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딤의 성소
모래 위에 우뚝 선 흰 건물들.
어디서 어떻게 구해왔을까.
열사의 땅 위에 솟은 성소는 온통 하얀 대리석으로 빛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건 신탁이 내려지는 성역이다.
수십 개의 대리석 기둥이 지탱하고 있는 원형 건물 앞으로 신탁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마스터, 아무래도 성소에선 하디칸의 시미터는 감추는 것이 좋겠어요.”
왕권이 미치지 않은 곳이라곤 하지만 이딤의 성소는 크고 작은 전쟁 전에 신탁을 구하고 대동할 종군 무녀를 찾는 곳이다.
루디는 왕위쟁탈전이 벌어질 거라는 전쟁 소문을 들어왔기에 전쟁의 한 축이 될 하디칸의 흔적을 감추고 싶었다.
율도 별말 없이 칼을 루디에게 내어줬다.
루디는 모포 속에 칼을 숨겼다.
성소를 지키는 거세 근위병이 창과 방패로 무장한 채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성소로 들어서자 루디는 성역을 향해 율을 이끌었다.
신탁을 구하려면 성역의 무녀를 만나야 했다.
“그쪽이 아니다.”
율은 사람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루는 성역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신탁은 성역에서만 구할 수 있는데요?”
“저쪽이군.”
율은 거세 근위병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지성소를 가리켰다.
성소와 분리된 건물, 가장 거룩한 곳.
“마스터, 저긴··· 최고 무녀나 출입하는 곳이에요. 보세요. 경비도 삼엄하잖아요.”
“네 말이 맞았구나. 신탁? 저건 적당히 위로나 희망 섞인 말을 읊어대는 장사에 불과하다. 내가 찾는 건 저 건물 안에 있다.”
율의 말에 루디는 얼굴이 핼쑥해졌다.
절대 무위로도 가질 수 없거나 이룰 수 없는 것도 분명 존재한다.
믿음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믿음으로 무장한 이곳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을지언정 스스로 무릎 꿇어 굴복시킬 순 없으리라.
“마스터, 저긴···.”
루디의 말을 더 들어보지도 않고 율은 지성소로 발을 돌렸다.
지성소 앞엔 거세 근위병과 최고 무녀를 시중드는 시녀 계급의 무녀가 있었다.
사리 분별을 하기 전부터 성소의 근위로 키워진 순수한 전사들이 율의 앞을 막아섰다.
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최고 무녀에게 올릴 공물이 있소. 전해 주시오.”
율은 품 안에서 손바닥 크기의 가는 나뭇가지를 꺼냈다.
숲이 아니더라도 정원 한구석에 있는 나뭇가지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초라한 나뭇가지였다.
은쟁반을 받쳐 들고 있던 무녀가 의아한 눈초리로 율을 바라봤다.
율은 나뭇가지를 쟁반 위에 올리고는 약간의 선힘을 불어넣었다.
근위 중인 거세병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무녀의 입술에 가는 탄성이 터졌다.
볼품없는 나뭇가지에 꽃눈이 생기더니 천천히 꽃망울을 터트렸다.
화려한 흰 꽃이 피었다.
이곳 사막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꽃.
앗센의 북부에서 한겨울에 피는 설빙화였다.
탄성을 터트린 무녀는 율에게 묵례를 하곤 급히 은쟁반을 들고 지성소 안으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마법··· 마법도 부린단 말인가?’
루디도 거세 근위병이나 무녀만큼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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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빙화··· 그대가 보는 앞에서 꽃을 피웠단 말인가요?”
“네, 키리얀 최고 무녀님.”
하늘거리는 백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율이 공물로 올린 꽃가지를 손에 들고 지성소를 서성였다.
‘이곳으로 향한 권능 조각이 청색 조각이었구나.’
이곳은 이딤의 성소, 이딤은 주색 권능이다.
주색 권능은 적색 카르파와 황색 지울에서 나온 권능이다.
그래서 주색의 이딤은 카르파를 어머니, 지울을 아버지라 여겼다.
신에게서 나온 뿌리는 같지만 어쩐지 청색 람차와는 극성이 다른 권능이라 여기기도 했다.
‘이방인이 이딤의 조각을 빼앗고자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 이방인을 은밀히 모셔오세요.”
“하오나, 이곳에 낯선 이를 들이는 일은 금지돼 있습니다. 최고 무녀님.”
“금지를 어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이기도 하죠? 그렇죠?”
무녀는 머리를 조아리고 말없이 지성소 밖으로 향했다.
최고 무녀 키리얀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세간에 소문이 파다한 만큼 키리얀도 곧 벌어질 왕위쟁탈을 위한 전쟁을 예견했다.
전쟁이 벌어지면 키리얀은 국왕과 하디칸 둘 중에 한 사내를 선택해 종군해야 할 몸이 된다.
병사들을 위해 기도하고 승리를 기원하는 전장의 여신이 돼야 한다.
기도와 기원을 별개로 종군 무녀는 군세를 이끄는 우두머리의 노리개이기도 했다.
때때로 공을 세운 장군이나 병사의 시중드는 일도 마다치 말아야 한다.
수십, 수백이 될 경우라도.
혹여, 전쟁에 패하게 된다면 승전을 고하는 제물로 화형을 당하거나 승리한 병사들의 성노예가 되기도 한다.
전쟁에 이겼다고 해도 형편이 많이 나아지진 않았다.
용도를 다한 무녀는 비싼 값에 돈 많은 상인에게 팔리거나 지방 호족에게 넘겨져 노리개로 삶을 살아가야 한다.
멀리 바다 건너 도시로 팔려나가 고급 매춘부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키리얀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굶주린 가족을 위해 어린 키리얀이 성소의 무녀로 가게 됐을 때 그녀의 어머닌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곳에선 적어도 굶지는 않는다고 들었다. 더 나빠질 건 없단다. 아가야.”
더 나빠질 건 없었다.
스스로 그렇게 믿고 기꺼이 무녀가 됐다.
키리얀은 독보적인 미모와 총명한 두뇌, 이딤의 아내이자 딸로 터득한 여러 이능으로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최고 무녀의 자리에 올랐다.
최고의 무녀란 다음 전쟁에 희생될 제물이긴 했지만 말이다.
베일이 드리워진 지성소의 은밀한 방으로 한 사내가 들어오자 키리얀의 상념이 끊어졌다.
두 남녀는 베일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설빙화를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림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군요.”
“기쁘게 받아줘서 나도 기쁘오.”
“나는 이딤의 아내이자 딸, 성소의 최고 무녀 키리얀이라고 해요.”
“율이라고 하오.”
“율, 그래요. 율. 공물을 전하러 먼 길을 오시진 않았을 텐데, 무엇을 원하세요?”
“이딤을 만나고 싶소.”
키리얀은 대답이 없이 가만히 베일 사이를 뚫고 율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율,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나 알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모르오.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말해주시오.”
키리얀은 베일을 걷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는지 뻔뻔한 사내의 얼굴을 보려 했는지 모를 일이다.
눈처럼 하얀 피부, 시원하게 뻗은 고운 눈썹, 붉고 도톰한 입술과 터질 것 같이 물오른 여체가 율 앞에 섰다.
커다란 눈망울이 율을 바라봤다.
마치 율의 내면을 들여다보듯 깊고 무거운 눈매였다.
“권능 조각을 원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군요.”
“원한다면 내 속에 조각을 가져가시오. 가져갈 방법이 있다면···.”
“풋, 단서를 붙이는 것이 위협처럼 들리네요. 일개 무녀가 무슨 힘이 있다고···.”
두 남녀는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입술을 먼저 연 것은 율이었다.
“도와주시오. 이딤을 만나고 싶소.”
키리얀은 묵묵부답이었다.
‘이 남자··· 내게 무얼 요구하는지 알지 못한다.’
키리얀의 깊은 눈동자에 이채가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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