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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임의 글 공장입니다.

싱글벙글 고시원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드라마

완결

홍차임
작품등록일 :
2015.10.23 23:35
최근연재일 :
2016.04.02 21:40
연재수 :
3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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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113
추천수 :
969
글자수 :
181,952

작성
16.01.25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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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10화. 깊어진 계약.

DUMMY

든든하다.


이제 분홍은 검은색 건물에 가면 노래도 연습할 수 있고, 보컬 수업도 할 수 있고, 그리고 밥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2천원짜리 밥이 요즘 세상에 어디 있을까, 생각하면 이것은 신의 축복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단체 식사를 하는 조건이므로, 고시원 식당의 반찬이 다 떨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슬리퍼 아주머니는 식사 만드는 일 하나는 열심이었고, 반찬이 다 떨어진 날은 많지 않았다. 웬만한 식사는 6천원 이상인 시절에, 2천원만 내면 따듯한 밥과 국이라니, 혼자 사는 것에 인이 배긴 분홍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어떤 날은 두부 부침이 있는 날도 있었다. 부치면서 수분이 쪼옥 빠져나갔는지 두부가 유부처럼 즐겁게 씹혔다. 그 두부를 간장에 찍어먹을 수 있도록 노란색 테이블 위엔 간장통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 날은 횡재를 한 기분였다.


분홍이 어려서 먹던 시뻘건 소시지 부침이 있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분홍에게는 특유의 신념이 있었다. 끊임없이 노래 연습을 한다면 어느날은 세상이 자신을 알아줄 것이라는 신념.


한 시간씩 연습실 방을 빌려서 연습을 하는 것은 실력을 향상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일이든 준비하는 데 30분은 필요하다. 날이 추워지자 몸이 얼어 있는 날에는 어깨도 굳고 노래 소리가 잘 나지 않았다. 피아노 연습도 30분 정도는 해야 한다. 처음 노래를 할 때는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피아노 연습하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아 스스로 불만이었다. 노래는 30분, 피아노 연습은 두 시간, 그런 식이었다.


어려서 1, 2년 배웠던 피아노는 아예 못 치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노래를 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때도 있었다. 악보 그대로 치는 클래식 피아노 기법은 가요를 부르는 데는 별로 안 좋았다. 분홍이 아는 거라고는 바이엘, 체르니, 모짜르트 등이었다. 그나마도 집안 형편이 어려울 때는 피아노 학원에 두 달 다니다가 끊고, 다시 세 달 다니고 끊고, 그런 식이어서, 클래식 피아노마저도 체계가 잘 잡혀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노래를 하는 사람들은 반주가 필요한 것이지 연주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가요 반주 악보에 그려진 음표들 그대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은 분홍의 실력으로는 택도 없었다. 복잡한 악보는 그녀가 보았던 체르니나 부르크뮐러가 그린 악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그러니 한두 시간의 연습으로는 택도 없었다.


그런 상태로 반주를 시작하면 악보에 코를 박고 피아노를 치게 될뿐 노래는 뒷전이 되기 일쑤였다.


결국은 ‘코드’라는 것을 알아야했다.

G 코드, F 코드, A 마이나 코드.


학교 수업 시간 중에 코드를 배우는 시간이 있었지만, 증 3도, 단 4도, 하며 어려운 개념들은 그녀로서는 도대체 따라갈 수가 없었다. 외워야 할 코드들이 교수님 칠판을 가득 채우며 칠판 밖으로 넘칠 지경이었다. 재미를 잃고 말았다.


거기다 자만심도 있었다. 충분히는 아니었지만 클래식 피아노를 쳤던 분홍에게 악보대로 '순수하게' 치치 않고 코드로 ‘대충’ 치는 것은 청중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복잡한 심리 때문에 그녀는 한동안 노래하는 시간보다 피아노 연습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는 모순에 처해 있었다.


가수로 유명해지기는커녕 코러스와 주부교실 강사 등으로 연명하게 된 분홍은, 이제, 모든 자만심을 버려야만 했다. 이판사판, 사즉생의 각오가 되어야 했다.


'노래, 오직 노래 실력에만 집중하는 거야...'


적어도 하루에 네 시간정도는 매일 연습실을 써야 할 것 같았다. 더군다나 검은색 건물에서 식사를 할 수가 있게된 마당에, 하루종일 연습실에 있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두 끼 다 먹어도 고시원에서만 먹으면 4천원이면 다 되는 거잖아?'


결심해야 될 때가 되었다.


이곳 캐시 뮤직인지, 아니면 다른 연습실인지. 그리고 결정된 연습실에서 분홍은 노래와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하는 게 분명했다.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 노래를 시작할 때 꿈꿨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어 보였다.


보라색 슬리퍼 아주머니는 분홍을 볼 때마다 눈동자로 물어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거야?’ 라고.


그녀의 눈 질문은 다음의 뜻이다.


'그러니까 한 달치씩 끊을 거야? 어쩔꺼야?'


그걸 의식한 분홍은 꼭 먼저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 학생이 지금 별로 없어서... 가르칠 학생이 많아지면 그때 한 달씩 등록할게요.”


“아무렴. 그렇지, 그렇지. 학생들이 많아져야지. 천천히 결정해, 천천히.”


목소리에 다정함이 묻어있다. 슬리퍼 아주머니가 그렇게 이해와 공감이 어린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그녀가 무척이나 분홍의 입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반증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따듯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단 그녀의 고용주와 통화할 때를 제외하고는.


어쨌거나 분홍은 연습실 시설이나 연습실 운영 방식 때문에 다른 곳을 가고 싶다는 말은 아주머니에게 절대로 할 수가 없었다. 단, 학생이 별로 없어서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 말만큼은 슬리퍼 아주머니가 충분히 이해를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주머니에게 '수지'란 횡단보도의 빨간불과 파란불처럼 생명을 지켜주는 아주 분명한 기준이었다.


날씨가 추워지자 지하인 캐시 뮤직의 냉기도 함께 심해졌다. 에어컨을 켜야하는 계절에 캐시 뮤직에 처음 왔던 분홍은 이제 난로의 따듯함이 간절해졌다. 온풍기처럼 생긴 게 방에 있어 틀어보니 기계에 물만 차올랐다. 온풍기가 아니라 제습기였던 것이다.


요즘처럼 아주머니가 분홍의 입실을 간절해 할 때 난로좀 달라는 요구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 혹시 난로 있으세요?”


그 질문에 또다시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무튼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니 지하 연습실에는 난로가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누가 가져갔는지 없어졌더라는 얘기다. 아주머니 머릿속에서 유력한 용의자는 뽀글머리 할머니였다.


분홍은 캐시뮤직에 처음 답사를 왔던 날 피아노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버럭 화를 내던 뽀글머리 할머니를 잘 기억한다.


아주머니가 할머니를 의심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검은색 건물의 주인은 늘 그 이름이 ‘사모님’인데, 사모님의 어머니인 뽀글머리 할머니는 부자와 결혼하여 부자가 된 딸, ‘사모님’의 덕을 그런 식으로 본다는 것이다.


고시원생 식사를 위한 쌀도 두 포대를 들이면 그중 한 포대는 할머니가 가져간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딸인 ‘사모님’에게는 절대로 비밀이며, 그 비밀을 지키는 비밀 요원 역할을 슬리퍼 아주머니가 해야 한단다. 그뿐이 아니며, 할머니의 길고 긴 하소연을 들어주는 임무 수행을 자신이 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중요한 역할이 무엇인지 밝히는 사람의 자부심이 그녀의 호흡에서 묻어났다.


쌀과 휴지는 그렇게 비밀 요원과의 협조 하에 가져가지만 난로는 고하지 않고 가져간 모양이었다. (할머니가 가져간 게 맞다면.)


거기서 아주머니의 자존심에 약간의 스크래치가 났다. 아주머니는 뽀글머리 할머니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그것이 그녀가 이 검은색 건물에 꼭 있어야 할 이유 중 하나이지만, 그렇다고 할머니가 그녀의 고용주인 ‘사모님’의 물품을 충직한 종업원인 자신의 허락 없이 가져가는 것까지는 오케이 할 수만은 없다는 투였다.


분홍은 그 모든 이야기를 들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었다.


바로 둥그런 머리를 가진 전기 난로!


아주머니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자면, 이 난로도 어느날 없어질 수 있다. 그리고 누가 가져갔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밥이 갖춰졌다.

겨울에 쓸 난로도 확보했다.

노래에 대한 절박함이 있다.

보컬 레슨도 해야한다.


이제 분홍은 이 연습실과, 그 아주머니와, 좀더 깊이 있는 계약을 하기로 결심했다.


삼십만원의 현금을 찾아다가 슬리퍼 아주머니에게 주었다. 슬리퍼 아주머니가 현금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신성함과 즐거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돈에 관심 없는척 외면하는 느낌도 준다. 그러다 또 은밀한 환희가 얼굴에 비친다.


“현금 영수증 해줄까?”


분홍은 강사다. 세상은 그녀로부터 세금을 받아가는 명목으로 그녀를 ‘개인 사업자’라고 불러준다. 하지만 개인 사업자인 분홍은 ‘사업’을 하지 않는다. 현금 영수증도 필요 없다.


"아니요. 괜찮아요."


삼십만원을 들고 경쾌하게 뛰어올라가는 슬리퍼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니, 분홍은 이 조금더 깊숙한 계약이 잘 하는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한다.


그리고는 맘을 다잡는다.

'모든 것을 다 만족하는 곳은 세상에 없어.'


- 리얼리즘 코미디 <싱글벙글 고시원>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

분홍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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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36화. 허풍의 재발견. 16.03.18 850 11 11쪽
35 35화. 송의 프리젠테이션. +2 16.03.13 1,069 12 20쪽
34 34화. 프랑스 사람들처럼. 16.03.11 776 15 11쪽
33 33화. 분홍이 같은 애는 없어. +2 16.03.08 985 14 8쪽
32 32화. 플라자 고시텔. 16.03.02 1,124 15 10쪽
31 31화. 성냥갑 같은. 16.02.29 969 15 9쪽
30 30화. 추억이라는 놈. 16.02.24 878 16 13쪽
29 29화. 고시원 첫날밤 잘 보내. 16.02.23 1,100 20 6쪽
28 28화. 그녀의 대답은 노. 16.02.22 844 17 10쪽
27 27화. 선생님은 능력자 16.02.21 988 17 7쪽
26 26화. 방 두 개. +2 16.02.21 862 19 9쪽
25 25화. 떨리고 두근거려. +2 16.02.19 1,053 17 16쪽
24 24화. 해볼게요. 16.02.18 738 16 7쪽
23 23화. 송, 진심이야? 16.02.16 773 18 11쪽
22 22화. 두번째 유혹. +2 16.02.15 992 16 12쪽
21 21화. 강남 남자. 16.02.14 894 18 13쪽
20 20화. 누런 개, 연이. 16.02.13 788 17 12쪽
19 19화. 사모님 예쁘죠? 16.02.12 921 19 13쪽
18 18화. 번-아웃. 16.02.10 775 21 10쪽
17 17화. 나에게도 남편이 있다. 16.02.09 800 22 11쪽
16 16화. 나는 당신 편이예요. +2 16.02.08 809 19 10쪽
15 15화. 두 지배자의 갈등. 16.02.07 840 19 9쪽
14 14화. 꽁지머리 남자와의 화해. 16.02.07 896 19 11쪽
13 13화. 새로운 지배자. 16.02.05 787 19 12쪽
12 12화. 초록색 교복. 16.02.05 848 20 11쪽
11 11화. 컵밥과 조각케익. 16.02.05 1,027 21 9쪽
» 10화. 깊어진 계약. 16.01.25 1,052 2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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