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은 아이가 궁금하다.
징벌방에서 나온 율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체력 훈련도 하고 여러 가지 수업을 들었다.
흥미를 끈 것은 이 세계의 신과 권능이었다.
······
하늘님은 잠이 들었다.
잠든 하늘님의 꿈에서 탄생한 여덟 권능은 만물을 이루는 힘의 원천이다.
태초에 백색 권능이
시간과 공간을 만들고 시작을 알렸고,
청색 권능은 만물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저 지켜볼 뿐이다.
황색 권능은 미약한 것과 강한 것을
나누고 서로 사귀게 했으며,
적색 권능이 지혜와 지식을 전하여
최초의 문명이 탄생했다.
녹색 권능은 생명이
자연 속에서 먹고 사는 이치를 정했고,
자색 권능은 법과 질서를 만들어
국가와 권력을 만들었다.
주색 권능은 모든 힘과 이치를
수호하며 만물들은 주시했고,
흑색 권능은 마지막을 기다린다.
······
하늘님과 여덟 권능을 믿는 세상이다.
잠든 하늘님을 주로 섬기는 앗센 제국에선 각각 권능을 섬기는 이들도 자유롭게 믿음을 지키고 산다 했다.
예컨대, 백색 권능과 청색 권능을 섬기는 밀교승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 수인은 황색 권능을 섬긴다 했다.
그 밖에 적색 권능을 섬기는 연금술사와 연단술사 무리도 있고 마법을 부리는 주색 권능을 숭배하는 이도 있다고 했다.
‘요력에 도력에 연금술에 마법까지······.’
다양한 믿음이 공존한다는 것도 놀랍고 전생에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미지의 힘과 권능이란 존재에 율은 적지 않게 놀라게 됐다.
흥미를 끄는 또 다른 것은 여러 대륙이 있다는 점이었다.
앗센 제국이 있는 이곳 아나시비 대륙을 비롯해 이디프, 카실로스 대륙과 1,000년 전에 멸망한 카르파나 대륙까지······.
크게 네 개의 대륙으로 이뤄진 세상엔 다양한 인종과 민족, 수인과 몬스터가 존재하며 지금까지 보아온 것은 그중 극히 일부분이라는 사실에 강한 호기심이 들었다.
‘차차 알아보는 재미도 있겠는걸.’
율은 전생에서 지적 유희자로 분류될만한 인물이었다.
이런 율에게 던져진 넓은 세계와 다양한 권능, 문화는 두고두고 탐닉할 즐거움이 됐다.
체력 훈련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제국의 종특이라고 할 수 있는 사예 훈련도 시작됐다.
검산에서와 마찬가지로 제국도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활쏘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활쏘기엔 남녀노소 부귀빈천이 따로 없었다.
대장군부 근처엔 활터가 있었는데 나뭇잎만 떨어져도 깔깔대는 어린 소녀도 가슴 보호대를 하고 활터로 몰려가는 것을 여러 번 봤었다.
어린새들은 각 가문을 대표하는 선수였다.
육십보에선 거의 다 만발이었고, 백이십보에서도 만발을 쏘는 어린새가 수두룩했다.
아직 근골이 완성되지 않은 탓에 더 먼 거리를 쏘거나 무거운 화살을 날리지는 않았다.
백이십보를 쏘는 것만 하더라도 대단한 솜씨임엔 분명했다.
마지막 수업으로는 늙수그레한 선술스승이 지도하는 심법 수업이었다.
선도 호흡으로 심신을 단련하는 수업이다.
사람의 일생을 두고 가장 산만한 시절, 여덟 살배기에게 정좌하여 호흡과 신경을 집중하는 일은 곤욕이 따로 없다.
무가武家 출신이나 선술을 가문비기로 삼는 어린새는 그나마 곧잘 따라 했지만, 저잣거리에서 나고 자란 규여 진과 같은 녀석은 좀이 쑤셔서 견디기 힘든 수업이었다.
“후 와, 지루해 죽는 줄······.”
“영기가 주둥이로만 모이는 네 놈이야 지루했겠지. 으흠.”
진이 수업을 마치고 투덜대자 선술 훈련에 자신 있는 맥달이 비아냥거렸다.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그 둘은 투닥거렸다.
지치지 않고 생동하는 여덟 살배기를 한낮 더위를 식혀주는 고목과 같은 선술스승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가 숨긴 저 맑은 기운은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렵구나. 내 죽고 다시 나와 이 나이를 먹도록 정진한다 해도 성장한 저 아이를 당하지 못할 것만 같구나. 허허, 인생무상이로다.’
영기가 새어나갈까 봐 애써 몸 안에 가두고 호흡하던 율의 모습을 떠올리며 선술스승은 장탄식했다.
“박사,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그려.”
어느 틈엔가 아시두리의 훈육감이 선술스승 옆에 섰다.
“허허허, 늙으니 어린새 수업도 힘에 부치는 모양이오. 훈육감께서 웬일이시오?”
훈육감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올해 든 어린새들이 어찌나 우악스러운지 매일 깨지고 다치는 이가 생깁니다그려. 어린새끼리 다툼엔 어느 정도 방관하는 게 전통인 것은 알지만 고민이 됩니다.”
“허허허, 매해 드는 어린새마다 성정이 다르긴 하지요.”
“대장군부의 막내는 어때 보이십니까?”
“징벌방에 다녀온 어린새 말씀인 게요? 벌을 받고 나선 좀 누그러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아시지 않습니까? 검산 지킴 씨족의 아이라는 것을······.”
‘성상聖上께서 아이가 궁금하신 게구나.’
선술스승은 훈육감이 황실에서 모종의 임무를 가지고 파견한 관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영기가 다른 아이보다 맑고 풍부합디다. 산 좋은 곳에서 정기를 많이 취한 탓이겠지요.”
한소끔 침묵이 이어지고 훈육감이 운을 뗐다.
“왜 한참 시끄럽지 않았습니까. 경천동지의 기개를 타고 날 아이 얘기로요.”
······
“내 이 나라 국무의 맥을 이어온 신지 씨요. 예언이란 말이오. 어떤 눈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오. 두억시니 눈으로 보면 두억시니만 보이고 하늘님 눈으로 보면 하늘님만 보이지요.”
“허허허, 그런가요?”
‘성상의 자리는 불행한 자리다. 밑도 끝도 없이 의심하고 경계해야 하니······. 저 어린 것 앞날에 큰바람이 불겠구나. 어이할꼬.’
그날 밤.
선술스승은 아시두리의 수장인 태학박사를 찾았다.
태학박사는 구레나룻 수염을 족집게와 쪽 가위로 다듬고 있었다.
“선진先進께서 어쩐 일이시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 모양이오. 음? 선진 얼굴이 대체 왜 그 모양이오?”
“궤를 열고 천문을 보았네.”
“허허 참, 그렇게 길흉을 알아봐 달라고 소원을 해도 입때껏 청 한번을 들어주지 않은 분이 갑자기 천문을 보셨다?”
얼굴이 반쪽이 된 늙은 선술스승은 태학박사 앞자리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어린새와 사범 앞에서 근엄했던 태학박사도 동문수학한 선진 앞에선 학도 시절처럼 너스레도 떨며 격 없이 굴었다.
그런데 선술스승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
둘만의 긴요한 얘기가 오가고 태학박사는 사색이 됐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해를 삼키고 나온 아이란 말이오? 선진! 이 사실이 성상 귀에 들어간다면 그 아이는 물론 해모 씨 일가도 앞으로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을게요.”
“1,000년을 이어온 가문이네. 무너진다면 이 제국도 사분오열될 것은 자명한 일이지. 제국을 이루는 한 축이 무너지고 나면 봇물 터지듯이 분열하고 말게야.”
“그걸 누가 모른답니까? 확실한 거요?”
선술스승은 아이의 사주를 적은 종이를 태학박사에게 넘겼다.
“자네가 산술은 나보다 나았지. 계산해 보게. 8년 전 ‘헛달’이 뜨고 해를 삼킨 날과 일치하는지······.”
태학박사는 아이의 사주를 받아들고 한참을 계산하더니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개천의 징조로다. 아아, 어찌 내 대代에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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