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크린자의 시간 75
‘나아가는 엉덩이에 비들치고 땀 나면 안 좋은데!’
난 이 상처가 왜 이리됐는지 모른다는 어투로 갑작스레 내리는 비를 원망하며 방수작업을 마무리했고, 모든 작업이 끝나고 관리사무소로 들어와 녀석에겐 코코아를 난 커피를 엉덩이에도 연고를 건네며, 비 오는 날 일 하게 만든 것에 대한 미안함을 피력해 보았다.
미리 방비해 뒀더라면 좋았을 것을, 미리 그렇게 해뒀더라면 비 맞을 걱정 없이 설렁설렁해도 그만일 일이, 원래 계획상 초등학교 정리 후 바로 다음날 강당으로 몰고 들어갈 작정이었기에, 피치 못해 다치다 보니 예정된 수순이 초장부터 꼬여버리고 말았다.
계획대로만 됐더래도 저런 방수작업은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하다못해 며칠만이라도 비가 늦게 시작됐더라면 나아가는 엉덩이에 살짝 무리를 주더라도, 조금씩 일들을 진행시켜 장마에 대비해 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미 비는 시작돼 버리고, 며칠간의 치료기간이 작업 진행의 족쇄가 되어, 장마까지 겹치게 되자 옴싹달싹 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시작된 것을,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난 잠시 이 시간을 즐겨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느니 말이다.
“쏴~! 툭! 투 툭! 툭!”
비옷을 입었었다지만 비에 쫄딱 젖은 관계로, 옷을 갈아입고 이불을 둘러싸매 엎드려, 열려진 창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를 믹스커피 향과 함께 맞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오르는 체온과 함께 포근함마저 즐기며, 편안히 감겨진 두 눈과 표정이 이곳이 마치 천국인양, 만족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시원한 빗소리와 더불어 따뜻함까지 공존하는 숙소 이불 안에서, 난 단 하나가 모자람에 아쉬워하며, 충족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말과 함께 행동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햐~! 분위기 좋다. 그래도 이런 날엔 해물파전에 막걸리가 딱인데! 한 잔에 한점 간장에 찍어서 캬~!’
술 때문에 덧난 게 불과 며칠 전인데 나아가기 시작한다고 벌써부터 술타령을 하는 나다.
어떻게 보면 이젠 본능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하나 이 정도면 아마도 이젠 병이지 싶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선 해물파전이나 막걸리는 더 이상 구경할 수 없는 귀물이 돼 버렸으니 아쉬운 마음에 그저 입맛만을 다셔볼 뿐이었다.
부침 가루는 많았지만, 해물이나 막걸리는 구할 수 없는 노릇이니 그냥 부침 가루만을 가지고 전이라도 한번 지져볼 요량을 했다.
‘토핑으로 뭘 넣을까? 스팸이나 참치 캔? 아님 통조림의 옥수수 콘?’
빗소리를 즐기며 전을 지질 레시피를 상상하다, 요사이 늘 그랬던 것처럼 종이뭉치와 노트를 가져다 베개 앞을 잔뜩 어지르기 시작했다.
엎드린 자세 그대로 무언가가 잔뜩 기록된 노트와 종이들을 쭉 한번 검토한 뒤, 서로 내용들을 비교해가며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시작했다.
비교하고 끄적거리고 검토가 끝난 종이를 구겨서 내던지고, 한참을 노트와 종이에 열정을 쏟은 뒤, 다시 한 번 이리저리 노트의 페이지를 들춰가며, 상반되는 항목들이 없는지 노트 안의 내용마저도 서로 비교해보기 시작했다.
처음 메모로 시작된 이 작업은, 버스에 대한 개조 계획들이, 필요한 재료와 더불어, 쓰이게 될 공구와 함께, 보통 그 공구를 사용하는 업종마저 첨부되어 있었고, 게다가 오가던 거리에서 목격한 공구와 재료가 있을 만한 장소의 위치까지, 간단한 약도와 더불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림까지 동원돼 세세하게 구현된 이 노트는, 어찌 보면 버스의 개조를 위한 설계도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고, 빈둥거리던 내내 떠오른 아이디어들을 쓰기만 하다 보니, 분량만 늘고 서로 다른 방식이 한곳에 혼재돼, 일관되게 정리해둘 필요성이 있어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이를 위해 작성해둔 메모를 정리해, 노트에 따로 모아 포괄적으로 정리하다 보니, 작은 것부터 전체까지 모든 내용이 한눈에 잡히며, 따로 쓰여진 종이를 보는 것보다는 개념 잡기가 훨씬 수월해 졌다.
또 이렇게 전체의 내용을 하나로 통합시키다 보니,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가할 때마다 그로 인해 발생하게 될 연쇄적 현상들마저 미리 파악할 수 있어, 적용 가능한 아이디언지 검토단계에서부터 확인돼, 시행착오를 상당 부분 줄여주는 이점이 되었다. 하지만 생각만으론 모든 걸 할 수 없는 게 당연한 거라, 상상하는 것과 실제 제작 단계에 있어선, 무수히 많은 부침을 겪어야 하는 건 상식이었다.
그나마 시간이 아까워 이런 식으로나마 활용하고 있었지만, 늘 직접 제작할 수 없음에 아쉬움은 항상 마음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쩌라 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해야지, 무리하려 했다간 또다시 주저앉는다!'
엉덩이에 난 상처조차도 그날 무리했기에 생긴 결과라 생각하던 나는, 첫 번째 수칙 ‘안전제일!’과 함께 두 번째 수칙으로 ‘무리하지 말자!’라는 행동방침을 내걸게 되었다.
사람이 방심하거나 집착하게 되면 무리하게 되고, 설마 괜찮겠지란 생각이 실패로 귀결된다는 생각에, 마음 한켠에 내심 무리하지 말자를 되새기며, 또다시 눈앞에 놓인 노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리하지 말자라는 말 자체가 무색하게 진행된 노트는 어느덧 거의 완성단계에 가까워져 있었고. 새로운 아이디어마저 추가해 통합하다 보니 어느새 노트 한 권이 빽빽하게 들어차 버렸다.
못쓰는 글씨와 더불어 못 그리는 그림이 괴발개발 그려진 언뜻 보면 암호 책 같아 보이는 이 설계도는, 하지만 무리하지 말자와 나만 알아먹으면 되지라는 생각이 깃들며,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더 외계어처럼 보이는 노트 한 권이 마침내 완성되는 기염을 토했다.
꽉 찬 노트를 놔두고 새로운 노트를 꺼내 작업을 재개하려다 이 속도면 오늘 내 완성돼 버리겠다는 느낌에 '전이나 부쳐볼까?'라며 요리를 위해 자리를 박찼다.
‘급히 먹는 떡이 체한다고 장마도 이제 시작단계니 서두를 것도 없지.’
이름이 정해지지 않아 계획의 성공을 위한 'O'라 명명된 노트의 표지를 덮으며, 부침 가루를 가지러 가는 사이에 한창 꽃분호의 단장에 열 올리고 있는, 예린이에게 구경과 함께 멋지다는 덕담을 건넸고, 이내 그곳을 벗어나 내 단골슈퍼로 가기 위한, 발걸음에 힘을 주며 비 오는 거리를 향해 우산을 찍으며 주저 없이 나섰다.
커다란 자동우산을 펴 비 오는 거리로 나와 유유히 내리는 빗속을 걸으며 우산 밖으로 슬며시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안에 떨어지는 비들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는 감촉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주억거렸다.
'장마라고 해서 맨날 비 오는 날만 있는 건 아닐 테지?'
부침 가루를 들고 복도를 지나며 이동해가는 중간에도 또다시 예쁘다는 칭찬을 남발하기 시작했고, 복도는 이내 입을 가린 채 연신 락카를 뿌려대는 예린이와 이에 멋지다며 박수 쳐주는 내 목소리만이, 아스팔트를 적시는 빗소리와 더불어 관리사무소 주변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염원으로 얼른 이 비가 잠시라도 멈춰지기를 기원하면서 말이다.
-. 6월 25일 초등학교 강당 내부 아침 9:30
덜덜거리는 휴대용 발전기가 연신 돌아가고, 중앙의 버스를 비추는 형광등들이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강당의 노란 마룻바닥 위에 널려있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곳은 내가 평정해둔 초등학교 강당의 깊숙한 곳으로, 강당 초입에 세워져 있던 배드민턴 네트들을 제거하고, 작업 시에 발생하게 될 소음 등이 외부로 퍼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강당 맨 안쪽으로 버스를 몰아, 버스 개조를 위한 작업장으로 한창 꾸려지는 중이었다.
장마 중이라도 비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면 그때 버스를 몰고 와 강당 안으로 입성하려 했는데, 엉덩이의 상처가 아물도록 비는 오락가락 그칠 생각이 없고, 미리 작업장이라도 꾸며보자라는 생각에 며칠 전부터 이곳을 들락날락 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60 트럭에 예린이를 대동하고 기본적인 무장에 공구마저 갖춰 진압 이후 처음으로 별 무리 없이 이곳을 밟았고, 비 오는 거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송트럭이 운동장에 멈춰 서자, 예린이는 간만에 온 학교가 신기했는지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그런 예린이를 트럭에 그대로 남게끔 설명한 뒤, 단창용 m-16에 블로우건 마저 채비하고, 두 시간에 걸쳐 꼼꼼하게 초등학교 내부를 발칵 뒤집어업기 시작했다.
할 때 꼼꼼히 해야 하고 이번이 마지막 점검이라는 생각에 사각이 없도록 뒤엎으며 위험요소의 제거에 나섰고, 이후 마지막 안전점검이 끝나고 내부를 구경하고 싶다는 예린이의 설득에 못 이겨, 녀석의 손을 마주 잡고 흔들며 학교 건물 복도를 장난치며 걸었다.
건물 두 동 중 첫 번째 건물이 1~3학년, 두 번째 건물에 4~6학년 교실이 자리해 있었고, 예린이와 내부를 거닐며 저학년 교실의 그림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예린이에게 슬며시 뭔가를 물었다.
"예린아 너 혹시 몇 학년이니 3학년? 4학년?"
"응 원래 4학년이어야 하는데 3학년 다니다 못 갔으니까 3학년일 거야 3학년!"
예린이는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의기소침한 표정을 얼굴에 지어 보였고, 난 그런 녀석을 보며 갑자기 생각나 버렸다는 어투로 미소 지으며 한마디 툭 하고 던져보았다.
"아 그럼 이제부터라도 공부 좀 시켜야겠는데?"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갑작스런 내 선포에 녀석은 볼을 부풀리며 불만 있다는 의사를 무언으로 전달했는데, 나는 이를 본채만 채 하며 놀리는 듯 지나가는 어투로 몇 마디를 더해 녀석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안에 들어가면 교과서와 참고서도 있을 거야! 이참에 가서 챙겨와 보자!"
또다시 뒤에서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쌤통이라며 뒤 돌아보지 않고 앞서 가듯 걸었다.
‘금주라니 요 녀석, 너도 한번 당해봐라!’
나는 속으로 미소 지으며 주고받는 장난이 복도를 걷는 내내 이어지게 되었고 어느새 이렇게 오손도손 걷다 보니 어느덧 발길이 3학년 어느 교실 앞까지 이르게 되었다.
내가 알던 보통의 초등학교 몇 학년 몇 반 교실이 아닌, 3학년 국화반이라 쓰여진 교실 안에 들어간 우리는, 온통 내가 뒤엎어 버린 책·걸상들 중, 맨 앞의 한 세트와 교탁마저 바로 세우고, 의자에는 예린이를 앉히고 교탁 앞에 내가 들어섰다.
궁금한 표정이 가득한 예린이를 보며 목을 몇 차례 가다듬은 뒤 한켠에 놓인 분필을 찾아 커다란 글씨를 칠판에 새겼다.
몇 자 되지 않아서 금세 칠판 중앙을 차지하게 된 글자들, 내용을 보아하니 ‘‘축’ 초등학교 3학년 졸업’이라는 느닷없은 단어가 그곳에 자리해 있었다.
분필을 뒤로 던지며 급조한 말들을 두서없이 연이어 내뱉기 시작하는데.
“에 또, 조금 늦었긴 했지만, 우리 유예린 양의 초등학교 3학년 졸업식을 축하하며, 뭐 사정이 있어 3학년 학업을 끝까지 이수하지 못했지만, 그까이 꺼 공부가 뭔 대수겠습니까! 블라블라‥.”
나의 엉터리 같은 졸업식 축사가 시작되고, 처음엔 무슨 상황인지 한참을 궁금해하던 예린이는, 칠판에 쓰여진 글자와 나의 축사가 재밌었는지, 양손으로 턱을 기대며 웃는 표정을 연신 지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장황한 연설은 그칠 줄을 몰랐고, 한참의 주절거림이 다시금 이어진 후.
“에 또, 설라 무네 아 목 아프다. 이만, 축사 끝!”
난 박수로 예린이의 졸업식을 마무리하고, 뛰어나오는 예린이를 안아주며 손을 마주 잡고 밖으로 나가, 4학년 교실이 있는 맞은편 건물로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금 막 3학년 졸업식을 치뤘으니 4학년 입학식도 마저도 치러줄까 해서다.
‘졸업장이라도 만들어 줄 걸 그랬나?’
즉흥적인 발상에서 시작된 일이라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교무실이라도 들러서 볼 걸 하는 후회를 하다가 즐거워하는 예린이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며.
“예린아 너 근데 이참에 대학교까지 졸업해 볼래?”
- 작가의말
내용도 그렇고 어제 비오는 날 올렸으면 좋았을 것을, 때를 놓치긴 했지만 비오는 날을 상상하며 읽어주세요. 오늘도 완성과 더불어 올라가랏~!
PS. 어느덧 선작이 천여분을 넘어섰군요 이건 제 노력 보다는 추천글에 힘입음이 크다 생각 합니다. 맘속으로 성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먼저 감사드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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