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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섬 님의 서재입니다.

반드시 자살하는 가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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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섬
작품등록일 :
2023.05.29 15:17
최근연재일 :
2023.07.03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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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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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3)

DUMMY

“해명을 할 기회를-”

“걱정 마라, 충분히 줄 예정이니.”


새하얗게 바랜 머리에 깊은 눈과 주름진 입가에 인자한 미소가 지어진다. 방금 까지 흉악한 살기가 무색하게 사라지고 부드러운 노인이 자리를 차지한다.

사람을 죽이는 대 살의가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감정이다. 하지만 제든에게 불필요한 감정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밥을 먹고 꽃을 꺾는 것과 같이 당연한 일이니까.


“말 과 다르지 않습니까!”


공격의 전조를 직감한 리하일이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검을 잡는 사치 따위 부릴 수 없다. 재능은 바래지 않는 법이고, 판단은 지극히 옳았다.


“몸이 굳었구나 꼬마야.”


단지 나태하다. 리하일의 움직임보다 빠르게 제든의 손날이 먼저 도달한다. 뱃가죽을 뚫기 직전 예리한 손날은 장타가 되어 헤리안의 배를 강타했다.

기세와 다르게 헤리안의 몸은 크게 밀려나지 않았다. 입고 있는 철 갑옷 또한 뚫리지 않고 손 자국만이 남았다.


“커헉-!”


하지만 속은 달랐다. 제든은 배의 살 가죽을 찢고 허리 뼈를 부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내장을 상하게 하는데 큰 힘은 필요치 않다.


“어르신. 이게 무슨 일이신가요.”


입에서 피를 쏟아내며 무릎 꿇은 리하일을 뒤로 하고 제든은 시선을 돌렸다.


“허허, 남작 부인 아니십니까. 기별 없이 뵙게 되어 송구합니다.”

“아직도 저를 남작 부인이라고 부르시는군요.”


제든은 베른의 아버지다. 보통 가볍게 부르는 것이 정상인 관계이지만 제든은 언제나 헤리안을 극 존칭인 자작 부인이라 칭했고, 베른이 살아있을 적에도 느껴지던 확실한 거리의 존재는 착한 부인의 탈을 쓰던 시절에도 신경이 쓰였었다.


헤리안은 짜증을 삼켜 내고 미소를 지어낸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가문의 큰 어르신을 모시게 되니 참 난감합니다.”

“무얼, 그저 노인으로써 온 것이니 큰 신경을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배려하는 표정과 말에 헤리안은 웃는 입가가 흔들린다.


‘망할 노인네가 왜, 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만약 외가의 가주로써 왔다면 소란스러운 상황을 오히려 도움 받을 수 있다. 외가의 주인이라 해봤자 결국은 데이피스토 가문의 늙은 개니까. 그런데 개별의 존재인 노인으로 온 것이라고?


“웃기지도 않는 말 장난입니다.”


헤리안은 더 이상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노인이라는 대답의 의미는 협박이나 다름 없다. 지금 자신의 행동은 독단의 판단으로 이뤄졌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이곳에 있는 이를 모두 죽여버릴 수 있다는 의지 표명이다.

아무리 형태만 유지하고 있다고 하나 기사단은 기사단. 분명 수십 기사를 홀로 죽이는 것은 힘들겠지만 그는 몇 십년간 살행을 수행한 전문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왔을 리 없을 뿐만 아니라 가주의 죽음 이후 침묵을 유지한 그가 이곳에 온 이유가 분명 있을 거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기란 귀찮은 겉치레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주변에 기사들에게 눈치를 주며 헤리안은 한 발짝 제든에게 다가갔다.


“개인으로 오셨다면 분명히 큰 이유가 있을 것인데 도움이 될 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위험한 만큼 제든에게도 부담되는 행동이다. 공적인 행동과 사적인 행동의 차이를 무기로 헤리안은 은은한 압박을 유지한다.


“외가와 어떤 식으로 협력해야 할지 벌써 고민입니다.”

“그리 큰 고민은 안 하셔도 됩니다. 새 가주님이 재미난 장난을 치길레 삶의 재미가 드문 늙은이가 불 품 없이 끼어든 것입니다.”

“가주를 키워야 할 부모로써 사사로운 장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켜 부끄럽군요. 어디서 알았는지 궁금해 질 지경입니다.”

“하하, 들개들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입니다. 저도 통제를 할 수 없는 녀석들이라 곤란한 법입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들개란 외가의 암살자들을 칭한다. 아무리 난폭하고 겁 없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주인의 명은 죽음보다 먼저 한다는 사실은 이미 자명한 사실이다.

헤리안은 단언한다.


“전 짐승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제 집에 들어온 들개들은 살처분 해야 되겠습니다.”

“하하, 장난을 좋아 하는 녀석들이라 변호를 하고 싶지만 가주님께서 그러시겠다면 저야 어쩔 수 없습니다.”


제든의 눈이 베리안을 향했다.


“재밌는 장난을 좋아하시는 새로운 가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저 전통을 따를 뿐입니다.”


준비한 카드는 나왔다. 의도대로 움직일지 모르지만 베리안은 과감하게 행동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건 좋지 않은 선택입니다.”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발현의 흔적을 빠르게 경고하는 제든의 목소리에 베리안은 답한다.


“개를 넘어 사람은 공포를 느끼면 조용해지는 법입니다.”


푸른 색을 띄는 마나와 이질감이 느껴지는 검은 기체가 베리안의 팔에서 흐른다. 미약하나 더 없이 선명한 흑색은 이곳의 전원을 충격에 빠지게 했다.


“이 무슨, 지금 자신이 어떤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는 겁니까?”


동공이 덜덜 떨렸다. 보는 것은 처음임에도 단숨에 눈치 챌 수 있었다. 저건 금기다. 만약 세상에 드러난다면 내기의 결과와 상관없이 가문은 멸문 하고 연관된 이는 이단 심문관의 고문을 겪으며 고통 끝에 죽지도 못하게 된다.


“흑양「黑樣」을 심장에 새긴 겁니까! 흑마법에 손을 대다니 이런 말도 안되는··· 금기를 접한 이의 말로를 모르는 겁니까?”


자신들이 지닌 마나와 다른 마나의 움직임을 느낀 기사들이 움찔한다. 자의식을 스스로 거세한 꼭두각시나 다름 없으나, 인간의 감정 중 가장 강렬한 색을 띄는 공포가 헤리안의 명령을 덮어 버린 것이다.


“죽여야 된다.”

“빨리- 교회가 보기 전에 없애야 해!”


평생 고문을 당하며 죽지도 못해 살아갈 수 있다. 생존의 명령이 기사들의 자아를 복구한다. 이를 눈치 챈 제든이 한 수 빠르게 움직인다.


“기사단이란 것들이 감히!”


무릎을 들어 바닥에 발을 내딛는다. 발을 기점으로 큰 진동이 주변 공간을 울렸다. 소리로 끝나지 않은 힘의 여파에 기사들은 균형을 잡기 위해 허우적거렸다.


“그만!”


균형을 잡기 위해 허둥 거리는 기사들에게 제든이 소리쳤다. 균형을 잡으며 약간이지만 진정된 기사들에게 시선을 때고 베리안을 응시한다.


“선택에 뒤 따른 파장은 인지 하고 계신 겁니까.”

“이 일이 밖에 알려지면 전 종교쟁이에게 사지가 찢기고 눈알이 파이며 모든 기억을 말한 다음 깊은 지하에서 썩은 빵과 빗물을 마시며 평생을 고통에 발버둥 치다 죽을 겁니다. 하지만··· 꼬랑지를 말고 죽거나 발버둥 치다 고통스럽게 죽는 것, 둘 중 최소한 후자가 낫지 않겠습니까?”


헤리안이 코웃음친다.


“미쳤구나 베리안. 늙은이 한번 부르겠다고 금기에 손을 대?”

“덕분에 상황은 변하지 않았습니까? 꽤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 하는데.”

“아니 넌 자신이 어떤 짓을 했는지 몰라!”


다가올 미래를 떠올릴 수록 거칠어지는 숨을 무시하며 헤리안이 소리 질렀다.


“어르신, 아니 이제는 다 필요 없겠네. 늙은이. 지금 이라도 늦지 않았어. 당장 베리안을 죽여. 나를 제외한 기사들과 시녀들까지 전부, 이 사실이 밖에 퍼지면 모든 것이 끝이야!”

“험악한 말을 너무 쉽게 하시는군요.”

“그럼 어떤 것을 할 생각이지? 반지를 가졌으니까 나를 죽이고 인형을 제대로 된 가주로 만들어 보게? 하하! 한번 해보지 그래, 얼마 안 되서 이단 심문관 한테 폐허가 될 가문이지만 말이야. 아, 이런 말은 충실한 개새끼에게 좀 불편하신가?”


분명 현 상황에서 최적의 판단이다. 죽음을 앞둔 모든 이들과 베리안까지 입을 다물게 만드는 선택은 뜬금없이 금기를 저지른 가주를 대처하는 최선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고 시녀와 기사단은 모르며 베리안만이 아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어쩌면 제든도 알고 있을 수 있는 한 가지 진실.

베리안은 가볍게 묻는다.


“책들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아버지가 알려주지 않아서 곤란했습니다.”

“이거 원···”


베리안의 물음에 제든은 활짝 미소를 짓는다. 인자한 이전과는 성질이 다른, 광소와 비견되는 감정에 헤리안이 움찔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지식에 대한 욕구를 놓지 않다니, 전 가주님께서 자식 농사를 훌륭하게 하여 이 늙은이는 기쁠 따름입니다.”


베리안은 기다리던 완벽한 대답에 주먹을 꽉 쥐었다.


‘됐다.’


영문 모를 대화에서 불안한 낌새를 느낀 헤리안이 다급히 소리쳤다.


“당신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저히 떠올리기 힘든 얘기지만 이 대화가 의미하는 가설은 하나 밖에 없었다.


“설마, 원래 가주들이 금기에 접했다고?”

“이거 알면 안되는 걸 알아버렸네요.”


헤리안에게 시선을 땐 베리안은 제든을 바라봤다. 이제 칼자루를 쥔 인물은 단 한명이다. 남은 것은 확인이었다.


“보여드릴 것은 이제 없습니다.”


헤리안에게 게임을 명목으로 웃기지도 않은 제안을 한 이유는 단순한 시간 끌기였다. 상식적으로 기사를 이기는 것이 말이 안된다. 단지 외가에 살고 있으나 이미 가문에 눈과 귀가 되어줄 제든의 들개들에게 알리기 위함 이었다.

반지를 지녔고 가문의 비밀 또한 알고 있는 가주가 지금 위기에 처했다.


“어르신. 그래서 어떠십니까.”


마치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계획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그러니 가주의 직위를 수행하기 충분한 능력까지 지녔으 어서 저 간약한 여우를 당장 없애고 나를 가주로 모셔라.

베리안은 확신을 가지면서도 어쩔 수 없는 긴장을 느끼며 제든의 답을 기다렸다.


“가주의 무거움을 어린 나이임에도 훌륭히 이해 하고 있는 모습 훌륭합니다. 하지만 부족합니다.”

“뭐가 부족하다는 소리입니까.”

”한낱 가신에 불과한 제가 어찌 과오를 저지르겠습니까. 저는 그저 정해지는 가주님을 따를 뿐입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정말 그랬다면 아직 내가 살아 있으면 안된다. 제든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가주는 헤리안의 아들이 되었을 테니까. 당장이라도 뱉고 싶은 반박의 말에 입이 근질 거리지만 참고 되묻는다.


“그렇다면 뭐를 원하시는 겁니까.”

“단순합니다. 현 가주님께서 내기를 신청하지 않으셨습니까.”


제든의 말을 집중하고 있던 헤리안과 베리안의 안색이 상반되게 바뀌었다.


“역시 어르신입니다. 약속의 무거움을 아는 모습을 보니 여태까지의 과오가 싹 잊혀지는 기분입니다.”


헤리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방금의 대화가 아무 의미 없게 변한 선언이었다. 내기란 베리안과 리하인의 결투, 그런 불리한 내기를 선택한 베리안의 의도가 제든을 부른다는 선택이었음이 드러난 상황에서 내기를 재개한다는 것은 승패가 확실시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단순한 상황 파악을 끝낸 것은 헤리안 뿐이 아니었다.


‘씨발.’


급격하게 변한 상황에 베리안은 가슴이 답답해 울분이 날 지경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헤리안의 편을 든다고?’


분명 제든은 오로지 가문만을 생각하는 광인이다. 그런데 선택이 왜 저런 선택을 했지. 대체 왜? 내가 알지 못하는 둘의 사정이 있나? 가주가 죽기 전 헤리안의 능력이 뛰어났나 아니면 헤리안의 아들 재능이 뛰어난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실패의 원인에 베리안은 사고를 억지로 회전 시킨다.


‘일단 이유는 나중이다. 살 길을 찾아야 해.’


도망쳐야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승산은 없다. 애써 짠 판이 망가지니 준비한 말들이 단숨에 적으로 변질되었으니 승산은 욕심이다.


“생각이 많으신가 봅니다 가주님.”

“···덕분에 말이야.”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렇게 저를 부르기 위해 노고를 하셨는데 더 이상 복잡하게 만들어서는 가신으로서 불충이겠지요.”


죽는다. 어떻게 해야 살아나갈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 베리안은 지끈 거리는 두통마저 느꼈다.


“혹시 제 마나 호흡법의 특징을 아십니까.”

“그걸 모를까. 외가에서 주로 쓰는 독살을 마나로 재현하고자 만들어진 특유의···”


무협지에서 파생된 용어이기에 보면서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격산타우였나.”


말을 끌어야 한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기 위해 베리안은 최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산의 뒤 존재하는 소를 때리듯 당신과 싸우는 이는 직접적인 치명상을 입지 않아도 특유의 파동에 의해 독에 당하듯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고 하지.”

“예. 스승님께 마나 호흡법으로 가문의 일원을 때리는 것이 마음이 아프지만 방금 리하일 경에게 격산타우의 수를 활용했습니다. 이미 코어가 끊어져 마나는 사용할 수 없고 장기가 끊어져 한 걸음마다 고통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취향이 변태적인 노인네구만. 나쁘지 않아. 고통은 흥분 되니까.”


쓰러져 있던 리하일이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본래의 규칙대로 리하일 경과 가주님이 싸워 이기는 자를 제가 돕는 내기, 쉽고 명확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다쳤다 해도 기사인 남자와 마나를 익히지 못한 일반인이 싸우란 소리인가.”

“역시 흑양을 새긴 지 얼마 되지 않았군요. 물론 그것도 염두하고 균형을 짰으니 괜찮습니다.”

“그런건가.”


사람이 미치면 실성을 한다고 했나. 베리안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니까 저 덜떨어진 패배자만 죽이면 니가 내 따까리가 된다는 거지?”

“가주가 되신다면 얼마든지.”

“미친놈.”


베리안은 질린 듯 고개를 휘저었다. 지금도 흔들리지 않는 제든의 눈동자에는 진심으로 내게 기대하는 감정이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마치 내게 증명을 요구하는 듯 하다.

자명의 반지와 선천적인 데이피스토 가문의 혈통만이 지녔다는 흑마법의 재능을 모두 사용하여 마나를 잃었다 하지만, 기사였던 리하일을 죽여 가주의 자리에 앉을 자격을 보이라고 요구하고 있다.


“보고 싶으면 실컷 봐라.”

“예! 무너지는 데이피스토가를 재건하여 저주 받은 검재라는 오명마저 더욱 깊은 어둠으로 가려버릴 악마와도 같은 재능을 견식할 영광을 제게 허락해주시면 됩니다.”


자신만만한 대답에 더욱 감동에 찬 제든의 연변을 귓가로 흘리며 베리안은 검을 뽑아 들었다. 더 이상 얘기를 들어줄 정신력이 남지 않았다. 내가 죽든, 살든 좀 쉬어야지 머리가 돌아갈 것 같다.


“검을 잡는 것도 오랜만이네.”

“어디 보면 검사라도 된 것 같은 말투네? 고작 해야 처음 사람을 죽여 본 날이 몇 일 전이면서.”


헤리안의 말에 베리안은 크게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긴 하지.”


평생 검을 휘둘러본 기억이 얼마나 될까. 아마 2번째 일거다. 디안을 죽일 때 한번, 지금 또 한번 그리고··· 아.


‘예전에 한번 있긴 하네.’


베리안이 되기 전, 딱히 유쾌하지는 않은 기억이다.


“정확히 기사의 목을 베어 제게 가주의 혈통을 증명해 주시면, 전 이번의 불충을 당신의 검으로써 속죄 하겠습니다.”

“좋아. 진짜 마음에 들어.”


칼을 잡은 손가락에 끼여진 반지의 감촉이 어느 때보다 믿음이 갔다.


“어떤 고통을 느끼더라도 너 만은 반드시 죽여주마.”


충혈된 눈으로 외치는 리하일의 선언은 거짓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죽이려고 한 적이 처음은 아니어서 협박 느낌은 없다. 아, 따먹으려고 오는 적은 처음이긴 해.”

“닥쳐라!”


일갈과 함께 리하일의 몸이 기운다. 비스듬한 움직임은 땅을 박차는 돌진으로 이어진다. 무슨 기술이지. 단숨에 눈 앞으로 다가오는 리하일의 속도는 머리를 잠시 멈추게 만들 정도다. 경험은 그렇다.


그러나 육체는 늦지만 확실히 반응한다. 힘이 약하니 검은 양손으로 잡는다. 리하일의 움직임은 눈으로 애써 보이지만 동작의 의미는 전혀 파악 되지 않는다. 예상 범주 안이다. 자명의 반지는 싸움의 경험을 주지 않는다.

몇 대에 누적된 검의 경험을 선사한다.

검에게 사랑 받으며 마나에게 원한을 받은 이들, 데이피스토의 이름을 지닌 검사들의 기록들이 빼곡히 쌓인 반지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았고.


서걱-


그것은 마나를 잃은 한낱 기사의 목을 베기 충분한 재능이었다.


툭. 목을 잃고 넘어진 리하일의 육체가 쓰러진다. 단 일합, 모두가 볼 수 있는 속도의 경합이었으나 동작의 진의를 파악한 이는 제든 뿐이었다. 양손으로 잡은 검이 얼마나 느리고, 아름답게 움직였는지 눈으로 직면한 제든은 잠깐 자신의 넋이 나갔음을 깨닫고 극심한 자기 혐오를 느꼈다.


“데이피스토가의 가주를 뵙습니다.”


꿇은 무릎과 바닥을 향해 조아리는 머리는 충성을 뜻한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알아서 해. 좀 쉬어야 될 것 같으니까.”


베리안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팽개치며 자리를 벗어났다.


덜덜-


애써 숨겼지만 양팔은 쉼 없이 떨리고 있었다. 뒷모습을 조심히 지켜보던 제든은 속으로 생각 하였다.


‘사람을 죽이는 감각에 익숙하지 않으신 건가.’


이 또한 잘 이겨내셔야 할 것이다. 그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이겠지.

가문의 큰 어르신이 아닌 귀곡으로써 자신의 작업물을 쳐다봤다.


“아들의 마누라를 작업 하는 것은 또 처음일세, 아무리 나라도 미안하구만.”


말과 달리 걸음에는 망설임은 없다.


*


저택에 계단에 오르며 창문 밖으로 제든이 일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베리안은 방 안에 도착한다. 이제야 첫 번째 단계가 끝이 났음에 안도하며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푹신한 침대가 부드럽게 몸을 감싸니 문득 옜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몸이 피곤했다. 지금은 반지의 경험에 따라 몸을 억지로 맞췄기에 근육이 파열 된 것이지만, 그때는 과도하게 긴장을 해서 그랬다.


“세 번째라 그런가? 어색하지는 않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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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다툼 23.06.29 16 0 14쪽
29 이상「理想」(2) 23.06.28 17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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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다르면서 비슷한 둘 23.06.25 22 1 12쪽
26 매(2) 23.06.24 22 1 11쪽
25 매(1) 23.06.23 23 0 16쪽
24 진리회 23.06.22 20 0 14쪽
23 나쁜 짓 (2) 23.06.21 20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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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성질 23.06.18 25 0 14쪽
19 운동 23.06.17 31 0 12쪽
18 오만 23.06.16 23 1 13쪽
17 악연 23.06.15 23 0 16쪽
16 대련(2) 23.06.14 28 0 18쪽
15 대련(1) 23.06.13 24 0 12쪽
14 입학 23.06.12 23 0 13쪽
13 입학 시험 23.06.11 26 0 17쪽
12 눈 먼 대장장이 23.06.10 36 0 14쪽
11 용사와 흑마법사(3) 23.06.09 29 0 15쪽
10 용사와 흑마법사(2) 23.06.08 33 0 14쪽
9 용사와 흑마법사(1) 23.06.07 45 1 10쪽
8 훈련 23.06.06 56 0 14쪽
» 내기(3) 23.06.05 57 0 18쪽
6 내기(2) 23.06.04 67 0 12쪽
5 내기(1) 23.06.03 68 0 16쪽
4 감옥 23.06.02 8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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