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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홍기석입니다.

사희곡 (捨姬曲 : 버린 여인의 노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홍기석
작품등록일 :
2019.05.13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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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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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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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괄시는 해도 5

DUMMY

5


그렇다면 이런 식의 조사로는 쉬이 진실에 다가가기 어려울 터였다. 어떻게든 당시의 사고 기록을 손에 넣어도 그것이 고스란히 진실한 내용을 담고 있을까.


오랜만에 머릿속에서 열이 올랐다. 이토록 기가 막힌 정황들을 왜 이제야 알아챘을까. 절대 평범하지 않았던 학창 시절을 그대로 기억하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조각들이 비로소 하나씩 맞추어지고 있었다. 어째서 외조부는 매일 성장하는 손녀를 보고도 씁쓸했을까.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는 성과를 가져와도, 온통 우려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바로 이 순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위로 올라갈수록 알지 말아야 할 진실과도 가까워지니, 흔쾌히 기뻐할 수가 없었겠다.


‘네 엄마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


그래서 모친의 언급을 금했을 수도 있었다. 설령 어린 마음에 깊은 상처가 만들어져도, 괜한 의문으로 집안 전체가 위험한 편보다 훨씬 낫다는 판단이겠다.


실제로 그것은 유효하게 작용했다. 자신은 자연스럽게 부모의 생각을 지웠고, 또래가 하는 이야기에도 점점 무감각해졌다.


그저 어른들만 아는 속사정이겠거니, 특히 생부에 대해 모질게 말하는 태도를 볼수록 더욱 파헤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그 자식 때문이야.’


때때로 울적한 기분에 술까지 마신 날이면 외조부는 어김없이 그렇게 말했다. 때마다 부인이 서둘러 방으로 데려갔지만, 진즉에 들린 이야기가 머리에 계속 맴도는 현상은 어쩔 수 없었다.


부친은 무엇을 잘못했을까. 설마 부유하고 순진한 대학생을 속여서 이 존재가 세상에 나오게 만들었나. 상상만 해도 메스꺼웠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 집안에서 자신은 어떤 존재인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과 증오하는 이의 핏줄이 정확히 반반으로 섞인 결정체, 어쩌면 지금까지 그 진실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겠다.


어떤 사람이었을까. 뒤늦게 다시 생각하니 막막했다. 생사 여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집안뿐만 아니라 공권력에게 미움을 산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서서히 그 가닥이 잡히고 있었다.


콕 집어서 ‘공권력’을 의심하는 데는 근거가 여럿 있었다. 금전적으로 부족하지 않았던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 앞에서 계속 침묵한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설명이 가능한 요소는 오직 범인의 정체에 있었다.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 생부에게 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사건에 공권력이 개입했을지 몰랐다. 그래서 모두가 끝까지 함구했고 그 비밀이 용케 지금까지 유지된 듯 보였다.


시대적 상황만 따져도 이해되었다. 독재가 만연하던 시기가 아니었는가. 정부에 대해 조금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가던 시대였기에, 더더욱 몸을 사렸겠다.


제아무리 재벌이라도, 법과 원칙을 마음껏 바꾸는 이들 앞에서는 언제든 망으로 거를 수 있는 피라미에 불과했다.


그래서 임종 직전에 그토록 손녀를 찾았나. 평소에는 말조차 섞지 않았던 사이라 먼저 자리했던 친척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심히 당혹스러웠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백할 용기가 생겼을까.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도착하자마자 하얀 보로 가려진 외조부의 모습을 마주해야 했다.


통곡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 살아야만 했는지, 마지막까지 이해하지 못한 애증이 남았을 뿐이었다.


혹시 흔히들 말하는 ‘운동권’에 속한 사람이 아닐까. 정말이라면 당시 정부에게 그만한 미운 털은 당연히 박혔을 터였다.


하지만 소속과 얼굴도 모르는 이 조건에서 당장 추정하는 가설 하나로 생부를 찾기는 무리였다.


당시 풍요로운 집의 막내딸과 연애 중이던 운동권 남학생, 최소한 학교라도 알았다면 동창들을 수소문했을 텐데. 보다 접근성이 높은 어머니 쪽을 먼저 알아보아야 좋을까.


천륜을 상당히 중시하는 문화였다. 문제가 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조금 신중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단지 생부의 신분을 조사하는 정도라면 곧잘 털어놓을지 몰랐다.


외가의 유품 전부는 삼촌이 가지고 있었다. 물론 생전에 사용한 물품은 이미 처분해서 없겠지만, 혹시라도 보관하는 물건들 중에 어머니의 소유는 없을지. 그녀를 온전하게 기억하고 기릴 만한 사람은 이제 남매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설마 고인의 흔적을 말없이 그냥 지웠을까. 이를 테면 학창 시절의 모습이라도 그대로 남긴 졸업 앨범과 비슷한 물건들 말이었다. 그것을 소지하는 일 자체가 문제될 성질은 아니지 않은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니···?”


집안만큼 자주 신경 쓰지 못하는 창고에서 계속 찾던 물건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누구도 열지 않아 표지에 먼지가 수북한 상태였다.


「참장여자고등학교 23회 졸업 앨범」


생전 처음 확인하는 모친의 흔적에 도현은 조사와 별개로 내심 설레는 감정도 느끼는 중이었다.


어렵게 물건을 건넨 어르신은 영 안심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자식이 부모에 대해서 알고 싶은 현상이야 자연스럽지만, 이것이 기폭제로 작용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민감한 시기에 돌연 막내 동생을 파헤치는 조카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걱정 마세요. 시간이 많아지니까, 그냥··· 궁금해서요.”


고등학교 시절 모친은 예상과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적막한 집안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서 실로 소극적인 성격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같은 학급의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호탕한 면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모친의 얼굴을 보자마자 확신할 수 있었다. 못된 사내의 농간에 빠져서 인생을 그르칠 그릇이 아니었다. 혹시나 스스로 운동권을 자처하지 않았을까. 외조부가 줄곧 원망한 인연도 그 즈음에서 시작되었겠다.


자신과 비슷한 얼굴로 이렇게 다른 인생을 살았다니, 이내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더할 나위 없이 기쁘기도 했다.


“다행이다.”


모두가 쉬쉬하는 대로 정말 존경하기 힘든 사람들이면 어쩌나, 마음속에 언제나 그런 고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모르는 채로 지내야 좋다고 단정했다. 이런 사연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는지 모르고, 졸지에 자식과 헤어졌던 이들은 얼마나 억울했을까.


더 늦기 전에 오해를 해소해서 다행이었다. 모친의 모습을 이제 확인한 단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에 대해서 당당하게 알아볼 용기가 생겼다. 이토록 이지적인 분위기가 넘친다면 생부도 모친과 별반 다르지 않을 성향이겠다.


* * *


강남구 역삼동.


이후는 앨범 속에 기재된 정보들을 토대로 움직였다. 친분과 상관없이 생전의 모친을 알 만한 사람이라면 전부 찾아다녔다.


하지만 예상대로 험난했다. 시댁을 따라서 거주지를 옮긴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겨우 주소를 특정해서 집 앞까지 찾아가도 생판 다른 사람이 이미 오랫동안 지내고 있었다.


“뭐하시는 분이세요? 며칠 전부터 계속 이 동네를 돌아다니던데.”

“네? 아, 그게···.”

“어, 어머?! 설마! 그··· 검사님?!”


목적을 말하기도 전에 도현은 자연히 가게 안으로 이끌렸다. 부지런히 보수한 흔적이 만연하지만 지난 세월을 모두 지우지 못한 분식집이었다.


주인은 아직 주문조차 하지 않은 그녀에게 서둘러 어묵탕을 내밀었다.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유명세를 체감하게 되었다.


먼저 이야기하지 않아도 반길 만큼 그동안 해낸 일이 사람들에게 굉장한 인상을 남긴 모양이었다. 뜻하지 않게 보람을 느꼈지만 더불어 부담스러웠다.


이후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결정하지 못한 가운데서, 부모의 흔적을 따라가는 일조차 부진하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여기, 오래 계셨나 봐요.”


도현은 자연스레 화제를 전환했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제공한 음식이라지만, 곧바로 숟가락부터 들기가 무엇했다.


대한민국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지만, 어디까지 방아쇠를 당겼을 뿐이었다. 이후 성과는 뜻을 함께한 모두가 만든 것이었다. 그러니 그 영광을 당연하게 독식하지 않고 싶었다.


그나저나 주인의 나이를 짐작하면, 남몰래 가졌던 기대는 조용히 접어야겠다. 가게는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주인은 기대 연식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가게가 낡았을 뿐이지 그보다 늦은 시점에 요식업을 시작한 사람으로 보였다. 어차피 식사할 시간인 터라 기분이라도 전환할 겸 이곳에서 끼니나 해결하겠다.


이어서 그녀는 메뉴판을 확인했다. 내키는 대로 내놓는 주인을 대신해 응당히 지불할 가격을 미리 계산하기 위해서였다.


“사십 년은 족히 넘었죠. 어렸을 때도 계속 여기서 장사했으니까.”


도현은 주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기대했던 연세가 아니라도 한 자리를 오래 지켰다면, 그들과 관련한 소식을 제법 듣지 않았을까.


마침내 그녀의 앞에 도착한 음식은 매콤한 쫄면이었다. 생각지 못한 그림이지만 보다 더 두근대는 순간이 목전인 가운데 도현의 시선은 부지런히 주인을 쫓았다.


“그럼, 근처 살던 사람도 잘 아시겠네요?”

“음··· 참장여고 학생이면 조금은 더 알죠. 저기 학생들이 주로 여기를 찾으니까.”


시계를 확인하니, 학생들이 수업에 열중할 시간이었다. 언제나 짧게 느껴지는 점심을 마치고 밀려드는 식곤증과 싸워야 하는 때, 정작 그녀 자신과 거리가 먼 일상이었지만.


배부른 감각이 싫어서 점심을 조금만 먹고 때문에 수업 중에도 조는 경우가 없었으니, 이제 와서 생각하니 반 아이들에게 자신은 대단한 별종처럼 보였겠다.


그렇다면 모친 역시 친구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을까. 고등학교 생활을 하는 동안 버젓이 똑같은 자리를 지킨 가게였다. 평소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고 해도 최소한 한 번쯤은 동급생을 따라 방문했을 확률이 있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인상이었다. 한 번이라도 가게에 발을 들였다면 주인도 어렵지 않게 당사자의 모습을 상기할지 몰랐다.


“누구 찾으세요? 그래서 요 며칠?”


여태 한 질문들로 이쪽의 뜻을 눈치챘는지, 주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마도 대선과 관련된 작업이라고 오해한 듯했다. 구태여 목소리까지 낮출 필요는 없으니까.


괜한 오해는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그만큼 다급했던 터라 도현은 따로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다. 수차례 허탕만 반복하고 있었다. 서둘러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이토록 궁지에 몰리면 누구든 성급해졌다.


“혹시 이 분 아시나요?”


도현은 품에서 별도로 인화한 사진을 여럿 꺼냈다. 코트 안주머니에서 꺼냈다 넣었다 반복했더니, 며칠 사이에 가장자리가 마치 옛것처럼 닳은 상태였다. 더욱이나 당시의 졸업 앨범 특성상 사진까지 전부 흑백이니, 그 흔적이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되었다.


사진을 받아든 주인의 표정이 직전과 달리 자신감이 떨어졌다. 사진의 인물을 지그시 응시하는 모습이,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죄송해서 어쩌나··· 모르는 얼굴이네요.”

“아아··· 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우연하게 잡은 한 줄기 희망조차 물거품으로 변하니, 의욕이 극심하게 떨어졌다. 동네에 살았던 사람조차 대부분 거주지를 옮긴 마당에 몇 개의 사진과 이름으로 무엇이 더 가능한가.


게다가 수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나서 찾기 시작했으니, 늦어도 지나치게 늦었다. 그동안 자신에게 갖은 핑계를 댄 업보였다.


오랜 시간 외면했던 진실이 이렇게 간단히 드러날 리가 있겠는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녹록지 않다면 다른 수단을 이용할 각오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성함이라도 알 수가 있을까요? 얼굴은 못 봤어도, 어디서 주워들었을지 모르니까.”

“주정하, 주 씨에 정자 하자를 쓰세요.”


빛깔 좋은 음식에 좀처럼 젓가락을 올리지 못할 정도로 상심한 모습이 신경 쓰였을까. 주인은 다시금 사진을 쳐다보았다. 모르는 얼굴을 계속 본들 무엇이 달라질까 싶지만, 최소한 단서라도 얻기 위해서였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인연의 고리가 어디 숨었을지 모르니까. 말하자면 그들 사이에 징검다리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이 있다던가.


“어머님··· 되시나요?”

“하하, 네.”

“아아, 어쩐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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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희곡 (捨姬曲 : 버린 여인의 노래)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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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 종곡 21.02.19 51 0 14쪽
384 어른 괄시는 해도 9 21.02.16 50 0 14쪽
383 어른 괄시는 해도 8 21.02.16 53 0 13쪽
382 어른 괄시는 해도 7 21.02.12 45 0 13쪽
381 어른 괄시는 해도 6 21.02.12 46 0 13쪽
» 어른 괄시는 해도 5 21.02.09 47 0 12쪽
379 어른 괄시는 해도 4 +1 21.02.09 52 0 13쪽
378 어른 괄시는 해도 3 21.02.05 57 0 13쪽
377 어른 괄시는 해도 2 21.02.05 42 0 13쪽
376 어른 괄시는 해도 1 21.02.02 83 0 13쪽
375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8 21.02.02 47 0 15쪽
374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7 21.01.29 124 0 16쪽
373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6 21.01.29 64 0 14쪽
372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5 21.01.26 55 0 14쪽
371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4 21.01.26 67 0 12쪽
370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3 21.01.22 58 0 15쪽
369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2 21.01.22 76 0 15쪽
368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1 21.01.19 54 0 15쪽
367 하늘이 돈짝만 6 21.01.19 49 0 13쪽
366 하늘이 돈짝만 5 21.01.15 45 0 13쪽
365 하늘이 돈짝만 4 21.01.15 78 0 12쪽
364 하늘이 돈짝만 3 21.01.12 64 0 11쪽
363 하늘이 돈짝만 2 21.01.12 74 0 12쪽
362 하늘이 돈짝만 1 21.01.08 50 0 13쪽
361 쥐 본 고양이 9 21.01.08 52 0 13쪽
360 쥐 본 고양이 8 21.01.05 61 0 12쪽
359 쥐 본 고양이 7 21.01.05 52 0 12쪽
358 쥐 본 고양이 6 21.01.01 48 0 12쪽
357 쥐 본 고양이 5 21.01.01 5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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