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겸전文武兼全
여름이 오고 방학을 할 무렵 선술스승 효기는 홀연히 사라졌다.
매일 솔잎을 줍던 어린새들은 이제 거의 한 줌이 다 된 솔잎만 만지작거렸다.
율은 선술스승이 사라진 이유가 자신과 관련 있을 거라 짐작했다.
방학이 왔다.
정든 동무들은 모두 집으로 향했고 율도 대장군부로 돌아왔다.
율은 아시두리에서처럼 선도의 호흡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아버지 가림의 지도로 가문비기도 연마해 나갔다.
한낮엔 무치와 대발, 막손 두 가슬 땅 가히 갑사와 웃고 떠들며 연무장에서 수련했고 밤엔 아버지 가림에게 검술을 배웠다.
길어진 해만큼 길 것 같던 여름도 금세 지나고 다시 아시두리로 간 율은 동무들과 주인 없는 선도장을 아지트 삼아 매일 드나들었다.
돌아올 선술스승을 위해 주변을 정갈히 하고 스승이 가르쳐준 대로 수련도 했다.
한가위 무렵에 율은 처음으로 그의 형뻘이 되는 해모 치령을 처음 만나게 됐다.
“네가 율이로구나.”
다소 차가운 인상의 치령은 아버지 가림을 닮았다.
“처음 보입니다. 치령 형님.”
“확실히 고모님을 닮았구나. 피는 못 속인다더니······.”
율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치령은 젊은 버전의 가림이라는 생각이 율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치령은 무뚝뚝했지만 어린 율과 북방의 얘기와 검술 얘기를 곧잘 나눴다.
살아서 품에 안을 수 있는 두 아들이 조곤조곤 얘길 나누는 모습을 본 초고 부인은 행복했다.
그 가을엔 향이와 무치가 가례를 맺고 부부가 됐다.
가례 중에 입술 꼬리가 아래로 처진 사람은 율이 유일했다.
이젠 향이는 갑사 무치의 아내 ‘가슬 댁’으로 불러야만 했다.
가슬 댁이 신접살림을 차리고 한참 재미 볼 때쯤 황궁에서도 경사가 들려왔다.
생모인 황후가 건강한 아들을 생산했다는 소식이었다.
마땅히 축하해야 할 일이었고 율은 마음을 다해 축하했다.
그리고 생모를 마음에서 지웠다.
시간이 흘렀다.
아홉 살이 돼 아시두리에서 두 해째를 맞는 37번 방 어린새들은 새로 맞은 후배들 숙소에서 벌어진 소란에 한 소리씩 했다.
작년에 자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서열을 정하는 싸움이 며칠째 계속되는 중이었다.
“하아, 요즘 것들이란······.”
“언제 철이 들려는 지, 쯧쯧.”
“저 때가 좋았지. 암.”
“애들도 아니고, 말로 잘 풀면 될 것을······.”
한 달여 동안 주변 어린새들의 단잠을 방해했던 자신들의 만행은 아예 잊어버린 듯했다.
아홉 살부턴 검술도 배우고 말 타고 부리는 기승술도 배우기 시작했다.
조랑말을 타던 아홉 살은 말을 타고 야외로 수련 나가는 선진들의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몹시도 부러웠다.
한 해··· 두 해··· 시간은 빨리 지났다.
열두 살이 돼 진검을 다루고 말을 달려 산과 들로 수련을 다닐 무렵이 돼서야 매일 같이 쓸고 닦았던 선도장의 주인이 돌아왔다.
선술스승은 갈 때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삼 년 하고도 반이란 시간이 지난 후였다.
노스승은 선도장을 잘 관리해온 어린새들을 치하하고 그간의 성장을 대견해했다.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구나. 기특하다. 이제 군마를 부리고 병장을 다루게 됐으니 한층 더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에 매진하도록 해라. 군마와 병장은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힘의 원천은 굳센 마음에서 나온다. 이점 명심하거라. 허허허.”
노스승은 인자한 웃음을 보였다.
율과 동무들은 노스승의 조언에 고개를 주억였다.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오늘날 아시두리 동배 중 가장 뛰어난 4인방이 된 배경엔 노스승의 훈육과 충고가 주효했다는 것을.
병장기를 다루며 무리武理를 깨달아 가면서 예전 솔잎을 줍고 마당을 쓸던 그때 터득한 호흡과 집중이 얼마나 중요한 수련이었는지 어린새들은 근래에 새삼 느끼고 있었다.
노스승은 돌아와선 율에게 별다른 얘기를 건네지 않았지만, 율을 지극히 여겼던 모양이다.
다시 돌아온 효기는 율에게 치유술과 몇 가지 비술을 전수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노스승이 율을 따로 불러 앉혔다.
“이 비술을 네게 내리는 이유는 네가 어려운 처지가 될 것을 알면서도 시련을 스스로 받아들여서만은 아니다. 네가 걸을 길엔 필시 많은 불쌍한 인연들이 널 스치고 지날 것이다. 항상 인연을 소중히 하여라. 그리고 도와라.”
짧은 이유를 설명하곤 효기는 율이 가진 맑은 영기로 생명을 치유하는 법을 비롯한 그가 평생 이뤘던 선술의 요체要諦를 가르쳤다.
효기는 나머지 율의 동무에게도 특별한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맥달에겐 효기가 스스로 고안해낸 오묘한 진법을 가르쳤다.
진에겐 기상을 예측하고 길흉을 점치는 천문 보는 법을 가르쳤다.
마지막으로 강에겐 몸에 축적된 패왕기에 막힌 기혈을 열어 원활히 기운을 운용하게 하는 심법을 가르쳤다.
아이마다 성취할 수 있으면서도 꼭 필요한 비술을 전수한 셈이니 노스승의 혜안과 고심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인연이 닿지 않아 뭐 하나 챙겨주지 못한 많은 어린새를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무겁구나. 이것도 하늘님의 뜻이로다···.”
효기는 가끔 더 많은 어린새를 보살피지 못한 처지를 한탄했다.
이런 스승의 탄식을 들을 때마다 율은 자신 일로 스승이 자리를 비운 탓이리라 생각하며 마음이 좋지 않았다.
효기의 가르침에 힘입어 맥달은 패를 나눠 공방을 주고받는 진법훈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성적이 걸린 훈련에선 동배의 어린새들은 맥달과 한패가 되길 빌기까지 했다.
허허실실, 성동격서, 전격전, 신속 대응 등등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전술이 가미된 변화무쌍한 진법 전개는 지도하는 사범들도 감탄해 마지않았다.
진도 맥달 못지않게 어린새로부터 인기가 좋았는데 진은 걸어 다니는 기상감이란 소리를 들을 만큼 정확한 날씨 전망을 했다.
말을 타고 야외로 나가는 날이면 진의 입술에서 ‘쾌청’이란 소리를 듣고 나서야 행장을 꾸리는 어린새도 있었다.
게다가 나름 길흉을 점치는 재주도 좋아 그때부터 4인방의 재주를 시기한 다른 패당 어린새의 시비나 함정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가장 놀라운 변화는 오황자 강이었다.
강은 스승이 가르쳐준 심법에 심취해 수련에 전념하더니 점점 외모가 변해 갔다.
터질 것 같은 볼살도 푹 꺼지고 눈두덩이에 붙은 살도 빠져 칼로 째 놓은 듯한 가는 눈이 번쩍 떠져 부리부리해졌다.
몸 둘레가 키만큼이나 됨직했던 것이 점점 홀쭉해지고 팔다리는 늘어나고 큰 몸을 지탱하던 근육들이 등장하자 대리석을 깎아 만든 조각상 같은 몸매가 드러났다.
말하기 좋아하는 어린새 사이에선 삼황자와 풍모를 두고 비교하는 말까지 돌 지경이었다.
치유술과 아직 그 쓰임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몇 가지 비술을 효기에게서 사사한 율은 아직 그 재능을 밖에 내보이지 않았다.
구태여 재주를 뽐낼 필요는 없었다.
율은 여전히 강했고 여전히 생동하는 생기를 품었으며 매사 경쾌했으며 즐거웠다.
열네 살이 돼 청년티가 나기 시작한 율과 동무들은 우악스러운 악동에서 어느덧 아름다운 소년이 돼 아시두리를 무대로 지덕체를 모두 갖춘 문무겸전의 총아로 촉망받았다.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