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의 길
루디는 율의 테이블에 합석해 음식을 먹는 시늉을 하며 주위 눈치를 살폈다.
말없이 음식을 삼키는 율을 보며 루디는 속삭이듯 말했다.
“마스터, 그 시미터 말인데요. 여기 사람 얘기로는 왕족의 것이라고 해요.”
“그래? 그거 잘됐구나.”
“마스터, 여기 이디아 왕국에서 왕족은 권능에 버금가는 존재라고요. 잘못하면···.”
“어찌 처리할까 고민했는데 잘된 일이네. 왕족이면 한 말은 지키겠지. 찾으러 오면 제값 받고 넘기만 그만이지.”
율은 루디의 말허릴 끊고 먹기에 집중했다.
“어서 먹어. 넌 더 커야 해. 부지런히 먹어.”
태평스러운 얼굴로 먹기를 종용하는 율을 보며 루디는 ‘당신과 난 이미 한배를 탔으니 내 안전도 고려해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닥치면 그때 생각하자. 아무리 나빠져도 매음굴만 하려고.’
루디도 율의 배짱을 닮고 싶어졌다.
이런 주변 반응은 다음 오아시스에서도 그 다음 오아시스에서도 반복됐다.
며칠을 그렇게 반복되다 보니 루디도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디아 왕국의 수도 이데에서는 다른 반응이 나왔다.
이데의 성문을 통과하는 검문에 험악하게 생긴 흑인 수문장이 율과 루디를 붙잡았다.
“가는 곳을 밝혀라.”
“이딤의 성소.”
“어디서 오는 길이지?”
“카포타.”
“등에 진 검은 어디서 났지?”
“내기에서 이겨 받았다.”
흑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데엔 얼마나 머물 생각인가?”
“내일 아침에 떠날 거야.”
“알겠다. 내일 아침 떠나기 전에 내게 확인을 받아야 한다.”
“왜지?”
“몰라서 묻나? ‘하디칸’ 님의 검을 지녀 이 정도로 끝나는 줄이나 알아.”
‘하디칸···.’
루디는 그 이름을 듣곤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험악하게 굴긴 해도 순순히 길을 내어주는 수문장을 뒤로하고 일행은 이데로 들어갔다.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이지.”
“무슨 소리냐?”
“하디칸, 하디칸이었다고요. 그 수염 난 사내가···.”
“하디칸이 누군데?”
“이디아 국왕의 숙부, 얼마 전부터 왕국을 놓고 국왕과 대립 중인 왕족이죠.”
“오 그래, 그런 정세는 들은 적이 있지. 여긴 왕권을 놓고 싸우는 일이 아주 자연스럽다지?”
“맞아요. 역사 이래로 무력 없이 왕권을 계승한 적이 드문 왕조죠. 중요한 건 국왕에 적대적인 인물의 칼을 들고 이데로 들어온 마스터와 내 목숨이 위험하다는 거죠.”
“성문지기가 통과시켜줬잖니. 죽일 거라면 벌써 손을 썼겠지.”
“수문장이나 군인이야 상관없지만, 국왕을 지지하는 세력 눈엔 적으로 보일 것 아니에요. 그 칼 숨기는 것이 좋겠어요.”
“숨기기엔 이미 늦었다. 벌써 얘기가 들어갔을 거야”
“후, 그런가요.”
율은 심드렁하게 길을 재촉해 화려한 여관을 잡고 목욕을 즐기고 식사를 했다.
루디도 더는 호들갑스럽게 굴지 않았다.
나빠져 봐야 매음굴만 하겠느냐는 생각에 매사 마지막을 염두에 두기로 했다.
두 배짱 좋은 사내가 식사에 여념이 없었다.
식사가 얼추 끝나갈 무렵이었다.
멀끔한 사내 하나가 율과 루디의 테이블로 다가섰다.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합석해도 되겠나?”
사내는 정중하게 자리를 청해왔다.
율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사내는 자리에 앉아서 율을 안색을 살폈다.
“나는 이디아의 아나타토이 바심이다.”
“율.”
율은 짧게 자기소개를 하곤 루디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루디는 음식물을 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에게 잔을 내주곤 와인을 따랐다.
“이 검 때문인가?”
“맞다. 그건 보통 물건은 아니라서 말이지.”
“이데를 들어오면서 얘긴 들었지. 유명한 사람의 것이라는 걸···.”
“국왕 전하의 가장 가까운 혈육의 물건인지라··· 그 검을 어떻게 가지게 됐는지 알려줄 수 있겠나?”
“내기해서 얻었지.”
“내기라고?”
율이 와인을 마시는 동안 루디가 자초지종을 바심이라는 사내에게 설명했다.
“하디칸 님이 체통 없이 또 내기 도박을 하셨군. 그대가 하디칸 님을 주사위로 이겼다니 믿기지 않는군.”
바심은 율을 유심히 살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고 있는 시미터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것이 율의 힘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눈치였다.
바심은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실례했다. 좋은 여행이 되길 빌겠다.”
바심은 식당 입구에 대기하던 전사를 이끌고 사라졌다.
“이젠 놀랍지도 않네요. 왕족에, 아나타토이에···.”
이디프의 소드마스터와 같은 경지라 일컬어지는 아나타토이를 만난 루디가 퉁명스럽게 소감을 말했다.
“나와 다니다 보면 이런 놀랍지도 않을 일이 앞으로도 많을 거야. 후회해도 늦었어. 비싼 돈을 들인 널 당장 놔줄 일은 없으니까···.”
율은 천천히 와인을 들이키며 맛을 음미했다.
“후회라니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심심할 틈 없어 좋겠네요.”
루디가 율과 보낸 시간이 그리 길진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 평탄치 못할 길 위에 올랐음을 직감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성소로 향하는 율과 루디에게 성문 수문장이 뜻밖에 소식을 전했다.
이딤의 성소로 가는 순례의 길에 괴물이 출몰하여 많은 순례자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었다.
율은 개의치 않자 험상궂은 흑인이 욕을 해댔다.
“미친 새끼··· 나가 뒈지는 건 네 맘이지만 그 검을 회수하는 귀찮은 일은 우리 일이 되겠군.”
“길이나 열어.”
수문장은 이를 득득 갈았지만, 굳이 죽으러 간다는 놈을 말릴 생각은 없었다.
주인 잃은 돈주머니라면 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남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무서우냐?”
낙타를 몰고 있는 루디에게 율이 물었다.
“뭐가 나올지 알고는 있어요?”
“아니···.”
“구울, 식인 요물이에요. 이곳 아나타토이도 단독으론 이렇게 나서지 않는다죠.”
“무서운 게로구나.”
“누가 무섭댔어요? 칫.”
“가만있자, 구울이라면··· 간이 별미라던데···.”
“헉··· 그런 소리는 어디서 들었어요?”
“옛날 책에서···.”
“헛소리··· 1년 반을 이디아에서 보냈지만 그런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어요.”
“그놈 간이 성장기에 그렇게 좋다고 했어. 만일 나타나면 간을 꺼내 네게 먹여야겠다.”
“웩··· 듣기만 해도 속 뒤집히는 것 같네요.”
로취가 루디를 곁눈질하더니 투루루 투레질했다.
성소로 가는 길엔 오아시스도 세 곳뿐이라서 중간에 숙영이 필수였다.
율 혼자라면 로취가 좀 구시렁대더라도 밤낮없이 걸었을 것이다.
아직 루디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다니기엔 수행이 부족해 보였다.
율과 루디는 점심도 거른 채 첫 번째 오아시스로 향했지만, 하룻길에 닿기엔 너무 멀었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선인장이 군락을 이룬 곳에서 숙영하기로 했다.
비가 내린다면 이곳엔 물이 고이고 선인장은 꽃을 피울 것이다.
낙타는 가시가 돋친 선인장을 잘도 베어 먹었고 로취는 따라 하지 못했다.
식사 준비를 하던 루디가 말 쿠키로 로취를 약 올렸다.
“로취, 이 불쌍한 말 새끼야. 종일 걷느냐고 배가 고프지?”
순순히 쿠키를 내놓지 않을 걸 안 로취가 콧구멍을 크게 벌이고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종이 다른 두 수컷의 서열정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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