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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천재 화가가 그림을 너무 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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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론상이
그림/삽화
오후 10시 15분 연재
작품등록일 :
2024.08.21 12:12
최근연재일 :
2024.09.19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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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4.09.18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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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마치 살아있는 듯한 그림

DUMMY

30.


"영정 사진이요?"


난데없는 영정 사진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몸이 긴장했다. 내가 살던 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영정 사진의 개념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초상화를 그려 오래도록 기억하곤 했다.


머리가 희끗하긴 하다만, 나름 정정해보이는데.......이순제를 위아래로 흘끗 쳐다보자, 그가 큰 목소리로 웃어댔다.


"번지수를 잘못 찾았네! 영정 사진으로 날 그려달라는게 아니야."

"그럼요?"

"내 아내지. 어때 한번 보러갈텐가? 온 김에 밥도 먹고 가고."


이순제가 눈을 찡긋거리며 물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시간. 아무리 화방을 자주 드나들었다곤 하지만 집에 갈 정도로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물감과 재료들을 생각하니 차마 안가겠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가 않았다.


......그림만 팔리고 나면 다시는 오나봐라.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화방을 나왔다.


"......? 여기라고요?"

"왜, 같은 건물이라서 놀랐나?"


그러나 이순제를 따라 간 곳은 다름아닌 화안 화방 건물 꼭대기층이었다. 설마 같은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순제는 별 말 없이 어깨를 으쓱이며 "이 건물 다 내거라네."라고 말했고, 문득 유지석이 이 말을 들었다면 분명 자본주의 눈으로 그를 바라봤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금수저, 건물주라는 말에 환장하는 녀석이니까.


"실례하겠습니다."

"어차피 아무도 없네. 편하게 들어오게나."


그렇게 들어간 그의 집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동시에 맡아본 적 없는 냄새가 나를 맞이했다. 나는 신기한 눈으로 이곳 저곳을 바라보며 그를 따라 이동했다.


이순제의 집은 화방 주인답게 벽 곳곳에는 그림이 걸려있었다. 크고 작은 액자들이 줄지어 있는 가운데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이하석]


......사기꾼의 그림이군. 눈살을 찌푸리며 이번에도 점으로 도배되어 있는 그림을 빤히 쳐다봤다. 그 모습을 본 이순제가 재밌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오! 역시 천재끼리는 뭔가 통하는 게 있는건가? 이하석 작가 그림에 이렇게 관심을 보일줄이야. 신기하구만."

"......그냥 마침 눈에 보였을뿐이에요."

"그게 바로 운명이라는거지! 하하하!"


호쾌하게 웃어대는 이순제와 달리 내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도 그럴게 애초에 나는 이하석을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와 동일한 취급을 받는게 불쾌했기에.


나에게 있어 이하석은 '그깟 점 찍어서 5억이나 받아먹는 사기꾼' 정도였으니까.


벌레씹은 표정을 하고 있는 내 어깨를 툭 치던 그가 턱짓으로 안방을 가리켰다. 순간 처음에 이순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영정 사진이라고 하는게 나을 수도 있겠군.' 라고 말하던 그.


......영정 사진이라면 이제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사람이겠지.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방문을 바라봤다.


초상화를 그리는 건 문제없다. 보이는대로 그리면 되니까. 그러나 만약 환자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앉아있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면? 어느정도는 융통성을 발휘해 적절하게 그려내는게 필요했다.


'제가 이렇게 생겼다는 말인가요? 마르코님?'


문득, 오래전 한 귀족 가문의 영애를 그려줬다가 노발대발하게 만든 일이 떠올랐다. 그 영애의 경우에는 얼굴에 크고 작은 곰보가 많았고, 나는 보이는 대로 그대로 그렸다.


'곰보가 있길래 곰보를 그렸을 뿐인데, 어찌 화를 내시는......?'

'제 얼굴엔 곰보가 없어요.'

'아니, 지금 거울만 봐도 보이는데요.'


물론 그 말을 끝으로 그 가문에서 쫓겨났다. 지금 생각해도 억울한 일이었다. 그럴거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하질 말았어야지. 아니면 곰보를 다 없앤 후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든가 말이다.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올라왔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이 방안에 있는 여자는 그때 그 귀족 영애처럼 어리진 않을테니까. 이순제의 나이가 적어도 칠십은 되어보이는 걸로 봐서 되도 않는 고집은 피우지 않을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동시에 아까 집에 들어왔을 때 맡았던 향이 더욱 짙게 퍼졌다.


"어......."

"내 아내네. 인사하게나."


활짝 웃는 여자. 그러나 사람이 아니었다.

사진이었다.


싱긋 웃으며 가리킨 곳에는 애초부터 사람이 없었다. 사진만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꽂혀있는 향을 보며, 현관에서부터 났던 향의 출처를 알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이 여인이 이순제의 아내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이순제를 바라보니,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는 말게나. 미친 건 아니니까. 여기 이 사진 속 여자는 내 아내가 맞네. 단지 오래전에 사별했을 뿐이지."

"죽은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말인가요?"

"맞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살아있는 사람도 아니고 죽은 사람의 초상화라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림을 그리는 데는 더 수월할 터였다.


눈 앞에 이미 걸려져있는 영정 사진을 그대로 따라 그리기만 하면 될테니까.


나는 이순제보다 적어도 서른살은 더 젊어보이는 사진 속 여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건 없죠. 사진만 빌려주세요. 그림은 유화로 그려드리는게 더 낫겠죠? 아니면 따로 원하시는게 있으세요?"

"유화든 수채화든 상관없네. 그 대신 조건이 있네."

"조건이요?"


내 질문에 이순제가 씩 웃으며 말했다.


"마치 지금 살아있는 것처럼 그려주게나."

"......예?"

"아내는 나랑 동갑이었거든. 아마 지금 나이쯤이면 얼굴에 주름살도 많이 꼈겠지. 머리도 하얗게 세버리고 말이야."


나는 머리위로 물음표를 연신 띄웠다. 이순제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그려달라고? 그것도 더 나이든 모습으로?

보통 아름다웠던 순간을 그림으로 남기는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순제는 반대로 더 늙은 모습을 그려달라고 하고 있었다.


"지금 저 모습은 너무 젊네. 나만 늙었다니, 치사하지 않나."

"......불가능해요."

"왜? 자네라면 그 누구보다 섬세하게 그려내줄거라 믿네만."


그는 진심으로 내가 그릴 수 있을거라 믿고 있는 듯 했다.


......이래서였나. 내가 제일 적합할거라고 말한 이유가.


사진처럼 똑같이 그려낸다는 건 나의 장점이다. 내가 본 풍경을 그대로 그리고, 내가 본 그림을 그대로 그려내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체'가 존재했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본체가 없으면 그릴 수 없었다.


지금도 사진이라는 본체는 있지만......젊을 때의 모습이 아닌 나이든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내 상상이 가미될 수 밖에 없었다.


문득 오래전 메디치 가문에서 쫓겨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쫓겨났던 이유 역시 메디치 가문의 성인, 고스마를 못 그려서였으니까.


미간을 좁힌 채로 땅바닥을 바라봤다. 그리고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애초에 이미 죽은 사람이잖아요. 이제와서 늙은 모습을 그려달라고 하다니. 이상하다고요."

"흠, 역시 그런가? 하긴, 맞는 말일세."


화를 낼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이순제는 내 말에 수긍했다. 그리고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알았네. 이 이상 강요하는 것도 화가한테 못할 짓이겠지. 그러면 이 사진과 똑같이 그려주게나."

"똑같이요?"

"사실 사진이 있어서 상관이 없긴하다만....... 개인적으로 사진보다는 그림을 더 선호해서 말이지. 벽에 하나 걸어두고 싶거든."


이순제의 말에 나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큰 목소리로 웃으며 내 등을 내리쳤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 할 필요 없네. 아내가 사별한지도 벌써 30년은 훌쩍 넘었고 말이야. 이제 울려고 해도 눈물도 안 나."


저녁이나 먹고 가게! 라며 호쾌하게 웃어보이는 그였지만, 애초에 이런 분위기와 상황 자체가 어색했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저녁 식사를 거절했다.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였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밥이 넘어갈리가. 결국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는 나를 현관까지 배웅했다.


"그림 그릴 때 쓸 사진은 한 장 더 찾아두겠네. 아마 집 안 잘 찾아보면 예전에 인화해뒀던 게 있을걸세."

"네."

"그럼 내일 화방으로 오게나. 조심히 가게."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 나는 어두움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모습을 뒤로 한 채 건물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길. 어느새 밤 하늘엔 달이 떠 있었다. 어두워질대로 어두워진 상황. 나는 전에 유지석이 알려줬던 지도앱에 의지한 채 집으로 걸어갔다.


'......너무 단칼에 거절했었나.'


순간적으로 죄책감 따위의 마음이 올라왔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나이든 모습을 그리겠는가.


안되는 건 빠르게 안된다고 하는게 좋다. 괜히 된다고 뻗대봤자 흘러가는 건 시간뿐이니.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고 있는데, 발걸음마다 마음이 요란스러워졌다.


'언제까지 보이는 것만 그릴거지? 강렬한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지 않았나?'

'내 그림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옳다고 할 수 있는가?'

'왜 나는 보이지 않는 걸 그릴 수 없는거지?'


턱. 발걸음을 멈췄다. 양 주먹을 꽉 쥔 채로 하늘을 바라봤다.


달. 환한 보름달이 머리 위에 있었다. 나는 지금 저 달을 바라보고 있고, 지금 내게 종이와 붓, 물감만 있다면 저 달을 그대로 그려낼 자신이 있었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 아까 보았던 달을 떠올렸다. 방금 전 보았던 모습이기에 선명하게 다시 머릿속에서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릴 수 있다. 방금 보았던 장면이니까. 아마 집에 가서도 이 장면을 그대로 그릴 수 있을거다.


내일은? 내일도 아마 그릴 수 있을거다.

일주일 뒤에는? 어렴풋하지만 가능하겠지. 그리 어려운 풍경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기억력이 좋은 편이기도 하고.


그럼 일 년 뒤에는? 아니 십 년 뒤에는?


"......그릴 수 없어."


나는 미간을 좁혔다. 결국 기억에 의존하는 그림은 한계가 있었기에. 적어도 기억이 유지 되는 한에서만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이대로는 안된다. 이래서는 그 녀석과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아 뇌리에 박아버리는, 그런 강렬한 그림을.


"하아......미치겠네."


결국 나는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여전히 하늘 위로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기에 그 상황이 더욱 처연하게 느껴졌다.


답답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답이 안 나왔다. 한 평생 그림 그리는 것에 있어서는 자신있다고 생각했는데......오래 전 스승님의 밑에서 그림을 처음 배울 때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스승님이라면 뭐라고 하셨을까.


그렇게 미간을 좁히며 끙끙거리고 있는데,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고 있어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미간을 팍 좁혔다.


"......사기꾼."

"말 너무 심한거 아니에요?"

"점성애자."


이하석이 가로등 밑에 서있었다.


"차라리 사기꾼이 낫네요."


싱긋 웃는 표정과 함께.


작가의말

추천과 선작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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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천재 화가가 그림을 너무 잘 그림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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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제목 변경] 일반고 미술 천재가 되었다 → 르네상스 천재 화가가 그림을 너무 잘 그림 24.09.13 34 0 -
공지 연재시간 안내: 오후 10시 15분 24.09.03 906 0 -
31 그림을 안 그릴 이유 NEW +2 6시간 전 175 7 15쪽
» 마치 살아있는 듯한 그림 +1 24.09.18 437 22 12쪽
29 후회하지 않는 그림 +1 24.09.17 547 19 13쪽
28 완벽한 그림과 강렬한 그림 +4 24.09.16 634 24 14쪽
27 마음을 살리는 그림 +3 24.09.15 687 25 15쪽
26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 +1 24.09.14 720 24 14쪽
25 안 팔리는 그림 +1 24.09.13 745 25 14쪽
24 텅 빈 그림 +1 24.09.12 831 23 13쪽
23 인정하기 싫은 그림 +2 24.09.11 891 23 17쪽
22 이딴게......그림? +1 24.09.10 942 31 12쪽
21 어긋난 그림 +1 24.09.09 993 30 16쪽
20 잊혀진 그림 +3 24.09.08 1,088 37 16쪽
19 모두를 감동시키는 그림 +1 24.09.07 1,154 42 14쪽
18 이딴 그림 +1 24.09.06 1,182 36 15쪽
17 전세계로 퍼진 그림 +5 24.09.05 1,278 41 15쪽
16 아득하고 모호한 그림 +1 24.09.04 1,367 43 20쪽
15 애들 장난 수준 그림 +3 24.09.03 1,433 42 15쪽
14 낙서도 그림 +4 24.09.02 1,615 45 18쪽
13 더 비싼 그림 +3 24.09.01 1,660 38 13쪽
12 보이는 게 전부인 그림 +4 24.08.31 1,678 43 13쪽
11 괴물같은 그림 +2 24.08.30 1,714 41 15쪽
10 수채화 그림 +1 24.08.29 1,745 51 14쪽
9 비싸질 그림 +4 24.08.28 1,781 47 16쪽
8 천재의 그림 +2 24.08.27 1,784 43 13쪽
7 옳은 그림 +4 24.08.26 1,832 48 13쪽
6 비싼 그림 +2 24.08.25 2,055 42 16쪽
5 개쩌는 그림 +5 24.08.24 2,102 44 13쪽
4 비슷한 그림 +1 24.08.23 2,320 4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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