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우리, 쫓겨나는 거야?
“송. 나 머리좀 감고 올게.”
분홍은 머리를 긁으면서 송에게 양해를 구한다. 양해를 구하긴 했지만, 캐시 뮤직이란 연습실은 두 사람이 함께 지키기엔 과하게 조용했다. 분홍의 예상대로 송은 허락했다.
“응. 그래. 씻고, 좀 쉬다와도 돼.”
“미안한데...”
“아니야. 얼른 가서 씻고, 바로 오지 말고 좀 쉬어요.”
분홍은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몸이 쳐지는 걸 느끼며 진짜로 방에서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손님이 없는 장사를 하게 되면 인터넷도 하고 티비도 보고 할 수 있어 처음엔 좋지만, 결국은 차라리 손님이 좀 많고 몸을 움직이는 게 더 편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분홍이 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손님이 하나도 없는 것보다는 적당히 손님이 있어 움직이는 게 몸이 더 개운했다.
밤에 캐시 뮤직 문을 닫고 자신의 고시원 방으로 올라가면 11시가 넘었다. 밤에 머리를 감고 자면 아침에 뒷 머리가 불쑥 올라와 지나치게 개성적인 헤어 스타일이 연출된다. 그래서 그녀는 ‘내일 아침에 씻어야지’ 하고 소설책을 읽다가 잠이 든다. 아침엔 '아침형 인간'인 송과 아침 식사 시간을 맞추고 캐시 뮤직 자판기에 동전을 넣어 모닝 커피를 함께 한다. 그러다 보면 하루 일과가 시작되어 새삼스레 씻을 시간이 없었다.
어쩌면 문제는 그게 아니다.
한 건물 안에서 잠자고 장사하고 노래하고 밥먹고, 24시간을 보내다보니, 마치 집에만 있는 사람처럼 머리를 안 감고 며칠 지내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리려 했다.
처음 며칠은 캐시 뮤직에 갇혀 열심히 연습을 하였다. 이 건물에선 할 게 연습밖에 없어서 실력 향상을 시켜주시는 주님께 감사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수업마저도 없는 날은 몸이 축축 쳐졌다. 안 감아 기름진 머리카락들을 검은색 소파에 펼쳐놓고 누워있으면 시간은 또박또박 딱 1초씩만 흘렀다.
‘내 아직 젊은 나이에 인생을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회의감이 밀려왔다.
‘수업 없다고, 손님 없다고, 이렇게 지저분하게 망가져서 살면 안 돼.’
분홍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다.
송이 빈 용기에 덜어서 나눠준 유기농 샴푸에 물방울을 몇 개 떨어뜨린 뒤 거품을 낸다. 유기농 샴푸가 원래 그런 것인지 직성이 풀릴 만큼 거품이 나진 않아 서운하다. 머리칼 위로 피어나는 북실북실 피어오르는 거품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바로 지출 제로이다.
'고시원 이콜 지출 제로'
제로여야만 한다. 연습실 값도 이제 안 내도 되고 밥도 연이 엄마가 만든 밥을 먹는다. 그리고 샴푸와 휴지도 송이 산 걸 조금씩 얻어다 쓴다. 분홍은 이런 무지출의 삶이 뭔가 근천스럽게 느껴지면서도 마음 깊이에서는 만족스럽다.
'그래. 인생을 사는 방식은 다양한 거야. 꼭 돈을 매일 쓰면서 살 필요는 없는 거지.'
샤워 후 그녀의 작은 방으로 돌아와 접이식 철제 의자에 앉아 젖은 머리를 다시 한번 수건으로 닦아낸다. 곧 봄이고 춥지도 않은데 자연적으로 말릴까, 아니면 헤어 드라이기로 바싹 말릴까 고민한다. 송은 분홍에게 씻고나서 좀 쉬다가 오라고 했지만 진짜로 방에서 혼자 쉴 폼을 잡으니 송이 가게를 보고 있는데 많이 미안해진다.
그때 띵동 메시지가 울린다.
[황윤희 사장이 왔어요.]
분홍은 웬지 가슴이 덜컹한다. 황윤희의 등장도 덜컹하고, 부연 설명도 이모티콘도 없는 송의 문자가 함축적으로 비상사태를 알리고 있는 것 같다.
분홍은 자신이 괜히 걱정하는 것이길 바라며 짐짓 태연하게 답장을 한다.
[지금요? 나 지금 바로 내려갈까요?]
분홍은 송으로부터 ‘아니. 괜찮아. 천천히 내려와.’라는 답장이 오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즉시 온 답장은 한 글자였다.
[네]
분홍은 젖은 머리를 말릴 시간따위는 없는 긴급한 사태임을 알아차렸다. 회색의 모자 달린 잠바를 걸쳐 입고 계단을 타고서 날듯이 내려갔다.
지하 유리문 건너로 검은색 소파에 앉아 있는 황윤희가 보였다. 긴 생머리에 작은 눈, 나이에 비해 군살없이 날씬한 체구, 그리고 그녀의 이미지를 완성시키는 약간 신경질이 난 표정.
“안녕하세요. 사장님.”
“네.”
분홍은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인사를 짧게 하는 건가, 생각하며 약간 기분이 상했다. 그녀는 분홍과의 만남이 있을 때마다 늘 분홍의 인사를 먼저 받았고, 언제나 인사말은 ‘네’ 한 글자였다. 분홍은 자음 한 개와 모음 한 개로 이루어진 황윤희의 짧은 인사보다는 미리 연락을 하지 않고 찾아오는 그녀의 약속 태도가 더 못 마땅했다. 만약 분홍이 미리 황윤희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면, 가게에 내내 누워 있다가 머리를 감으러 고시원 방으로 다시 올라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분홍이 내려오기 전에 송과 황윤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없어 분홍의 촉이 바짝 선다. 분홍은 지금 캐시 뮤직 안에 감도는 공기의 온도를 재보고 있었다. 확실한 건 그다지 훈훈하지는 않다.
황윤희는 늘 만남의 시간을 자기가 혼자 정했다. ‘지금 거의 다 왔다. 얘기하자.’ 아니면 ‘생각해 보고 (내가 편할 때) 연락주겠다.’ 하는 식이었다. 더 심한 경우는 보라색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연이 엄마가 “사모님이 왔다 갔는데......” 하면서 황윤희의 뜻을 분홍에게 전해주었다.
“매상이 백만원도 안 돼.”
분홍은 당황했다.
‘그걸 나더러 어쩌라고. 원래 없던 손님인데...’
분홍에게 이제부터는 연습실이 손님이 점점 많아질 거라는 믿음은 있었다. 왜냐면, 캐시 뮤직의 낮은 매상은 연습실을 방치했을 때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홍 커플은 연습실을 방치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분홍이 연습실 장사를 하는 건 처음이지만, 자신이 이러든 저러든 잘 해낼 것이라고 믿고 있긴 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방을 무료로 쓰고 있어서 그런지 분홍은 주눅이 들었다.
“이번달 매상이 백만원이 안 돼.”
황은 같은 말을 반복하였다.
분홍은 고시원에 들어온지 열흘도 채 안 된 상태였다. 그런데 한달 매상을 두고 자신을 채근하는 황에 대해서 기분 나쁜 마음이 다시한번 들었다. 송이 한 마디 거들어줄까 싶어 쳐다보았으나 그날따라 송은 노트북 모니터만 바라볼뿐 과묵하기만 했다.
“분홍씨, 짐 다 옮겼어요?”
분홍은 입이 얼어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다. 짐은 다 옮겼다.
‘그걸 왜 묻지?’
짐은 다 옮겼으며 그 짐을 아직 다 풀지도 못했다. 처음엔 정성껏 싸다가 막판에는 에이 모르겠다, 하며 쑤셔넣은 작은 거울이며, 카메라며, 몇 가지 물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뿐인가? 작은 공간 넓게 쓰기의 달인이 쓴 ‘수납의 여왕’이라는 책은 아직 다 읽지도 못했고, 책에 나온 그대로 해보기 위해서 이미 정리했던 짐도 꺼내서 다시 넣고 하는 중이었다.
황윤희의 본심은 바로, 나.가.라.는 뜻이었다.
당황한 분홍은 최대한 그녀의 본심을 못 알아들은 척 하였다.
“네. 제가 더 빨리 고시원으로 들어오고 싶었는데, 그쪽 집 계약 기간이 있어가지고요, 들어온지 열흘정도밖에 안 됐어요. 짐 정리하는 것도 빨리 안 되네요.”
분홍이 들어온지 얼마 안 됐다고 하자, 이번에는 황윤희가 분홍의 말을 못 알아듣는 척을 하였다.
방을 공짜로 쓰는대신 캐시 뮤직 연습실의 장사를 하겠다고 했지, 열흘만에 손님을 몇 배로 늘여놓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일을 꾸민 사람은 분홍이 아니라 보라색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연이 엄마였다.
“제가 음악하는 사람이니까 친구들한테 입소문 내고, 밴드하는 친구들한테도 소문을 많이 내려고요. 연습실, 잘 될 거예요.”
“장사란 게,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지. 나도 알아. 근데, 들어가는 비용이 안 빠져. 이번 달 매상이 백만원도 안 돼.”
‘들어가는 비용? 나한테, 아니, 우리한테 십원도 준 적이 없으면서 무슨 비용이 들어간다는 거야? 설마 방 쓰는 거?’
분홍은 얼굴이 화끈거리더니 급기야 뒷목이 저려온다.
“사장님... 저 들어온지 열흘도 안 됐어요.”
“아니, 글쎄.”
‘아니 글쎄’는 네 글자로 이루어진 마법의 주문이다.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데, 말하는 사람의 힘을 한 순간에 확 빼놓는 강력한 힘을 가진 고수들의 언어이다.
그때 분홍이 연습실로 내려온 뒤로 한 마디도 않던 송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을 보니 프리젠테이션을 할 준비가 마쳐진 듯 보였다. 송의 프리젠테이션 실력을 잘 아는 분홍은 송이 선전해 주길 바라며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사장님, 분홍이한테 노래 배워보세요. 분홍이가 노래를 끝내주게 가르쳐요. 저도 옆에서 보면, 거의 음치였던 사람도 분홍이한테 배우면 반 가수가 다 되더라구요.”
송은 분홍을 하늘높이 띄웠다. 송은 종종 분홍을 위대한 보컬리스트나 훌륭한 보컬 선생님으로 치켜세운다. 분홍은 그런 송의 모습이 분홍을 발전시킨다고 생각하고 칭찬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왔다. 처음엔 그런 말을 믿지 못하고 자신이 여자친구니까 하는 형식적인 칭찬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자꾸 듣다보니 믿어졌고 그런 말을 믿는 것이 실제로 자신의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둘만 있을 때에나 하는 이야기였다.
‘프리젠테이션 실패야. 황윤희가 완전 황당해할 거야. 난 몰라...’
분홍이 그런 생각을 하며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아니, 내가 그렇잖아도 노래를 배워보려고 어떤 선생한테 갔었어.”
황윤희가 검은색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평소답지 않은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
분홍은 뒷걸음쳐서 프론트 데스크에 몸을 붙였다.
‘왜 나한테 다가오지?’
분홍은 자신이 몸을 피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바로 몸을 바로 세웠다. 송이 그러지 않는가, 분홍이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그래. 난 훌륭한 선생이야.’
분홍은 훌륭한 선생님답게 자세를 바로한다.
“근데, 내가 찾아간 선생이 글쎄, 나이가 많아서 안 가르쳐준대드라구. 뭐, 나도 이해하지. 원래 그쪽 분야가 가능성 있는 어린 애들을 키우지, 우리같은 아줌마는 안 가르치잖아. 그지?”
분홍은 자신의 기억 창고를 스캔하여 가장 나이가 많았던 학생을 떠올린다.
“제가 가르쳤던 레슨생 중에 사업하시다가 은퇴하신 아버님도 계셨어요. 그리고 주부님들도 배우고 계세요.”
분홍에게 현재 배우고 있는 레슨생들 가운데 ‘주부님’은 열정적인 미숙 씨 한 사람이다. 그러나 분홍은 주부님을 ‘주부님들’로, 단수에서 복수로 바꾼다.
흥분해서 앉지 못하던 황윤희는 갑자기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응. 나야. 여기 끝내주는 노래 선생님이 있어.”
분홍은 ‘끝내주는’ 노래 선생님이 되어 버리자, 또다시 깜짝놀라 프론트 데스크에 다시 몸을 기댄다.
“이 선생님은 나이고 뭐고 다 상관없이 학생들을 친절하게 가르치신대. 그럼! 노래도 엄청 잘 하시지!”
이 상황에 확실한 건 단 하나다. 황윤희는 분홍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저렇게 노래를 배우고 싶었나?’
분홍은 당황하여 머리를 쓸어내린다. 머리를 말리지 못하고 내려와서 손 끝에 물이 조금 묻어난다.
그날 밤 분홍에게 문자 메시지가 왔다.
[다음주 화요일. 저녁 7시. 밴드 5인]
자려고 누웠던 분홍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낯선 번호로부터 온 이 문자 메시지는 바로 황윤희에게서 온 문자이다. 황윤희는 분홍을 만날 일이 있을 때 절대로 시간을 사전에 묻지 않았다. 분홍의 연락처를 알고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또 황윤희를 통해서 들어오는 연습실 예약을 연이 엄마에게 전달하여 송이 연이 엄마로부터 예약 사항을 전달 받아 연습실 셋팅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엔 그녀가 분홍에게 ‘직통’한 것이다.
분홍은 사.장.님.에게 인정 받은 마음에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고 눈썹이 위로 몇 번 올라갔다. 마음이 푸근해졌다.
'그래. 이게 소통이지.'
이제 정말로 황윤희를 위해 캐시 뮤직의 광고를 열심히 하여 손님을 많이 유치할 마음이 진실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사장님이신가요?^^ 네. 예약 확인하였습니다]
그날 밤 황윤희는 더이상 문자를 하지 않았다.
-싱글벙글 고시원,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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