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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모 님의 서재입니다.

저녁 노을 물든 태얀

웹소설 > 자유연재 > 로맨스, 라이트노벨

가재모
그림/삽화
가재모
작품등록일 :
2021.10.02 13:06
최근연재일 :
2021.10.02 19:2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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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55

작성
21.10.02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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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저녁 노을 물든 태안

천혜의 태안 풍광과 춘하추동 낙지, 주꾸미, 꽂게, 갈치, 조기, 대화 등 풍성한 해산물부터 맛을 소개하겠습니다,




DUMMY

1회차/저녁 노을 물든 태안


가재모


본 소설의 주인공인 김종민은 고향이 태안이다. 태안은 원래 백제시대에는 성대혜현(省大兮縣)이었고 신라 경덕왕때는 소태현(蘇泰縣), 고려말인 1298년에는 태안군으로 승격되었다. 1914 서산군으로 합병되었다가 1989년 서산으로부터 분군되어 오늘의 태안군이 되었다. 환태평양시대의 거점인 태안(泰安)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준말이다. 태안반도의 앞바다인 안흥량(安興梁)이 잔잔해서 섬들이 편안하게 잠들 수 있어야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해진다는 소망을 나타낸 것이라 고 한다. 특히 고려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침탈이 잦았던 곳이라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태안 지역은 5세기 말부터 대륙으로 통하는 교통로(交通路)의 요지였다. 고려와 조선은 도읍이 서해에서 가까운 개경(開京)과 한양(漢陽)에 위치함에 따라 서해의 연안해로가 운송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당시 세곡과 각종 공납품의 주요 생산지는 경상, 전라, 충청의 삼남지방이어서 물류의 대부분이 태안반도 연안을 경유하여 개경 혹은 한양으로 옮겨졌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전라도에서 생산된 세곡이 나주의 영산창(榮山倉)과 영광의 법성포창(法聖浦倉)에 보관했다가 서해안의 해로를 따라 강화도 앞바다를 지나 조강(祖江)을 거쳐 서강(西江)의 광흥창(廣興倉)에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 뱃길에서 암초가 많고 물살이 빠르고 파도가 높은 곳이 태안 앞바다인 안흥량(安興梁)으로 세곡선이 자주 침몰하였다. 태안은 북쪽으로는 가로림만, 남쪽으로는 천수만이 깊숙이 들어와 있다. 서쪽으로는 서해가 버티고 있으며 동쪽으로만 내륙인 서산과 맞닿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다. 내륙은 낮은 구릉지로서 많은 산지가 개간지로 개발되어 주민들은 주로 수산 어로 작업과 농사를 방행해서 생업을 이어왔다. 태안은 바다 가운데로 수십 리를 뻗어 들어가 있어서 태안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양곡을 저장하면 중국과 일본 침탈의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고 국내적으로는 호남과 영남을 쉽게 제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이었다. 이런 연유로 해변 고을이지만 산성이 많이 있었다. 안흥성(安興城)은 1655년(효종 6)에 축조된 석성(石城)으로 서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 안흥진성(安興鎭城)이라고도 부르며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다. 그러나 1894년 동학혁명 때 성내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고 성곽과 동서남북의 성문이 비교적 원형대로 남아 있다. 태안의 소근진성(所斤鎭城)의 기록을 보면 태안 해안의 방비 및 조운선의 호송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종민은 태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태안에서 졸업했고 당시 태안에 고등학교가 없어서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다. ROTC를 지원하여 졸업 후 광주육군보병학교의 소정훈련을 필하고 육군소위로 임관, 단기 복무 후에 중위로 예편되었고 전역 후 대기업 입사시험에 합격 서울 본사에서 임원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안면도 출생이고 서산 여고 출신인 부인, 채은옥과 대학 졸업 후 결혼했고 슬하에 아들 하나만을 두었다. 아들은 무역상사에 본사에 다니다가 우즈베키슨탄 지사로 파견된 후 현지에서 사긴 우즈벡 여인과 결혼해서 아들, 딸을 하나씩 낳았다. 종민은 시골 출신이지만 승부 근성이 있어서 본사에서 동기들 중에서 항상 앞서가는 선두 그룹에서 입지를 확보해 나갔다. 그런데 선대 회장이 고령에 건강이 악화되면서 소속 대기업 후계자 경쟁과정에서 자기가 모시고 있던 장남이 자동승계된 것이 아니라 막후실력자인 회장의 후처인 사모의 입김에 좌지우지되어 차남한테로 주력회사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일이 크게 틀어지고 말았다. 종민은 줄을 잘 못선 책임이 일단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자회사 사장으로 발령을 받았지만 회장실의 음양으로의 외압 때문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 사퇴했다. 이런 와중에 종민 부인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아산병원에서 담당의사로부터 정밀 진단결과를 접한 종민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채은옥은 자궁경부암 2기 판정을 받은 것이다. 당장 3일후에 급히 수술 일정이 잡혔다. 아들 내외가 차를 몰고 병원까지 데려다 주고 수술절차까지 해줘서 오전10시부터 3시간에 걸친 수술을 했다. 오후엔 태안에서 채은영의 친정 부모들이 병원으로 딸 수술 과정이 걱정돼서 올라오셨다. 수술 경과는 성공적이었고 천만다행으로 타부위의 암 전이는 없다고 했지만 향후 15회 이상의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항암치료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각고의 과정이었다. 길고 검었던 머리가 털 끝 하나 없이 송두리째 빠져버린 정도였다. 15번의 험난했던 항암치료가 끝나고 이제 3개월에 한 번씩 내원해서 상태를 체크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채은옥은 장시간의 암제거 수술과 15번의 뼈를 깍는 것과 같고 등골까지 떨리는 혹독한 항암치료는 “죽으면 죽었지 두 번 다시하고 싶지 않다.”고 단언했다. 채은옥은 자신이 채소보다는 욕식을 남달리 좋아하고 운동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고혈압과 당료 관리도 급선무였다. 그래서 채은옥은 담당의사에게서 여러 번 반복해서 지적을 받았기 때문에 퇴원 후 특화된 식단관리, 즉 채소 식탁 혁명을 일으키겠다고 공언을 했다. 채은옥의 이러한 발상의 전환과 또한 간병하면서 옆에서 지켜 본 남편의 입장에서 도출된 처방은 고향 태안으로의 귀촌과 귀농,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부부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모아졌다. 종민의 아버지는 작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고향집과 텃밭 2천평은 아직까지는 정정하신 노모가 지키고 계셨다. 부부간에 의견이 투합되고 시골 노모도 바라던 바라 태안으로의 귀농 귀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현행법상상 농촌 외의 지역에서 농업 외의 산업분야에 종사한자나 종사하려는 자, 즉 귀 농인이나 재촌 비농업인이 농촌으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려는 자를 지칭한다. 또 농촌 지역에서 거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지 않은 자, 즉 재촌 비농업인이 농업을 전업으로 하거나, 농업에 종사하면서 이와 관련된 자가(自家) 생산 농산물의 부가가치 제고를 위한 농식품 가공ㆍ제조업을 겸업하기 위해, ‘농촌’으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는 자나 하려는 자로서 연령이 사업신청년도 기준으로 65세 이하인 세대주이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농정원 포함), 농촌진흥청, 산림청,지자체가 주관 또는 위탁하는 귀농·영농 교육을 모두 온라인으로 충족했다. 창조경제혁신센터 귀농교육, 지자체 지정 멘토·멘티 활동, 지자체 귀농투어 참여했다. <아기 울음소리 살아진 고령 농촌> 종민과 은옥이 그동안 오랫동안 몸담고 살았던 서울을 훌쩍 떠나 태안 전원 마을 고향집으로 돌아와보니 주거 환경과 상활 수준은 분명 월등하게 향상되었다. 그런데 농촌엔 닭울음소리와 개짖는 소리는 유구한데 어린이는 보기 드물고 등굽은 노인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농촌의 고령화가 생각보다 심각한 것을 실감했다. --------------- 자욱한 새벽안개 밀어내고 솔향 그윽한 능선위에 아침 해 광명 뿌리며 솟아오르면 궁벽한 농촌, 아침 일손도 바빠진다,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는 여전한데 아기 울음소리는 살아졌고 농촌 인구의 고령화로 60세는 청년으로 불리니 농촌은 깊숙이 파인 주름살투성이로 점차 늙어 가고 있다. 청년층의 농촌 인구가 10% 미만이며 가임 젊은 여성들과 청년들 도시 학교에 직장과 제짝 찾아 떠나 버린 빈 둥지들을 등 굽은 노인들이 힘겹고 외롭게 지키고 있다. 2회차/저녁 노을물든 태안 가재모 종민과 은옥은 지난 2007년 초여름에 부부가 모처럼 의기 투합해서 고향 태안으로 짐을 꾸려 이주했었다. 종민과 은옥은 원래 태안이 고향이고 어려서 초등학교 다닐 때는 집에서 다녔다. 일손이 모잘랄 때는 영락없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팽개치고 농사일을 거들지 않으면 않 될 때였다. 그래서 원만한 농삿일은 어머니와 아버지 한테 배워서 대충할 수 있었으나 고추, 가지, 도마도, 오이, 콩, 보리, 밀, 쌀, 수수, 조, 녹두, 팥, 수박, 참외, 마늘, 꽤, 생강, 고구마, 상치, 배추, 무우, 감자, 옥수수, 버섯, 부추 등 20여 가지가 한커번에 쏟아져 나오면 정신이 없어졌다. ------------- < 젊은 귀농 인구와 첨단 기술 영농> 종민은 "첨단 과학 영농 기술 능력을 갖춘 젊은 귀농 인구가 늘어나야 농촌이 살아나는 길이다"라고 설파하고 다녔다. 종민은 이제 흙 냄새는 확실히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어느 정도 농촌에 정착의 뿌리가 내려지기 시작하자 자신이 아주 전문가적 귀농 귀촌의 전도사가 되어 버렸다. 귀농은 40대 말이나 50대 초반이 적령기이고 50대 후반이나 60대 초반은 지각생이 분명하다. 아무리 기계 영농을 한다고 해도 농촌일, 농삿 일은 노동 집약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귀농을 결심하기 전에 준비 과정인 필수 코스로 농업기술센터를 데릴 사위 처갓집 드나들 듯 해야 한다고 한다. 노동력은 줄이고 수확은 극대화하고 첨단 스마트 팜 기술과 작물의 생육 환경원격 제어에 빅데이터 기반의 재배환경과 최적화 기술까지를 통달하고 가야한다. 나아가 유리 온실 태양광 팬넬과 에너지 저장장치, 시스템 보일러, 전기 히팅 펌프, 온실 온습도 조절 기술 비료와 시비요령, 병충해와 농약 살포 요령 등 터득해야할 기술이 너무나 많다. < 성공적인 귀농과 참 농부의 신지평> 귀농 신고를 하면 지자체의 각종 지원이 뒤 따른다. 빈집을 마련하면 집 수리비며 농사일 시작하면 농기구가 구입자금을 지원해준다 . 초보자는 동네 일손 도와주며 영농기술 익혀야 하고 이웃들과 관계망 넓히는 것이 급선무이다. 기계농과 ICT 결합하여 스마트 팜과 영농과학화를 적용해야 한다. 남 따라 가기보다는 차별화해서 부가가치 창출 영농, 고소득 영농 기법 선진 과학 영농과 인터넷 마케팅 관리 등 신 지평을 개척해야 한다. 가축 분료, 흙냄새와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어 7개 성상쯤 무사히 견뎌 넘고 일상 대화 속에 농사일로 시작해서 농사일로 끝날 정도면 참 농군이 되는 것이다. <귀농의 분수령, 귀촌과 귀향> 요즘은 귀농 바람이 많이 줄어들었다. 부풀었던 꿈과 노동 집약적인 고된 현실과 투입과 소득 간에 한강 폭보다 더 넓은 엄연한 간극에 낙망하고 좌절하고 귀농 청년들의 발길을 돌리게 한다. 귀농, 귀촌, 귀향에 목적과 뜻은 분명 다르지만 판단의 기준은 애매모호함이 많다. 결승점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야 하는 것은 귀농이고 승부와 무관하게 도시 직장 생활에 환멸 느껴 자연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하여 고향이 아닌 시골로 내려가면 귀촌이다 어릴 적 잊을 수 없는 모정의 추억과 텃세 심한 타향보다 부모님과 친척들의 든든한 울타리와 죽마고우들의 네트워크 등 그런 장점을 안고 고향에 몸담는 것이 바로 귀향이다. 귀촌도 귀향도 아닌 귀농은 단순히 가슴 설레이는 마음으로 출발할 수 없다. <정직한 흙과 땀, 귀농의 교훈> 흙과 땅은 정직하고 작물은 농부의 발자국과 땀을 먹고 자란다. 경험 없는 농사는 시행착오를 거듭하게 되고 한해 농사 실패는 그 후유증이 두해의 손실로 남고 의욕이 앞선 귀농보다는 창의와 경험이 중요하다. 귀농의 꿈은 각박한 현실과 고단한 현장에서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보따리 싸들고 목가적 풍경에 낭만이 철철 넘치는 고즈넉한 전원에 아담한 집과 농토 마련하고 봄에 기도하는 손목으로 씨 뿌리 때는 마음마저 설레인다. 그런데 정작 힘에 부치는 것은 삼복 불볕더위에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범벅의 분수령을 참고 넘겨야한다 가뭄에 쩍쩍 갈라진 밭 고량에 쪼그리고 앉아 잡초 작업하거나 논 가운데 마스크 쓰고 농약 뿌리다 보면 허리 끊어질 듯 아프고 전신이 노곤해진다. 저녁엔 온 삭신과 관절 마디마디가 다 쑤셔오고 농사가 허리 휘게 하는 중노동임을 절감케 된다. 스스로 마음을 비우고 몸을 낮추고 과도한 욕심도 버리고 왕년의 화려했던 필름 다 지우고 참 농부로 토인이 되겠다는 결연한 각오와 마음 다짐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접고 싶고 떠나고 싶고 중도에 포기하고픈 미혹을 이기고 부부간에도 흐르는 땀 서로가 닦아주고 위로하고 격려해서 희망의 담벼락이 서서히 무너져 내림을 경계해야 한다. ----------------- [유류 피해 극복한 태안의 기적] < 청천벽력, 태안 만리포 유류 유출 사고> 종민과 은옥은 초여름에 태안으로 내려왔지만 농촌을 떠난지 오랜 세월이 흘렀고 처음엔 텃밭농사를 어디부터 손을 대야하는 알 수 없었다. 다행이도 어머니께서 이른 봄부터 텃밭에 오밀조밀 각종 씨았을 뿌리고 잘 가꿔 오셨기 때문에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따라서 일손을 놀리면 그만이었다. 특히 며느리가 암으로 죽었다 살아난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시어머니 노릇 할 생각은 아에 서울서 짐싸들고 왔을 때부터 포기했던 것이다. 정직한 땀의 결실, 오곡백화 무르 익었던 황금 들녘에 가을 추수가 시작되었고 알곡만 다 거둬드리고 쭉정이만 쌓여 있는 들녘에는 늦가을바람만 가득했다. 동네 어른들과 가을 무배추 실한 것 골라 씻어서 절였다가 고추가루, 무우채와 각종 양념 버무려서 겨울 김장도 다 마쳤다. 이제 농촌은 동절기 비닐 하우스 재배농가를 제외하고는 겨울 농한기에 접어든 것이다. 그런데 긴 겨울 밤 자고 일어나니 만리포 해상에 유류 유출사고가 터진 것이다. 동민은 태안군정 자문위원을 맡았고 군 의용소방대 부대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군청 상황실장으로 부터 긴급호출이 떨어져서 급거 군청을 찾았다. 군청내에는 급히 군수 주제로 열린 간부회의에서 서해유류유출사고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분과별 책임자를 지정하여 가동에 들어갔다. 종민은 방재물자조달 분과를 맡았고 은옥은 여성자원봉사 지원분과를 맡아 오전 오후로 나눠서 봉사하거나 격일제로 사고 현장 지휘본부에서 봉사하기로 했다. ---------------- 2007년 12월 7일 충남 서해안 태안 만리포 해안에 청천백일 날벼락이 떨어졌다 억겁의 세월을 하루 같은 동작으로 파도는 뒤척이고 문풍지 흔드는 모진 겨울 해풍에 선 잠자고 일어난 어촌 사람들 TV를 켜자마자 만리포 해상의 유류유출사고 뉴스에 귀를 의심했다. 바다 새들도 제 눈 발등에 비비고 깨어난 이른 아침에 평온했던 태안 만리포 해안에 청천백일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만리포 북서쪽 해상에서 고장 난 해상크레인이 결박 줄이 끊어져 표류하다가 정박 중인 거대한 유조선과의 충돌, 기름 유출사고를 냈다. 검은 원유 1만2천여 킬로리터가 속수무책으로 유출되어 천혜의 풍광과 청정 바다로 아름다웠던 바다가 일순, 충격의 '검은색 죽음의 바다'로 변했다. 사고 인근 해안의 70여 킬로가 검은 기름으로 범벅이 되어 서해안 바다를 유일한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던 물고기 양식장, 굴 양식장, 김 양식장, 전복 양식장을 저승사자처럼 덮치는 공포의 검은 기름띠 평화롭던 어촌 마을은 청천벽력을 맞았다. 마을 전체가 하루 아침에 쑥대밭 되고 망연자실하여 하늘을 원망하는 절망의 탄식 소리 드높고 여인네들의 쏟아지는 눈물과 울음소리, 눈물바다 울음바다 되었다. 해변으로 파도 따라 쉴 틈 없이 검게 물려오는 죽음의 기름띠 자식같이 정성 다해 키워왔던 어족들이 떼죽음당해 생계조차 막막해졌다. 양식 가구들의 통곡 소리 드높은 집단 초상집 동네 방송을 통한 어촌 이장의 다급한 사고 방송에도 설마 설마 했던 악몽 같은 유류 유출사고는 꿈이 아닌어엄한 현실로 목도되었다. 눈앞에서 거대한 검은 해일처럼 양식장, 금 모래밭 해초가 붙어사는 갯바위와 돌덩이까지 온통 검은 기름으로 맥질되었다. 먹물 바다에 내려앉은 갈매기와 바다 새들 기름으로 맥질되어 날개에 수갑처럼 채워졌고 허우적 거리다 지쳐 겨우 목 내놓고 애잔하게 울어댔다. 연안의 물고기들은 떼 죽을 당해 전쟁터의 시체처럼 해변으로 수없이 밀려왔다. 국내 최악의 유류 오염사고로 기록된 처참한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 유출 사고 태안 바다 수많은 물고개의 목줄을 끊었고 어민의 생활터전을 빼앗고 희망의 등불을 송두리 꺼버렸다.


그림같이 아름답던 황홀한 낙조와 붉게 타는 저녁노을도 울꺽하는 기름 냄새에 노년의 사치처럼 빛을 잃었다.3회차/ 저녁 노을 물든 태안


가재모


<123만 명의 천사 같은 자원봉사단 행렬> 죽음의 바다는 123만 여명의 천사 같은 자원봉사자 힘센 권력이 강제 동원한 것 아니요 자원하는 마음, 심령 깊은 곳에서 울어난 힘든 일 서로 거들고 품지고 또 갚아야 하는 품앗이 한국 전통의 노동 공동체 미풍양속이다. 협력과 합심. 자조 공동체였던 ‘두레’와 같은 자원봉사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지고 기쁨은 나눈 만큼 커지는 법이다. 자원하는 마음, 빚진 마음으로 귀한 시간 쪼개서 막히는 머나 먼 길 자비량으로 호주머니 떨고 두툼한 마스크로도 막을 수 없는 코를 찌르는 기름 냄새 참으며 양팔에 쥐가 나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중노동을 참고 견디었다. 방제 작업 12월 유난이도 매서운 해풍에다 눈도 아니고 비도 아닌 진눈깨비 흩날리고 음식 부실하고 부족하지만 하루 종일 해질 때까지 바닷물 검은 기름 퍼내고 갯바위와 모래를 헝겊으로 씻어내고 귀경 차 올라타면 뿌듯한 보람과 땀과 노동의 진가를 골수로 느낀다. 사고 이후 매일 태안군청 전화통에 하루 종일 불이 났다. 기름 오염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태안 해변의 자원봉사단의 문의 전화가 뻔질났다. 혼탁한 정치도, 침체된 경제도 잠시 접어두고 한 양동이의 검은 기름, 바윗돌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기름띠 한 뼘이라도 닦아 내려는 국민적인 희망 행렬을 본다. 환경단체들도 일손이 달리는 방제 기관 도우려고 이른 아침에 태안행 버스를 타고 있었다. 주말과 공휴일에 울긋불긋한 등산 배낭 대신에 하얀 방제복을 입은 자원봉사자들의 물결이 태안 앞바다를 메웠다. 세모의 길목에서 ‘태안의 아픔에 동참하자.’는 국민들의 성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인간 띠로 끝없이 이어졌다. 과로에 지쳤던 방제기관 임직원들 망연자실 실의에 잠긴 주민들도 희망의 끈만은 놓지 않고 양식장으로 바닷가로 발길을 재촉했다. <환경단체, 사랑의 공통체인 종교단체와 기업들의 솔선수범> 전국 환경운동단체, 종교단체, 대학생, 기업체, 지자체 자원봉사센터에서 자원봉사 신청자 수는 물경 6만 명을 돌파했다. 자원봉사자들 두툼한 방한복에 개인별 장갑, 장화, 보호복에 헌옷가지, 도시락, 물까지 눈물겹도록 알뜰히 챙겨 왔다. 12월14일, 방제 현장에 투입된 3만 8천여 명 가운데 2만 6천여 명이 자원봉사자들이었다니 세계가 놀랄 일이다. 환경운동연합은 전국적으로 3천명의 회원과 주민들 자진해서 참여했다. 수십대의 버스를 빌려 타고 머나먼 서해 태안으로 태안해변으로 구름떼처럼 몰려들었고 현장에 도착하면 작업 지역의 오염 실태, 작업요령과 환경 생태계의 변화를 소상히 알려줬다. 작업자들 스스로 마스크와 방제장비를 챙겼고 화학 유처리제 보다는 사람 손으로 기름찌꺼기를 하나하나 걷어내는 게 상책이라는 녹색연합 전국 지역본부 회원들이 스스로 방제 작업의 수범을 보였다. 검은 기름띠로 기가 막힌 처참한 현장에서 남녀노소, 지역감정, 이념과 종교의 높았던 담 다 허물고 그냥 마음들이 녹아 내려 협동과 화합의 공동체로 묶였다. <연말 송년회 대신에 태안으로 태안으로> 예년의 흥청망청했던 연말 송년회와 단합대회 다 접고 새벽 차타고 태안 만리포와 파도리로 몰려왔다. 기독교, 불교와 천주교 중앙종단과 남녀선교회 중심으로 자원봉사자들이 추위를 녹였다. DJ 대학은 태안 행 버스 안에서 기말시험 치르고 현장으로 갔고 UJ회사 정수기, 공기청정기 태안에 보내 작업장 음료와 악취를 걸려줬다. 지자체 마다 솜씨 좋은 주부들 뽑아 식사와 커피, 따끈한 국물을 나눠준다. 태안 토박이를 제외하면 봉사자들 모두 먼 길 마다하고 대부분 간단히 새벽밥 먹었거나 굶은 사람들이 대부분일 터 시장 탓에 물과 김밥 한 줄씩 받고는 게 눈 감추듯 꿀맛으로 금새 먹어 치웠다. 품아시와 십시일반은 한국 민의 협동정신의 전통적 토대다. 방제 작업장은 태안군 소원면 만리포, 신두리, 학암포, 백리포, 천리포해수욕장 등 사고 최대 피해 지역은 광범위다. 교회, 학교, 기업체 등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봉사인원이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다. 한달 전엔 멀리 해안가엔 영락없이 하얀 갈매기 떼들이 북적였는데 오늘은 하얀 방제복 입은 봉사자들의 분주한 움직임만 보인다. 단체마다 형형색색의 방제복 색깔이 달라 단체 구분은 쉽다. 검은 방제복을 입은 방제 단체는 바위에 붙어 작업하면 바위가 사람되고 사람이 바위가 되어 빨강 장갑의 부지런한 손놀림만 보였다. 바위 밑 부분의 검은 부분은 파도 치면서 밀려온 기름띠의 흔적이 도색한 듯 겹겹이 쌓였고 수욕장을 둘러싼 절벽 밑은 모두 검은 색 천지다. 바위에 붙어있던 굴과 고둥 등 생명체들 송두리 기름을 뒤집어 쓴 채 죽어 버려 살벌한 사해 풍경이다. 지난 여름 피서 왔을 때 보았던 바위 틈마다 작은 고둥들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이름 모를 게들이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하던 풍경 오늘 두 눈을 비벼보고 또 봐도 온데 간데 없다. <거룩한 땀방울, 기름띠 제거 작업, 고된 노동의 보람과 진가> 기름띠 이미 수많은 바위에 달라붙어서 닦아도 닦아도 원색 복원이 이뤄질는지 그때만 해도 아득한 먼 미래로만 생각했다. 금 모래밭을 자랑하던 모래 사장 구석구석에서 검은 얼룩이 너무나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바닷가가 가까워질수록 처음에는 기름 냄새가 울꺽울꺽 메스꺼움을 더 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코의 후각 기능에 예민함을 잃었다. 햇볕 반사되어 반짝이던 갯바위들 온통 기름 범벅 뒤집어썼고 쪼그리고 앉아 닦기엔 오금 다리 너무 너무 힘들어 털썩 주저앉은 자세로 돌멩이에 묻은 기름 쉴 사이 기계처럼 닦아낸다. 눈비가 섞여 내리는 겨울 음산한 날씨 가운데 아빠 엄마 따라온 꼬마들도 응석부리지 않고 열심이다. 모래 속을 파보면 걸죽한 기름에 작은 돌멩이들이 서로 엉겨있다. 고무장갑에 덕지덕지 기름들이 묻어나고 속으로 속으로 스며들은 기름띠, 북구 작업이 언제 끝이 날지 가늠할 수 없어서 봉사자들의 가슴은 막막함과 답답이 교차했다. 점심메뉴는 일회 용기에 담긴 김치를 넣은 국밥이다. 누구하나 투정 부리는 사람이 없다. 앉을 자리도 없어서 서서 먹고, 비가 내려서 질척한 흙바닥이지만 가리지 않고 철퍼덕 앉아 먹기도 했지만 표정만은 모두 밝다. 마른땅에도 앉기를 꺼리며 수건 얌전히 깔아줘야 겨우 겨우 앉을 예쁘장한 처녀들도 오늘은 진땅에 퍼져 앉아서 밥그릇 바닦까지 긁어 가며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웠다. 바닷가 돌멩이는 스치기만 해도 검정 기름때가 묻어난다. 새 옷도 금새 더러워지고 고인 물에는 기름이 둥둥 떠다닌다.

할미바위.png




안면도 꽃지의 할베바위와 할미바위의 화상적인 낮조 풍경을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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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저녁 노을 물든 태안(5) 21.10.02 26 0 16쪽
4 저녁 노을 물든 태안(4) 21.10.02 23 0 21쪽
3 저녁 노을 물든 태안(3) 21.10.02 23 0 23쪽
2 저녁 노을 물든 태안(2) 21.10.02 23 0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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