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도의 귀공자
대장군부 저택은 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 훨신 크기가 컸다.
내실이 있는 곳까지 여러 문을 거쳤는데 근엄한 표정을 한 가히 갑사가 문을 지켰다.
개의 수인 가히는 표정은 매우 과묵했지만 귀여운 꼬마를 슬쩍 훔쳐보곤 꼬리를 살살거리기도 했다.
대장군부의 내실에 들자 구레나룻을 멋지게 기를 중년 남자와 자애로운 미소가 아름다운 중년 여자가 어머니와 나를 반겼다.
“어서 오너라. 수임아.”
“오라버니······.”
대장군 해모 가림은 측은한 눈빛으로 여동생 해모수임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어찌나 애틋했는지 어렸던 내 기억에 단단히 못 박혔다.
나는 한 아리따운 여인 손에 이끌려 푹신한 침구가 있고 창밖엔 화초와 연못이 보이는 방으로 갔다.
“도련님, 저는 향이라고 해요. 앞으로 도련님을 모실 거예요.”
향이라는 여인은 내 하녀였다.
향이는 귀여운 꼬마의 낡고 남루한 옷을 모두 벗기고 방 옆 목욕탕으로 데려가 정성스레 씻겼다.
이때 난 이지理智는 분명 전생의 기억에 의존했지만, 감정과 감각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젊고 아리따운 손길이 닿자 머릿속엔,
‘이런 고마울 때가······.’
라고 생각했고 가슴속에서 터진 말은,
“아이, 부끄럽단 말이야.”
라며 서로 따로 놀았다.
“아휴, 때 좀 봐! 도련님 가만 좀 있어 봐요. 찰싹!”
향이는 제 상전의 등짝을 후려치며 묵은 때를 벗겨냈다.
아등바등하는 아이를 씻긴 향이는 좋은 냄새가 나는 귀한 옷을 입혔다.
“아휴, 우리 도련님 황도에서 가장 잘난 사내셨네. 오구오구.”
향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아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향이는 검산을 뛰놀던 천둥벌거숭이를 황도의 귀공자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씻긴 후 진수성찬이 차려진 큰 마루로 데려갔다.
아이는 차려진 음식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산에선 제대로 먹지 못한 하얀 쌀밥에 다섯 가지 구이와 황복찜, 민어탕, 꿩고기 완자 그밖에 이름 모를 산해진미······.
황제의 밥상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았다.
아이는 정신없이 음식을 탐닉했다.
이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던 대장군 가림은 누이동생을 보며 말을 건넸다.
“저 아이 이름이 ‘율’이라 했느냐?”
“네, 오라버니.”
“참으로 잘 생겼다. 하기야 앗센 땅 화중화花中花인 네 소생이니 오죽하겠냐마는······.”
오라비의 칭찬에도 수임은 그다지 좋은 내색이 없었다.
수임은 대장군 부인 초고 씨를 보며 말했다.
“부인께 누를 끼쳐 면목이 없습니다.”
“어인 말씀이오. 그렇지 않아도 집에 아이가 없어 적적하던 참이었답니다. 괘념치 마세요. 아가씨.”
걸신들인 듯 음식을 오물거리는 율을 보며 슬픈 눈으로 대장군 가림은 수임에게 물었다.
“결심은 굳힌 것이냐?”
“······네, 오라버니. 황궁의 안주인이 되겠습니다.”
가림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율은 어머니의 결심도 모른 채 신나 있었다.
검산에선 하루에 두 끼를 먹었었다.
점심엔 동무들이랑 나물을 캐 먹고 꽃을 따먹거나 작은 짐승을 잡아먹기도 했었다.
주려서 힘들진 않았지만 풍족하지도 않았다.
여기로 와서는 세 끼마다 진수성찬에 간식으로 생전 먹어보지 못한 별식이 나왔다.
대장군부는 구경거리도 많았다.
갑사들이 훈련하는 연무장, 여러 별채와 병졸들의 숙소, 무기고도 있었고, 수만 권은 족히 돼 보이는 서고도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목욕탕이었다.
자신의 방 옆에 딸린 목욕탕보다 훨씬 큰 목욕탕이 여러 개 있었고, 재수가 좋은 날엔 드리워진 발 사이로 대장군부의 여인들이 목욕하는 장면을 구경할 수도 있었다.
여섯 살은 뭘 해도 죄가 되지 않는 나이였다.
인생 단물 쓴물을 어느 정도 맛본 전생 기억이 있는 율에겐 이곳은 꿈결 같은 세상이었다.
그러다 향이에게 번쩍 안겨 싫은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것도 나쁘진 않았다.
율은 어여쁘고 살뜰히 살펴주는 향이가 너무 좋았다.
“아휴, 도련님. 벌써 여인네 뒤꽁무니만 쫓으시니······. 내가 한량님 하나 키워내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캬캬캬.”
대장군부에 몸을 담고 있는 식솔은 수백 명에 달했는데 이 검산의 꼬마가 등장하자 금세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앗센 제국의 화중화라고 불린 수임의 소생인 것도 관심거리였고 해마리 검산의 아이라는 점도 관심거리였다.
황국의 사람들은 해마리 씨족을 반 도깨비라 불렀다.
비단 검도깨비와 공존한다는 것을 떠나 이들 해마리 씨족은 여느 사람이 가지지 못한 선인의 기질을 타고났기 때문이었다.
월등한 무예와 선술, 도깨비와 같은 신비한 것과의 교감, 이것은 황국 사람들로부터 질투와 경외와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 감정은 본말이 전도된 점이 없지 않았다.
원래 이곳 사람들도 해마리 씨족과 다를 바 없이 출중한 무예와 선술, 교감 능력이 있었다.
그들이 제국을 만들고 그곳에서 안락함과 세속에 찌들면서 본성을 잃어버린 것이지 없던 재주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까 질투와 경외는 후회와 그리움의 완곡한 표현일 뿐이었다.
영악하다 못해 닳고 닳은 꼬마는 자신을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
‘뭐, 굳이 기분 상할 일은 아니지 않아? 별로 특별한 것도 없는데 사람들이 유난을 떠는 거지. 뭐야.’
율은 그렇게 생각하곤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느덧 대장군부로 온 지 보름이 다 돼 가고 있었을 때였다.
거나하게 저녁을 먹은 후였다.
수임은 율을 자신의 처소로 불러들였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데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어머니는 빛나는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참을 뚫어지게 율을 바라보던 수임은 마침내 붉은 입술을 열었다.
“이 어미는 내일······황궁으로 갈 것이야. 넌 여기에 남을 거고.”
율은 수임을 보며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너는 이제부터 대장군 해모 가림과 초고 씨 부인의 아들이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해모 율이다.”
한참을 말이 없던 율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 황궁엔 왜 가는데요?”
“······어미는 이 제국의 황후가 될 것이다. 그것이 오래전부터 나의 꿈이다.”
율은 알고 있었다.
귀한 마차를 타고 오면서 소곤거리는 갑사들의 얘기를 귀담아듣고 이미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등진 황후를 이어 새 황후가 되리라는 것을.
혈연의 정으로 그녀와 더는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이 슬프진 않았다.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자 맘먹었다.
“약속해다오. 그렇게 해줄 수 있겠니?”
굳은 표정으로 대답을 종용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율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주억여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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