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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임의 글 공장입니다.

싱글벙글 고시원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드라마

완결

홍차임
작품등록일 :
2015.10.23 23:35
최근연재일 :
2016.04.02 21:40
연재수 :
3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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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8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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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1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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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35화. 송의 프리젠테이션.

DUMMY

분홍 커플은 캐시 뮤직에서 장사를 하였고 거기서 나오는 매상은 모두 황윤희 사장에게 올려야 했다. 그리고 주말에도 장사를 해야했다. 그 대신 고시원 방을 제공 받는 것이니까.


두 사람 방값을 합치면 백만원이 좀 넘지만 일하는 사람이 제공받는 숙식은 방의 판매가 기준으로 계산할 수 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 때면 분홍은 가슴이 조이는 듯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아직은 쌀쌀한 2월, 온수를 쓰면서 샤워를 할 때면 그 생각이 달라졌다. 고시원에 들어왔으므로 이제껏 그녀 뒤를 졸졸졸 쫓아다니던 가스요금 고지서와 전기요금 고지서와는 빠이빠이다. 다른 세입자들과 함께 N분의 1로 산정된 수도요금 고지도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노동력과 숙식제공의 교환이라는 이 거래가 상당히 괜찮다는 생각이드는 것이다. 온수를 쓸 때면 특히 황윤희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으며 그 따듯한 물이 ‘황윤희의 온기’인듯한 느낌마저 받았다.


하지만 ‘계약서 없는 계약’은 무엇인지 모르게 분홍에게 시종 불안한 기분을 주었다.


송은 캐시 뮤직 프론트에 앉아서 장사를 하고 틈틈이 회사 일을 했다. 연이 엄마는 기쁜 얼굴로 지하로 내려와 검은색 소파에 앉았고 일을 하는 송에게 이야기 한 마당을 펼치곤 했다. 송과 마주보는 위치의 소파도 아닌데 말이다. 송은 연이 엄마의 왼쪽 얼굴을 보는 방향, 서로가 길쭉한 기역자를 만드는 위치에 앉아 있었다. 송의 얼굴은 자신의 노트북 화면에 향해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송의 반응이 없어 심심하다 싶으면 송쪽으로 허리를 틀고 소파 팔걸이에 두 손을 걸어 송을 쳐다보며 또 이야기를 이어갔다. 송은 남자라서 그런지 분홍처럼 인내심 있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는 못했다.


“네, 네. 그렇죠... 아이구...”라고 그녀의 말에 응수를 해주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횟수가 줄었다. 놀랍게도 연이 엄마는 송의 그런 반응에도 삼십분 이상씩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송, 연이 엄마 이야기 듣는 거 안 힘들어? 난 듣느라고 매일 머리가 아팠는데.”


플라자 고시텔에 이사 들어오던 날 연이 엄마의 ‘네 냉장고 고물 발언’에 상처를 받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분홍은 연이 엄마에 대해서 말할 때 은근히 말이 비꼬아져서 나왔다.


“아이구, 그게 뭐 힘들어? 그냥 듣기만 하는 건데. 나는 그런 거 잘 해. 어른 상대하는 게 내 특기라니깐~!"


사실 송이 그녀의 말을 듣는 태도는 잘 들어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매우 형식적인 응수일뿐, 귀담아듣지 않아 내용도 잘 기억하지 못하곤 했다.


“연이 엄마가 무슨 얘기 했어?”라고 나중에 분홍이 물으면 “뭐, 그냥 같은 얘기지. 고시원 얘기.”라고 했고 자세한 내용은 없었다. 그러나 송은 자신이 어른 상대하는 데 있어서 베테랑이라는 데에 늘 자신있어 했다. 송이 어른인 연이 엄마를 대접하는 방식이었다.


캐시 뮤직을 셀프로 이용하던 손님들은 프론트에 앉아 있는 송에게 적응을 해야했다. 오래 이용한 손님은 여기 캐시 뮤직에 사람이 있을 리가 있냐는 식으로 이런 변화에 무관심하게 셀프의 몸짓을 이어갔다.


기타를 맨 남자 손님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한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 라고 말했다. 짧은 머리에 안경을 쓰고, 청바지에 골덴자켓을 입은 남자. 양복차림은 아닌데도 어딘지 회사원 느낌이 나는 손님인데 분홍이 낮에 혼자 연습할 때 종종 본 사람이다.


분홍 커플의 어서오세요,라는 인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짓과 동선은 이미 여러 차례 리허설이 되어 있었기에 입퇴실 시간 기록표에 가서 우아하게 고개를 들어 캐시 뮤직의 벽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한 뒤 도착한 시간을 말끔하게 적었다. 송과 분홍도 그를 조용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손님은 모짜르트 방에 쏙 들어간다.


늘 혼자 듣던 다른 손님들의 연주 소리를 송과 함께 듣게 되자 분홍은 할 말이 많아졌다.


"저 아저씨는 꼭 저 곡부터 치셔."

“와. 기타 되게 잘 친다.”


송이 감탄한다.


“자주 오던 분이거든. 몇 번 봤어. 근데 회사원인 거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낮 시간에 오는지 볼 때마다 신기했어.”

“아, 그랬구나.”


송은 자신이 평소에 듣던 음악의 기타 솜씨들에는 못 미쳐도 실제로 한 공간에서 들려오는 연주 소리에 감동을 받는다.


“나도 여기 장사만 좀 자리 잡히면 기타부터 연습할 꺼야.”


혼자 연습하는 사람의 음악소리를 귀기울여 듣는 것은 보통 오분에서 십분이다. 잘 안 되는 부분을 다시 치고 다시 치고 하면 밖에서 엿듣는 일의 흥미도 한 순간 달아나버린다.


“요금, 이쪽에서 계산해 주세요.”라고 송이 말해도 청바지의 남자손님의 셀프 움직임은 깨어지지 않았다. 검은색 서랍 맨 윗칸에 돈을 넣으려고 했고 “손님, 요금 저한테 주시면 됩니다-”라는 송의 다정한 하이톤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마법이 풀린 듯 했다.


“아, 예? 예. 아. 이렇게 드리면 되나요?”


최근에 처음 와서 한두 번만 이용했던 새로 온 손님들은 이 연습실이 셀프라더니 여기 주인이 생겼느냐면서 신기해했다. 그리고 송에게 친근하게 대했다.


분홍이 처음에 캐시 뮤직에 와서 관리자인 연이 엄마한테 친근하게 다가갔듯이.


캐시 뮤직을 방치하거나 다소 복잡한 방식으로 운영하여 안 그래도 없는 손님을 더 파격적으로 줄여놓고 떠나간 꽁지머리 남자의 영향으로 연습실은 조용한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분홍은 ‘내가 여기서 월급 받는 것도 아닌데...’라며 매상이 적은 것에 대해서 그다지 애닳아하지 않았다.


계단을 타고 내려온 연이 엄마는 하늘색 스프링 공책을 분홍에게 건넸다.


“......?”

“여기다 매상을 적어.”

“...... 고맙습니다.”


공책 같은 건 장사하는 데 필요없다고 말하면 연이 엄마가 무안해 할까봐 분홍은 공책을 받아들었다. 또 연이 엄마에게는 부적과도 같이 소중한 게 ‘펜으로 매상 딱딱 적을 수 있는 자신의 위대한 능력’이기에 공책을 주는 그녀의 성의가 가볍지 않다고도 해석했다.


“손님이란 게 빨리 느는 게 아니야. 내가 신발 장사를 해봐서 빠삭하다구. 사모님한테 두 달정도는 열심히 해야 손님이 들 꺼라고, 시간을 좀 달라고 하지 그랬어?”


연이 엄마는 ‘시간을 달라’는 표현을 썼다. 분홍은 아무런 수당 없이 방만 하나 쓰라던 사모님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연이 엄마의 그런 말이 의미 있게 들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신에게 부당하다고 생각되었다.


‘내가 뭘 받은 게 있다고 사모님한테 시간을 달라고 애원을 해야 한단 거지?’ 라며 냉소적인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송은 달랐다. 송은 어떻게 하면 장사가 잘 될지를 컨설팅 회사 직원답게 컨설팅하기 시작했다. 송은 근처의 연습실을 염탐하고 다녔다. 쫓아나가고 싶어도 가게도 지켜야 되고 또 다른 가게에 염탐하러 갔다가 염탐 중인 걸 들키면 어쩌나 싶어 분홍은 그럴 때마다 송이 빨리 염탐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미어캣처럼 기다렸다. 송은 또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찾아들어가 각 연습실의 이용료 가격 조사를 하였다. 그러면서 ‘캐시 뮤직에 손님이 적은 이유는 가격 경쟁력’이라고 땅땅땅 결론을 내렸다.


송은 검은색 소파에 분홍과 연이 엄마를 앉혀놓고 프리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연습실에서 파워포인트를 쏠 수 있는 조건이 안 되는 게 안타까웠다. 송의 이야기가 길어지자 연이 엄마는 하품을 시작했다.


“아아아하음... 그러니까 값을 내려야 된다는 거네.”


연이 엄마가 송의 의견을 반대하는 것도 아닌데 송은 연이 엄마의 그 한 마디에 다시 장황한 프리젠테이션을 시작했다.


분홍은 여기서 버는 돈이 자기의 돈도 아닌데 송이 뭐하러 저렇게까지 열심인가 싶으면서도, 송의 새로운 방법이 진짜 매상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따져 보았다.


이제까지는 시간당 9천원이던 캐시 뮤직의 요금을 6천원으로 하겠다고 송은 선언했다. 삼국대 인근 연습실들의 가격을 조사해본 바 캐시 뮤직의 가격 경쟁력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2시간에 만원,에 장사를 하는 연습실이 있다는 걸 알게된 송은 경각심을 느끼는듯했다. 송의 발표를 멍하게 듣거나 매상 올리는 일에 다소 무관심한 두 여성의 승인을 얻어 송은 새 가격표를 만들었고 바로 출력하여 벽에다 붙였다.


“송, 이렇게 하는 게 오히려 손해 아닐까?”


연이 엄마가 가고나서 둘만 남자 분홍은 물었다.


“아니야. 이리와서 봐봐, 분홍.”


송은 프리젠테이션에 활용할 수 없어 아쉬웠던 엑셀 파일들을 하나씩 열어 분홍에게 시연했다. 파일에는 여섯 개의 방이 꽉 찰 경우 얼마까지 벌 수 있는지 작성되어 있었다. 한 시간에 6천원을 하자더니, 엑셀 파일에는 한 시간에 2천원도 눈에 띄었다.


“송, 이렇게 싸게 한다고? 한 시간에 2천원?”

“응. 이게 정기적으로 사용하는 손님들한테만 이렇게 해주는 거야. 할인 혜택인 거지.”


분홍도 연습실을 다니다보면 매일 쓰는 사람들에겐 저런 혜택이 있긴 있었다.


송의 열렬한 팬이 된 연이 엄마는 송이 요금을 올리든 낮추든 싱글벙글이었다. 분홍은 여전히 갸우뚱이었다. 그러나 결론은 같았다. 너무 신경쓰지 말자, 였다. 또, 분홍보다 먼저 검은색 건물에 들어와살면서 장사를 전담하고 있는 이는 자신이 아니라 송이었으므로 그의 의견을 웬만하면 다 따르기로 했다.


“사모가 와가지고 걱정을 하대. 가격이 너무 낮은 거 아니냐고.”


며칠 후 연이 엄마가 평소보다 조금 느린 속도로 계단을 타고 내려와 말했다.


“......”


어떤 상황에서도 순발력 있게 말을 잘 하곤 하는 송은 이번에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 이게 다 송 사장이 장사 잘 되게 하려는 거야. 절대 싼게 아니라구 그랬지. 가격표를 한 장 쥐어보냈어, 내가. 집에 가서 헨리랑 한번 계산해봐, 이랬지 내가. 그랬더니 씨익 웃어. 그냥반은 내가 하는 말이면 다 믿는다니깐. 헤헤헤.”


날씬한 몸매에 돈이 많은 사모님. 그녀는 송의 프리젠테이션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에 이번 할인 결정이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삿날 짐을 나르던 분홍의 가슴에 스크래치를 내고나서 억화심정이라도 있는지 방까지 쫓아들어와 두 번째 스크래치까지 낸 연이 엄마였다. 반면 송의 행동에는 뭐든 적극 찬성이었다. 그리고 송에게 하나씩 꼭 고시원 일을 시켰다. 깍두기용 무단 나르기, 쌀포대 6층으로 올리기, 침대 매트리스 나르기와 같이 주로 물품을 나르는 일이었다.


“내가 아무래도 딸네를 가봐야 될 것 같은데, 일이 너무 많어. 어흐!”

“다녀오세요. 제가 방 보러 오는 사람 있으면 보여드릴 테니까.”


연이 엄마는 송의 말에 얼굴이 밝아지더니 신이 나서 험담을 시작한다.


“야채 가게를 바꿔야 돼! 사모님은 왜 거기 야채가 하나뚜 안 좋은데 왜 계속 거기서 사라고 하시는지 모르겠어. 고것들이 오이를 아랫따가는 썩은 걸 노코 위에만 싸악 안 썩은걸 올려놔. 내가 이렇게 야채 줄꺼면 다시는 안 산다고 오늘 단단히 말을 했지. 사모님한테 진즉 야채 가게 바꾸자고 해도 바꾸질 않어!”


그리고는 신나서 올라간다.


“분홍, 나 집에 한번 내려가야 될 것 같은데, 괜찮겠어?”


송은 검은색 소파에 앉아 있는 분홍에게 말을 건넨다.


“...... 어, 언제? 왜? 나 아직 혼자 장사 못하는데...”

“그래서 나도 안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병원에 가셔야 된대. 내가 태워다 드려야 될 것 같아.”


분홍은 왜 동네 병원 가는데 서울에서 승용차가 내려가야 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한 달에 몇 번씩 시골 집에 내려가던 송이 분홍을 만난 뒤로 집에 내려가는 횟수를 조금씩 줄이고 있는 데다가 캐시 뮤직 장사를 시작한 이후로는 연습실에 묶여서 옴짝달싹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은 운전을 하면서 길이 막히거나 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하면서 또 씽씽 달릴 때는 운전으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한다는 걸 분홍은 알고 있다.


“그럼, 나한테 장사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고 가.”

“하하. 알았어. 별거 없어. 의외로 간단해.”


그녀가 캐시뮤직을 이용한 지는 반년 가량 되었지만, 신용카드로 요금을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손님들 가운데는 신용카드 결제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너 없을 때는 현금만 받는다고 벽에다 붙여 놓을까?"

"에이. 그럼 안 되지. 자 나랑 한 번 해보자."


분홍이 상상하는 가장 두려운 것은 숫자 0(영)을 찍을 때 하나 더 눌러서 1만2천원이 12만원이 되거나, 매매 취소를 해야 하는데 기계를 못 다뤄서 손님 앞에서 쩔쩔매는 상황였다. 송과 분홍은 나란히 프론트 앞에 서서 송의 신용카드로 1원을 결제했다가 취소해 보고, 20원을 결제했다고 다시 취소하면서 장사에 관한 수업을 했다. 신용카드 결제기에서 영수증이 뽑아져 나올 때 나는 찌기리기릭 찌기리기릭 하는 소리를 듣는 게 분홍은 즐거웠다.


“나 한 번 더해 볼래.”

“그래, 그래.”


분홍은 이번에는 쪼금더 금액을 올려 백원을 결제해서 찌기리기릭 하는 소리를 듣고 백원을 다시 취소하면서 소리를 즐긴다.


“만약에 지난 번 밴드 손님처럼 앰프를 더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 나 일렉 앰프랑 베이스 엠프랑 구별 잘 못하는데...”

“음... 어차피 손님이 많지 않아서 밴드 손님이 아예 없을 확률이 많아.”

“그래도 오면?”

“회사 이름으로 구별해줄까?”

“아니!”

“하하하. 알았어. 내가 청테이프를 살짝 붙여놓을게. 베이스 앰프에만. 베이스가 더 적으니까.”

“그래그래!”


그런 일은 모두 송이 담당하고 있는 일이었다. 분홍은 송이 알려주는 내용을 까먹을까봐 노란색 수첩에 꼼꼼이 받아적는다.


송은 혼자 장사를 하게 된 분홍이 못내 걱정되어서 그녀의 곁을 맴맴 돌다가 “웬만하면 당일로 다녀오구 정 안 되면 하루 자고 내일 일찍 올게.”라고 말하며 시골로 떠났다. 출발하는 송의 승용차에 대고 손을 흔드는 분홍은 이 검은색 건물에 홀로 남겨지는 것 같아서 웬지 슬픔이 느껴졌다.


'이제부터 정말 이 검은색 건물이 내가 있어야 하는 곳이구나. 최소한 우리 두 사람 중 하나는 반드시 여길 지켜야 하는구나...'


자신이 한 결정이 무엇인지 실감이 팍 났다.


송이 없는 상태에서 분홍이 하는 첫 연습실 장사였다. 손님일 때도 연습실 도우미를 자처하면서 분홍이 해오던 일들이 있었지만 전적인 책임을 져야 된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됐다. 주말인데도 다행히 손님이 많지는 않았다. 첫 손님으로 기타 합주 손님들이 도착했다. 세 사람인데 셋다 기타를 매고 입장했다.


‘헉. 앰프. 앰프를 더 달라고 할지도 몰라.’


긴장이 시작되었다. 분홍은 최선을 다한 스탠바이 자세로 모르는 건 물어보지 말고 앰프를 더 달라고 하지 말길, 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대기했다. 그러나 방 안에서는 몇 번 웃음소리가 터지더니 즐겁고 경쾌한 기타들만의 합주가 시작되었다. 방 안의 웃음소리를 끌고나온 체크무늬 남방의 손님이 다가왔다.


“기타 피크좀 하나 쓸 수 있을까요?”

분홍은 서랍을 열어 마구 뒤진다.


‘송이 어디 있다고 했는데......’


고작 기타피크에 노란 수첩의 필기를 펼쳐 보는 게 부끄러워 분홍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뒤진다. 분홍이 계속 뒤지고 있자 “아, 없으시면 안 주셔도 돼요...”라고 남자는 말한다. 그때 다른 학용품 밑에서 얼룩덜룩한 표범 무늬의 피크가 나온다.


남자는 한참이나 기다렸음에도 “감사합니다. 쓰고 돌려드릴게요.” 라고 말한다. 분홍은 씨익 웃으며 “아니예요, 가지셔도 돼요.” 라고 말한다. 분홍은 흐뭇해진다. 분홍이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는 보컬에 대한 로망으로 잠시 기타를 배웠던 적이 있다. 그때 분홍은 한 번도 피크를 돈 주고 산 적이 없다. 동기들 중에 노래 실력보다 기타 실력이 더 좋았던 재환이가 “오, 분홍이도 이제 기타 치게?”하면서 하얀색 피크를 줬다. 시작이 그래서인지, 아니면 피크는 담배를 서로 권하듯 그냥 돌고 도는 것인지 그 뒤로도 하나씩 사람들이 주었다. 그래서 분홍은 피크를 한번도 돈을 주고 사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손님에게도 피크를 그냥 주고 싶었다. 역시 작은 피크 하나에도 손님은 기뻐하고 분홍은 흡족했다.


연주의 즐거움에 취한 손님 한 명이 피크를 받아간 일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오늘따라 기타 합주 손님들은 화장실이 어딘지도 묻지 않고 알아서 찾아갔다. 입구를 쳐다보며 프론트에 말 상대도 없이 앉아 있자니 칸막이 독서실에 홀로 앉아 공부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분홍은 자신이 살던 원룸 앞에서 장사를 하던 구멍가게 마트 부부가 온종일 티비를 보는 것을 볼 때마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하루종일 한 자리에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지루할 텐데 저렇게 티비 보는 게 유익할까? 그것도 눈을 떼지 않고 계속. 나라면 책을 읽겠어! 그게 아니라면 눈을 감고 쉬거나.’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장사는 기다림의 시간이 많다. 티비는 바보상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기다림과 바보 상자로 점철된 하루란 너무 가혹해!’


분홍은 바보 상자를 켜지 않았고 대신 인터넷을 검색하여 성공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읽었다. 유명 발레리나의 인터뷰가 관심을 끌었다. 발레의 본고장 러시아에서 유학하던 시절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장학금을 못 받았던 일 등 이방인이라서 서러웠던 일을 언급하고 있었다. 차별 속에서도 그녀는 발레, 발레, 발레만 하였다고 한다.


‘그래 나도 노래, 노래, 노래만 하면 되는 거야.’


발레리나 끼리의 서열을 나타내주는 지표가 수업시간 중 연습실 어느 줄에서 배우느냐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결국 승리하여 맨 앞줄에 서서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나도 맨 앞에서 내 노래를 부르는 거지. 코러스에서 가수로!’


분홍의 마음도 발레리나와 같이 성공한 듯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발레를 하면서 엉망이 된 그녀의 목뼈와 척추 이야기도 인내가 빚은 찬란한 열매, 좋아 보였다.


‘나도 노래 연습하고 싶다.’


분홍은 발레리나의 인터뷰를 읽고난 뒤 열정에 전염되어 노래가 몹시 하고싶어졌다. 하지만 손님이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 방에 들어가서 노래를 하고 싶다. 몇 번을 마음이 갈팡질팡한다. 그녀는 바닥에 조금 모아져있는 이면지 한 장을 집어들어 [잠깐 자리 비웁니다] 라고 매직펜으로 적는다. 프론트에 유리 테이프로 붙이고 방안으로 들어간다.


노래를 하는데 신경은 온통 프론트에 가 있다.


‘지금 저 방에 있는 사람들 계산 안 하고 도망가버리면 어쩌지? 아니야, 인상이 좋던데...’

‘연이 엄마가 주말에 아무도 장사 안 한다고 송과 나의 험담을 하면 어쩌지?’


걱정만 쌓여간다.


분홍은 버티고 버텨 한 곡을 끝마친다. 마이크와 앰프, 그리고 키보드 전원을 끄고 프론트 데스크로 다시 나와 앉는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손님은 한 팀밖에 없는데, 내 노래 연습은 못하고. 아, 배고파. 손님들이 나오면 밥먹으러 올라가야겠지? 밥 먹으러 갔을 때 하필 손님이 오면 어떡하지?’


인터넷 검색도 더이상 하고 싶지 않다. 멍하니 앉아있길 30분, 그녀는 ‘바보 상자’를 켠다. 버럭개그로 유명한 개그맨 이정수가 콧물 흘리는 분장을 하고 바보처럼 논두렁을 걷는다. 화면에서는 억지로 넣은 가짜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싱글벙글 고시원,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분홍이_창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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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36화. 허풍의 재발견. 16.03.18 852 11 11쪽
» 35화. 송의 프리젠테이션. +2 16.03.13 1,071 12 20쪽
34 34화. 프랑스 사람들처럼. 16.03.11 777 15 11쪽
33 33화. 분홍이 같은 애는 없어. +2 16.03.08 986 14 8쪽
32 32화. 플라자 고시텔. 16.03.02 1,125 15 10쪽
31 31화. 성냥갑 같은. 16.02.29 971 15 9쪽
30 30화. 추억이라는 놈. 16.02.24 880 16 13쪽
29 29화. 고시원 첫날밤 잘 보내. 16.02.23 1,102 20 6쪽
28 28화. 그녀의 대답은 노. 16.02.22 846 17 10쪽
27 27화. 선생님은 능력자 16.02.21 990 17 7쪽
26 26화. 방 두 개. +2 16.02.21 865 19 9쪽
25 25화. 떨리고 두근거려. +2 16.02.19 1,056 17 16쪽
24 24화. 해볼게요. 16.02.18 740 16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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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2화. 두번째 유혹. +2 16.02.15 995 16 12쪽
21 21화. 강남 남자. 16.02.14 896 18 13쪽
20 20화. 누런 개, 연이. 16.02.13 791 1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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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6화. 나는 당신 편이예요. +2 16.02.08 813 19 10쪽
15 15화. 두 지배자의 갈등. 16.02.07 842 19 9쪽
14 14화. 꽁지머리 남자와의 화해. 16.02.07 897 19 11쪽
13 13화. 새로운 지배자. 16.02.05 790 19 12쪽
12 12화. 초록색 교복. 16.02.05 851 20 11쪽
11 11화. 컵밥과 조각케익. 16.02.05 1,029 21 9쪽
10 10화. 깊어진 계약. 16.01.25 1,057 2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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