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vs 마녀(218)
가장 어두운 곳은 등잔 밑(5)
난감한 상황이다.
돌기둥 아래는 이미 마족들로 발 디딜 틈도 없다.
"제길 너무 방심했다. 이런 멍청한 실수를 하다니."
-카이이아아
마법사 레노번의 마족 편람에 기록된 자료에 저 날개 달린 놈을 카이악족이라고 표시해 놓은 것은 바로 놈의 울음소리가 키아악이라고 들리기 때문이었다.
강심장이라고 하던 아가므네조차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정신을 차려 포탈을 그려 볼 테니 저놈을 막아."
그러나 저놈뿐만 아니었다 놈이 지른 괴성을 알아들은 다른 마족들이 일제히 돌기둥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제길 여긴 좁아서 포탈의 진이 그려지지 않아."
"엑? 어쩌라는 거야? 어디로 피해?"
벌써 돌기둥 위로 기어 올라오는 녀석도 있었고, 점프하여 뛰어온 놈도 있었다. 진퇴양난 물러설 곳도 싸울 곳도 없는 황당한 위치에 두 사람은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다.
"쳇, 할수 없군. 야. 내 허리 잡아."
"뭘 하려고?"
"시간 없어. 죽기 싫으면 시키는 대로 해."
아가므네는 탈로스의 뒤로 돌아가 허리를 꽉 껴안았다.
탈로스는 단검을 꺼내 손바닥을 그어 피를 냈다. 돌기둥 바닥에 다섯 문자를 새겨 넣으며 영창을 읊었다.
"나의 피와 살을 양식으로 만들어진 라마단의 원령이여. 피조물에게 신의 제물이 되기 위한 격통을 주소서. 숭고한 믿음에 답하여 주소서, 그 믿음이 현실에 도래하도록."
-우르르
두 사람이 올라선 기둥이 크게 흔들렸다.
"꽉 잡아."
그리고 주변에 흩어진 돌기둥과 석편들이 엄청난 힘으로 들러붙기 시작했다.
-쾅
탈로스는 스톤 골렘의 어깨로 날아올랐다.
골렘의 어깨에서 내려다보니 바닥이 아예 안 보일 정도로 마족이 새까맣게 몰려나왔다. 테세론의 문을 닫고 말고의 차원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놈들은 불사왕과 케이사르는 공격하지 않았다. 그건 뭔가 저들만의 거래가 있었을 거다.
거대한 스톤 골렘이 양팔을 휘두를 때마다 마족이 쓸려나갔다. 하지만 수가 너무나 많았다.
"저놈은 뭐냐? 말라키의 힘을 가진 자가 어떻게 이곳에 있지?"
테오타르칸의 말에 불사왕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세상 어디를 가도 존재하는 것이 쥐와 바퀴다. 여기라고 예외는 아니지."
케이사르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저건 스톤 골렘인데? 이미 사멸된 기술이 아닌가?"
"소환을 전문으로 하는 네크로맨서가 있었지. 사라센의 사제들이었지 아마.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죽음의 사막으로 추방 당했을 텐데?"
"아뇨 남아 있는 네크로맨서가 있습니다. 저도 한명 부리는 자가 있는데 그가 말하길 라마단의 힘을 쓰는 네크로맨서가 있다고."
그때 불사왕의 눈이 번쩍 떠졌다.
"라마단. 설마?"
불사왕의 몸에서 붉은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크윽."
케이사르는 기겁하고 뒤로 물러났다.
-핑
불타오르는 불사왕의 몸이 일직선으로 스톤 골렘을 향해 날아갔다.
스톤 골렘의 거대한 돌기둥 주먹이 움직일 때마다 마족이 수도 없이 튕겨 날아갔다.
그러나 끝이 보이는 않는 전투였다.
"온다."
탈로스는 거대한 힘이 다가옴을 감지하고 영창을 되뇌었다.
-팟
스톤 골렘의 허리가 정확히 양단되었다. 양단된 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녹은 돌조각이 죽처럼 흘러내렸다.
"갈!"
탈로스는 한 발로 휘청거리는 골렘의 어깨를 찍어 누르며 절단된 부분을 다시 접합시켰다.
그 순간 골렘의 발밑에서 디멘션 다크 포탈이 그려졌고 빛이 쏟아져 나왔다.
불사왕은 눈앞에서 골렘과 그 주변의 마족이 일시에 증발하듯 사라지는 것을 보고 검을 거두었다.
"케이사르 난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간다. 뒤처리는 알아서 하도록 해라."
불사왕이 지나가자 주변의 마족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그들의 몸에 불이 옮겨붙어 타오르기 시작했고 그것은 꺼지지 않는 불이었다. 그것을 지켜 보고 있던 테오타르칸은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생각보다 심심하지 않을 것 같네. 어떤가? 배반자 인간?"
"이브리엄을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더군다나 저놈은 이브리엄이 아니라 이브리엄이 만든 사냥개에 불과할 뿐이니까."
"원래 사나운 것이 사냥개지 주인은 그 허약함을 감추기 위해 사냥개를 옆에 두는 법이거든."
빛이 꺼지고 스톤 골렘은 주먹을 내리찍어 마족을 찌푸려 뜨렷다.
"그 이쁜 몸에 상처 내기 싫으면 이곳에 있어."
탈로스는 그렇게 말하고 골렘의 어깨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마족을 베어 넘겼다. 포탈이 가동되는 순간 함께 딸려온 마족이었다.
탈로스의 전투 장면을 바라보던 아가므네는 고개를 가로 저였다.
"쳇 교주의 그림자라고? 거짓말도 그럴 듯하게 해야지. 그림자가 무슨 본체보다 더 잘 싸우실까. 우리 교주님."
아가므네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스톤 골렘을 일으키는 능력하며 스톤 골렘을 통해 그 바닥에 다크 디멘션 포탈까지 열었다.
그건 라마단을 조금 얻어서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결국 모두 반대하니 모그룩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냈군. 마족 따위 상대조차 되지 않는군."
스톤 골렘까지 가세하니 포탈에 딸려 왔던 마족은 몇 분 만에 깨끗이 제거되었다.
"어이, 무너진다. 조심해."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스톤 골렘의 몸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악. 피할 시간은 주셔야죠. 쿨럭, 쿨럭."
먼지를 뒤집어서 쓴 아가므네는 기침하며 걸어 나왔다.
"이러면 포탈이 못쓰게 될 텐데요?"
"이미 여긴 쓸모없는 곳이 되어 버렸어."
"교주님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알았냐?"
"골렘에 포탈까지 마음대로 사용하시는 분은 교주님 말고 또 누가 있을까요?"
"네가 알았다면 불사왕도 알았겠지?"
"라마단이라고 외치는 걸 보니 짐작은 했겠지만, 확신은 서지 않을 거예요. 지금 교주님은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이니 아마 맨시티 쪽에 연락해서 확인하려 할 거예요."
"그럴 필요는 없어. 맨시티 동탑에 넣어둔 가짜는 이미 들통 나버렸거든."
"교주님은 도대체 이번 사건과 무슨 관계죠?"
"후, 너도 이제 알아야 하겠지. 너만큼 진실에 다가간 사람도 드물고 나와 함께 행동 하려면 그 입이 얼마나 무거워져야 하는지 느껴봐야 할 테니까. 나 황태자다."
"···."
아가므네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탈로스를 바라봤다.
"방금 황태자라고 하셨습니까?"
"귀먹었냐?"
"화··· 황태자? 테드 황태자? 그 망나니 황태자?"
"지금은 불행하게도 망나니는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 너는 너무 많은 진실을 알고 있지만 서로 연결이 안 되어 말실수할 수 있어. 마테니 때문에 지금까지 널 살려 두는 거란걸 분명히 해 두지. 아니라면 입막음했을지도 모른다. 네가 그 입 잘못 놀리면 모든 것이 뒤틀릴 수 있으니 내 신분을 정확히 밝히는 거다."
아가므네는 즉시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미천한 천민이 감히 황태자를 알현합니다."
"허, 내가 거짓말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느냐?"
"수십 년 동안 암살자로 지냈습니다. 거짓말 정도는 구분할 줄 압니다."
"내가 황태자인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성황과 칠무신 그리고 마교에서는 메흘린과 아드리안, 세렌, 레베카, 마법사 중에서는 아리스토틀 이렇게 다섯 명뿐이다. 그리고 어반 마르스에 잡혀간 마테니도 내 정체를 알고 있다."
"그래서 제가 교주님 욕을 하면 그렇게 화를 냈군요."
"네게 내 신분을 밝히는 이유는 하나다. 네가 들은 진실을 한곳으로 엮어 주기 위해서다. 혼란을 느끼면 자신도 모르게 실수하게 되지. 경각심을 가지고 있으면 차라리 그것이 나을 거라는 판단에서다. 그러니 앞으로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된다."
"교주님께서 제 혀를 돌려주신 이후로 너무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 옛날로 돌아가려 합니다. 언젠가 평화로운 날이 온다면 다시 고쳐 주십시오."
탈로스가 뭐라고 제지하기도 전에 그녀는 단번에 혀를 잘라 버렸다.
"그럴 필요까지는···."
테츠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아가므네에 다가가 큐어로 지혈을 해 주었다.
"네가 그 정도 각오를 보였으니 혀를 재상 시키지 않으마. 나중에 마테니와 다시 만날 때 그때 다시 고쳐 주도록 하지."
아가므네는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자 포권지례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칸은 포기해야 할듯싶다. 얼마나 많은 인간이 죽어 나갈지 모르겠구나. 성황은 도대체 무슨 짓을···."
탈로스는 몸을 경직시켰다. 그리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늘 위에는 독수리 한 마리가 원을 그리고 돌고 있었다.
"쿠로···. 야생왕이 근처에 있다. 가자."
탈로스는 황급히 새로운 포탈을 그렸고 빛이 꺼지자 아가므네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얼마 뒤 거대한 덩치의 검은 말에 올라탄 야생왕이 탈로스가 사라졌던 포탈 위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는 한동안 바닥을 내려다봤다.
"태자 전하는 성가신 기술을 익혔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나. 이제는 완전히 저주에서 벗어 난 것으로 봐야겠지."
-와지끈.
숲이 타오르며 거대한 검은 구름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잠시 뒤 남쪽의 숲에서 붉은 불꽃이 일더니 온몸에 불이 붙은 거인 한명이 튀어나왔다.
"이미 늦었어. 어디로 가셨는지는 파악이 안 돼. 말라키의 기술은 신의 영역에 들어가는 기술들이라."
"셋째 형님. 태자 전하께서 엘스칼라 유적에서 테세론의 문을 연 것을 보셨습니다."
"성황께 전해라. 나는 태자 전하를 추적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만약 태자 전하께서 이브리엄을 만났다면 이젠 비밀을 모두 아시고 계실지도 모른다. 아니 아시고 계신다고 봐야겠지."
"성황께서 크게 진노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테오타르칸이 문을 통과했나?"
"네 제가 옆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두 번째 계획으로 간다. 놈을 서쪽으로 보내라."
"시몰레이크 후작에게 밀서를 보내라고 케이사르에게 지시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해. 단 그 전에 두 번째 계획으로 변경했다고 레베카에게 연락 먼저 하는 거 잊지 말고. 멋모르고 날뛰는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태성왕 더러 시몰레이크 후작을 지키라고 일러둬라."
-뚜각 뚜각
흑말 무이는 천천히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없다. 이 해가 가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해."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차질이 생겼어. 성황께서 노하시면 계획이고 뭐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할 거야."
아칸에 지옥이 열렸다. 지옥에서 쏟아져 나온 마물은 도시로 뛰쳐나왔다.
성군에 의해 마족이 완전히 토벌되었다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던 자들은 더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생지옥 그 자체가 아칸 도시 전역을 휩쓸었다.
성을 닫아걸고 결사 항전하던 귀족들도 마족의 공격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키아악족은 철로 만든 화살촉 따위로 잡을 수 있는 마족이 아니었다.
아칸에서는 비명이 끊이질 않았고 성질 급한 놈들은 피가 뚝뚝 흐르는 인간의 생고기를 입에 쑤셔 넣고 씹어댔다. 그들 앞에서 인간은 남녀노소 구분되지 않았다.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아이는 가장 맛있는 간식거리일 뿐이었다.
지하에서 쏟아져 나온 마족은 아칸 인구보다 갑절은 많았고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성군은 아칸 왕궁에서 마족과 공방을 주고받다가 결국 몰려드는 머릿수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수의 사망자를 낸 체 남문을 통해 도시 밖으로 물러났다.
성군이 도시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도시를 포기한다는 의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운명의 등불은 아직 계속 타오르고 있다는 것뿐이다.
초토화. 말 그대로 초토화다. 도시 전체가 지옥으로 변했다. 인간의 유대는 모두 끊어졌고 이웃은 물론 가족도 마족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처자식이 마족에게 통째로 씹히고 있어도 남편이라는 작자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부인이 다 먹히고 나면 다음은 자시의 차례란 걸 알기 때문이다. 짐도 챙길 여유도 없다. 지금 쏟아져 나온 마족은 인간의 탈을 쓰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짐을 챙길 여유도 없이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들은 가족 따위 챙길 여유조차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며 자식이며 아무것도 챙길 틈을 주지 않았다.
자식이 먹히는 걸 보면서 달려들어 봤자. 자신도 먹힐 것이고 그건 자살과 같았다. 심지어 재빨리 목을 매단 사람도 있었다. 길드도 박살이 났고 어떻게든 마족을 막아 보려 했지만, 전투력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검 좀 쓴다는 전사들도 검 한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하고 도살되었다. 아무몰드 격투장의 사회자 머독도 자신의 뚱뚱한 몸이 뜯겨 나가는 것을 보면서 마지막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아무몰드의 격투가들은 무기를 들고 일제히 마족에게 달려들었지만, 마족에게 그들은 경기를 관람하는 인간과 같은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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