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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임의 글 공장입니다.

싱글벙글 고시원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드라마

완결

홍차임
작품등록일 :
2015.10.23 23:35
최근연재일 :
2016.04.02 21:40
연재수 :
38 회
조회수 :
69,216
추천수 :
969
글자수 :
181,952

작성
16.02.05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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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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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13화. 새로운 지배자.

DUMMY

분홍은 아버지가 입원해 계신 병원에 들러서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에겐 예전처럼 간병인이 있다. 이제는 예전과 달라져서 그 간병인이 아버지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여섯 명의 환자들을 돌본다. 대체로 남자 노인 환자들이고 아버지는 그 중 한 명이 되었다. 아버지는 급격히 약해졌다. 가족이 올 때마다, 그것도 병실에 들어오자마자부터 언제 갈 거냐,를 묻는다.


분홍은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에게서 질문을 받고는 “삼십분 있다가 갈게요.” 라고 말한다. 원래는 두 시간정도 머무르지만, 그렇게 말을 해놔야 아버지가 분홍이 갈 때 덜 서운해할 것 같아서이다. 그리고 갈 때가 돼서 아버지가 물으시면 그때도 “삼십분만 있다가 가야 돼요.” 라고 답한다.


아버지와의 30분 간의 면회, 실제로는 두 시간의 면회를 마친 분홍은 노래를 하기 위해 연습실로 향한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캐시 뮤직에 도착한다.


입구 소파에 앉아 있는 슬리퍼 아주머니의 얼굴 표정이 오늘따라 묘하다.


“언니.”

“어? 어... 왔구나... 지비구나.”


앞을 멍하게 쳐다보며 어안이 벙벙한 얼굴인데, 밝은 것 같기도 하고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하다. 분홍은 조심스럽게 아주머니 옆에 앉는다. 슬리퍼 아주머니는 갑자기 원래 정신으로 돌아온듯, 그러나 긴급 비밀이 있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춘다.


“이제 저 남자가 음악실을 맡을 거야.”


아주머니는 종종 이 연습실을 '음악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저 남자'라고 하는데, 방 안에서 덜컹덜컹 짐을 나르는 것 같은 소리가 날뿐, 누가 눈에 보이는 건 아니다. 아주머니는 종종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분홍이 모르는 것을 분홍이 아는 것처럼 분홍에게 말을 하곤 한다.


“언니가 하시는 거 아니였어요?”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이었다. 이 세계의 지배자는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그녀 옆에 앉아 있는 보라색 슬리퍼 아주머니였다. 입구 미니 자판기에 동전을 넣어 마음대로 커피를 뽑아 마실 수 있는 사람도 그녀였다. 분홍은 그녀의 손님 험담과 남편에 대한 분노의 언사를 듣다가 가슴에 화상을 입는듯한 고통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분홍을 다른 손님보다 좋아하고, 또 분홍을 가까이 두려는 아주머니의 마음을 알기에, 그리고 다른 연습실들과 비교해 따져보아도 좋은 조건이라 생각했기에 캐시 뮤직에 머무르기로 했던 것이다.


언니가 여기 맡아 하는 거 아니었냐고? 맞다. 아주머니가 여기 책임자이다. 분홍은 이제껏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한 달 사용 요금도 아주머니한테 드리고 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분홍은 덜컥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장님, 사모님, 할머니, 그리고 코쟁이 사장님까지, 수많은 사장들이 슬리퍼 아주머니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이 6층짜리 검은색 건물, 그리고 그 지하에 일어나는 이 변동에 민감해졌다.


이용객인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를 무엇보다 알고 싶었지만, 분홍은 그보다 먼저 이 건물의 경영 구조부터 들어야했다. 그 중에도 방 안에서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저 남자’가 이 연습실을 운영한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400에 인센티브에 방 한 개’였다.


“사백만원이요?”

“응. 뭐... 사장님 있을 때는 장사가 그 만큼 되기도 했어. 그리고 1층에 방을 하나 쓴다네.”


낮 시간에는 텅텅 비기 일쑤인 이 캐시뮤직에서 정말 월 사백만원을 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분홍이 할 때쯤 처음 보는 남자가 상자에 물건을 한 가득 담아서 들고 나왔다. 무언가 내다버리는 모양이었다.


키가 아주 크고 머리를 뒤로 하나로 묶은, 소위 말하는 음악좀 하는 남자, 의 모습이었다. 키가 좀 작고 은색 야구모자를 쓴 남자도 뒤이어 따라나온다. 남자는 사십대쯤 되어 보이고 야구모자를 쓴 남자는 삼십대 초반정도로 키큰 남자보다는 젊어 보인다.


“여기가 연분홍 선생님이라고...”

“아, 네.”


아주머니가 분홍을 소개하자, 꽁지머리의 키가 큰 남자는 아, 네, 외에는 어떤 인사도 하지 않았다. 분홍은 동물적인 자기 보호 감각으로 고개를 끄덕하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제 겨우 분홍에게 찾아온 캐시 뮤직에서의 ‘안정’이었다. 그 안정이 혹시라도 날아가 버릴까봐 그녀는 새로운 지배자에게 기본의 예는 갖춘 것이다.


그러고보니 캐시 뮤직 내의 조명이 평소와는 뭔가 달랐다. 유심히 보니 천장 조명뿐 아니라 마치 술집처럼 벽을 타고 은은하게 퍼져나오는 붉은 조명이 비추고 있었다. 이곳의 새로운 지배자는 조력자를 데리고 나타나 새로운 조명을 켜고 쓸데 없는 물건들을 내다버리면서 자신의 새로운 영역을 접수하고 있었다.


꽁지머리 남자는 갑자기 음악을 크게 틀었다. 맞다, 캐시뮤직은 늘 고요했다. 손님이 와서 연습을 할 때 내는 악기 소리나 노래 소리 외에는 늘 고요했다. 큰 음악을 틀자, 호프집 같은 분위기가 최종 완성되었고, 분홍과 슬리퍼 아주머니는 호프집에서 자리조차 안내 받지 못하고 있는 물 흐리는 손님들이 되어 있었다.


분홍은 이 불편함을 어디에 대고 호소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근데, 언니. 언니는 저 아저씨 아세요?”

“알긴!”

“그럼, 어떻게......”

“할머니가 그러셔. 저 사람이 인자부터 여기 맡아서 헐꺼라구. 인제, 사백이 넘으면 그 돈은 자기가 갖는 거지. 그리고 여기 방 하나가 오십구 만원이니까. 근데 여기가 사백은 쉽진 않을걸...”


아주머니는 도무지 답이 안 나온다는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한다. 분홍은 ‘사모님’이라고 불리우는 이 건물 사장에게 화가 났다.


“언니가 그래도... 여기 건물 전체 책임자 아니세요?”


분홍이 알기에 슬리퍼 아주머니는 이곳의 '관리 책임자'이다. 그러나 그녀를 존대하는 의미로 '관리'라는 단어는 빼고 물었다.


“그러엄! 내가 다 책임자지."


내내 작던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비로소 커지기 시작한다.


"여기 밤에 잘 잠겼나, 내가 싹 보고, 한 층 한 층 다 돌아보고나서 그리고 정문을 내가 잠그잖어. 정문 관리를 한 하면 크은 일 나! 경찰이라고 뭔일 나면 책임져 줄 거 같어? 절대 책임 안 져! 여기 추울 때는 노숙자가 들어와서 자고 있기도 하더래니까는? 내가 그걸 보고 얼마나 놀랬는지 몰라. 여기가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이거 못해, 나니까 하지. 아주 내가... 아이고. 남편을 어디서 그지 같은 걸 만나가지고, 내가...”


분홍에겐 불편한 상대이기도 했지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끝나가는 지금, 수 개월 동안 이 곳의 책임자는 어찌되었건 보라색 슬리퍼 아주머니였다. 그런데 이곳의 ‘사모님’은 아주머니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여기를 관할하라고 다른 사람을 들여보냈고, 그 새 지배자는 지금 물건을 내다버리며 연습실을 접수하고 있었다.


그 사모님이라는 인물의 냉기가 분홍에게도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손님이 자신이 사용한 시간을 종이에 적고 요금은 검은색 서랍 맨 윗칸에 넣어놓고 가는 셀프 연습실 캐시 뮤직, 하지만 손님이 도착하면 즉시 보라색 슬리퍼 아주머니가 계단을 타고 빗자루 탄 마녀처럼 나타나는 셀프가 아닌 셀프 연습실, 캐시 뮤직.


돈을 넣는 검은색 서랍의 맨 아랫칸은 분홍의 자리였다.


“언니, 저, 혹시 제가 악보를 맨날 가지고 다니기가 힘들어서 그런데, 혹시... 제 물건좀 두고다닐 수 있을까요?”


어느 날 분홍은 용기를 내어 말했었다. 아주머니는 대답도 하기 전에 검은색 서랍 맨 아랫칸을 열어보였었다.


스피커에 연결하는 전선 케이블이 몇 가닥 들어있을뿐 거의 비어 있는 서랍이었다. 분홍은 기쁘게 그 서랍을 차지했다.


노래 악보며, 발성 이론 자료며, 이런저런 서류들이 늘 한 뭉치씩이나 되는 분홍을 위해 송은 어느날 20개 들이 파일을 두 다발 가져다 주었다. 파일이란 게 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늘 하나나 두 개씩만 사던 물건을 한꺼번에 가지게 된 분홍은 부자가 된듯 기분이 좋고 송에게 고마웠다. 하나는 집에서 쓰고 하나는 검은색 서랍장 맨 아랫칸, 자신의 당당한 자리에 넣어놓고 썼다. 피아노 교본, 악보들, 그리고 치약과 칫솔 위에 송이 준 파일이 늘 잘 놓여 있었다.


그 파일은 악보집 없이 다니는 학생들에겐 하나씩 선물로 나가기도 했다.


“악보는 꼭 파일에 넣어서 다녀. 악보 구하는 게 예전만큼 어렵진 않지만 레슨할 때 쓰던 악보는 다 네 재산이야.” 라고 분홍은 덧붙였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꽁지머리 남자에게 분홍은 인사를 꼬박꼬박하고 미소도 지어보였다. 하지만 남자는 인사하는 분홍에게 성의 없이 대꾸만 하는 정도였다. 오히려 그녀를 좀 경계하거나 멀리하는듯도 보였다.


며칠 후 분홍이 맨 아랫칸 서랍을 열어보니 송이 사준 파일 셋트의 껍질이 모두 찢어져 있었다. 파일 한 개는 표지가 구겨져 접혀 있었고 몇 개는 아예 없어졌다. 분홍은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모든 상황이 그려졌다. 꽁지머리 남자가 필요 없는 물건을 내다버릴 때 분홍의 물건도 버리려고 했다가 웬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다시 쳐박아 놓았을 것이다. 또는 원래부터 이 연습실에 굴러다니던 물건이려니, 하고 분홍의 파일을 몇 개 가져다 썼을 것이다.


‘이래서 동물들이 영역 싸움을 하는구나.’


분홍은 화난 고양이처럼 등의 털이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분홍은 가끔 연습실 종업원 노릇을 해야 했다. 손님들에게 마이크를 바꿔준다든가, 연결 잭을 찾아다 준다든가 했다. 휴지가 어딨냐고 물어보는 손님,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어보는 손님에게 응대했다. 그런 것이 귀찮았지만, 다른 손님들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좋은 점이 더 많았다. 주로 텅텅 비어있는 연습실이라 그날 기분에 따라 원하는 방을 골라가며 쓸 수 있고 (분홍도 다른 손님처럼 모짜르트 방을 가장 좋아했다) 슬리퍼 아주머니의 손님 험담 퍼레이드만 참으면 주어지는 몇 가지 혜택들도 있어서 지낼만 했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었다. 이제는 분홍의 물건은 패대기쳐지고 분홍의 자유는 점차 줄어들었다.


외부의 적이 내부를 결속시킨다는 말은 참말이었다.


아주머니를 은근히 피해다니던 분홍은 이제 아주머니를 먼저 찾아가기도 했다.


“언니, 개랑 놀아도 돼요?”

“그래.”


아주머니는 꽁지머리 남자가 나타나고 처음 며칠 동안은 아주 고요했다. 말수가 줄었고 놀란 토끼 눈으로 자신의 영토-법률적으로 말해 그녀의 소유는 아니겠지만-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누가 몰래 자기 말을 엿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늘 소리를 낮췄다.


“그 사람 방을 줬는데, 방에서 자지도 않어.”


꽁지머리 남자 말이다. 아주머니는 속삭이듯 말했다.


“저번에 자기 동생이라고 한 놈을 더 데리꾸와서 셋이 같이 밥을 먹고 갔어.”


속삭였다.


“아니, 연습실 구조를 왜 그렇게 바꾸지? 난 이해가 안 되네. 그렇게 하면 손님들이 싫어하는데.”


역시 속삭였다.


연습실 입구의 검은색 소파에 앉아있는 게 불편해진 분홍은 이제 노래하다 쉬고 싶으면 아주머니의 고시원방을 찾았다. 아주머니의 방문을 열면 분홍의 악보에 오줌을 쌌던 누런 개가 빈 방을 지키다가 분홍을 환영했다.


분홍은 아주머니, 그리고 개와 함께 셋이서, 때로는 개와 단둘이서 그 방에서 쉬곤 했다.


- 월세 서바이벌 로맨스 <싱글벙글 고시원>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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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37화. 고시원의 아침. 16.03.21 701 12 10쪽
36 36화. 허풍의 재발견. 16.03.18 852 11 11쪽
35 35화. 송의 프리젠테이션. +2 16.03.13 1,070 12 20쪽
34 34화. 프랑스 사람들처럼. 16.03.11 777 15 11쪽
33 33화. 분홍이 같은 애는 없어. +2 16.03.08 986 14 8쪽
32 32화. 플라자 고시텔. 16.03.02 1,125 15 10쪽
31 31화. 성냥갑 같은. 16.02.29 971 15 9쪽
30 30화. 추억이라는 놈. 16.02.24 880 16 13쪽
29 29화. 고시원 첫날밤 잘 보내. 16.02.23 1,102 20 6쪽
28 28화. 그녀의 대답은 노. 16.02.22 845 17 10쪽
27 27화. 선생님은 능력자 16.02.21 990 17 7쪽
26 26화. 방 두 개. +2 16.02.21 865 19 9쪽
25 25화. 떨리고 두근거려. +2 16.02.19 1,056 17 16쪽
24 24화. 해볼게요. 16.02.18 740 16 7쪽
23 23화. 송, 진심이야? 16.02.16 776 18 11쪽
22 22화. 두번째 유혹. +2 16.02.15 995 16 12쪽
21 21화. 강남 남자. 16.02.14 896 18 13쪽
20 20화. 누런 개, 연이. 16.02.13 791 17 12쪽
19 19화. 사모님 예쁘죠? 16.02.12 923 19 13쪽
18 18화. 번-아웃. 16.02.10 779 21 10쪽
17 17화. 나에게도 남편이 있다. 16.02.09 805 22 11쪽
16 16화. 나는 당신 편이예요. +2 16.02.08 813 19 10쪽
15 15화. 두 지배자의 갈등. 16.02.07 842 19 9쪽
14 14화. 꽁지머리 남자와의 화해. 16.02.07 897 19 11쪽
» 13화. 새로운 지배자. 16.02.05 790 19 12쪽
12 12화. 초록색 교복. 16.02.05 851 20 11쪽
11 11화. 컵밥과 조각케익. 16.02.05 1,029 21 9쪽
10 10화. 깊어진 계약. 16.01.25 1,057 2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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