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x무명귀 님의 서재입니다.

누가 아저씨를 슬프게 했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중·단편

완결

무명귀
작품등록일 :
2020.12.26 15:25
최근연재일 :
2021.02.09 18:30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556
추천수 :
25
글자수 :
125,420

작성
21.01.14 18:30
조회
84
추천
5
글자
17쪽

1화 - 어떤 존재가 괴물이고 인간일까 -

DUMMY

로위는 달리고 있다. 어디로 달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구에게 쫓기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달리고 있다. 어둠 속에서 광명을 되찾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숨이 턱 막히고 머리는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로위의 걸음은 느려지고 추격자의 목소리는 점점 선명해졌다. 로위는 앞을 바라본다. 출구없는 어둠을. 귀를 쫑긋 세운다. 추격자의 발소리가 가까이서 끊긴다. 로위도 더 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지쳐버렸다.


“ 넌 나의 그림자야. 떠날 수 없어. ”


*


하얀 불빛이 거짓말처럼 비쳐들어왔다. 그 광채가 로위의 눈을 간질였다.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걸 환영한다는 인사였다. 꿈 속에서 찾아다니던 광명이었다.


“ 아저씨! 아침 먹어! ”


광명 같은 마리아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렸다. 청각만큼은 살아있었다. 로위는 문득 탁자에 놓인 달력을 보지만 연도라는 개념을 상실해서 오늘이 언제인지 알아내는 데에 한참이 걸린다. 이제는 기억하려 애쓰지 않는다. 어차피 그는 이곳에 산지 얼마나 흘렀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에 의해 구제 받았고 마음씨 따뜻한 여인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는 것 정도. 그리고 지금은 자신이 누군가를 보살피고 있다는 것도. 그것만 기억해도 족했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살고 싶었다. 누군가와 함께 영원히. 그러나 그녀는 떠났다. 오늘은 그녀가 죽은날이다. 기억하는 건 아니다. 그의 기억력엔 사소한 결함이 있다. 달력에는 그날을 잊지 말라는 표시로 그녀의 죽은날이라는 글귀와 별 표가 세 개나 그려져있다. 그는 그녀가 죽은 날을 잊지 않으려 애써보지만 늘 실패할 뿐이다. 표시의 힘을 빌리고 메모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 아침 먹으라니까? ”


마리아가 문을 벌컥 열고 아침의 빛을 머금은 얼굴을 찡그리며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어조는 높았지만 천성적으로 화를 못 내는 타입의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웃었다. 미소가 아름다웠다. 마리아 나이 때에 어울리는 싱그러운 미소였다.


“ 금방 나가. ”


로위는 짧게 답한다. 마리아는 그의 대답이 짧아도 늘 웃는다. 마리아는 로위에게 언제나 어색한 여자다. 그녀를 닮았지만 그래서 더 어렵다. 자꾸 그녀를 떠올리게 해서. 로위는 마리아가 나간 뒤 한참을 침대에 앉아서 생각에 잠긴다.


꿈에 대해서.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밤마다 어딘가를 달린다. 그곳은 어디일까. 어둡고 뜨거웠다. 꿈에서 로위는 늘 긴박하게 움직였다. 마치 쫓기는 것처럼. 로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마리아가 한 마디 더 보태기 전에 일어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참에 걸어둔 전신거울에 그의 모습이 비춰진다. 거울에 반사된 모습은 반은 인간이고 반은 야수인 남자였다. 왜 이렇게 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로위에게 망각은 친구와도 같았다. 늘 따라붙어서 의문부호만을 남긴다. 로위는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식탁에는 마리아가 차린 베이컨과 계란프라이가 있었다. 로위는 그것을 먹으며 마리아의 말동무가 되어준다. 늦잠꾸러기인 로위 때문에 입이 심심했을 것이다. 마리아는 떠들기를 좋아하는 여자이고 상대방이 누구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로위를 기다렸다. 로위는 늘 마리아의 말을 경청했으니까. 그녀는 편견이라거나 선입견이 없었다. 눈앞에 있는 야수를 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일 터였다. 아마 그녀는 상대방이 한낱 차가운 벽이라도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위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것이다.


이 마을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마리아의 친화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울함에 지배 당한 마을에서 가장 수다쟁이인 여자.


“ 듣고 있어? ”


마리아는 멍하니 듣고만 있는 로위를 의심하는 눈초리로 쳐다본다. 그녀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 물론이야. ”


“ 뭐, 괜찮아. 내가 아저씨 몫까지 말하면 되지. ”


그녀가 호쾌하게 말했다. 참 쿨하고 유머러스한 아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촌구석에 이렇게 말이 많은 스무살 여성의 말동무는 거의 없었다. 어쩌면 마리아에게 있어서 이 마을에 태어난 것은 불운일지도 모른다. 외롭고 힘겨운 생활이었을 테니까.


그들의 생계는 기껏해야 하나 남은 공장과 몇 없는 농토가 책임져야 했다. 마트나 정비소도 있었지만, 대부분 자영업이고 흔히 말하는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한 고립지였다. 그 흔한 바다도 없고 사람도 없고 시설도 없는 척박한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과묵해진다.


입을 닫고 살기도 빡빡한 세상이다. 그들이 아침을 다 먹을 무렵이면 로위에게 할 일이 생긴다. 이 마을에 정착한 뒤로 하루도 거르지 않은 일이다. 마을 사람들의 잡일을 도맡는 것이다. 동네사람들이 하루내내 가장 많이 하는 소리는 “ 로위 어딨어? ”이다.


꽤 어려운 부탁도 있지만, 그것 말고도 그냥 말동무를 해달라던가 하는 터무니 없는 부탁도 있다. 그는 마치 이 마을 전체에 종속된 것처럼 부르면 달려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바쁘게 하루를 보내다보면 어느새 밤이었다.


“ 오늘 할머니한테 갈 거야? ”


마리아가 차를 마시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로위는 갑작스런 물음에 조금 놀란다. 자신이 이곳에 정착한 이유가 그녀 덕분이었다. 상처입은 그는 어딘지 모를 곳들을 걸으며 거처를 구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도망치며 살아왔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찻잔 속에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누가봐도 야수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 세상에 반인반수가 허용되는 인간들의 세계가 있을까. 로위는 그저 쉬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공격하면 어떡해? 저 괴물이 우릴 죽일 거야. 무서워. 무서워. 도망가자. 그는 갑자기 과거에 침잠하여 대답을 잊었다. 로위는 모든 걸 망각하고 싶었다. 마리아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제멋대로 말을 이었다.


“ 에이, 기분이다! 맨날 혼자 몰래 가서 보구 그랬지? 난 아저씨가 할머니한테 가서 뭐 하는지 늘 궁금했어. 혹시 혼자 우는 건 아닐까 상상해보곤 했지. 오늘은 무조건 나랑 같이 가는 거다? ”


마리아는 일부러 더 과장된 몸짓을 해보이며 로위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 일이 일찍 끝나면. ”


로위의 짧은 대답에 마리아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 아저씨가 무슨 마을사람들 노예야? 그냥 오늘 하루 쉬어! ”


“ 안 돼. 오늘 할 일이 아주 많아. ”


마리아는 마을일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도맡으려는 로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 그냥, 늘 고마워서 그러지. ”


로위가 마리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듯이 덧붙인다. 이렇게 착한 사람이 반인반수라니, 마리아는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만 그것조차 힐난처럼 다가갈까 두려워 곧장 그 마음을 거둔다. 연민은 무례한 감정이다. 마을 사람들이 마리아에게 그러했듯이.


그날도 로위는 저녁나절이 되도록 마을을 가로지르며 사람들의 민원을 들어준다. 폭풍이 지나간 날이면 지붕 고치기는 예삿일이고 밭일이며 육아까지 못하는 게 없으니 부르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생긴 건 야수인데 하는짓은 호구나 다름없는 남자를 마리아가 데리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할머니의 유언 때문이다.


마리아가 태어날 때부터 로위는 마을에서 이미 오랫동안 두터운 신망을 쌓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오갈곳 없는 반인반수를 그녀의 할머니, 그러니까 메리가 거둬준 것이다. 메리는 오랜기간 반인반수와 동거했다. 별다른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그저 인간적 도리로서 그리했다. 그들은 결코 남녀로서 한집에서 한 식탁을 공유하지 않았다.


그것은 손녀인 마리아가 보증했다. 단 한 명 납득하지 못한 여자가 있다면 마리아의 엄마인 미라였다. 미라는 로위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


“ 완전 걸레짝이네. ”


빗길에 널브러져 있다가 메리에 의해 집안에 들여진 그를 향해 그녀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그 첫 마디가 너무도 날카로워서 로위는 기억의 잔상처럼 그 말을 고이고이 가슴에 담아두었다. 미라는 엄마의 결정을 끝까지 반대했다. 미라는 거의 경기를 일으켰다.


“ 엄마가 드디어 노망이 난 거야. ”


그날, 로위를 사이에 둔 두 여자는 긴급하게 설전을 벌였다. 그 숨막히는 교전은 서로에게 흠집을 냈다. 그를 안방에 재우려는 메리와 내쫓으려는 미라의 고성은 옆집까지 들릴 정도였다. 다행히도 옆집까지 이 교전에 참전하는 불편한 상황까진 벌어지지 않았다.


“ 아니, 나 멀쩡해. ”


메리는 자신의 지능상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듯이 또박또박 발음했다. 벌써부터 자신을 벽에다 똥칠하는 치매노인 취급 말라는 듯이.


“ 내가 보기엔 아니야. 멀쩡한 사람이 외간남.. 아니지, 남자인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저 얼굴이 사람 얼굴로 보여? 저건 사람이 아니야. 괴물이야. 세상 어떤 멀쩡한 사람이 괴물을 집에 들여? 그리고 저 가방은 뭔데. 뭐가 들었는지 알아봤어? 폭탄이 들었을지 누가 알아? ”


미라가 검지로 로위의 품 안에 있는 자물쇠 잠긴 돈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로위가 꼭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지키는 가방. 첩보요원들이 들고 다닐 법한 검은 가방이 미라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미라는 누구보다도 깐깐하고 고지식한 여자다.


오로지 자신 밖에 모르고 제 아무리 가족이라도 자신의 앞길을 막으면 참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다. 가진 것이 아무리 충분해도 더 가지기 위해 악을 쓰는 여자다. 그러므로 수도의 대학교에 수석으로 졸업해 유명 로펌에 취업한 미라에게 촌구석에서 농사나 짓고 사는 가족들이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그들은 그녀의 눈엣가시였다.


자신의 인생에 방해나 안 돼면 다행인 존재. 가능하면 얼른 치워버려야 하는 존재. 그녀의 인생에서 좌절은 없었다. 적어도 그녀 혼자서라면.


“ 네가 변호사한다고 돌아다니는데 그래서는 안 돼. 변호사는 그래서는 안 돼는 게야. 이 세상에 태어나 어떤 존재가 괴물이고 인간일까. 그건 누가 정하는 것일까. ”


메리가 말했다. 그러나 경쟁사회에 찌들어버린 딸은 엄마의 그런 철학을 이해하지 못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로 인간을 현혹하는 말 따위 인생에 도움될 게 없었다.


“ 엄만 그게 문제야. 쓸데없이 철학적이지. 내가 왜 코피 터지도록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려고 기를 썼는 줄 알아? 다, 엄마처럼 살기 싫어서야. 없는 살림에 다 퍼주고 빈 방도 없는데 사람 들이는 습관 때문에. 남들처럼 좀 이기적이면 안 됄까. 아니, 그럴 필요도 없는 거잖아. 그리고 그동안 엄마가 먹이고 재운 것들도 사람이니까 참은 거지. 저런 괴물을 집에 들이자는 게 정상이야? 난 도저히 이해 못하겠어. 엄마가 못하면 내가 쫓아버릴 거야. ”


미라는 힘없이 현관에 엎드려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로위를 강제로 집 밖에 내쫓으려 그의 두 팔을 있는 힘을 다해 들었다. 묵직한 로위의 체중이 미라의 손에 느껴졌다. 제법 무거웠지만 미라는 젖 먹던 힘을 다했다. 비가 억수 같이 내리던 어느 봄이었다.


로위에겐 바깥세상에서 맞은 첫 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봄날에 그는 집 없는 달팽이처럼 하염없이 떠돌았다. 그를 불러주는 사람도, 찾는 사람도 없었다. 이 세상 속에서 살아있는 로위는 없었다. 그저 흉물스럽고 두려운 야수만 있었다.


미라는 로위의 두 팔을 질질 끌고 비 오는 집 마당으로 데리고 나갔다. 거친 신음과 욕설이 오갔다. 로위는 또다시 쓸쓸한 기분을 느꼈으나 자신의 사정을 이유로 간청하지 않았다. 그럴 기운이 남아있는지 의문이었다. 그는 어느새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표정과 유리창에 비친 반인반수의 모습을 보며 그는 어딜 가도 환영 받을 수 없는, 심지어 동물들의 무리를 가더라도 외면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 다신 오지 마. ”


미라는 절대적인 심판자가 된 것처럼 계단 위에서 차가운 눈으로 대문을 닫았다. 성문이 닫히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빗속에 퇴궁 당한 반역자처럼 로위는 성문을 쓸쓸히 바라보았다. 그 뒤로도 문 너머에서 고성이 오갔지만 대체로 미라의 음성이었다.


날카로운 칼날 같은 목소리였다. 분노를 절제하되 상대에게 충분히 압력을 넣을 수 있는 목소리였다. 철학자와 변호사의 언변다툼은 철학자의 패배였다. 그는 달리기 시합을 관전하는 관중이 된 기분이었다. 무력히 판정의 번복을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판정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당연한 결과에 목을 멘 것이 민망스러웠다. 그는 심정적으로는 철학자를 응원해야 했으나,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미라의 결정이 옳았다. 로위는 납득할 수 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을 가진 반인반수를 집에 들이는 것은 비상식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그 역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그 역시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렇게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라고 호소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귀에는 들어올 리가 없는 남의 이야기일 터였다. 남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자는 성인군자일 것이다. 게임은 끝났고 결과를 받아든 로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립하는 슬픔을 억눌렀다. 오늘은 조금 다르길 빌었던 것이 사치였던가. 결국 또다시 길을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이 무겁기만 했다. 족쇄를 달고 걷는 기분이었다. 판을 쥐고 흔드는 것은 결국 그가 아닌 다른 모두였다.


그에게, 남들과 다른 그에게 선택권은 없다. 소수자는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강에 휩쓸리는 조난자일 뿐이다. 소수자의 구명은 온정을 베푸는 자들에 달려있었다. 그가 베풀지 않는다고 해도 원망할 수는 없었다. 억울하고 원통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세상이었다. 로위는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좀 먹고 싶었다. 로위는 자신의 얼굴처럼 제대로 굶주린 야수가 되어있었다. 아직 이성이 떠나가지는 않은 것이 다행스러운 부분이었다. 그는 마을의 분위기와 동 떨어진 외로운 불빛을 따라갔다.


마트였다. 아마 유일한 현대식 건물이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겐 돈이 없기에 관두기로 한다. 그는 인간에겐 화폐가 전부라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것으로 인해 전쟁도 불사하는 것이 인간이었다.


지금의 로위에겐 너무나 먼 곳의 이야기지만. 로위는 서둘러 다시 어둠속으로 숨었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그의 뱃속은 젖을 달라는 아기처럼 울어댔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못 참고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았다. 그는 가끔 자신이 두렵다.


달라진 외모만큼이나 내면도 달라졌을까봐. 인간의 이성을 잃어버렸을까봐. 마침내 이렇게 된 경위를 잊은 것처럼 자신이 인간이라는 자각마저 망각해버릴까봐. 그는 수풀 속에 숨어서 돈가방을 연다. 돈가방 안엔 수많은 주사기들이 정연하게 채워져있었다.


빈틈없이 빽빽하게 이십 년 치였다. 로위는 그 중에 하나를 빼들어 자신의 팔뚝에 꽂아넣었다. 주삿바늘이 털복숭이의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일순간에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낀다. 기분이 몽롱했다. 일종의 환각일 수도 있겠다.


환영을 보진 않았지만 하늘이 조금 도는 듯했다. 그는 마음이 진정된 것을 느낀다. 숨이 느려졌다. 천천히 들뛰던 박동이 잦아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포도당 주사처럼 허기를 이겨내게 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로위가 미치지 않게 해줄 뿐이었다.


미쳐서 사람을 먹지 않도록. 최소한의 처치일 뿐이었다. 배고픔을 다스리려면 먹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숨어든 곳 근처에 밭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밭으로 들어가서 농사중인 오이를 서리했다. 그는 힘이 없을 때야말로 역설적으로 놀라운 힘이 생긴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잃을 게 없으니 두려운 것도 없고 두려운 게 없으니 되려 당당해지는 것이다. 그는 오이밭을 거덜낼 기세로 무섭게 먹어댔다. 로위의 모습은 일곱 개의 죄악 중에 식탐을 상징하는 바알제붑 같았다. 인간의 잡식성이란 특성이 사라지지 않은 것이 이렇게 감사할 수가 있나.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인간의 가장 큰 장점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로위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세상은 늘 그렇듯 약자의 행복한 순간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정말로 이건 악습이었다. 신의 농간이 아니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 거기 누구시죠? 누군데 남의 밭에서 그러고 있는 거에요?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누가 아저씨를 슬프게 했나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1 마지막회 - 내 소원이 이루어졌어. - 21.02.09 26 1 18쪽
20 20화 - 아가 - 21.02.08 16 0 9쪽
19 19화 - 도망쳐 - 21.02.05 24 1 9쪽
18 18화 - 진짜 알약 - 21.02.04 17 1 13쪽
17 17화 - 빛을 향해 - 21.02.03 17 1 12쪽
16 16화 - 공모자들 - 21.02.02 20 1 13쪽
15 15화 - 컴 백 홈 - 21.02.01 20 1 20쪽
14 14화 - 잘 가 - 21.01.29 21 1 15쪽
13 13화 - 안대를 낀 여자 - 21.01.28 22 1 9쪽
12 12화 - 세상에게 물리다 - 21.01.27 26 1 11쪽
11 11화 - 가짜 에밋 - 21.01.26 19 1 13쪽
10 10화 - 누구랑 가는 게 중요해? - 21.01.25 19 1 10쪽
9 9화 - 과거 - 21.01.22 24 1 12쪽
8 8화 - 늙은 여우 - 21.01.21 24 1 10쪽
7 7화 - 집 나간 개 - 21.01.20 23 1 10쪽
6 6화 - 우리가 키워요 - 21.01.19 27 1 12쪽
5 5화 - 다 널 위해서야 - 21.01.18 25 1 16쪽
4 4화 - 마을 밖은 위험해 - 21.01.17 25 1 16쪽
3 3화 - 모두의 마을이니까 - +1 21.01.16 27 1 15쪽
2 2화 - 이방인 - +1 21.01.15 50 2 1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