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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무명귀 님의 서재입니다.

누가 아저씨를 슬프게 했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중·단편

완결

무명귀
작품등록일 :
2020.12.26 15:25
최근연재일 :
2021.02.09 18:30
연재수 :
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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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
추천수 :
25
글자수 :
125,420

작성
21.02.0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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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마지막회 - 내 소원이 이루어졌어. -

DUMMY

놀라울 정도로 쉽게 그 말이 나왔다. 갓난이 때 본 뒤로 처음인데도. “아가”라는 말과는 전혀 접점이 없는 인생을 살아왔으면서도. 그녀는 아기를 싫어했다. 그리고 몇 년 뒤엔 노란 원복을 입고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일렬의 아이들을 싫어했고, 얼마 뒤엔 치마를 입고 어설픈 화장을 시작한 소녀들이 싫었다.


이제는 젊은 여자들이 싫다. 애꿎은 여자들은 그녀의 차가운 냉대를 경험해야 했을 것이다. 의뢰인이 간혹 그 나이대의 아이를 데려오면 그녀의 눈은 평소보다 더 날카로워지고 어조는 기계처럼 리듬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너무도 쉽게 “아가”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자격도 없는 말인데도 술술 나왔다. 아가. 내 아가. 사랑하는 내 아가. 가식의 가면을 쓰니 어려울 게 없었다. 미라는 마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로위가 그녀를 막아섰다.


“ 누구시죠. ”


그녀는 무안한 손을 거두었다. 늑대와 같은 얼굴을 한 이 남자와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 미라에요. 저 모르시겠어요? ”


그의 날카로운 맹수의 눈이 조금 커졌다. 변호사의 직감으로 해석하건데, “당신이 왜 여기에..”라고 말하는 눈이었다. 그리고 그 눈은 곧 미라가 누군지 알아버린 듯 흔들렸다. 미라. 당신이 지켜 마지않는 아이의 엄마. 그 눈은 곧 분노를 표출했다. “ 이제와서 왜. ”라고 불을 뿜어내는 눈이었다.


“ 알죠. 잘 알죠. ”


로위가 말했다. 평소처럼 저음이었으나 그의 어조는 흔들리는 지반 위에 건물처럼 위태로웠다. 조금 이를 악 무는 듯도 했다. 꼬리를 밟힌 얌전한 개처럼 짖지 않고 이빨만 드러냈다.


“ 내 딸을 만나게 해줘요. ”


로위의 눈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 이 여자가 무슨 말을. ”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비난의 말을 삼키듯 목에서 경련이 일었다.


“ 이제와서 왜. ”


미라가 예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그가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무슨 뜻이 함축되어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배 아파 낳은 딸을 버린 여자가 이제와서 왜 딸을 찾아왔는지.


그것도 마을이 홀랑 다 타버린 날에. 사실 마을이 불의 소용돌이에 빠져버린 것은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충격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마을을 생각한 적은 없었다.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도 그녀에게 작은 슬픔조차 남기지 않았다.


마을과 엄마는 그녀의 발목을 잡는 존재였으므로. 딸을 버린 날은 처음으로 그녀 자신도 감정이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이다. 울 수 있고, 자신을 향해 분노할 수 있으며 절망하고 후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간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마음을 저 남자는 알 리가 없다.


“ 저, 얼마 못살아요. ”


스스로 자신의 인생이 얼마 후 끝난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선언한다는 것이 슬펐다. 영원할 거라 믿어왔다. 열심히 사는 게 문제지 오래 사는 게 문제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신을 증오했다. 열심히 산 것이 죄라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속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안다면 모두 펭펭 놀 것이다. 그녀처럼 살고 싶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모든 걸 버리고 죽어가는 사람으로 살고 싶을 사람이 어딨을까. 엄마조차, 딸조차 버리고 결국 오십을 못 살고 세상을 뜨는 사람으로 남게 될 인생. 몇 달째 그녀는 로펌에 출근하지 못하고 있다.


치료는 형식적이었다. 갈 날을 받아놓고 번호표만 기다리는 형국이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못했다. 그녀는 남다른 근성을 지녔다. 신의 선고를 거스르고야 마는 저항정신을 가졌다. 촌동네의 딸은 세상에 나갈 수 없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었다. 세상에 나갈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자신이 있었다. 야망이 있었고 그것을 뒷받침해줄 근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말들도 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래서, 뭘 바라는 겁니까. ”


그가 단호하게 물었다. 그의 뒤에 있던 마리아가 상황파악을 하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혼란스럽겠지. 다 안다, 아가. 모성애가 솟구쳤다. 그녀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누군갈 속이기 위해선 자신도 속여야 한다.


딸이 늘 눈에 밟혔지만, 그건 그녀 자신이 괴로워서였다. 죄책감은 그녀의 의지로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피의 이끌림은 그녀의 의지로 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만 없었으면 잊을 수도 있었다. 엄마를 잊었듯이.


“ 딸과 하루를 보내고 싶어요. ”



*


차는 어둠 속을 달렸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서먹한 네 사람을 태우고서. 그들은 가는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목적지가 어딘지도 알 수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클라우드조차도, 자신이 어디를 향해 페달을 밟고 핸들을 조종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는 로위의 시선이 꽂히는 걸 느낀다. 경계의 눈빛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함께 차에 타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이유는 전적으로 마리아 덕분이었다. 마리아가 엄마와의 시간을 원했기에. 자신을 버린 엄마가 죽기 전에 딸과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어주기 위해.


클라우드는 어색함을 무마하려 라디오를 틀었다. 진부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사랑노래였다. 클라우드의 심정을 대변하는 안타까운 가사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일 뿐인 남자의 얘기였다. 언제쯤 이 슬픈 관계에 변주를 줄 수 있을까.


때론 불가능할 것도 같다가, 거의 다 왔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종잡을 수 없는 여자를 사랑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바다로 향했다. 그녀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내비게이션처럼 명령했다.


“ 바다나 갈까. 다 잊으러. ”



*



차는 한참을 내달렸다. 어두운 도로, 굽이진 산길을 너머 바다가 보이는 해안도로가 나왔다. 숨막히는 절경이 펼쳐졌다. 해가 뜰 시간에 맞춰 온 것 같았다.


“ 바다야, 미라. 가고 싶어 했잖아. ”


클라우드라고 자신을 신사처럼 소개했던 남자가 말했다. 마치 둘만 있는 것처럼 시선을 맞춘 남녀는 연인 같았다. 그러나 엄마의 눈에서는 사랑보단 동정이 느껴졌다.


“ 그래. 고마워, 클라우드. 최고의 행선지야. ”


클라우드는 그 사실을 아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칭찬만이라도 고맙다는 듯. 진심이든 아니든. 차는 해변가에서 정차했다. 아직 아무도 찾지 않는 이른 시간의 겨울바다였다. 해수욕을 하는 미친사람은 없었다.


클라우드는 어색한 공기를 풀기 위해 과장되게 팔을 쓰다듬으며 추워했다. 오늘 기온은 제법 포근한 편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실 마리아와 로위, 미라의 고향과는 다르게 클라우드는 따뜻한 지역 출신이라는 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


“ 로위, 마지막으로 마리아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요? ”


거절하면 모녀 사이를 갈라놓는 파렴치한이 될 것 같을 정도로 애처로운 요청이다. 마리아는 로위가 불안해하는 걸 알았다. 또다시 마리아와 떨어지는 것이 이제는 그에게 공포로 다가올 거라는 것도. 그래서 마리아는 더더욱 웃으며 말했다.


“ 난 괜찮아, 아저씨. ”


마리아는 엄마를 따라나섰다. 모녀는 해변을 걸었다. 엄마가 앞서 걸었다. 아침의 바닷바람은 날이 선 칼로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매서웠다. 엄마가 가냘픈 몸을 떨며 외투를 여몄다.


“ 괜찮아요? ”


엄마는 파도가 모래에 부서지는 구간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그녀의 걱정어린 말에 멈춰섰다. 떠오르는 태양이 정면에서 섬광을 내뿜고 있었다. 퍼뜩 지난 새벽의 화염이 생각났다.


“ 미안해. 너 추스리기도 전인데. ”


엄마가 말했다. 엄마의 시선은 여전히 태양에 붙박여 있었다.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제 딸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발이 시려울 텐데도 얕은 파도에 발을 담그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왜 하필 지금이냐고 묻고 싶지 않니? ”


엄마가 물어왔다. 그랬다. 왜 하필 지금일까. 아까 들은 바로 엄마는 이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흔히들 하는 말로 죽기 전에 후회했던 일을 주워담고 싶어하는 걸까.


그래봤자 달라지는 건 없는데. 마음만이라도 편히 가려고. 갑자기 괘씸해졌다. 하지만 마리아는 누군가를 미워하는데에는 재주가 없는 여자였다. 그렇기에 엄마의 이기심에 심술은 날 지언정 증오는 하지 않았다.


“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요. ”


마리아가 말했다. 그녀는 엄마의 옆에 섰다. 같이 얕은 파도에 발을 담갔다. 차가웠지만 기분은 좋았다. 묘한 연대감도 들었다. 같은 부위에 같은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마리아는 놀라웠다.


핏줄이란 것이 이런 걸까. 별다른 말 하지 않아도 쉽게 동화되는 것이 핏줄일까. 그럼 로위는 뭘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끈끈한 유대감은 뭘까.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엄마를 만난 것이 로위와의 관계에 작은 물결을 일으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당연한 것 같았던 것이, 사실 당연한 것의 대신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것처럼.


“ 고마워. ”


엄마가 처음으로 딸의 얼굴을 돌아봤다. 옅은 미소가 창백한 얼굴에서도 빛났다. 원래 엄마는 미인이었겠다 싶었다.


“ 뭐가요? ”


마리아가 되물었다. 질문이라기보다 농담이라도 하는 것처럼 웃음기어린 표정으로.


“ 그냥 모두 다. 예쁘게 잘 커줘서. 날 보고 무서운 눈을 하지 않아줘서. 너무 많은 걸 묻지 않아줘서. ”


엄마가 다시 앞을 바라봤다. 비밀이 많은 여자 특유의 분위기가 났다. 알 수 없는 표정에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편안한 듯 부자연스러운 얼굴이었다. 자신을 철저히 숨기는 배우의 이면처럼.


“ 솔직히 말해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요. 다 사정이 있었겠죠. ”


마리아는 그런 아이였다. 깊이 생각하는 법이 없는. 그래서 순수한. 그러나 부주의한. 장점이자 단점을 가진 아이. 엄마는 마침내 몸을 틀고 그녀를 바라봤다. 잔뜩 오므린 몸은 떨렸지만 고통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이 추위를 잊을만한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엄마가 한 걸음 다가왔다. 조금 진정이 돼지 않았다. 감정의 종류를 해석할 수가 없어서. 긴장인가, 두려움인가.


“ 역시 날 이해해주는 건 너 뿐일 거라는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


엄마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파도, 바람보다도 작은 소리였다. 귀를 기울여야만 들리는 소리였다. 입모양의 힘을 빌려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엄마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마리아는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뒤로 물러섰다.


“ 그게 무슨 소리에요? ”


마리아는 당혹감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뭔가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엄마의 외투가 스르륵 발밑으로 흘러내려갔다. 엄마는 이 날씨에 민소매를 입고 있었다. 너무나 앙상한 어깨와 팔이 칼바람으로부터 지켜줄 보호막을 잃고 드러났다. 엄마는 그 팔을 반대쪽 손으로 비볐다.


“ 엄마 팔 어떠니? 이것도 이해해줄 수 있니? ”


마리아는 걸어다니는 시체를 마주한 듯 섬찟했다. 하지만 엄마는 분명히 산 자였다. 말을 하고 거칠지만 숨을 쉬고 느리지만 보행이 가능했다. 엄마는 이해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편안하던 눈이 조금은 불안정했다.


“ 네. ”


그녀가 대답했다. 별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 엄마는 아니야. 엄마는, 난 납득할 수 없어. 내 모습을 이해할 수 없어. 왜 이렇게 됬는지. ”


그녀는 푸념을 시작한 듯 보였다. 마리아는 잠자코 들었다. 마음의 동요가 잠잠해졌다.


“ 하지만, 현실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모든 인간이 그렇지. 운명은 거스를 수 없어. 엄마는 곧 죽을 거야. ”


마리아는 자신이 어느새 울고 있다는 걸 느꼈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엄마가 죽기라도 하는 것 같은 선언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들었을 때보다 현실감이 느껴졌다. 엄마는 곧 죽는다.


“ 방법은 없는 거에요? ”


마리아가 물었다. 그녀 자신도 부질없는 질문을 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있었으면 이러지도 않았겠지. 제 자식보다 인생이 더 중요해서 떠난 여자가 자신의 죽음을 선언하기까지 몇 번의 확인절차를 거쳤을지 상상이 갔다.


의사에게 되묻고 당신 같은 돌팔이랑은 상종을 않겠다며 다른 병원을 전전하고 인터넷을 뒤져 짓궃은 네티즌이 한 헛소리를 따라하며 속을 버리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인정하지 못하다가 몸의 변화를 이길 수 없음에 무릎 꿇었겠지. 그런 그녀에게 방법을 논하다니. 마리아는 스스로가 어리석었다고 느낀다.


“ 있어. ”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 그건 바로 너야. ”


*



역시 마리아와 떨어져선 안 돼는 거였다. 그녀 곁을 지켰어야 했다. 그것은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미라가 제 딸의 손을 잡았고, 마리아의 몸이 빛났다. 발현의 순간이었다. 막아야 했다. 로위는 튀어나가듯이 모래사장으로 뛰어들었다. 모래사장에 발을 디뎠을 때 뒤에서 묵직한 몸뚱이가 달려드는 것을 느꼈다. 클라우드였다. 클라우드가 그를 막아선 것이다. 대체 왜? 라는 물음을 삼켰다.


“ 제발 그냥 두세요. 미라의 꿈을 방해하지 마세요. ”


클라우드는 호소하고 있었다. 그의 몸을 어떻게든 짓누르기 위해 온 체중을 싣고서. 하지만 로위는 어렵지 않게 일어났다. 클라우드는 몸에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로위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로위는 쏜살 같이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



로위의 등에서 모래사장으로 떨어졌을 때 클라우드는 무력감을 느꼈다. 힘이란 것에 손을 대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할 것도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으려면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을 탐내지 않는다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었다. 클라우드는 달려가는 로위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다르게 사랑을 지켜낼 로위를.



*



미라는 그 손을 빼내려 애썼지만, 그 결심은 철저히 뭉게졌다. 세포 하나하나에서 변화가 느껴졌다. 근육이 재조합되고 골격이 프라모델처럼 움직였다. 마치 다시 태어나려고 하는 듯했다. 그 모든 장대한 움직임들이 단 몇 초만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로위가 달려들었을 때에야 그 모든 것이 끝나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미라는 파도 위로 주저앉았다.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눈앞에 하얀 무릎이 보였다. 그동안은 보지 못했던 무릎이다. 그녀의 손바닥은 젊음을 되찾았다.


그녀는 얼굴을 매만졌다. 모든 게 예전으로 되돌아가있었다. 몸뚱이를 무겁게 했던 병의 기운도 사라져있었다. 그녀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꿈만같았다. 정말 모든 게 달라져있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훌륭한 결과를 바란 건 아니었다.


병만 낫길 바란 것이었다. 그런데 딸이 어미에게 뜻밖의 선물을 주었다. 미라는 미친듯이 웃으며 일어섰다. 기쁨을 숨기는 법이 없는 여자다웠다. 승소율 일위 변호사는 뭘 하든 이겼다. 그리고 승리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승리는 언제나 즐거웠다.


정복감 따위는 아니었다. 해냈다는 성취감 때문이었다. 미라는 자신이 불가항력마저 이겨냈다는 사실에 숨이 넘어가듯 웃었다. 이보다 더 즐거운 승리가 있을까.


“ 이제 됐지? 미라, 가자. ”


클라우드가 말했다. 어느새 다가와서 손을 잡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어두웠다. 뭔가 두려워보이기도 했다.


“ 응. ”


“ 당신들, 처음부터 이러려고 돌아온 거지? ”


로위가 말했다. 이를 악 물고 해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목소리였다. 클라우드는 어떻게든 자리를 뜨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마리아는 쓰러져있었다. 사실 그녀도 스스로가 무서웠다. 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걸까. 너무도 기뻐서 최소한의 모정조차 끼어들 틈이 없는 걸까.


“ 가자니까. ”


미라가 클라우드의 채근에 못 이겨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로위가 다가왔다. 분노로 떨리는 얼굴이 위협적이었다.


“ 다신 얼쩡거리지 마. ”


그녀는 그 말을 못 들은체 했지만 내심 마리아가 부러웠다. 그 어떤 위험 속에서도 자신을 구해줄 남자가 있다는 것이.



*



마리아가 눈을 떴을 때 엄마는 없었다. 모든 것이 꿈인 것처럼 평화로운 기분이었다. 잠을 잤던 걸까. 눈앞엔 언제나 그렇듯이 로위가 있었다. 새들이 울고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숲인가. 마리아는 생각을 하려 애썼다. 엄마는 어딨을까. 여기는 어딜까. 로위는 왜 자꾸 약을 만지작거릴까.


“ 깼니. ”


로위가 말했다. 자신이 자다깬 것처럼 목소리가 갈라졌다.


“ 엄마는? ”


“ 갔어. 또다시 널 두고. 이제 그 여자는 잊어. ”


단호했지만 강압적이진 않았다. 사실 잊을 것도 없었다. 엄마가 그녀의 인생에 끼어든 시간은 지난 새벽부터 지금까지 반하루 밖에 안 돼니까. 애초에 엄마 생각을 하거나 그립다는 느낌이 든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조금 서운한 기분은 들었다.


이렇게 빨리 떠나다니. 언제 어떤 모습으로 떠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엄마가 손을 잡았을 때부터 모든 기억이 끉겨있었다.


“ 이거 먹어. ”


그는 알약을 내밀었다.


“ 뭔데? ”


마리아가 물었다.


“ 모든 걸 끝낼 수 있는 약이야. 너를 평범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마을에서 도망갈 때 하나 주웠어. 다신 없을 기회야. ”


“ 그런 거라면 아저씨가 먹어야지.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


마리아의 물음에 로위는 고개를 저었다.


“ 난 너만 있으면 돼. 설령 인간성이 사라지더라도. ”


로위는 마리아의 입에 알약을 욱여넣었다. 마리아가 저항해봤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삼키고 말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러면 아저씨는 되돌아갈 수 없잖아. 몸에는 미세한 변화도 없는 듯보였다. 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로위가 전에 없던 웃음을 되찾은 것 빼고는.


“ 내 소원이 이루어졌어. ”


작가의말

첫 연재가 여찌저찌 끝났는데 지켜봐주신 독자분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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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화 - 누구랑 가는 게 중요해? - 21.01.25 19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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