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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무명귀 님의 서재입니다.

누가 아저씨를 슬프게 했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중·단편

완결

무명귀
작품등록일 :
2020.12.26 15:25
최근연재일 :
2021.02.09 18:30
연재수 :
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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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
추천수 :
25
글자수 :
125,420

작성
21.01.1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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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6화 - 우리가 키워요 -

DUMMY

죽음의 문턱에 가기 전, 사람들은 옛 앨범을 꺼내보듯이 인생의 어느 한 부분으로 시간여행을 간다고들 한다. 믿을 수 없었지만, 지금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로위는 보수공사를 하기 전, 낡은 통나무 집에 불과했던 메리의 집에서 깨어났다.


사고에 대한 것이 너무도 분명하지만, 마치 어제의 일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방금 전에 생사를 오갔었는데. 로위는 자기가 죽음의 문턱을 넘기 전에 망자들이 들르는 기억의 도서관에 와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책이 아니라 기억을 꺼내보고 현실적인 공간으로 뛰어들어 다시 한 번 재생해보는 것. 죽기 전 마지막 선물.


“ 뭐해, 로위. 아침 먹어야지. ”


순간적으로 마리아가 한 말인 줄 알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이건 분명히 메리의 목소리였으므로. 그러나 그것은 더욱 말이 안 되었다. 메리는 죽었으므로. 하지만 로위 역시 죽었다. 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믿었다. 그래. 여기는 망령들의 구역. 죽은 메리가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더구나 이건 기억 속이니까. 언제로 돌아온 걸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로위가 뜸을 들이자, 메리가 직접 행차하신 것이다. 메리는 다른 때보다 조급해보였고, 로위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왠지 오늘이 인생에 어떤 부분일지 예상이 갔으므로. 신이 그에게 억만금을 주어도 바꾸지 않을 선물 같은 날이었으므로. 노크 소리가 다시 들렸다.


조금 더 빠르고 강도가 셌다. 그녀의 용건은 로위가 알기로 그저 아침을 먹으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침을 저토록 절실하게 먹이고 싶어 직접 계단을 올라 문을 두드리진 않을 테니까.


“ 얼른 나와봐. ”


그녀는 끝내 단순히 아침을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듯 요청했다. 로위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 어쩐 일이세요, 아침부터. ”


문을 열고 마주한 메리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온몸이 물에 빠진 생쥐마냥 젖어있었고, 눈물샘이 마비된 줄만 알았던 그녀의 눈가엔 좀처럼 볼 수 없는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누구보다 강인한 여자가 운다는 건 심각한 일이다. 로위는 표정을 굳혔다.


“ 미라가 왔다갔나봐.. ”


미라. 그게 뭐 어쨌다는 걸까. 잠깐 왔다가 소리소문 없이 떠나는 것이 일상인 그 모진 딸내미가 이번에도 언제 왔다는 말도 없이 떠난 게 뭐 대수라고. 그때의 로위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메리가 우는 이유를. 메리가 우는 데에는 그에 걸맞는 문제가 있으리라.


“ 미라를 잡아야 해. 평생 후회하면서 살지도 몰라. ”


로위는 메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위해선 밑층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 무슨 일인지 차근차근히 말씀하세요. 일단 내려가요. ”


로위가 메리의 등을 토닥이고 계단쪽으로 몸을 돌렸다. 메리는 슬픔이라는 술을 마신 것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다. 메리의 눈에 다섯 남짓의 계단은 아득해보였고, 계단참은 악마의 아가리처럼 끔찍했다. 로위는 그녀를 부축해서 걸었다. 노인이 옛날 일을 곱씹듯이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참에서 메리는 한 번 쓰러질 뻔했다.


“ 미안, 로위. 나도 늙었나봐. 더는 버티기가 힘든 일이 산더미야. ”


그녀가 로위의 품에서 말했다. 로위는 그녀를 다독이고 다시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로위와 메리가 1층 거실에 도착했다. 아주 힘든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것처럼 진이 빠졌다. 메리는 거의 걷지 못할 지경이었다. 로위는 거실을 둘러봤다. 거실은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었다. 낡은 나무탁자와 적갈색 소가죽 소파, 산 뒤로 한 번도 켜지 않았다는 디지털 TV, 옹골차게 닫혀있는 창문까지.


심지어 날씨는 어제와 같이 비가 내렸다. 달라진 풍경이라곤 메리가 꺼내놓은 두루마리 휴지들이 나뒹구는 모습 뿐이었다. 그는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뭐가 잘못됬는지 알아차렸다. 로위는 무의식적으로 현관으로 향했다. 중문을 열고 짧은 복도를 가로질렀다.


현관 앞에는 아기가 담긴 바구니와 편지가 있었다. 아기는 자기 신세를 아는지 모르는지 평온해보였고, 무섭게 생긴 로위를 보고도 초연했다.


로위가 송곳 같은 발톱으로 아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아이는 누구에요. 다 아는 답을 들으려고.


“ 미라가 두고 갔어. 잡으려고 달려갔지만 잡을 수 없었어. 비가 내렸고 안개가 짙었으니까. 또 미라는 옛날부터 달리기에 재능이 있었어. 아마 법률가가 아니었다면 육상선수가 됬을지도 몰라. ”


메리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치 술을 마셨을 때처럼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렇다고 메리가 사리분별을 못하는 심신미약 상태는 아니었다. 메리는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한 노인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딸의 일로 인해 조금 정신이 없을 뿐이었다.


메리는 딸이 무슨 말을 해도, 인연을 끊고 잠적해도 태연하게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누구보다 핏줄의 마법을 믿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무리 사이가 멀어져도 핏줄로 이어져 있으리라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미라는 달랐던 모양이다.


미라는 핏줄을 중시하는 제 엄마와 완전히 반대되는 인생을 살았다. 가족보다 자신. 가족보다 친구. 가족보다 동료였다. 그녀에게 엄마는 궁상맞고 철학적인 노인네였을 것이다. 자신보다 가방끈도 짧으면서 나이 좀 먹었다고 가르치려드는 노인네. 그런 그녀에겐 참 어울리는 짓거리였다. 제 자식까지 버리는 짓.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 난 이 아이가 내 인생을 망칠까 두려워.


저 아기는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알기나 할까. 그저 웃으며 엄마가 곧 돌아오기를, 젖을 먹여주기를 기다리고 있을까.


“ 우리 미라 어떡해. 이런 짓을 했으니 평생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할 텐데. ”


그날이 마리아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사실 그때 무슨 기분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첫느낌은, 글쎄. 피붙이를 버린 미라에 대한 도의적인 형식의 분노였을까. 그런 딸이라도 안쓰러워하는 메리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그것도 아니었다면 제 삼 자의 무관심이었을까.


로위는 자신이 아기의 꼬물거리는 손에 정신이 팔려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찌나 이뻤는지, 아기를 처음 보는 순간처럼 오장육부가 녹아버리는 듯했다. 그 순간, 마리아를 보고 내 아기라는 듯한 환각에 휩싸였다.


그래서였을까. 외할머니인 메리보다도 그는 열과 성을 다해 아기를 돌봤다. 아기가 다치면 제 살을 도려낸 듯이 아팠고, 아기가 걸음마를 뗐을 때는 기분이 좋아서 생전 안 쓰던 일기를 써야했다. 그렇게 기분 좋은 날의 기록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만둔지 오래였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마을 사람들의 잡일을 돕기 시작한 이후로 글이 손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리는 몇 날 몇 일을 미라를 찾겠다고 아우성이었다. 딸을 돌려줘야 한다면서. 그때의 메리는 정말로 불행해보였다. 자신을 감싸던 아름다운 조명들도 그녀를 외면했으니까.


“ 우리가 키워요. ”


로위가 말했다. 날로 피폐해져가는 메리를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로위는 어여쁜 아기를 거칠은 품에 안았다. 어쩜 이리도 작고 보드라운지. 메리는 그제야 아기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우리 아가. 메리의 목소리가 영혼처럼 흐릿하게 흘러나왔다. 무의식 중에 나온 것처럼.


“ 오오, 아가.. 딱한 것.. 내가 니 할미란다. ”


메리가 어쩔 줄을 몰라하며 말했다. 마치 초보 엄마라도 되는양. 처음 아기를 마주한 경이로움과 이 작은 아기를 책임져야 한다는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는 마리아의 작은 손에 검지를 갖다대었다. 고사리 같은 손이 전력을 다해 로위의 검지를 붙잡았다. 유일한 끈을 놓지 않으려는 것처럼. 아기의 손이 나를 놓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 듯했다. 로위는 자신이 마리아를 왜 지키려고 마음 먹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는 어른이 지켜야 한다는 낡은 관념 때문이었을까.


그 뒤로 미라는 돌아오지 않았다. 로위는 마리아에겐 미안하지만 오히려 고마웠다. 뒤늦게 자신이 어미라는 걸 강요하지 않아서. 어쩌면 마리아를 핏줄이라는 진부한 것 때문에 빼앗기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열심히 마리아를 키웠으므로.


그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마리아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했다. 그랬기에 지금 여기서 죽음의 시험을 보고 있는 것이겠지. 마지막 관문으로 마리아를 처음 만나고 키운 날들 속에 던져진 것이고.


로위는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딘가 한참을 눈알을 굴렸다. 아직도 과거를 떠도는 걸까. 정신이 아득했다. 희미하게 시야가 돌아왔다. 운 것처럼 흐릿하게 보이다가 마침내 마리아의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 아저씨! ”


마리아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로위의 몸은 붕대로 칭칭 감겨져있었다. 갈비뼈가 덜그덕거리는 듯했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 천만다행이구나. ”


메리가 말했다. 진짜 메리일 리는 없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메리가 문지기처럼 서서 말한 것처럼 영롱하고 단호했다. 로위의 눈에서 왈칵 슬픔이 솟구쳤다. 자신을 돌려보낸 게 그녀일까.


“ 난 아저씨가 죽는 줄 알았어. ”


내가 죽긴 왜 죽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입마개를 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스르르 잠이 쏟아졌다. 죽기 전, 유언을 남기기 위해 정신이 돌아온 것 뿐이라는 듯. 그가 잠에서 깨었을 땐 밤처럼 깜깜했다. 주변은 암흑천지였으나 이곳이 낯선 공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일어났니. ”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옆에 누군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리노였다.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가 눈앞에 나타났다.


“ 기다리느라 혼났어. 난 지루한 건 딱 질색이거든. ”


녀석이 말했다. 로위는 머리가 지끈거려서 말문이 막혔다. 그는 여전히 병원침대 위에 있었다. 힘이 쭉 빠지고 나른했다. 여전히 갈비뼈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 여긴... 어디지.. ”


로위가 가까스로 말문을 트였다. 이 경우, 쥐어짰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어둠 속에 표류한 남자의 대답을 갈망하는 물음. 리노는 로위라는 섬 주변을 유랑하는 유람선처럼 정체불명의 방을 돌아다녔다. 쉽게 알려주기 싫다는 듯이 대답이란 사탕을 입에 물고 오물오물 대며.


“ 기억 안 나? ”


리노는 오히려 되물었다. 그 어조가 마치 나무라는 듯했다. “ 어떻게 그걸 기억 못할 수 있어? ”에 가까운 면박이었다.


“ 모르겠어, 정말로. 아무것도. ”


로위는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무엇이 그의 머리를 들쑤시는지 알 수 없었다. 숨이 가빠왔다. 한 곳이 아프면 연쇄적으로 다른 부분까지 이상이 오는 것처럼 고통이 전이됬다.


“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지.. ”


리노는 중얼거리더니 무전기의 안테나를 길게 빼고 누군가와 긴밀히 얘기를 나누었다. 로위는 마침내 발끝에 도달한 고통에 신음하느라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 실험실로 가자. 그곳이 우리의 고향이잖아. ”


“ 무, 무슨... ”


말이 나오지 않았다. 리노가 로위에게 입마개를 씌웠다. 그리고 그의 육중한 어깻죽지에 주삿바늘을 꽂아넣더니 피스톤을 눌렀다. 로위가 미처 상황을 인식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잠이라는 악마가 다시 로위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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