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세스퍼 님의 서재입니다.

168시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12.22 01:52
최근연재일 :
2019.09.28 16:11
연재수 :
269 회
조회수 :
153,590
추천수 :
3,759
글자수 :
1,685,206

작성
19.08.05 21:35
조회
64
추천
2
글자
9쪽

(레인) 인형의 인형 (12)

DUMMY

아크는 달렸다. 도약했다.

그 속도와 기세는, 원체 타인에겐 일절 관심도 주지 않던 그레이브야드의 망자들마저도 뒤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빠르고, 다급했다.

그는 안톤에게 따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해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들이 여기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를 찾아왔다는 것.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분명했기에.


“.......”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그 과정은 이미 연구실 문을 여는 순간 머릿속에서 지워진 상태였다.


“아, 주인님!”


언제나 그렇듯, 반갑게, 해맑게 웃으며 ‘주인’을 맞이하는 소녀와,

당황한 듯한 얼굴로 눈치를 살피는 예담.

그리고-,


“.......”


그 자체로 발광을 하는 듯 찬란한 빛의 은발과, 평범한 드레스조차 명인의 걸작처럼 만들어버리는 아름다운 몸의 곡선과 투명한 피부. 그러나 평소였다면 청명함 그 자체였을 새파란 빛의 눈동자는 니에브의 얼음보다도 싸늘하게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었다.


“실비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아크의 입술이 멈춘다.

뒤늦게, 실바아가 바라보고 있는 풍경이 그의 눈에도 들어온 것이다.


아크와 소녀, 그리고 예담을 위해 대형 강의실을 개조하여 만든 연구실.

그 연구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수술대.

그 수술대 위에는,

도시의 시의장, 데니스가 아크와 소녀, 예담을 위해 제공해준,

‘실험체’들이 놓여있었다.


“.......결국 이런 거였군요.”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결국 당신에게는 그 모든 게 단순한 수단. 우리도, 우리의 희생도, 우리의 신념도, 당신에게는 그저 허울 좋은, 하나의 선택이었을 뿐.”


“.......”


아크는 부정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지금 눈앞의 풍경, 이 상황에서 무언가를 말해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 동포들......., 외관은 멀쩡한 것을 보니, 제국에서 따로 실험용으로 준비했던 자들인가 보네요. 아마 뇌의 일부분이 없거나, 그 괴물들처럼 전도체가 박혀있거나, 둘 중 하나겠죠?”

자신을 향한 질문인가 헷갈려 눈치를 살피는 예담. 그러나 그런 예담의 존재는 아예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실비아는 천천히 수술대 사이를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제국이 예전부터 우리 인형들의 병기화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아르다르에서 레이토를 납치해간 것도 그 계획의 과정이었겠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우리 동포들이, 이제는 이렇게 당신을 위한 재료가 되어 제 앞에 누워있네요.”


재료.

싸늘한 단어.

마침내 마주친 인형의 새파란 눈동자 속에서 아크가 읽어낼 수 있는 감정은 그리 많지 않았다.


“.......변명은 하지 않겠다. 여기에 온 뒤로 그녀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걸 확실히 하기 위해선 증명이 필요했어.”


“증명이라......., 실험이란 단어를 꽤나 돌려 말씀하시네요.”


“이들은 이미 제국의 실험에 의해 희생당한 자들이야. 죽은 자의 희생으로 산 자의 운명을 고칠 수 있다면, 난 몇백 번, 몇천 번이라도 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어.”


“만약 여기 누워있는 게 사람들의 시체였다면, 당신은 그래도 그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이다.”


“만약 그들 모두가 ‘망자’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


되돌아올 수 있는 권리.

되돌아오지 않을 권리.

영혼과 육신이 있는 자들에겐 언제나 선택권이 있었고,

망자들은 그 선택권을 위해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에겐 영혼이 있었기에,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목소리도 허락받지 못한 채 이곳에 누워있는 저들에겐, 과연-


“소울 슬레이어, 당신은 우리, 인형들에게 영혼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질문에 대한 아크의 결심은 빨랐지만, 실비아의 첨언이 곧바로 이어진다.

“제가 말하는 영혼이란, 누군가의 영혼조각이라고 할 수 있는 혈마법이나 저주의 잔재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의 그녀라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수성을 제외하고, 순수한 관점에서의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


이미 받아봤던 질문.

하지만 이번엔 쉽게 답할 수가 없었다.


“그래요. 어쩌면 우리 인형들에게는 처음부터 영혼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당신들과 똑같이 만들어진 겉모습, 당신들처럼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진 머리. 우리가 느끼는 감정, 분노, 기억과 생각. 이 모든 게 영혼의 부산물이 아닌, 그저 먼 옛날 우리의 창조주가 우리에게 원했을 뿐인 모습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런 꼴로 이렇게 누워있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에요.”


“.......난 그녀와 함께 했던 기억을 되찾고 싶을 뿐이야.”


아크의 대답에 실비아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물론 상냥함이나 연민과는 거리가 먼, 싸늘한 미소였다.


“기억이요....... 어느 대학교수는 기억이야말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가장 큰 조각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 분류법에 의하면 인간보다 길고 선명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영혼은 분명 인간의 것보다 진하고 선명해야 할 텐데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아크, 당신이 집착하고 있는 건 정말로 존재한다고 믿는 그녀의 영혼인가요, 아니면 인형이라는 껍질로 감싸져 있는 기억의 파편들인가요?”


“.......”


“당신은, ‘지금’의 그녀를 사랑하긴 하는 건가요?”


대답은 없었다.

아니,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크의 목소리보다도 먼저 반응한 소녀의 단검이 순식간에 실비아의 턱 아래에 맞닿았고, 그 덕분에 은빛 머리카락 몇 올이 하늘하늘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주인님은.”

마치 피가 끓는 듯, 새빨간 눈동자.

실비아의 얼굴과 가까이 맞닿은 레인의 표정은 마치 명치라도 얻어맞은 듯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져있었다.

“주인님은......., 나를 사랑하셔.”


“.......그래요? 그건 눈을 뜨자마자 사랑한다는 말로 당신에게 ‘감정’을 주입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정말로 진실된 사랑이 꽃필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당신이 순진하기 때문인가요?”


“주인님은.”

먹색의 단검날이

“나를”

피부를 파고 들기 시작하며

“사랑하셔.”

한줄기 붉은 선혈을 만들어내는 순간.


“레인, 그만해.”


“.......”


“그만해.”


아크가 다가와 소녀의 어깨를 잡았고, 실비아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손등으로 피가 흘러내리는 목을 닦아낸다.


“.......우린 당신에게 희망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발작’의 저주를 끊어낼 방법을 찾아낼지도 모른다고, 지금까지 인간들 속에 섞여 숨어 살던 우리에게, 어쩌면 하나의 거대한 기회가 되어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당신에게 운명을 걸어봤습니다.”


“.......”


“.......하지만 우리가 틀렸네요. 당신은 그저 기회주의자였을 뿐입니다. 주어지는 상황과 인연을 모두 소모해서라도 본인의 욕심을 챙기면서, 그로 인해 생기는 모든 부작용과 상처는 ‘해결사’라는 이름의 가면 아래에 묻어두기만 하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

다시금 단검을 쥔 소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려는 것을, 아크는 간신히 제지할 수 있었다.

“한번 말씀해보세요. 지금 이 광경을, 이 인형을 위한 인형들을, 과연 당신만의 그 ‘낭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다시 말하지만, 변명하지 않는다. 나를 학살자라 비난해도, 기회주의자라 욕해도 상관없어. 아주 사소한 희망에도 모든 걸 걸어왔고, 매번 좌절했지만 매번 기대해왔다. 이해해달라고는 하지 않아. 아니, 그럴 수 없지.”

레인을 뒤로 잡아끌고, 자신이 대신하여 앞으로 나서는 해결사.

“하지만 이 기회를 방해한다면, 내가 이 땅, 되돌아와서는 안 되는 이 땅에 오면서까지 잡은 기회를 막으려 한다면, 상대가 제국이든 협회든, 인간이든 망자든 인형이든 상관하지 않아. 내가 지금까지 짊어온 절망의 무게만큼 되갚아 줄 것이다.”


“.......그건 협박인가요?”


“경고다.”


“하하, 경고.......”

연구실의 문이 열리고, 우람한 체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안톤이었다. 실비아는 그의 등장을 확인한 뒤, 피가 스며든 드레스의 목깃을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경고를 하셨으니, 저도 경고를 해드리죠. 우린 동포가 인체실험용 쥐새끼가 돼서 갈기갈기 조각나는 꼴을 보고만 있진 않을 겁니다. 그레이브야드 시의장에게도 정식으로 항의를 할 거고, 만약 우리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원래 하던 방식으로 의지를 표명할 수밖에요.”


“.......”


“듣자 하니, 이제 곧 여기서 전투가 벌어지는 모양이던데.”


미닫이문이 닫히며

서서히 사라지는 인형들의 모습.


그 마지막은,


악의가 선명한 실비아의 미소였다.



“모쪼록 뒤통수 조심하시길.”


작가의말

부족한 글을 봐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168시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휴재 공지 19.10.14 120 0 -
공지 안녕하세요. 공지입니다. (지도첨부 01/10 수정) +4 15.01.10 2,091 0 -
269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9) 19.09.28 71 2 10쪽
268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8) 19.09.23 50 2 11쪽
267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7) +2 19.09.18 72 3 9쪽
266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6) 19.09.12 53 3 10쪽
265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5) 19.09.07 42 3 11쪽
264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4) 19.09.02 46 3 10쪽
263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3) 19.08.28 51 3 11쪽
262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2) 19.08.22 45 3 10쪽
261 (레인) 기약이 없는 약속의 땅 (1) 19.08.11 61 3 10쪽
» (레인) 인형의 인형 (12) 19.08.05 65 2 9쪽
259 (레인) 인형의 인형 (11) 19.07.31 70 2 12쪽
258 (레인) 인형의 인형 (10) 19.07.26 65 3 10쪽
257 (레인) 인형의 인형 (9) 19.07.21 92 3 11쪽
256 (레인) 인형의 인형 (8) 19.07.16 52 3 11쪽
255 (레인) 인형의 인형 (7) 19.07.10 59 4 10쪽
254 (레인) 인형의 인형 (6) 19.07.03 55 3 11쪽
253 (레인) 인형의 인형 (5) 19.06.15 67 3 10쪽
252 (레인) 인형의 인형 (4) 19.06.08 80 2 12쪽
251 (레인) 인형의 인형 (3) 19.06.01 79 1 10쪽
250 (레인) 인형의 인형 (2) 19.05.24 75 2 9쪽
249 (레인) 인형의 인형 (1) +1 19.05.15 81 2 10쪽
248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11) 19.05.10 75 2 13쪽
247 연재 관련 +4 18.11.28 188 3 1쪽
246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10) 18.11.17 192 2 11쪽
245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9) 18.11.12 126 4 14쪽
244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8) 18.11.07 139 2 11쪽
243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7) 18.11.02 116 2 11쪽
242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6) 18.10.28 110 3 11쪽
241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5) 18.10.23 128 2 12쪽
240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4) 18.10.18 133 1 10쪽
239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3) 18.10.13 102 2 12쪽
238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2) 18.10.08 114 2 12쪽
237 (레인) 뒤틀린 눈빛과 어두운 그림자 (1) 18.10.03 112 3 11쪽
236 (레인) 돌아온 자들의 도시 (10) 18.09.27 112 3 11쪽
235 (레인) 돌아온 자들의 도시 (9) 18.09.22 116 2 11쪽
234 (레인) 돌아온 자들의 도시 (8) 18.09.17 112 2 12쪽
233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7) 18.09.12 121 2 12쪽
232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6) +1 18.01.14 171 3 13쪽
231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5) +2 18.01.09 189 3 12쪽
230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4) +2 18.01.04 163 3 13쪽
229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3) +1 17.12.30 173 4 13쪽
228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2) +2 17.12.25 150 4 11쪽
227 (란) 돌아온 자들의 도시 (1) +1 17.12.19 180 3 12쪽
226 (란) 그림자를 먹고 사는 것들 (10) +4 17.12.15 204 3 14쪽
225 (란) 그림자를 먹고 사는 것들 (9) +2 17.12.10 208 4 12쪽
224 (란) 그림자를 먹고 사는 것들 (8) +2 17.12.03 159 4 12쪽
223 (란) 그림자를 먹고 사는 것들 (7) +1 17.11.27 141 4 15쪽
222 (란) 그림자를 먹고 사는 것들 (6) +2 17.11.22 177 4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