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칸의 현실
아칸의 현실
아칸 시티는 폐허가 되었다. 솔라리스 왕국의 수도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길거리에 서성이는 것은 기괴한 형체를 가진 마족뿐. 인간의 모습이라고는 손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깜깜한 밤이 되면 도시는 더더욱 음침하게 변했다. 인간이 있을 때는 화려한 불빛으로 대낮같이 밝았던 도시는 불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혔다.
마족의 눈은 인간의 수배에 달한다. 불빛 하나 없는 밤에도 고양이보다 배는 좋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
마족이 점령한 도시 위를 빠르게 이동하는 사내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한 주택 지붕에 멈춰 섰다가 주변을 살피고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아칸 시티 최중심지에 속해 있고 건물 지붕에서 아이언 캐슬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이다.
바로 일루엠 길드의 본진 건물이었다.
그날 사건이 터졌을 때 길드원 대부분은 다행스럽게 성군의 틈에 섞여 아칸 시티를 탈출했다. 길드가 정보에 대해 다른 집단보다 탁월했기에 성군이 아칸에서 후퇴한다는 정보를 듣고 길드의 핵심 인력은 마족이 쏟아 나오기 직전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빈 길드 내부에는 마족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나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쪽 귀퉁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보인 것은 아가므네였다.
"여어. 신수가 훤해졌네. 이거 마테니가 불쌍해지는걸?"
"왜요?"
"평생 마누라한테 잡혀 살 걸 생각하니 말이야. 숨 한번 잘못 쉬면 꼴깍 할 테니."
"흥, 바람이라도 피면 바로 저승행이죠."
"흐흐, 칠무신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야 겪어 본 바로는 제피로스까지는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직 그 위는 무리인가요?"
"아니 그 위로는 검을 맞댄 적이 없어서 평가 불가라서 말이지."
"그렇군요. 칠무신이라···. 감히 상상도 못 할 영역에 있던 자들인데 이제 그들과 같은 높이에 섰다니 아직도 믿을 수 없군요."
"그건 그렇고 어떻게 되어가?"
"네 마왕이라고 자칭하는 자는 아칸 왕궁에 들어갔어요. 그는 마족을 지휘하는 우두머리 이전에 모든 마족의 정점에 있는 자예요."
"무슨 뜻이야. 우두머리라면 우두머리지 정점은 무슨 뜻으로 한 말이지?"
"그러니까 단순한 우두머리가 아니라 마족 한 명 한 명을 모두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달리 말해 이곳에 가만히 있어도 마족 전체의 움직임을 일일이 통제 가능하다는 소리고 특히 개개인이 얻은 모든 정보가 마왕에게 집중되고 있어요."
"골치 아픈 놈이군. 마족은 잡으려면 마왕을 먼저 잡아야 한다는 소리군. 테세론의 문은?"
"저조차 근접하기 힘들 정도로 마족으로 꽉 들어찼어요. 지금 상황에서 테세론의 문을 닫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합니다."
"칠무신은?"
"태성왕은 시몰레이크 성에 머물고 있고 불사왕은 아칸 시티를 빠져나가 성군에 합류했을 거고 야생왕은 정확히는 모르지만, 잔버크 주변에 있을 듯합니다."
"불사왕과 마왕의 관계는 모르지?"
"네, 알수 없습니다. 그 자리에 평범한 마족을 제외하면 인간은 두 명이 있었습니다. 불사왕, 케이사르입니다. 케이사르는 그 이후 종족이 아예 사라졌습니다."
"아칸 내에 있을 확률은?"
"아쉽게도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후후, 그렇지 않아도 놈은 곧 모습을 드러내게 될 거야. 영혼의 수확이 무르익어 가니까."
"그때 한 이야기 기억하십니까? 저는 암살자라 오래전부터 남의 속삭이는 소리를 잘 듣고 기억할 수 있는 훈련을 해 왔으니까요."
"뭐가 걸리는 부분이 있어?"
"불사왕 모건의 이야기입니다만. 우리가 너희를 초청했고 너희 맘대로 하라고 했던 말입니다. 이는 테세론의 문을 연 자들이 성군인지 케이사르인지 구분 짓는 묘한 잣대가 될 수 있습니다. 최초 성군이 아칸 시티에 진입하자마자 난데없이 아이언 캐슬을 점거한 것 기억나십니까? 성군은 이미 아이언 캐슬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으며 그곳을 조사하는 척했지만 결국은 아이언 캐슬 지하에 테세론의 문을 열렸습니다. 어쩌면 이 모든 과정에 성군이 개입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도 그 점이 몹시 궁금했어. 성군은 테세론의 문을 여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그 재료가 난해해. 토렘의 서를 쓴 말라키 토렘은 자신의 피를 잇는지가 아니면 절대 문을 열지 못하도록 했어. 토렘의 피를 이은 지는 우리가 데리고 있는 나브 공주와 오렌시아. 그리고 죽은 피렌시아 뿐이지.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에르제베트와 케이사르뿐이다. 현재로서는 테세론의 문을 여는 방법은 그것뿐이야."
"그럼 누가 나브 공주의 피를 제공했다는 거네요."
"그럴수도 있고···. 테세론의 문을 닫는 방법도 나브 공주 외에는 없어. 오렌시아도 있지만, 그녀의 피는 혼탁해."
"그럼 어떻게 나브 공주의 피를 구했을까요? 나브 공주는 마교가 엠버스피어에 있을 때부터 함께 하지 않았습니까?"
"케이사르는 영악한 놈이야. 놈은 아마 나브 공주 어머니 피렌시아의 피를 가지고 있었을 거야. 윌리엄 대공의 최측근인 만큼 피렌시아에 접근할 수 있는 이는 케이사르뿐이니까."
"테세론의 문을 닫으려면 아이언 캐슬에서 지하로 이어지는 곳의 마족들이 문제예요. 놈들은 절대적으로 테세론의 문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요. 하늘과 땅속까지 말이죠. 테세론의 문에 접근할 방법이 없어요."
"만약 마왕을 치면?"
"가능하죠. 마왕이 죽으면 순간 마족은 통제권을 상실하게 되어 스스로 본능에 따라 움직일 거예요. 그들은 늘 식욕에 굶주려 있죠. 그동안 살펴보니 인간이 남긴 음식 중 고기는 죄다 먹어 치웠어요. 아칸의 가축도 모조리 잡아먹었어요. 놈들은 철저하게 육식만 해요. 오로지 고기만 먹죠."
"케이사르는 아칸을 차지하려고 윌리엄 대공을 배신했지. 케이사르의 개인 군대는 완전히 박살이 났어. 케이사르는 마족과 거래하여 입지를 다지려 했지만, 중간에 불사왕이 개입했다고 볼 수 있어. 그런데 불사왕의 개입이 성황의 뜻인지 불사왕 개인의 뜻인지 불분명해."
"불사왕의 개인의 뜻이라면?"
"속단하기 이르지만, 그곳에 있었던 불사왕과 케이사르, 그리고 마왕은 어떤 계약으로 서로의 이득을 노리고 있었어.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이 중요해. 그리고 태성왕은 왜 시몰레이크 후작을 돕는 거지?"
"시몰레이크 후작이 성군에 요청했는데 성황이 그 요청을 수락한 모양입니다. 며칠 전 숨어 들어 시몰레이크 후작과 태성왕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태성왕의 대화를 들었어? 모험했겠구먼. 태성왕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늘어나 보네."
"완전히 죽었습니다. 대화를 듣는 그 시간 동안 심장도 정지시켜야 했으니까요. 조금만 더 머물렀다면 다시는 교주님 얼굴을 보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그래, 무슨 대화를 하든?"
"음, 앞뒤 맞지 않는 대화였어요. 제가 들어왔을 때는 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이 된 후였거든요. 대화 내용에 사생아가 몇 번 끼어 있었고 성황이 책임지고 그를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거래에 관한 내용도 있었어요."
"종합해 보면 시몰레이크 후작과 성황 사이에 어떤 이권이 개입한 상태라는 거군. 시몰레이크 후작이 황제에게 자신의 신변을 지켜달라고 부탁했고 황제는 들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거군. 태성왕을 투입해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것도 알아봐야겠어."
"마왕의 움직임이 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녀석은 시몰레이크 성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리지 않았어요. 인간을 먹기 위해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울 정도의 마족인데 인간이 가득한 시몰레이크 성을 내버려 두고 있다고요."
"녀석들이 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태성왕의 이야기 중에 이런 말도 있었습니다. 태자가 죽지 않았다면 넌 지금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 못했을 거라고."
"태성왕이 그리 말했다고?"
"네 분명히."
"태자가 죽지 않았다면?"
"시몰레이크 후작에게 태자는 죽고 없다고 인식시킨 것이죠."
그때였다. 탈로스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
"이런 귀신 같은 놈. 냄새를 맡았어. 영혼의 수확 때문에 도력이 방해를 받고 있다는 걸 깜박했군. 일단 피해."
두 사람이 몸을 감추자마자 길드 정문이 박살이 나며 한 인형이 뛰어들었다.
들어온 자는 마족이었다. 몸체는 인간과 같았지만, 머리는 사람이 아닌 수사자의 머리를 가진 희귀한 마족이었다.
키가 2m는 되어 보였고 거구의 덩치를 지닌 마족이었다.
녀석은 문을 박살 내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는데 뭔가 조금 이상한 모습이다. 그는 혼자였으며 온몸에 검은 먹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녀들에게 검은 먹물이라면 피다.
곧 그 뒤로 수십 마리의 마족이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칸에서 제일 잘 나가는 길드 건물이라. 중앙 홀은 넓었고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뛰어 들어온 녀석은 사라 머리 마족을 포위하듯 둘러쌌다.
이 층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탈로스는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알았다. 최초 사자머리의 기척을 느꼈을 때 자신이 들킨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탈로스는 모든 감각을 죄어 잠그고 아래층의 상황을 주시했다.
그들은 마족의 언어를 사용했다.
"배신자. 마왕께서 직접 처리하라는 명령이다. 순순히 머리를 내놔라."
"인간 따위와 협력하려 하다니 마족의 수치다."
"말이 많아. 누구든 저놈의 머리를 떼어내는 놈에게 알 세 개를 준다."
"죽여라."
사자 머리 마족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이미 많이 싸운 듯 사자 머리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크게 고함을 내지른 사자는 맨 앞에 달려드는 놈의 머리를 후려쳤다.
단 한 방에 머리통이 터져 나가며 몸체는 픽 스러졌다.
마족의 싸움은 생날 것 그대로의 싸움이다. 인간과 같이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신체를 사용하여 공격한다. 사자는 사자 답게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무기다.
한 방에 파충류 형의 넵탈리온 머리통을 으깨버릴 정도면 완력이 타 마족보다 월등하다는 증거다. 마족 중에 가장 많은 수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넵탈리온이다. 넵탈리온은 느리고 아, 물론 마족 중에서 느리다는 소리지 인간에 비교하면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다.
마교의 무인과 비교하면 2성 내공을 가진 당주의 천마행공과 비슷한 빠르기다. 녀석은 단단한 비늘 껍질 덕분에 인간의 모든 무기에 완벽한 면역이다. 물론 잉겔리움 금속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기사들이 아무리 검과 창으로 찔러도 생체가 하나 낼 수 없는 몸이다. 그런 넵탈리온을 한 방에 으깨버린다면 완력이 상상 이상이란 소리다.
넵시류는 토끼 머리를 가졌는데 물론 토끼 머리라고 귀여운 것은 절대 아니다. 이놈의 입은 귀까지 찢어져 있는데 주둥이 안은 날카로운 송곳 천지다 인간의 고기를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면 절대 귀엽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놈은 두 다리가 뒤로 앞으로 꺾어진 기형적인 다리를 가지고 있는데 달리는 속도는 발군이다. 작정하고 달리면 이를 넘어서는 인간은 테츠 이외는 없을 정도다.
반사신경이 극악하다 할 정도로 뛰어나 인간이 휘두르는 검은 죄다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사자는 놈의 어깨를 움켜잡고 목덜미를 물어 단번에 잡아 뽑았다.
그 틈에 여러 마리가 달려들어 손톱과 이빨을 사자에 박아 넣었다. 사자는 고함을 치며 달라붙은 마족을 잡아 찢었다. 바닥으로 검은 피와 내장이 지독한 악취를 뿜어냈다.
왜 자기들끼리 싸우는지 모르지만, 배신자라는 말에 대충 이해가 가긴 했다. 사자의 전투력이 발군이지만 쪽수에 밀리기 시작했다.
점점 몰려드는 마족이 늘어가고 치열한 싸움은 한동안 계속됐다.
탈로스는 숨어서 지켜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뒤쪽에서 마족 무리를 헤치고 들어서는 한 마족을 보았다. 놈의 머리는 드래곤의 형상을 닮은 모습이다. 일전에 잡은 기억이 있는 마족이다. 그래서 이놈의 특징을 잘 안다.
탈로스는 혜광심어로 아가므네에 말했다.
'탈출 준비해 이곳은 곧 불타오를 거야.'
-팟
사자도 상대를 알아봤고 순간적으로 드래곤 머리를 향해 내달렸다.
드래곤 머리는 바로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화염을 쏟아 냈다.
테츠는 이 드래곤 머리를 가진 마족과 싸움을 한 적이 있다. 바로 엠버스피어 원정군을 이끌던 아세톤이었다. 놈이 뿜어내는 화염의 불길은 흔히 피우는 모닥불 수준이 아니다.
용광로의 불길보다 더욱 거세어 철로 만든 인간의 무기를 녹일 정도의 가공할 화염이었다.
사자는 온몸으로 불길을 맞으며 달려들어 놈의 입을 부여잡고는 찢어 버렸다.
위턱과 아래턱이 분리되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끅끅대던 드래곤의 머리에 다시 일격을 날리고 털썩 쓰러져 버렸다.
이때다 싶은지 기회를 엿보던 마족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알 세 개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