제는 폭력적인 황제로 신하들을 맘대로 죽였다. 아무튼 재위17년동안 상서급 50명을 경질했고 심지어 병부상서14명을 갈아쳤다. 또한 죽이거나 자살케 만들었던 총독(総督)이 7명이었고 순무 11명도 죽이거나 자살하게했다고 한다. 최고조에 달했던 숭정 14년에는 감옥에 수감된 고위관리가 145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대신 급만 10명이 넘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숭정제 치하에서는 고위 관리들은 황제의 눈에 거슬려서 희생을 당하거나 후금, 이후에 청에 투항하는 기로에서 번민을 해야 했다. 후금은 청나라로 날로 강성해졌고 명은 전비 각출로 민심이반과 민란이 속출했다.

(2) 중원의 신흥 세력, 청의 비밀병기 17세기초 후금의 인구는 40만~50만명에 불과했다. 중국 명나라는 1억5,000만명에 달했고, 조선의 인구도 1,400만에 이르렀다.척박한 땅에서 소수 민족이 만주를 통일하고 몽골과 조선을 굴복시키고 중원을 석권해 대륙의 주인이 되었다. 기적이었다. 그러면 그러한 기적을 만들어낸 원동력은 1) 명의 황제는 명신들을 죽였으나 후금 황제는 증오하는 한인 책사 범문정을 중용했고 총애했다. 2) 명과 조선은 당파 싸움으로 사분오열됐으나 청은 물자확보를 위한 전쟁에 국력을 집중했다. 3) 조선은 중국을 하늘(天)로 보고 사대하려는 반면에 후금은 중국을 차지해 할 약속의 땅(地)으로 인식했다. 4) 조선은 유교를 숭상해 예의지국을 지향한 반면에 후금은 명나라를 두려워 하지않고 정복의 대상으로 표적화 했다. 5) 조선은 농공행상을 중시 장사 즉 무역을 천시했다. 6) 조선은 국제 화폐인 '은'을 경시해 임란 당시 엄청난 명군의 은 유통을 불용했다. 7) 청은 명의 화란제 공성 무기인 홍이포 제작 기술자를 색출해 자체 개발에 성공했으나 조선은 선진 무기의 도입과 자주 국방을 게을리했기 때문에 왜에 당하고 청에 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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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명청간 중원 권력 교체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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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자성의 난과 명나라의 멸망(5) 22.09.05 26 1 9쪽
» 명, 숭정제의 폭정과 누르하치 부자의 한인 책사 범문정의 총애 22.08.14 26 0 8쪽
3 홍타이지, 영원성 우회 경로로 북경 기습과 약탈 22.08.10 29 0 12쪽
2 누르하치 후금 건국, 명과 후금간의 사르후 전투 22.08.10 33 0 13쪽
1 명말, 만력제의 태정과 삼대정 22.08.10 148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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