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168시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12.22 01:52
최근연재일 :
2019.09.28 16:11
연재수 :
269 회
조회수 :
153,593
추천수 :
3,759
글자수 :
1,685,206

작성
19.09.12 19:53
조회
53
추천
3
글자
10쪽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6)

DUMMY

“레인, 다음 주가 시작할 때까지 얼마나 남았지?”


“.......”


소녀는 입을 다물고, 경계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질문을 뱉은 당사자를 바라본다.

얼마 전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를 어렵지 않게 기억할 수 있었지만, 소녀의 얼굴이 굳은 것은 그때 대화의 흐름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기억했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자의 정체가 ‘주인님’이 아니었다는 게 원인이었다.


“미안, 실례였니? 예전에 네 주인이 너한테 이렇게 묻던 게 생각나서. 무슨 인사 같은 건 줄 알았지.”


“.......”


“다음 주가 시작할 때까지 남은 시간, 29시간 8분. ‘우리들’은 시계가 없어도 알 수 있지. 뇌와, 그 뇌를 통한 사고 자체가 신기할 정도로 완벽하게 이 세계와 동기화되어있으니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에도 그 빛을 앗아가지 못한 은발. 그리고 노을의 누런 온기를 정면에서 거부하는 새파란 눈빛. 보통 상대에게 남아있는 피의 냄새로 경계의 농도를 가늠하던 레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도 피비린내가 아닌 존재 그 자체를 향한 적의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


“침묵이라, 좋은 회피수단이야. 네가 진실을 알고 싶지 않다면, 그대로 나를 지나쳐 네가 주인이라 부르는 그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


“하지만 ‘다음 주’가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 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잖아. 네가 주인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 주인이 너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 과연 그 무게가 네가 바라고 있는 것만큼 동등한 것인지, 의심되지 않아?”


“의심하지 않아.”


표정만큼이나 단호한 소녀의 목소리였지만, 실비아는 소녀의 입에서 목소리를 끌어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러웠는지 얇은 미소를 지었다.


“주인을 의심하지 않는 인형. 해결사로서 이보다 더 이상적인 존재가 있을까? 그렇지 않아?”


“.......”


“레인, 너는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된 네 주인에게 어떻게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 생각해봤어? 네가 어쩌다가 이런 곳에 와있는지, 어째서 그에게 명령을 받아 사람들을 죽이고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지, 생각해봤어?”


“나는 주인님을 믿으니까.”


“왜?”

한 걸음 더, 인형의 그림자가 더욱 짙게 인형의 얼굴 위로 쏟아진다.

“어떻게 그렇게도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를 믿을 수 있는 거야? 그와 너의 시간은 고작 일주일도 안 됐는데 말이야. 그 일주일이 지나면 어떤 미래가 너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기나 해?”


“상관없어.”


“그럼, 일주일 전의 너는 어땠을까?”


“.......”


실비아를 지나치려던 소녀의 걸음이 멈춘다.


“혹시, 네가 지금 주인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해?”


“당연하지. 그는 나를 사랑-.......”

불과 일주일도 안 된 기억.

하지만 머리를 짓누르는 묵직한 기억의 안개 속에서, 레인은 한참이나 ‘그때’의 상황과 목소리를 헤집어야 했다.

“나를 사랑.......하고 싶다고 하셨어.”


“하핫, ‘사랑하고 싶다’라......., 저기 레인, 그는 과연 일주일 전의 너에게도 그렇게 말했을까?”


“.......일주일 전의 나.......?”


“그래, 너는 매주-”




“이거, 말씀 중에 실례합니다.”


이런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일부러 소녀가 음침한 골목으로 들어설 때까지 기다린 것이거늘. 실비아는 어김없이 찾아온 견제의 상징, 망자의 미소를 향해 비릿한 비웃음을 품었다.


“.......생각보다 되게 빠르네. 당신 주인은 이 도시 전체에 감시망이라도 깔아뒀어요?”


“하하, 감시망이라뇨. 의장님께서 그분을 찾으시기에 주변을 좀 방황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운이 좋았죠.”


시의장 데니스의 집사이자 그의 ‘분신’, 도나스는 목소리로만 식별이 가능한 웃음과 함께 골목으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이어지지 못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건장한 덩치의 남자가, 아니, 인형이 그의 앞을 가로막은 덕분이었다.


“이야기는 곧 끝날 테니, 좀만 기다려주시지.”


특별히 물리적으로 위협을 가한 것은 아니었지만, ‘순교자’ 안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확실할 터. 그러나 그럼에도 도나스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사태가 위급하여 도시 전체에 동원령과 계엄령이 선포된 상태입니다. 호출명 ‘디스트로이어’는 어디까지나 도시의 이름으로 고용된 해결사. 그녀의 억류를 시도한다면 그 즉시 적대행위로 간주됩니다만.”


“협박인가?”


“제가 굳이?”


미소와 마주치는 미소.

기사와 기사의 기싸움처럼 영력이 맞부딪치는 일은 없었지만, 망자와 인형이라는 기이한 대립이 어떤 형식으로 끝을 맺을지는 아무도 모를 터.

그러나 이 대립은 허무하게 끝을 고하고 만다.


[비상대책본부에서 알려드립니다. 이제 곧 아실레마 중앙군의 공격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각자 정해진 위치에서 대기 해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으음, 시작되려나 보네요. 정말 죄송합니다만, 이젠 진짜로 가셔야 합니다.”


정중함이 더해진 도나스의 목소리에, 안톤은 뒤를 돌아 실비아와 소녀를 바라본다. 그의 검붉은 눈동자는 무언가의 허락을 구하고 있었고, 실비아는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 허락의 마침표를 찍었다.


“어쩔 수 없지. 이런 시기에 반동분자로 몰려서 쫓겨나고 싶지는 않으니까. 다만 레인, 내가 했던 말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똑똑히 간직해둬. 그리고 다음 주가 시작하기 직전에, 그 대답을 네가 주인이라 믿고 따르는 그 남자에게 꼭 전해주길 바랄게.”


“.......”


말을 마치고, 조금의 망설임도 후회도 없이 또각또각- 구두를 세워 골목을 빠져나가는 실비아. 안톤은 그 아름다운 여인의 뒷모습을 뒤따랐고, 망자의 옆모습으로는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자, 디스트로이어. 주인님이 찾고 계십니다.”


“주인님? 어느 쪽의?”


간단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그 질문에 담긴 상반된 의미를 도나스는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나와 당신의 주인님, 둘 모두요.”




=====




“드럽게 많군.”


피비린내 가득하던 전장엔 이제 암흑만이 가득했지만, 그 먹색의 장벽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건 역시 기사의 눈이라는 걸까. 아니면, 그저 이 ‘앨리스’라는 이름의 여인이 가지고 있는 특질인 것일까.


“뭔가 보이나?”


그런 앨리스의 곁으로 다가서는 아크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다르펜타 포격의 영향으로 망루의 절반이 무너지거나 금이 가 있었던 탓이다.


“다 보이지. 군단 놈들은 무너진 성벽 쪽에 상황을 봐서 곧바로 투입될 거 같고, 나머지는 전방위적으로 포위 중이고.”


“공성 병기는?”


“그냥 급조한 사다리나 공성탑 정도? 그 대포같은 건 안 보이네.”


“예상대로다. 우리도 계획에 맞춰 대응하면 그뿐.”


“.......”

다시 한번 크게 주변을 둘러보는 앨리스. 하지만 그건 무언가 추가적인 정보를 얻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다음 말을 내뱉기에 앞서 망설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데론은 어때?”


“의식은 아직 없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다고 하더군.”


“.......그래.”


“네 탓이다.”


“.......여기선 ‘네 잘못이 아냐’라고 위로해줄 때 아니야?”


비릿한 앨리스의 웃음. 그러나 그녀를 돌아보는 아크의 얼굴엔 농담기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기사로서의 너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러나 이어지는 아크의 목소리는 칭찬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유롭게 행동하면서도 필요할 땐 무법자를 힘으로 찍어누르는 네 기질과, 그런 기질을 보좌해주는 데론과 같은 자들에 의해 서부협회가 유지될 수 있었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여긴 카나반도, 블라고슬로바도 아닌 제국이다. 용병과 해결사들의 세계에선 너의 힘이 법칙이 되고 너의 이름이 중심이 될 수 있었겠지만, 여기서는 아냐. 너의 힘이 막히는 순간 제2의 데론이 나올 수밖에 없어.”


“.......”


“방만은 끝났다. 너도 나도, 이젠 책임감을 가져야 해.”


“.......책임감이라. 너한테서 그런 말을 듣자니 웃기네.”


“지금 싸우자는 게 아니라-”


“알아, 알아. 알고 있어. 네가 뭘 말하려는 건지.”

무거웠던 공기에 살짝 한기가 서린다. 감이 좋은 이들은 곧바로 이 변화를 알아차리고서 무기를 다잡았고, 무너진 성벽을 복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던 공병들은 철수를 시작하고 있었다.

“근데, 네가 하나 오해하고 있네.”

그리고 이에 맞춰 하나둘 빛을 내뿜기 시작하는 탐조등들. 그 빛의 끝에 일렁이는 검은 물결은 도시 전체를 뒤덮기 위해 흘러내리는 암흑 그 자체였다.

“내가 드리브달이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고집하고 있었던 건, 단순히 어린애 같은 반발심으로 가문 사람들을 엿 먹이려는 게 아니었어.”

미세하던 진동이 점점 확신으로 다가오고, 침묵하며 돌진하는 적들의 기세를 모두가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됐을 무렵,


앨리스는,


그 특유의 비웃음과 함께 검을 뽑는다.




“이 땅에서 ‘드리브달’이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를, 똑똑히 보여줄게.”


작가의말

즐겁고 스트레스 없는 추석 되시길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168시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휴재 공지 19.10.14 120 0 -
공지 안녕하세요. 공지입니다. (지도첨부 01/10 수정) +4 15.01.10 2,091 0 -
269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9) 19.09.28 71 2 10쪽
268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8) 19.09.23 50 2 11쪽
267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7) +2 19.09.18 72 3 9쪽
»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6) 19.09.12 54 3 10쪽
265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5) 19.09.07 42 3 11쪽
264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4) 19.09.02 46 3 10쪽
263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3) 19.08.28 51 3 11쪽
262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2) 19.08.22 45 3 10쪽
261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1) 19.08.11 61 3 10쪽
260 (레인) 인형의 인형 (12) 19.08.05 65 2 9쪽
259 (레인) 인형의 인형 (11) 19.07.31 70 2 12쪽
258 (레인) 인형의 인형 (10) 19.07.26 65 3 10쪽
257 (레인) 인형의 인형 (9) 19.07.21 92 3 11쪽
256 (레인) 인형의 인형 (8) 19.07.16 52 3 11쪽
255 (레인) 인형의 인형 (7) 19.07.10 59 4 10쪽
254 (레인) 인형의 인형 (6) 19.07.03 55 3 11쪽
253 (레인) 인형의 인형 (5) 19.06.15 67 3 10쪽
252 (레인) 인형의 인형 (4) 19.06.08 81 2 12쪽
251 (레인) 인형의 인형 (3) 19.06.01 79 1 10쪽
250 (레인) 인형의 인형 (2) 19.05.24 75 2 9쪽
249 (레인) 인형의 인형 (1) +1 19.05.15 81 2 10쪽
248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11) 19.05.10 75 2 13쪽
247 연재 관련 +4 18.11.28 188 3 1쪽
246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10) 18.11.17 192 2 11쪽
245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9) 18.11.12 126 4 14쪽
244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8) 18.11.07 139 2 11쪽
243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7) 18.11.02 116 2 11쪽
242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6) 18.10.28 110 3 11쪽
241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5) 18.10.23 128 2 12쪽
240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4) 18.10.18 133 1 10쪽
239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3) 18.10.13 102 2 12쪽
238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2) 18.10.08 114 2 12쪽
237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1) 18.10.03 112 3 11쪽
236 (레인) 돌아온 자들의 도시 (10) 18.09.27 112 3 11쪽
235 (레인) 돌아온 자들의 도시 (9) 18.09.22 116 2 11쪽
234 (레인) 돌아온 자들의 도시 (8) 18.09.17 112 2 12쪽
233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7) 18.09.12 121 2 12쪽
232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6) +1 18.01.14 171 3 13쪽
231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5) +2 18.01.09 189 3 12쪽
230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4) +2 18.01.04 163 3 13쪽
229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3) +1 17.12.30 174 4 13쪽
228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2) +2 17.12.25 150 4 11쪽
227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1) +1 17.12.19 180 3 12쪽
226 (란) 그림자를 먹고 사는 것들 (10) +4 17.12.15 204 3 14쪽
225 (란) 그림자를 먹고 사는 것들 (9) +2 17.12.10 208 4 12쪽
224 (란) 그림자를 먹고 사는 것들 (8) +2 17.12.03 159 4 12쪽
223 (란) 그림자를 먹고 사는 것들 (7) +1 17.11.27 141 4 15쪽
222 (란) 그림자를 먹고 사는 것들 (6) +2 17.11.22 177 4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