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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최근연재일 :
2024.07.03 22:59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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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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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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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55화 길드

DUMMY

55화 <길드>



“이 집으로 말씀드리자면-”


캣니스는 어떠한 설명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옆에서 중개인이 쫑알쫑알 떠들었지만 온 관심은 다른 곳에 팔려있었다.

사전에 길드 건물을 구한다고 들었지만. 이런 고위 귀족이나 사용할만한 저택인 줄은 몰랐다.

그녀의 키보다 몇 배나 큰 담장, 푸른 잔디가 가득 깔린 정원, 가을 막바지에 피는 꽃과 단풍이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그 아름다운 저택을 걷는 동안 캣니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꿈 같은 현실을 마주한 듯한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래서 어떤가 캣니스여?”

“네?”


정신을 놓고 있던 캣니스가 화들짝 놀랐다.

브레드는 그녀가 제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행동을 불만에서 나온 행동이라 여겼다.


“음. 이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 건가? 역시 용사가 있는 길드라면 왕궁 일부라도 빌려와야······”


캣니스는 경악했다.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냐며 황급히 입을 막았다.

그녀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중개인은 가더와 입씨름하느라 바빠 보였다.


“아니, 몇 번이나 말합니까!”


그가 하는 입씨름은 아직 저택 구매가 확정되지 않았으니 음식물을 가지고 오면 안 된다는 대화였는데···.


“그게 뭐예요? 문지기님.”

“어. 꼬맹이들 아줌마가 주더라고.”


오는 길에 어딜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나 했더니.

어머님들이 아이들을 돌봐준 감사로 무얼 싸줬나 보다.

양손 가득한 채소나 과일 같은 것을 보며. 나중에 떡이라도 돌려야겠다고 생각한 캣니스였다.


“그래서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어떤가? 이 저택으로 괜찮은가?”

“아, 네. 그냥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이보다 좋은 조건이 없을 거 같은데요? 대체 이런 집을 어떻게···”

“그렇다면 이 집으로 하겠네. 이보게 콧수염이여.”


어쩐지 급하게 말을 돌린 느낌이 적잖이 있었다. 하지만 이 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중개인이 손바닥을 싹싹 비빈 것이다.

그가 간신배처럼 브레드의 옆에 서 있으니 더는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순식간에 이런저런 서류를 작성하였다.


“뭐야 여기는?”


집구경과 계약이 어느 정도 완료된 그때였다.


“자일리 님 오셨군요.”

“여기라고 해서 와봤는데. 진짜로 여기 맞아?”


길드원이 될 모두가 쓸 공간이다.

당연히 자일리도 잊지 않고 초대했다.


“집이 이 정도면 괜찮은데? 우리 본가보다야 못 하지만 일개 모험가가 구할 수 있는 집은 아니야.”


자일리는 말했다.

많이 얌전해졌다지만 불쑥불쑥 자기애를 드러내는 그였다.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본인의 귀족 신분을 과시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크흠. 실언이었어. 못 들은 거로 해줘.”


스스로 민망한 말이었음은 아는지, 이번에는 말을 철회했다.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은 일류 모험가는 역시 다르다는 거였어.”


캣니스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기껏 철회하고 다시 꺼낸 말도, 여전히 한마디 한마디가 논란거리였다.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의 행동을 생각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그래서. 진짜 어떻게 한 거야?”

“무얼 말이에요?”

“대문, 정원, 마구간, 대형 목욕탕까지. 아무리 봐도 평범한 서민이 구할 수 있는 집이 아니잖아.”


자일리가 본인이 느낀 바를 이야기하였다.

돈 문제를 지적하는 이야기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적어도 백작가 이상이 소유했던 건물 같은데. 이런 곳은 귀족 전용이라서 함부로 내놓지 않아.”


그 말에 캣니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시선을 돌려서 브레드를 바라봤다.


“브레드 님?”

“음! 그런 사정까지는 몰랐군. 이곳은 왕궁에서 새로 사귄 친우가 소개해준 집이라서 말이네.”


새로 사귄 친우.

이런 집을 소개해줬다는 친우는 분명히 준 귀족 이상의 신분일 터였다.


“브레드 님···.”

“음?”

“설마 싶지만. 그게 왕궁 꼭대기에 앉은 분 이야기는 아니죠?”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질문을 한 순간부터 브레드가 말없이 웃고 있었으니.

캣니스는 중개인과 브레드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중개인의 태도가 지나치게 저자세이긴 하였다.


“시작부터 국왕의 총애 받는 길드라고 소문날 거예요.”

“걱정하지 말게. 그대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게 조심할 터이니.”


결코 알고 싶지 않던 비밀이 들통나고. 국왕님이 직접 나서준 저택 계약이 완료되었다.


“혹시 살면서 불편하거나 필요한 물품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꼭 왕궁에 연락을 거치는 걸 잊지 마시고요.”


거래가 끝나자, 중개인은 반듯한 자세로 악수를 청하였다.

브레드는 선뜻 악수에 응하였다.


“알겠네. 그대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친우에게 이야기하지.”

“에이. 꼭 그런 의미에서 말씀드린 건 아니지만. 부디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니라고 말하면서 부탁한다니 이상한 말이었다.

중개인으로만 보였던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인간성을 조금 엿본 시간이었다.

중개인이 떠나고. 그들은 본격적으로 새집 맞이에 들어갔다.


“진짜 집 한번 좋네. 그러면 이제 각자의 방을 정하는 거 어때?”


자일리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은근히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잔소리꾼이 사라져서 좋다는 둥. 이상한 해방감을 말로 표현했다.


“물론. 제일 넓고 좋은 방은 나에게 줘야 하는 거 알지?”


그 말에 브레드와 캣니스는 미소 지었다.

설마 자일리가 함께 살려고 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가 귀족 신분이기 이전에 그 성격에 단체 생활을 하려 할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아예 그가 있을 장소를 고려하지 않았다던가, 기껏 길드에 영입하고 내쫓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어쩐지 들어와서 살 거라는 기대도 안 한 인물이, 가장 피곤한 일상을 가져올 거 같았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새로운 길드원은 언제 소개해 줄 건데?”


그들은 여전히 말없이 웃기만 했다.

자일리는 왠지 한결같은 반응에 짜증을 느꼈다.


“됐어, 나중에 선배한테 인사만 제대로 하라고 해.”


-리는 말만 남기며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윽! 뭐야··· 이 석상은! 귀부인이나 가질 것처럼 고약하게 생겼네.”


앞을 안 보고 걷다가 애먼 장애물에 부딪혔다.

복도 한복판에 세워진 티미가 자일리에게 발길질을 받았다.

여전히 브레드와 캣니스는 웃고 있을 뿐이었다.

자일리가 한밤중에 복도를 거닐던 티미와 마주치고, 비명을 질러댄 게 그리 멀지 않은 날의 일이었다.

이렇게 다섯 명의 길드원이 한 곳에 뭉쳤다.

새로운 모험의 시작이었다.



*****



똑똑똑.


“으으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늦게까지 잠에 빠져있던 소녀의 귓가에 울렸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었던 거대한 이불 안에서 하얀 손이 삐죽 빠져나왔다.


“캣니스. 캣니스 일어났는가?”

“으음··· 문지기님···?”


캣니스는 침대 이불을 걷고 상체를 일으켰다.

여느 때와 같이 아침 인사를 건네기 위해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 그녀의 동행자가 방안 어디에도 없었다.


“아. 그랬지. 참···.”


그녀는 뒤늦게 전날 일을 떠올렸다.

저택은 2층 구조였다.

자일리는 바라던 대로 제일 넓은 2층 방을 얻었고, 브레드는 1층이 편하다며 2층의 좋은 방들을 마다했다. 그리고 티미는 방에 있는 스스로가 어색하다 하여서 아무 데나 돌아다니라고 하였고. 캣니스와 가더는 여정 중에 처음으로 각 방에서 밤을 보냈다.


“음. 깨어있었군.”


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은 브레드였다.

그는 배려심 넘치는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였다.


“아침밥을 준비했으니. 같이 들도록 하지.”


끄덕. 캣니스가 알겠다고 표현하였다.

브레드에게서 천천히 나오라는 말이 남고 문이 닫혔다.


“길드···.”


캣니스는 거울 앞에서 머리카락을 빗었다. 빗는 동안에 깊이 생각했다.

거울 속의 낯선 여인이 있었다.

마냥 어리고 무표정했던 용사 일행의 성직자는 보이지 않았다.


“동료···.”


캣니스는 가슴을 꾹 눌렀다.

천천히 뛰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는 순간 상기된 기분을 느꼈다.


“집.”


이곳은 모험가 길드에 있을 때와는 또 달랐다.

잠에서 깨었을 뿐인데 왠지 모르게 환영받는 기분이 있었다.

낯간지럽다고 해야 할까 낯설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굉장히 좋은 무언가가 실타래를 만들어서 가슴 언저리를 따뜻하게 감싸는 듯하였다.


“내가 있어도 되는 곳.”


항상 돌아갈 곳은 신전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일상 속 선물은 평생 꿈꿔온 환상 같은 거였다.

그녀는 머리 정돈을 끝내고 이부자리를 털었다.

창문을 열고 낯선 공기를 들이마셨다.


-벌컥


갑작스레 방문이 열렸다. 한 사람이 들어왔다.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인영이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캣니스! 밥 먹으러 가자!”


검은 머리카락과 시원하게 드러난 이마.

아주 잠깐 헤어졌을 뿐인데, 그의 붉은 눈동자가 그리웠다.

캣니스는 여느 아침때처럼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를 마주하고 나서야 진정으로 꿈이 아님을 알게 된 거 같았다.


“잘 주무셨어요, 문지기님?”

“그래, 잘 잤어. 이제 밥 먹으러 가자.”


가더가 배고픈 어린아이처럼 재촉하였다.

그런 사람이 그녀의 구원자이며, 인류가 항상 주시해야 할 위험인물이라는 게 신기했다.


“오늘 아침을 브레드 님이 준비했다는데. 혹시 코끼리 눈알 수프가 나올까요?”


말 한마디에 온갖 끔찍한 표정을 짓는다.

이러한 점이 그와 함께 있고 싶게 하였다.

거짓 하나 없는 그와의 일상이 너무나 좋았다.

캣니스는 자신의 아주 작은 거짓 하나만으로 이뤄지는 세상을 포기할 수 없었다.



*****



<외전- 신부>



“선생님. 여기는 이미 떠난 거 같습니다.”

“그렇군. 소문의 주인공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는데 말이지.”


사방이 어두웠다.

그래도 곰 같은 남자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그의 짧게 자른 머리카락 밑으로 무테안경이 빛났다.

그는 한 집안의 탁자 앞에 앉아서. 일렁이는 촛불을 마주하며 충실한 수하의 보고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그 소문 말고도 다른 소문이 들리는 거 같은데 말입니다.”


홀짝. 그리 품질이 좋지 않은 차를 마셨다.

깔끔한 움직임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며칠 전에 보였던 그 덩치 말입니다. 그게 움직인 이유가 화난 마신이 저질렀다고 들었습니다?”


달그락. 달그락.

찻잔이 놓여있는 탁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그 이유는 탁자 밑에 놓인 한 사람의 다리 때문이었다.


“이런. 많이 긴장하셨나 봅니다. 어르신도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는 게 어떻습니까?”


곰 같은 풍채의 남자가 질문하였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상대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서 덜덜 떨기만 하였다.

머리가 새하얘지도록 세월의 풍파를 견딘 노인. 이 집의 주인이었다.


“날이 춥습니다. 연세도 있으신데 항상 체온을 유지하셔야지요.”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찻물을 따랐다.

주홍빛 액체가 담긴 찻잔을 정중하게 권했다.


“아, 저, 저, 저, 저는 괜찮습니···”

“저런. 사양할 것 없습니다. 어르신께서 손님의 눈치를 살펴주실 이유는 없습니다.”


‘후. 하.’ 가쁜 숨소리가 오갔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노인은 남자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찻잔을 들고 덜덜 떨리는 입술 틈으로 찻물을 흘려보냈다.

남자가 무테안경 밑으로 지켜보고 말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예?”

“소문 말입니다. 이곳에 마신이 있습니까?”


쨍그랑.

찻잔이 깨졌다.

조금 전까지 떨고 있던 노인은 혹시 심장이 멈춘 게 아닐지 의심될 정도로 숨을 쉬지 않았다.


“저, 저는···.”


다행히 심정지로 죽은 건 아니었다.

그저 너무 놀란 나머지 횡설수설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의 시선은 겁을 먹은 노인이 아닌, 떨어진 찻잔을 향했다.

유감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런. 아무래도 너무 긴장하신 듯합니···”

“선생님. 데려왔습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망토를 뒤집어쓴 수하가 들어왔다.

망토 안쪽을 들추자 어린 여자아이가 나왔다.


“릴··· 릴리!”


조금 전까지 기운이 없던 노인이 두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 일어섰다.


“어, 어, 어, 어째서···.”


목소리와 행동에는 당혹감이 짙게 드러났다.

남자와 여자아이를 번갈아 보다가 아연실색하였다.

릴리는 잠을 자다가 깬 건지, 눈을 비비며 졸린 목소리를 냈다.


“으응. 엄마 아빠에게 손님이 찾아와서요···.”

“그, 그런데 어째서 네가···.”

“이 아저씨가 저번에 찾아왔던 아저씨를 찾고 있어서요···.”


릴리는 하품하였다.

늦은 밤에 일어난 탓인지 자꾸 눈꺼풀을 비볐다.

아이는 자꾸 감기는 눈꺼풀을 붙잡기를 관두고. 배시시 입꼬리를 올렸다.


“저, 잘했죠?”


그 말은 칭찬을 바라는 듯하였다.

평소에 공경에 빠진 이를 모른 척하지 말라는 노인의 말을 너무나 잘 지키고 말았다.


“그래, 릴리.”


곰 같은 풍채의 남자가 릴리의 앞으로 다가와서 눈높이를 맞췄다.

소리도 인기척도 없이 한순간에 거리를 좁혔다.


“우리는 그 아저씨를 찾고 있단다. 괜찮다면 이야기해주지 않으렴?”

“으응··· 릴리는 졸린데···.”

“아주 잠깐만 시간을 주면 된단다. 어떤 아저씨였는지를 이 아저씨에게만 말해주렴.”

“알겠어요. 그 아저씨는 마신···”

“릴리!”


노인이 큰소리를 질렀다. 릴리의 눈이 크게 뜨였다.

노인은 스스로 소리를 질러놓고도 놀랐는지. 손님의 눈치를 바쁘게 살폈다.

다행히 곰 같은 풍채의 남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다른 두 손님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오직 릴리 만이 목소리에 반응하여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소리를 지르세요? 촌장님.”

“리, 릴리야···. 그, 그 이야기는 우리만의 비밀이야기였단다···”

“하지만 그때 촌장님이 말했잖아요. 그 아저씨는 대단한 사람이니 널리 널리 알려야 한다고요.”

“이, 이노옴···. 하, 할아버지가 언제 그렇게 말했니?”


릴리는 동그란 눈을 연신 깜빡였다.

곧 자꾸 자신을 질책하는 노인에게 눈총을 쏘았다.


“할아버지! 왜 자꾸 거짓말을 하세요? 거짓말은 나쁜 거잖아요! 못된 마족이 잡아가잖아요!”

“이, 이 할아버지가 언제 거짓말을 했다고···. 릴리야 자꾸 그러면 할아버지가 이놈 할 거다, 이놈···.”


노인이 쩔쩔매던 가운데, 또 문이 열렸다.

이번에도 손님은 지체하지 않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흔적을 찾았습니다. 이 집 뒤에 있는 창고입니다.”

“아. 아아아······.”


노인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주저앉은 안색은 창백하였고, 나락을 보는듯한 눈동자는 한 남자의 기분을 살폈다.


“그래, 가도록 하자꾸나.”


곰 같은 풍채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연실색한 노인은 머리를 감쌌다.

남자가 문밖을 나가려고 움직였을 때. 작은 손길이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이에 남자는 뒤를 돌았다.


“왜 그러니? 릴리야.”

“아, 아저씨. 제가 말실수 한 거예요? 제발 촌장님을 아프게 하지 말아주세요.”


릴리의 작은 손이 벌벌 떨렸다. 겁에 질린 두 눈동자는 눈물을 머금었다.


“그 아저씨는 나쁜 사람 아니에요. 릴리가 넘어졌을 때 아프지 않냐고 물어 봐줬어요. 촌장님에게는 조금 말이 험했지만. 제 또래 친구들도 모두 다 그 아저씨를 좋아했어요.”

“릴리야 그만두어라!”


공포로 얼어있던 노인이 릴리를 제 뒤로 숨겼다.

이윽고 아이와 남자를 번갈아 보더니. 남자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모두 제 탓입니다! 제 탓입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엎드려서 고개를 조아렸다. 눈앞의 남자에게 용서를 구했다.

노인은 오밤중이 떠나가도록 큰 목소리로 자비를 구했다.


“제 탓입니다! 제가 다른 곳에 눈이 멀어서 마을 사람들을 현혹하고 강제로 마신을 섬기게 했습니다!”

“할아버지 왜 그래요! 그런 적 없잖아요. 할아버지는 아저씨를 소개해주기만 했으면서. 왜 이런 거짓말을 해요!”

“이놈! 거짓말은 네가 하고 있지 않더냐! 위대하신 분 앞에서 거짓을 말하면 다 들통난다는 것도 모르더냐!”

“할아버지. 하지 말아요···. 머리를 박으면 이마 아프잖아요. 이러지 말아요! 아저씨 잘못했어요. 릴리가 잘못했어요!”


노인은 작은 손길을 마다하고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그런 촌장의 행동에 어쩔 줄 모르던 릴리는, 함께 잘못을 빌다가 끝내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선생님.”

“그래, 네가 돌봐주어라.”


‘싫어. 안 돼. 촌장님을 데려가지마.’ 아이의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남자와 노인은 집을 나섰다.


“이곳입니까?”

“예. 제 죄를 숨겨둔 곳입니다.”


자물쇠를 열고 문을 밀었다.

흙먼지가 가득한 창고를 등불로 비췄다.

보인 것은 악마의 형상을 조각한 조각품. 센츄어리 대륙에서는 굉장히 보기 힘든 취미였다.


“이것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 사단이 일어난 건 제 어리석음 때문이니. 부디 마을 사람들을 벌하지 말아주십시오.”

“촌장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노인의 안색이 더욱 쓸쓸해졌다.

그동안에도 남자는 조각품을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살폈다.


“잠시 짐승이 머물렀나 봅니다.”

“예? 아뇨. 딱히 짐승을 키운 적은 없습니다.”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의 먼지를 손가락 끝에 문질렀다.

노인은 의문에 휩싸였다.

어째서 이 많은 증거물을 두고. 키우지도 않은 들짐승을 언급하는지.


“저 위대하신 분이시여···”


죽을 땐 죽더라도 이렇게 아무 것도 모른 채 있을 순 없었다.

각오를 다진 노인이 남자를 불렀다.


“신부로 괜찮습니다, 촌장님.”

“제, 제가 어찌 그리···”

“제가 이렇게 불러줬으면 바라는 겁니다. 신부라고 부르시죠.”


노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호칭을 정정했다.


“그, 그러면 신부님···. 제가 이 상황에 대해서 다 설명할 테니. 제 목숨만 취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하하! 그게 무슨 농담입니까? 제가 산적도 아니고. 왜 촌장님의 목숨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니. 그렇지만··· 그러려고 찾아오셨잖습니까?”


각오까지 하며 힘들게 꺼낸 말이 우스갯소리로 여겨졌다.

노인은 말로 형용하기 힘든 심정이 들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촌장님께서 저를 배려할 구석은 전혀 없습니다. 제가 여기 온 건 단순한 호기심일 뿐. 다른 마음은 없으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노인의 얼굴에 미세하게 화색이 돌았다.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못 믿었겠지만. 눈앞의 남자는 함부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저, 정말입니까?”


그래도 확실히 하기 위해 다시 한번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아. 아아··· 신이시여!”


그러자 줄곧 불안했던 마음이 덜어졌다.

이곳까지 들킨 와중에 들은 말이니, 더 이상 꺼릴 것이 없었다.


“다만 앞으로 조심하셔야겠습니다.”

“무, 무얼 말입니까?”


신부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등불에 비진 그의 미간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앞으로 이런 물건을 구하실 때는 반드시 마나 감응사와 함께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더러운 짐승에게 물리겠습니다.”


석고상밖에 모으지 않는데 웬 짐승 타령인가.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노인은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자, 그러면 이만 외부인은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예? 좀 더 머무르지 않고 어찌 그냥···”

“이 근처에 보고 싶은 얼굴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참.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하지만,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파하는 일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닌 듯합니다.”


남자의 말은 마지막 경고라는 것처럼 들렸다.

노인의 얼굴이 납빛처럼 변했다.


“예 알겠습니다. 앞으로 더 이상 마신을 모시는 일 따위는···”

“하하! 그걸 또 그렇게 들으면 어떡하십니까! 저는 신앙을 마음에 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이었습니다!”


또 거짓 없는 말이 오해를 정정해주었다.

노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뜸도 모자라, 입을 쩍 벌렸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찌 보이든 한 마을에 신실한 신자가 있는 건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조금···”


노인은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자신이 모시는 신이 인족에게 좋은 시선을 받기 힘들다는 말이었다.

그 말은 아무런 혐오도 경멸도 없는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그, 그, 그러면 계속 그분을 모셔도 문제가 없을 거라는···”

“적어도 저희 교단에서 손을 쓰는 일은 없을 겁니다.”


노인은 잠시 충격으로 얼어붙었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남자가 그리 말한다면. 실제로도 그러할 터였다.

아닌 밤중에, 한바탕 촌장을 놀라게 한 남자는 마을을 떠났다.

마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본래의 조용함을 되찾았다.

노인은 집으로 돌아와서 울다 지친 릴리를 등에 업었다. 아직 아이를 걱정하고 있을 부모의 집으로 바래다주었다.


“릴리야.”

“네, 촌장님···.”

“할아버지도, 릴리도, 조금 전의 아저씨도. 나쁜 사람은 한 명도 없단다.”


노인은 릴리를 업고 자갈길을 걸어갔다.

릴리가 울음기가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조금 전에는 왜 그렇게 화를 내셨어요···.”


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정말 많았다.

할아버지가 아직 당당하지 못해서. 그분을 모시기 적합하지 못해서. 그 남자 같은 사람이 많지 못해서.

하지만 끝내 말하지 않고 마음속 신앙으로만 남겨두었다.

언젠가 이 아이가 크게 되면 알게 될 일이었으니까.


“릴리야.”

“네, 할아버지.”

“언젠가. 언젠가. 우리 릴리도···”


그 아저씨처럼 멋진 사람이 되거라. 관대하고도 냉철한 사람이 되어라.

노인은 어렸을 적부터 들어왔던 옛이야기를 해주었다.


[심판자의 앞에서 죄를 짓지 마라. 처형자의 앞에서 죄를 숨기지 마라. 이 두 가지를 어긴 자 무자비한 죽음을 받게 되리니. 여신의 무구 앞에서는 진실한 사람만이 남으리라.]


소문만으로 들어왔던 셀레브리디 교단의 무자비한 처형자.

마신 신봉자와의 만남이 여신의 무구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처형자의 또 다른 이명이 이단 심문관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노인은 가능하다면 한 번 더 그와 만나고 싶었다.


“자, 가도록 하지.”


남자가 어두운 산속을 따르는 일행에게 말했다.


“열한 번째 날개가 신세를 진 이가 누구인지. 얼굴을 보러 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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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작가의 tmi: 여신의 무구란. 앱솔루트 셀레브리디 교단 소속 세 명의 팔라딘(여신의 무구)을 말한다. 음유시인의 노래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인물은 심판자와 처형자 이며. 노래로 남을 정도는 아니지만 존재하는 집행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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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56화 베르 23.04.01 59 0 13쪽
» 55화 길드 23.03.29 58 0 22쪽
65 54화 길드 23.03.25 66 0 16쪽
64 53화 길드 23.03.11 65 0 12쪽
63 52화 길드 23.03.08 63 0 12쪽
62 51화 길드 23.03.01 62 0 13쪽
61 50화 길드 23.02.26 77 0 11쪽
60 외전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23.02.26 67 0 10쪽
59 49화 끝나지 않은 위험 23.02.21 78 0 17쪽
58 48화 끝나지 않은 위험 23.02.17 68 0 13쪽
57 47화 끝나지 않은 위험 23.02.13 72 0 14쪽
56 46화 끝나지 않은 위험 23.02.10 54 0 13쪽
55 45화 끝나지 않은 위험 23.02.08 60 0 14쪽
54 44화 끝나지 않은 위험 23.02.04 59 0 11쪽
53 43화 던전 23.02.01 58 0 11쪽
52 42화 던전 23.01.29 63 0 18쪽
51 41화 던전 23.01.26 63 0 21쪽
50 40화 던전 23.01.25 67 0 17쪽
49 39화 던전 23.01.13 73 0 15쪽
48 38화 던전 23.01.02 74 0 15쪽
47 37화 앱솔루트에서 온 손님 22.12.29 78 0 14쪽
46 36화 앱솔루트에서 온 손님 22.12.28 76 0 14쪽
45 35화 앱솔루트에서 온 손님 22.12.26 75 0 21쪽
44 34화 앱솔루트에서 온 손님 22.12.19 85 0 12쪽
43 33화 선택의 책임 22.12.04 80 0 21쪽
42 32화 선택의 책임 22.12.03 81 0 15쪽
41 31화 선택의 책임 22.12.02 92 0 14쪽
40 외전 용사 그리고 기사9 22.12.01 78 0 15쪽
39 외전 용사 그리고 기사8 22.12.01 67 0 10쪽
38 외전 용사 그리고 기사7 22.11.30 71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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