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바이
사람들은 이들을 도르바이라고 불렀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도르바이를 두고 실체가 없는 전설이라고도 했다.
도력을 부려 두억시니의 진창을 무력화한 이들은 도르바이, 호랑이 수인이다.
‘도르바이라니 대체···. 그리고 수인이 도력을 부리다니 이건 미처 몰랐다. ’
베르내 변경에 우나이가 많은 이유는 목리 씨의 수호 수인이 우나이, 늑대 수인이기 때문이다.
천년도 더 된 목리 가문과 늑대 수인과의 맹약은 아직도 유효했다.
도르바이는 해모 가문의 수호 수인이다.
도르바이는 모여 살지 않았다.
그 숫자도 적었다.
이 존재가 옛이야기가 될 만큼 희미해졌던 이유는 이들이 사람과 어울리지 않고 산에 틀어박혀 오로지 선힘 수행에 힘을 기울인 탓이다.
그런 도르바이가 수백이나 이곳에 나타난 것은 분명 예삿일은 아니었다.
앗센에서 도르바이를 소환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해모 가문의 수장인 가림이었다.
나무를 잘라 만든 작대기에 불과한 곤방이 푸스름한 기운을 머금은 궤적을 남기면 두억시니는 공중을 날았다.
악의로 가득 찬 두억시니는 전세가 불리해졌음에도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기세와 사기를 고려하지도 않았다.
진창이 얼추 사라지자 드디어 밑도 끝도 없는 대기 명령에 이만 득득 갈던 베르내의 기병이 땅을 박차고 요격에 나섰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 난전 중이던 병사들은 힘이 솟았다.
사람과 말, 오랜 시간을 두고 형성된 유대는 무서운 무기가 돼 두억시니를 향했다.
중무장한 기병을 태우고 마갑까지 두른 전투마의 중량은 사람을 종잇장처럼 찢어버리는 두억시니에게도 버거운 무게···.
전력으로 달려 그대로 들이받으며 지나가기만 해도 요물은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점점 전세는 앗센 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벽사의 도력을 지닌 도르바이가 독무에 이르자 완강했던 독무도 흩어지기 시작했다.
진창과 독무를 만든 두억시니의 수괴가 멀리서 울부짖었다.
크아악!
귀청 떨어져라, 울부짖은 수괴 소리에 앗센의 병사들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런 젠장··· 여섯 굽이? 아니 여섯 굽이라니··· 저런 건 들어보지도 못했다.”
미늘창으로 적을 찍어 죽이던 걸무가 침음을 내뱉었다.
전초전에서 율이 수급을 벤 네 굽이도 흔하지 않았다.
다섯도 아니고 여섯 굽이는 아시두리에서도 두억시니 전쟁을 오래 치른 노병의 입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등위의 요물이었다.
요혈을 뒤집어쓴 가림이 지척에서 붉칼로 적을 지져대던 강에게 말했다.
“황자님, 조의를 불러 모아 두억시니의 본거지를 치십시오. 수괴는 변경백과 제가 척결하겠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어미 두억시니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대장군.”
황자 강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베르내의 숙원이던 두억시니의 본거지를 치는 과업이 자신의 손에 맡겨졌다.
지난 100년의 숙원을 정리하고 새로운 100년을 기약하는 위대한 과업이 자기 손으로 이뤄진다면···.
강은 조의를 불러 모으고 말을 대령하라 명했다.
가림은 두억시니를 지워가던 율에게도 당부를 잊지 않았다.
“황자님을 도와 어미 두억시니를 없애라. 선힘이 약한 자는 눈만 마주쳐도 요기에 홀린다. 조의가 나설 때다. 부디 조심하거라.”
“반드시 죽여없애겠습니다.”
율은 본진이 보이는 둔덕을 보며 외쳤다.
“로취!”
율은 땅의 말로 로취를 호출했다.
애꿎은 땅바닥을 때리던 로취는 신명이 나 제 주인 호출에 응했다.
로취가 저 스스로 전장의 주인을 찾아 나서자 경쟁 관계에 있던 흑영도 달렸고 마부들이 손쓸 틈도 없이 조의의 말들이 전장으로 달렸다.
명을 전하는 전령이 수고를 덜 수 있었다.
히이잉, 푸륵.
로취는 어느새 율의 곁으로 가 ‘내 왔소.’ 하고 소리를 냈다.
강은 빠르게 조의 중 부상이 심하지 않고 선힘이 아직 흐트러지지 않는 이들을 선별했다.
“남은 조의는 대장군을 도와라. 살아서 만나자.”
남게 된 조의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지로 들어가는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분한 마음과 전장보다 더 위험할 길을 나설 동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교차했다.
역사를 이루려는 무리는 두억시니 군세를 크게 우회해 말을 달렸다.
가림은 아까운 수많은 인명을 희생하면서 베르내에 뿌리내린 두억시니의 대장 격인 여섯 굽이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전쟁의 대단원은 그저 여섯 굽이의 척결이 아니었다.
본거지에서 두억시니를 생산해내는 어미 두억시니를 죽여 없애야 했다.
어미를 없애지 않고는 수년이면 무수히 많은 두억시니가 장성할 것이고 이런 불행한 죽음이 되풀이될 것을 노장은 잘 알았다.
“대장군, 저 원수 놈은 내 몫이오. 건뜻하면 내 몫을 뺏지 않았소? 이번만큼은 대장군께 양보하지 않을 거요! 하하하.”
“허허허, 변경백의 농을 들으니 옛 생각이 나는구려. 부인께선 그거 아시는지 모르겠소. 초고를 놓고 우리가 다툰 일 말이오.”
“어허, 서로 묻기로 한 일을 어찌 새삼 꺼내시오? 그분은 내 놓쳤어도 저놈은 내 몫이오.”
탁주 한 사발 놓고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얘기꽃을 피울 시간은 이미 없었다.
두 노장은 마지막이 될 전투로 회한을 달래며 다가올 이별을 준비했다.
&
전장 후방 깊숙이 두억시니 본거지로 달리는 길엔 독무와는 또 다른 안개가 자욱했다.
곳곳에 사람의 인골을 쌓아둔 저주 걸린 흉물이 만들어낸 안개였다.
조의 수는 수백 명, 나이가 많아봤자 스물서넛, 적은 이는 열여섯이었다.
율이 만들어낸 영기의 도움으로 기분 나쁜 안개는 조의를 덮치진 못했고 주변 사위도 어느 정도 밝아졌다.
두억시니 본거지를 둔 숲이 나왔다.
조의는 말에서 내려 걸어 숲으로 들어갔다.
음침한 숲에는 뿔도 다 자라지 않은 저급한 두억시니가 어슬렁거렸다.
곧 몸놀림이 재빠른 조의가 쉽게 제압했다.
조의는 모두 몸을 낮추고 은밀하게 숲 깊숙이 들어갔다.
덜 자란 두억시니는 피할 수 있으면 피했고 길목을 가로막는 놈은 죽여 되도록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움직였다.
요기가 점점 진해지는 것을 느낄 때쯤 조의 눈에 상상하기도 싫은 장면이 펼쳐졌다.
사람들, 넋이 나간 사람들이 알몸으로 서로 뒤엉켜 있었다.
음탕한 몸짓으로 서로를 탐하는 사람들, 사람이라 부르기엔 이미 늦어버린 요물의 희생물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지켜보는 여인 형상이 눈에 띄었다.
얼굴은 사람 형태였다.
드러낸 젖가슴은 족히 수십 개는 돼 보였다.
땅에 깊게 나무뿌리처럼 박힌 수십 가닥의 다리 사이로는 알 덩어리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 요물 근처엔 주먹만 한 새끼 두억시니가 설설 기어 다녔다.
낄낄대며 희생물들의 난교를 바라보는 십여 마리의 네 굽이 두억시니도 보였다.
“저게··· 재앙의 근원이 되는 어미인가···.”
맥달은 희생물과 어미 두억시니를 번갈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저들도 가족이 있었고 사람다운 삶이 있었으리라.
율은 사람의 음탕과 타락으로 두억시니가 잉태된다는 기록을 상기했다.
요물에 홀려 넋을 잃어버린 희생물의 몸짓이 무척이나 처연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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