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척난입
“크게 다친 어린새는 없는 듯합니다.”
“싸움의 원인이 뭐랍니까?”
“그야 뻔하지 않습니까? 이 시기엔 항상 벌어졌던······.”
“공공장소에서 벌어진 일은 이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아시두리를 책임지는 태학박사와 훈육감은 서로 의논해 주범인 율에게 징벌의 방에 3일간 머무르는 벌을 내렸다.
율은 반듯이 눕기도 어려운 좁은 독방에 갇히게 됐는데 이는 율이 바라던 대로였다.
대장군부를 떠나와 보름이 지나는 동안 검산에서 터득한 호흡법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이런 꾀를 내었다.
눈엣가시 같았던 흑지 걸무 패거리를 혼내줘 동배 중 입지를 다지는 것은 덤이었다.
‘딱 수련하기 좋은 장소군. 사흘간 호흡 공부에 매진해야겠다.’
율이 이런 잔꾀를 부리는 줄 모르는 그의 방 동료들은 희생한 율에 대해 신뢰가 싹트고 있었다.
율이 비운 방에선 곰바르에선 알아주는 거상인 진의 집안에서 넣어준 육포를 나눠 먹으며 옥신각신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니, 상황이 급박한데 밥이 목으로 넘어가든? 조금만 늦었으면 걔네가 아니라 우리가 묵사발이 될뻔했잖아!”
진이 육포를 질겅거리며 오황자를 강하게 질타하고 있었다.
“식사 마치고 하자고 분명히 말했다.”
누운 채 육포를 질겅이던 강이 대꾸했다.
“그나저나 율 녀석 얼마나 갑갑할까?”
맥달이 무표정한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조용히 처리하자니까 일을 크게 만든 것이 그 녀석이잖아. 그만한 각오를 했겠지.”
오황자 강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 걸무 녀석을 기절시킨 그 기술 말이야. 그런 수박술은 처음 보는걸. 너흰 어때?”
진이 반짝이는 눈을 하곤 물었다.
“목을 졸라 기절시키는 기술이야 많지. 그걸 그 녀석이 해냈다는 것이 놀랍지.”
줄곧 병사들과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맥달이 관점을 달리해 율의 기술을 칭찬했다.
“잘못하면 그 녀석 죽을 수도 있었어. 아주 위험한 수법이야.”
오황자는 기술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은근히 율을 힐난했다.
“네 뱃살에 압살해 죽을뻔한 애들을 생각하면 네가 더 무서운 수법을 쓴 거 같지 않냐?”
진은 오황자의 비위를 슬슬 긁어댔다.
우당탕탕탕.
육포를 씹다가 눈먼 주먹에 얻어맞은 맥달까지 엉켜 37번 방은 어제와 같이 소란해졌다.
사흘이 지나 율이 징벌방에서 나오게 됐다.
같은 방 동료랍시고 오황자와 맥달, 진이 마중을 나왔다.
“고생했다.”
무뚝뚝한 맥달이 먼저 안부를 물었다.
“두부 같은 건 없냐?”
율이 두부를 찾자 어린새들은 의아했다.
“웬 두부?”
“아니다. 그런 게 있다. 다음엔 준비해 둬.”
“미친놈 아냐? 다음이라니? 또 사고 치게?”
“하는 거 봐서······.”
율은 진이 이죽거리는 걸 무시한 채 자신을 노려보는 걸무와 눈을 맞췄다.
‘오······ 저 녀석 눈빛이 살아있네. 정식으로 맞상대하면 이길 수 있을까? 골치 아프네.’
징벌방에서 나온 율은 어린새들에게 좋은 구경거리가 됐다.
공공장소에서 공개로 패악질을 부린 녀석을 바라보는 시선은 제각각이었다.
동배 중에 원탑이라고 믿었던 걸무를 기절시킨 율을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녀석도 있었고 귀족의 예법에 어긋난 행동이라고 질타하는 시선도 있었다.
‘으으, 어쩔 수 없잖아. 호흡 공부는 해야겠고 마땅한 시간과 장소는 없고······. 그렇다고 매번 아무 데서나 두들겨 패다간 가문에 누가 될 텐데······.’
갑자기 율을 구경하던 인파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큭큭큭, 오황자나 돼서 시정잡배처럼 몰려다니며 사람을 상하게 하다니 폐하가 아시면 뭐라 하실꼬?”
무리를 데리고 어린새 사이를 가로지르고 나타난 이는 아홉 살 어린새였다.
여덟 살 어린새들은 움찔하며 물러섰다.
한 기수 위, 한 학년 위······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가장 대하기 어려운 위치다.
앞장선 선배 어린새가 강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황자는 제국의 존엄을 이어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아무리 아시두리에선 모든 어린새를 평등하게 대한다 해도 선배 된 어린새가 오황자를 공개적으로 무시하는 언사를 한다는 것은 예삿일은 아니었다.
오황자 강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저 뚱하니 서 있기만 했다.
답답해진 건 나머지였다.
“하아, 아홉 살배기와 무슨 살이 끼었나? 왜 자꾸 부대끼는지 모르겠네.”
방금 징벌방에서 나온 율이 종알거렸다.
“오호라, 네놈이 새 황후마마가 버렸다는 반 도깨비의 아들놈이구나. 반 도깨비의 아들놈이니 사분동이 도깨비인가? 큭큭큭.”
“쥐어터지기 전에 어디에 누군지나 말해라. 혹시 병신이 되면 깽값 부쳐줄 곳은 알아야지.”
율의 거침없는 입담에 얼굴이 일그러진 상대는 이를 갈며 말했다.
“나는 사택 구수, 사사로이는 오황자의 외사촌이 되지. 돌아가신 황후마마의 외조카이다.”
“외척이 발호하면 나라가 망한다는데 내 오늘 네 놈을 혼쭐내주고 나라를 구해야겠다.”
율은 구수의 말이 끊어지기 전에 몰아붙였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대목이 나오자 맥달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곤 한 걸음 앞서 나왔다.
사택 구수는 얼굴이 벌게져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말이······며은 다, 다인 줄 아느, 냐!”
“와, 시발, 말 더듬는 것 좀 봐! 정말 ‘외척질’ 하러 온 듯. 오 소름······.”
말 만드는 재주가 있는 진이 특유의 신경을 건드는 이죽거림에 사택 구수는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뎅뎅뎅.
오후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종이 널 살렸다. 외척 놈아.”
율은 갖은 쌍욕을 날리는 사택 구수를 뒤로 한 채 유유히 동료와 함께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
“외사촌이면 네 편이 돼 줘야 하는 거 아냐?”
율이 답답하다는 듯이 따져 묻자 강이 오후 내내 굳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외가는 삼황자 형님을 지지하지. 다음 황제로 말이야. ······ 어머니는 날 낳으면서 몸이 쇠약해지셨다고 해. 결국엔 아우를 낳다가 돌아가셨고. 형님도 그래서 날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 그 탓일 거야.”
······
“하긴 너처럼 큰 몸을 낳았으니 몸이 버텨낼······.”
빡! 컥.
맥달이 진의 뒤통수를 갈겼고 둘은 또다시 서로 엉겨 붙었다.
선 황후는 강까지 다섯 아들을 보았고 강 아래로 딸을 하나를 두었다.
그리고 몇 년 전 마지막이 된 일곱 번째 출산 도중에 죽었다.
아들 다섯 중 둘은 전장에서 산화했고 강의 손위 형은 어려서 죽었다고 했다.
외가마저 등을 돌린 강은 마음 둘 곳이 없었고 새어머니가 된 율의 생모, 황후는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모양이었다.
‘친아들도 찬밥인데 뭘. 이 녀석도 참······.’
율은 꽃보다 아름답고 얼음보다 차가운 생모 생각을 했다.
차라리 그녀가 덜 아름답고 조금은 따뜻한 분이면 어땠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강이 녀석이 지금보단 불행하다 느끼진 않았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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